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림리
- 등록일 2020.04.16 18:26
- 조회수 1097
- 등록자 관리자
송림리 (송촌, 예림, 통정마을)
송촌(松村)마을
송림리의 으뜸 마을
동쪽으로는 화지리 화지마을이, 서쪽으로는 신도리 도민동 마을이 있고 남으로는 송림저수지가 있어 마을의 농업용수로서 역할을 하며, 북쪽으로는 산포남초등학교를 넘어 예림마을과 통정마을이 있어 남북으로 길다란 지형을 가지고 있는 곳이다.
정촌(丁村)이라 불렸던 마을 이름
문헌상 본 마을의 이름이 처음 나온 것은 1912년의 이다. 이 기록에 등포면 12개 마을 가운데 한 마을인 '송촌(松村)'으로 나온다. 이후 1914년 행정구역개편으로 두산면과 등포면이 통합되면서 산포면 송림리에 속하게 된다. 송촌은 원래 동래정씨(洞萊丁氏)들이 먼저 터를 잡고 살았다고 전해지고 있다. 마을에 살던 정씨들은 자신들이 살고 있는 곳이라고 해서 정촌(丁村)이라 불렀다고 한다. 그 후 정씨들은 모두 마을을 떠났고 지금의 진주강씨가 들어오게 되었다. 터를 잡은 강씨들은 주위에 소나무가 많아 자손이 소나무처럼 번성하라고 기원하는 뜻에서 송촌(松村)이라 개칭하여 부르게 됐다고 전한다. 성씨의 구성은 진주강씨(晉州姜氏)가 터를 잡은 이후 대대로 살아 온 마을로 달성배씨(達城裵氏)와 나주정씨(羅州鄭氏) 각 1호를 제외한 전 가구가 진주강씨들로 강씨의 집성촌이다. 송촌마을을 비롯한 송림리 세 개 마을은 강씨마을이라 불릴만 하다. 진주강씨들이 터를 잡고 대대로 살아온 마을이기 때문이다. 그러기에 세 개 마을이 모여 있는 송림리는 90%이상이 진주강씨들이 차지하고 있다. 진주강씨 입향조는 우해(遇海)이며 그는 화지리로 입향한 강위구(姜渭龜)의 7세손으로 화지리에서 살다가 이 곳으로 이주했다고 전한다. 시기는 1600년대 후반으로 알려지고 있고, 분가(分家)가 송림리로 이주하게 된 직접적인 계기가 되었다. 그후 진주강씨가 자작일촌을 이뤄 대를 이어 살아오다가 다른 성씨들이 하나 둘씩 입주해 현재의 마을을 이루었다.
낚시꾼 몰리는 송림 저수지
마을의 남쪽에 자리한 송림저수지는 그 풍부한 수량으로 농업용수로 이용된다. 하지만 평지형 저수지인 이 곳은 농업용 이외에도 다양한 어종을 자랑하는 낚시터이기도 하다. 초보 낚시꾼들이 많이 몰리는 저수지로 특히 릴낚시가 잘되고 붕어의 씨알은 20㎝급이 많이 나오는 곳으로 알려졌다.
유물산포지 남아있는 유서깊은 지역
마을에는 고대의 역사유적인 유물산포지가 있다. 지금의 감나무 밭으로 경작되는 구릉이 그곳인데 삼국시대의 유적으로 추정되는 옹관편, 토기편등을 수습했다.
예림(禮林)마을
송촌에서 분가해 형성된 마을
동쪽으로는 도로를 넘어 화지저수지가 자리하고 있고, 서쪽으로는 시도 12호선을 넘어 신도리가 자리한다. 남으로는 산포남초등학교와 송촌마을이 인접하며, 북으로는 통정마을이 있어 송촌, 통정, 예림이 남북일렬로 위치한다.
처음에는 여름이라 불러
예림마을의 원래 이름은 ''여름'이라 불렸다고 전한다. 그 후 예림으로 바꾸어 부르게 되었다는데 문헌상 마을의 이름이 처음 나온 것은 1912년 이다. 여기에는 등포면에 속한 12개 마을 가운데 한 마을인 예림(禮林)으로 기록되어 있다. 그후 1914년 행정구역개편으로 등포면이 두산면과 통합되어 산포면으로 개편되면서 송림리에 속하게 된다. 그러나 당시의 예림마을은 마을 전체가 송림리에 속한 것은 아니었다. 마을이 세 개 구역으로 나뉘게 되고 각기 송림리와 함께 등수리와 화지리 등으로 분리되어 속하게 된다. 이는 행정구역 개편전까지의 예림마을은 등수리, 송림리, 화지리에 걸쳐 형성되었던 큰 마을이었음을 알 수 있게 해준다. 처음 불렸다는 여름이란 마을 이름은 송촌에서 강씨들이 분가할 때 여름에 이주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지금 불리는 예림이란 이름은 이 여름에서 따온 이름으로 보인다. 한자화의 영향으로 이렇게 붙여진 듯하다. 이 마을 또한 진주강씨의 집성촌으로 성씨의 구성은 마을 가구중 5가구를 제외한 24가구가 진주강씨이다. 마을의 최초 입향성씨는 진주강씨이다. 진주강씨 덕명(德明)이 송촌에서 살다가 분가해 지금의 마을 자리에 터를 잡은 것이 시초라고 전해온다. 진주강씨들은 원래 화지리 화지마을에 입촌해 마을을 형성하였다. 그리고 화지마을 입향조의 4세손이 송촌마을에 이주하게 되었고, 송촌 마을의 후손이 다시 이 곳으로 이주해 마을을 형성한 것이다. 마을은 번창을 계속해 현재에 이르렀다.
도요지 남아 있어 조사 필요
마을 북쪽 구릉지역에 있는 진주강씨 묘소 왼쪽에 시대 미상의 도요지 여러기가 분포한다. 1950년대에 발견되었으며 예전에는 경작시 많은 기와편이 출토되었다한다. 하지만 현재는 숲이 우거져 유물은 확인하기 어렵다. 그 때문에 시대를 파악하지 못하고 있어 시급한 조사가 필요한 곳이다. 노출된 가마의 구조는 지하식 등요(登窯)로 원형 천장의 구조이다.
통정(通井)마을
풍부한 수량으로 농사의 결실 거두는 마을
면소재지에서 산포초등학교를 지나 통정마을로 가는 길은 농작물의 결실들이 풍요로워 보이는 길이다. 마을은 매성리 마성마을에서 25호선과 만나는 지점에 있다. 시도 25선과 면소재지로 갈라지는 지점에 위치한 마을은 산포면의 여러 마을들과 비슷한 모습을 하고 있다. 동쪽으로는 송림리의 넓은 평야가 펼쳐지며 서쪽으로는 신도리와 매성리가 경계한다. 남쪽으로는 예림마을이 위치하며 북으로는 매성리의 마성마을이 인접한 평야지대에 자리한다.
우물에서 따온 마을 이름
문헌상 본 마을의 지명인 통정(通井)이 처음 나온 것은 1912년 이다. 당시에는 등포면 12개 마을 가운데 한 마을인 통정리(通井里)로 기록되어 있다. 이후 1914년 행정구역개편으로 산포면 송림리에 속하게 되어 현재에 이른다. 통정(通井)이라는 마을 이름의 유래를 살펴보면 예전에 마을 앞에 샘이 있었다고 하는데 수량이 풍부하기로 이름이 난 곳이었다. 물이 워낙 많이 나오자 마을에서는 물이 마를 것을 염려해 조금씩 나오게 통으로 막았다고 한다. 그러나 물의 양은 줄어들지 않았고, 물의 양 때문에 통이 자꾸 넘어지므로 마을 이름 또한 통샘이라 부르게 되었는데 후에 샘을 우물 정(井)자로 고쳐 지금의 통정(通井)이 되었다고 한다. 송림리의 다른 두 마을과 마찬가지로 이 마을 또한 타성받이 6가구를 제외한 23가구가 진주강씨이다. 이같은 이유로 송림리의 세 마을은 마을간의 의식과 생활문화, 동질성 등이 모두 한 마을같다.
송촌에서 분가해 형성한 마을
예림마을과 마찬가지로 송촌의 진주강씨들이 분파해 마을이 형성되었다. 진주강씨 사립(泗立)이 송촌에서 살다가 이곳에 터를 잡고 산 것이 오늘에 이른다. 진주강씨들은 원래 화지리 화지마을에 입촌해 마을을 형성하였다. 그리고 화지마을 입향조의 4세손이 송촌마을에 이주하게 되었고, 그리고 송촌 마을의 후손이 다시 이곳으로 이주해 마을을 형성한 것이다. 그리고 마을은 번창을 계속해 현재에 이르렀다.
도처에 산재한 유물, 유적
마을에는 구석기시대 유물 산포지와 삼국시대 유물산포지가 존재한다. 구석기시대 유적은 매성리 신흥마을 입구를 바라보며 좌측 구릉상에 위치하고 있다. 각종 타제석기의 유물이 수습되었다. 또한 마을 북쪽의 야산과 야산의 계속 사이에는 구석기와 삼국시대 유물산포지가 위치한다. 이곳에서는 타제석기와 다수의 토기조각 등이 수습되었다. 이러한 조건들은 이미 수천년 전에도 사람들이 거주했음을 알 수 있다. 마을에는 효열부(孝烈婦) 흥덕장씨(興德張氏)의 효열행(孝烈行)을 추모하기 위해 진주강씨 문중에서 1975년 건립한 효열비(孝烈碑)가 있다.
송촌(松村)마을
송림리의 으뜸 마을
동쪽으로는 화지리 화지마을이, 서쪽으로는 신도리 도민동 마을이 있고 남으로는 송림저수지가 있어 마을의 농업용수로서 역할을 하며, 북쪽으로는 산포남초등학교를 넘어 예림마을과 통정마을이 있어 남북으로 길다란 지형을 가지고 있는 곳이다.
정촌(丁村)이라 불렸던 마을 이름
문헌상 본 마을의 이름이 처음 나온 것은 1912년의 이다. 이 기록에 등포면 12개 마을 가운데 한 마을인 '송촌(松村)'으로 나온다. 이후 1914년 행정구역개편으로 두산면과 등포면이 통합되면서 산포면 송림리에 속하게 된다. 송촌은 원래 동래정씨(洞萊丁氏)들이 먼저 터를 잡고 살았다고 전해지고 있다. 마을에 살던 정씨들은 자신들이 살고 있는 곳이라고 해서 정촌(丁村)이라 불렀다고 한다. 그 후 정씨들은 모두 마을을 떠났고 지금의 진주강씨가 들어오게 되었다. 터를 잡은 강씨들은 주위에 소나무가 많아 자손이 소나무처럼 번성하라고 기원하는 뜻에서 송촌(松村)이라 개칭하여 부르게 됐다고 전한다. 성씨의 구성은 진주강씨(晉州姜氏)가 터를 잡은 이후 대대로 살아 온 마을로 달성배씨(達城裵氏)와 나주정씨(羅州鄭氏) 각 1호를 제외한 전 가구가 진주강씨들로 강씨의 집성촌이다. 송촌마을을 비롯한 송림리 세 개 마을은 강씨마을이라 불릴만 하다. 진주강씨들이 터를 잡고 대대로 살아온 마을이기 때문이다. 그러기에 세 개 마을이 모여 있는 송림리는 90%이상이 진주강씨들이 차지하고 있다. 진주강씨 입향조는 우해(遇海)이며 그는 화지리로 입향한 강위구(姜渭龜)의 7세손으로 화지리에서 살다가 이 곳으로 이주했다고 전한다. 시기는 1600년대 후반으로 알려지고 있고, 분가(分家)가 송림리로 이주하게 된 직접적인 계기가 되었다. 그후 진주강씨가 자작일촌을 이뤄 대를 이어 살아오다가 다른 성씨들이 하나 둘씩 입주해 현재의 마을을 이루었다.
낚시꾼 몰리는 송림 저수지
마을의 남쪽에 자리한 송림저수지는 그 풍부한 수량으로 농업용수로 이용된다. 하지만 평지형 저수지인 이 곳은 농업용 이외에도 다양한 어종을 자랑하는 낚시터이기도 하다. 초보 낚시꾼들이 많이 몰리는 저수지로 특히 릴낚시가 잘되고 붕어의 씨알은 20㎝급이 많이 나오는 곳으로 알려졌다.
유물산포지 남아있는 유서깊은 지역
마을에는 고대의 역사유적인 유물산포지가 있다. 지금의 감나무 밭으로 경작되는 구릉이 그곳인데 삼국시대의 유적으로 추정되는 옹관편, 토기편등을 수습했다.
예림(禮林)마을
송촌에서 분가해 형성된 마을
동쪽으로는 도로를 넘어 화지저수지가 자리하고 있고, 서쪽으로는 시도 12호선을 넘어 신도리가 자리한다. 남으로는 산포남초등학교와 송촌마을이 인접하며, 북으로는 통정마을이 있어 송촌, 통정, 예림이 남북일렬로 위치한다.
처음에는 여름이라 불러
예림마을의 원래 이름은 ''여름'이라 불렸다고 전한다. 그 후 예림으로 바꾸어 부르게 되었다는데 문헌상 마을의 이름이 처음 나온 것은 1912년 이다. 여기에는 등포면에 속한 12개 마을 가운데 한 마을인 예림(禮林)으로 기록되어 있다. 그후 1914년 행정구역개편으로 등포면이 두산면과 통합되어 산포면으로 개편되면서 송림리에 속하게 된다. 그러나 당시의 예림마을은 마을 전체가 송림리에 속한 것은 아니었다. 마을이 세 개 구역으로 나뉘게 되고 각기 송림리와 함께 등수리와 화지리 등으로 분리되어 속하게 된다. 이는 행정구역 개편전까지의 예림마을은 등수리, 송림리, 화지리에 걸쳐 형성되었던 큰 마을이었음을 알 수 있게 해준다. 처음 불렸다는 여름이란 마을 이름은 송촌에서 강씨들이 분가할 때 여름에 이주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지금 불리는 예림이란 이름은 이 여름에서 따온 이름으로 보인다. 한자화의 영향으로 이렇게 붙여진 듯하다. 이 마을 또한 진주강씨의 집성촌으로 성씨의 구성은 마을 가구중 5가구를 제외한 24가구가 진주강씨이다. 마을의 최초 입향성씨는 진주강씨이다. 진주강씨 덕명(德明)이 송촌에서 살다가 분가해 지금의 마을 자리에 터를 잡은 것이 시초라고 전해온다. 진주강씨들은 원래 화지리 화지마을에 입촌해 마을을 형성하였다. 그리고 화지마을 입향조의 4세손이 송촌마을에 이주하게 되었고, 송촌 마을의 후손이 다시 이 곳으로 이주해 마을을 형성한 것이다. 마을은 번창을 계속해 현재에 이르렀다.
도요지 남아 있어 조사 필요
마을 북쪽 구릉지역에 있는 진주강씨 묘소 왼쪽에 시대 미상의 도요지 여러기가 분포한다. 1950년대에 발견되었으며 예전에는 경작시 많은 기와편이 출토되었다한다. 하지만 현재는 숲이 우거져 유물은 확인하기 어렵다. 그 때문에 시대를 파악하지 못하고 있어 시급한 조사가 필요한 곳이다. 노출된 가마의 구조는 지하식 등요(登窯)로 원형 천장의 구조이다.
통정(通井)마을
풍부한 수량으로 농사의 결실 거두는 마을
면소재지에서 산포초등학교를 지나 통정마을로 가는 길은 농작물의 결실들이 풍요로워 보이는 길이다. 마을은 매성리 마성마을에서 25호선과 만나는 지점에 있다. 시도 25선과 면소재지로 갈라지는 지점에 위치한 마을은 산포면의 여러 마을들과 비슷한 모습을 하고 있다. 동쪽으로는 송림리의 넓은 평야가 펼쳐지며 서쪽으로는 신도리와 매성리가 경계한다. 남쪽으로는 예림마을이 위치하며 북으로는 매성리의 마성마을이 인접한 평야지대에 자리한다.
우물에서 따온 마을 이름
문헌상 본 마을의 지명인 통정(通井)이 처음 나온 것은 1912년 이다. 당시에는 등포면 12개 마을 가운데 한 마을인 통정리(通井里)로 기록되어 있다. 이후 1914년 행정구역개편으로 산포면 송림리에 속하게 되어 현재에 이른다. 통정(通井)이라는 마을 이름의 유래를 살펴보면 예전에 마을 앞에 샘이 있었다고 하는데 수량이 풍부하기로 이름이 난 곳이었다. 물이 워낙 많이 나오자 마을에서는 물이 마를 것을 염려해 조금씩 나오게 통으로 막았다고 한다. 그러나 물의 양은 줄어들지 않았고, 물의 양 때문에 통이 자꾸 넘어지므로 마을 이름 또한 통샘이라 부르게 되었는데 후에 샘을 우물 정(井)자로 고쳐 지금의 통정(通井)이 되었다고 한다. 송림리의 다른 두 마을과 마찬가지로 이 마을 또한 타성받이 6가구를 제외한 23가구가 진주강씨이다. 이같은 이유로 송림리의 세 마을은 마을간의 의식과 생활문화, 동질성 등이 모두 한 마을같다.
송촌에서 분가해 형성한 마을
예림마을과 마찬가지로 송촌의 진주강씨들이 분파해 마을이 형성되었다. 진주강씨 사립(泗立)이 송촌에서 살다가 이곳에 터를 잡고 산 것이 오늘에 이른다. 진주강씨들은 원래 화지리 화지마을에 입촌해 마을을 형성하였다. 그리고 화지마을 입향조의 4세손이 송촌마을에 이주하게 되었고, 그리고 송촌 마을의 후손이 다시 이곳으로 이주해 마을을 형성한 것이다. 그리고 마을은 번창을 계속해 현재에 이르렀다.
도처에 산재한 유물, 유적
마을에는 구석기시대 유물 산포지와 삼국시대 유물산포지가 존재한다. 구석기시대 유적은 매성리 신흥마을 입구를 바라보며 좌측 구릉상에 위치하고 있다. 각종 타제석기의 유물이 수습되었다. 또한 마을 북쪽의 야산과 야산의 계속 사이에는 구석기와 삼국시대 유물산포지가 위치한다. 이곳에서는 타제석기와 다수의 토기조각 등이 수습되었다. 이러한 조건들은 이미 수천년 전에도 사람들이 거주했음을 알 수 있다. 마을에는 효열부(孝烈婦) 흥덕장씨(興德張氏)의 효열행(孝烈行)을 추모하기 위해 진주강씨 문중에서 1975년 건립한 효열비(孝烈碑)가 있다.
- 담당부서 산포면 총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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