Page 30 - 나무이야기여행_18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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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성관과 사창거리를 먼저 다룬 것도 나주가 '전통과 현대'의 가교역할을 하는 점을
보여주기 위함이었지요. 보호수를 떠나서 나주에는 전남도문화재에서부터 국가문화재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고택들이 그대로 보존돼 있습니다.
이 가운데 하나가 바로 '목사 내아'이고 이곳 울타리에는 500년이 된 고목 팽나무가
있어요. 어찌나 나무의 세력범위가 크던지 담을 넘고 고샅길을 건너 나주목문화관까지
뻗어갔어요.
나주에서 일반인들에게 가장 잘 알려진 나무 가운데 하나가 관아 고택인 이곳 금학헌
팽나무에요. 나주에서 민간 고택을 대표한다는 남파고택(박경중 가옥)에도 목사골
천년 세월을 반영하듯 보호수에 등재되지는 않았지만 거목 몇 그루가 나주천변에서
수세(나무의 세력)를 자랑하며 옛 부자의 영화를 대변해 주고 있어요.
나주 목사 내아는 알기 쉽게 말하자면 관아에 딸린 목사의 살림집입니다. 오늘날로
치면 전남도지사의 관사쯤으로 보면 됩니다. 전체 건축 양식은 'ㄷ'자형 팔작지붕
목조인데 이런 'ㄷ'자형의 경우 사실 남쪽 지방에서는 보기 힘든 양식이랍니다.
기온이 온난한 점을 고려해 대부분 '-'자형으로 지어지기 때문이지요. 위에서 언급한
'남파고택'도 바로 '-'자형이랍니다.
목사 내아를 방문했을 때 가장 먼저 눈에 띄는 것은 입구에 걸린 '금학헌(琴鶴軒)'
이라는 현판이에요. 안채에 걸어야 하지만 지나가는 외지인들에게 이곳이 목사 내아임을
알아보기 쉽도록 대문에 내걸었답니다. 금학헌은 '거문고 소리를 들으며 학처럼 고고하게
살고자 했던 선비의 높은 지조'를 의미하는 이름입니다. 이런 선비의 절제된 고고한
지조는 정문 안으로 들어서면서부터 건물 곳곳에 그대로 투영돼 있어요.
목사 내아에서는 1894년 8월 13일에 동학혁명의 지도자 전봉준과 나주 목사 민종렬
사이에 서성문 전투에 이은 담판이 있었지만 결렬되었지요. 하여간 이곳은 근대사의
역사현장이기도 합니다. 우선 조선시대 나주목사 김성일, 유석증 등이 사용했던 방의
크기에서부터 그 절제미는 잘 드러나 있어요.
최근에 후손이 나주에서 근무한 적이 있는 퇴계 이황의 수제자인 학봉 김성일은
나주목사 시절에 선정을 베풀었대요. 그는 나주 토착 씨족 간의 긴 송사를 해결하는
능력을 보였고 목민관으로서 백성들의 억울함에도 각별히 귀를 기울이는 등 큰 업적을
남겼다고 합니다.
또한 중앙에서 파견 나온 고위 관리가 만취하여 밤늦게 관아로 오자 꾸짖고 문을
열어주지 않을 만큼 강직했던 일화도 있어요. 그뿐 아니라 김성일은 재임 시절 나주
최초의 서원인 대곡서원, 지금의 경현서원(노안면)을 세워 동방오현 중 가장 큰 인물인
한훤당(寒喧堂) 김굉필(金宏弼)을 모셨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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