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지리
- 등록일 2020.04.16 18:26
- 조회수 1193
- 등록자 관리자
화지리 (花池마을)
동부와 서부로 나뉘어 선의의 경쟁 벌이는 마을
지방도 819호선을 타고 산제리로 넘어가는 길. 새터마을이 보이고 그 왼쪽으로 화지마을로 들어가는 길이 있다. 화지 마을은 저수지를 앞에 두고 있다. 화지 저수지로 불리는 이 곳은 화지마을을 비롯, 주변마을들에 풍부한 농업용수를 대주는 젖줄이다. 동쪽으로는 산제리의 넓은 평야와 새터마을이 있고 서쪽으로는 송림리 송촌마을이 경계한다. 남쪽으로는 송림저수지와 다도면이 자리하고 북으로는 마을의 농업용수를 관개(灌漑)하는 화지 저수지가 있다.
1789년 기록에 나오는 마을
마을의 이름이 처음으로 보이는 기록은 1789년의 이다. 당시 기록에는 남평현에 속한 등개면(等介面) 4개 마을 가운데 한 마을인 화지(花池)리로 나온다. 이후 1912년 기록에는 등포면(等浦面) 12개 마을 가운데 한 마을로 화지리가 속해 나온다. 다시 1914년 행정구역개편으로 산포면에 속한 화지리가 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 마을의 이름은 까마귀가 꽃씨를 물고가다 연못에 떨어뜨렸는데 연못에 꽃이 만발하므로 화지(花池)라 붙여졌다고 전해진다. 현재 화지 마을은 동부화 서부 2개 마을로 나뉘어져 있다. 하지만 이는 어디까지나 행정편의상 부르는 마을 이름들이고, 마을 간의 의식과 생활접촉, 그리고 동질성 등은 역시 하나의 마을임을 보여준다. 성씨의 구성은 69가구 중 60가구를 진주강씨가 차지하고 있는 진주강씨 집성촌이다. 그 밖의 성씨로는 광산김씨, 밀양박씨, 평산신씨 등이 거주하고 있다.
진주강씨(晉州姜氏)의 텃골
화지마을은 진주강씨의 마을이다. 이 마을에 진주강씨의 입향조는 강위구(姜渭龜)이다. 1500년대 중반 나주시 보산동에서 살던 그는 친척의 소개로 이 곳을 알게 되었고 농사를 짓기 편한 이곳에 정착하게 되었다고 한다. 그 후 후손들이 번창하게 되었고 지금과 같은 진주강씨의 집청촌으로 발전했다고 한다. 입향조인 강위구는 1542년에 태어나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가산을 털어 장사 50여명을 모집하고 23세 된 아들 봉령(鳳翎)과 함께 금산군(錦山郡)으로 진군하여 조헌(趙憲)과 합류한 그는 조헌의 막료가 되어 왜적과 맞서 싸우다가 700의사와 함께 부자(父子)가 같은 날 순절하였다. 이 소식을 들은 봉령의 아내인 남평문씨는 초혼장(招魂葬)을 마친후 남편의 무덤 앞에서 자결한다. 이 보고를 들은 조정에서는 철종9년(1858) 강위구에게는 충신정려(忠臣旌閭)를. 아들 봉령에게는 효자정려(孝子旌閭)를, 봉령의 아내인 남평문씨에게는 열녀정려(烈女旌閭)를 각각 내렸다. 이 마을의 진주강씨들은 그후 이웃 송림마을로도 그 영역을 넓혀갔다. 강위구의 4세손이 송림리 송촌마을로 이주하게 되고 그후 예림과 통정마을도 개촌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이와 함께 1789년 의 기록이나 1771년 건립된 진주강씨 삼강문의 존재, 그리고 삼강문에 배향된 이들이 임진왜란의 공신이었다는 점은 의 기록보다는 훨씬 이전에 마을이 형성되었음을 유추하는데 무리가 없을 것이다.
마을의 오랜 역사만큼이나 산재한 문화유적
마을에는 오랜 역사만큼이나 곳곳에 문화유적이 산재해 있다. 먼저 마을 입구에 진주강씨 삼강문이 있다. 1771년 세워진 이 삼강문은 임진왜란 공신으로 동몽교관(童蒙敎官) 병조판서(兵曹判書)를 추증받은 강위구(姜渭龜)와 효자로 이조참의(吏曹參議)를 추증받은 강봉령(姜鳳翎), 그리고 시아버지와 남편의 전사소식을 듣고 자결한 남평문씨(南平文氏) 등 세 분을 모시고 있다. 정면 3칸, 측면 1칸의 이 삼강문은 최초 건립 후 한차례의 중수를 거쳤고 1914년 현재의 위치로 옮겼으며 1972년 다시 중수했다. 이밖에 삼강문과 관련된 교지와 옛 문헌을 강석기(83세)가 보관하고 있으며 '장사리등'이라 불리는 마을 뒷산 도요지터가 있다. 또한 강씨문중에 의해 1995년 건립된 화송사(花松祠)가 있어 앞서 언급한 임란공신 두 분과 열부 남평문씨를 배향하고 있고, 제향일은 9월 9일이다. 한편 예전에는 마을주변에 여러 개의 선돌이 있었으나, 경지정리와 저수지 축조 등으로 이전되거나 없어졌다. 또한 기우제를 지냈던 마을 앞산인 '무제등'이 있고 몇해 전까지도 동부와 서부로 나누어 줄다리기와 불싸움의 놀이가 벌어지기도 했다.
마을유래
아주 먼 옛날 지금의 나주시 산포면 화지리 마을 앞에는 멀리 식산이 바라다 보이는 골짜기에 조그마한 못이 하나 있었습니다. 그 못 옆으로 기름진 논이 펼쳐져 있었고 그 아래로는 멀리 영산강물이 흘러내리고 있었습니다. 영산강 물결 따라 가보면 나주 금성산이 평야 끝에 높이 솟아 있었고 북으로는 광주 무등산이 솟아있었습니다. 그 못에서 북으로 바라보면 낮은 등성이가 있었는데 북쪽에서 불어오는 바람을 막아주는 역할을 했습니다. 그 등성이에 멀리서 온 몇몇 사람들이 터를 잡아 초가집을 짓고 연못 주변의 논을 일구어 농사를 짓고 살기 시작했습니다.새둥우리처럼 아늑한 형국의 지형 덕분인지 이 곳에 지은 집은 매우 따뜻했습니다. 그리고 여름에는 먼 식산에서 불어오는 바람이 매우 시원한 곳이었습니다.
이곳에 터를 잡고 살기 시작한 사람들은 이 마을 이름을 무엇으로 지을까하고 고민했습니다. 그해 봄날 우연히 못 주변의 논을 갈던 사람의 눈에 새까만 까마귀 한 마리가 하늘에서 날아오는 것이었습니다. 보니 그 까마귀는 입에 무엇을 물고 있었습니다. 그것은 연씨였는데 그것을 그 못에 퐁당 떨어뜨리고 가는 것이었습니다. 물론 당시 그것을 본 사람은 그것이 연씨인 줄 몰랐는데 그 해 여름 그 못에 푸르게 돋아나는 연잎을 보고는 그 까마귀가 연씨를 물고와 떨어뜨린 것을 알았던 것입니다.그 못에 떨어진 씨앗은 그렇게 그곳에 뿌리를 내리더니 이듬해에는 붉은 연꽃을 피워 올리는 것이었습니다. 그것을 본 사람의 이야기를 들은 사람들은 이곳 마을 이름을 꽃화(花)자와 못지(池)자를 따서 화지라고 이름 붙였던 것입니다. 너무 오랜 옛날인지라 확실한 내력은 알 길이 없으나 입을 통해 구전으로 내려온 이야기를 증명이라도 하듯이 그 못 자리에 연꽃이 해마다 피어났고, 일제 때 일본인들이 저수지를 막느라 그 못 주변의 땅을 구입해 커다란 인공 저수지를 축조하였는데 그 저수지 안에 연꽃이 가득 퍼져 여름에는 온통 붉은 연꽃이 만발하여 향기가 온 마을에 가득합니다.
주로 진주 강씨족이 모여 사는데, 진주 강씨가 이곳 화지리로 와서 터 잡아 산 것은 1500년 대로 전해져 옵니다. 나주에 살고있던 진주 강씨 중 강위구라는 분이 이곳 화지리가 지세가 좋아 이주 해 살았다고 합니다. 강위구는 1592년 임란공신으로 왜적을 맞아 큰아들 강봉령과 함께 조헌의 수하로 들어가 금산에서 의병으로 분전하다 전사했습니다. 지금 화지리 입구에는 동몽교관 병조판서 강위구와 큰아들 강봉령, 그리고 며느리 남평 문씨를 기리는 삼강문이라는 정려가 건립되어 있습니다.화지리는 풍수학상으로는 연화도수(蓮花道水) 형국이라고 합니다. 연못에 물이 있고 아름다운 꽃이 있는 만큼 이곳에 사는 사람들은 인간과 세상의 도를 깨달아 세상을 이롭게 하는 훌륭한 인재가 많이 나온다는 것을 뜻하는 것 이랍니다.이처럼 구전되어 오는 화지리 마을 형성 유래는 연못과 까마귀와 물과 연꽃으로 어우러져 그 전해져 오는 이야기가 거짓이 아니듯 오늘을 증명하고 있는 것이니 참으로 신비로울 따름입니다.
동부와 서부로 나뉘어 선의의 경쟁 벌이는 마을
지방도 819호선을 타고 산제리로 넘어가는 길. 새터마을이 보이고 그 왼쪽으로 화지마을로 들어가는 길이 있다. 화지 마을은 저수지를 앞에 두고 있다. 화지 저수지로 불리는 이 곳은 화지마을을 비롯, 주변마을들에 풍부한 농업용수를 대주는 젖줄이다. 동쪽으로는 산제리의 넓은 평야와 새터마을이 있고 서쪽으로는 송림리 송촌마을이 경계한다. 남쪽으로는 송림저수지와 다도면이 자리하고 북으로는 마을의 농업용수를 관개(灌漑)하는 화지 저수지가 있다.
1789년 기록에 나오는 마을
마을의 이름이 처음으로 보이는 기록은 1789년의 이다. 당시 기록에는 남평현에 속한 등개면(等介面) 4개 마을 가운데 한 마을인 화지(花池)리로 나온다. 이후 1912년 기록에는 등포면(等浦面) 12개 마을 가운데 한 마을로 화지리가 속해 나온다. 다시 1914년 행정구역개편으로 산포면에 속한 화지리가 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 마을의 이름은 까마귀가 꽃씨를 물고가다 연못에 떨어뜨렸는데 연못에 꽃이 만발하므로 화지(花池)라 붙여졌다고 전해진다. 현재 화지 마을은 동부화 서부 2개 마을로 나뉘어져 있다. 하지만 이는 어디까지나 행정편의상 부르는 마을 이름들이고, 마을 간의 의식과 생활접촉, 그리고 동질성 등은 역시 하나의 마을임을 보여준다. 성씨의 구성은 69가구 중 60가구를 진주강씨가 차지하고 있는 진주강씨 집성촌이다. 그 밖의 성씨로는 광산김씨, 밀양박씨, 평산신씨 등이 거주하고 있다.
진주강씨(晉州姜氏)의 텃골
화지마을은 진주강씨의 마을이다. 이 마을에 진주강씨의 입향조는 강위구(姜渭龜)이다. 1500년대 중반 나주시 보산동에서 살던 그는 친척의 소개로 이 곳을 알게 되었고 농사를 짓기 편한 이곳에 정착하게 되었다고 한다. 그 후 후손들이 번창하게 되었고 지금과 같은 진주강씨의 집청촌으로 발전했다고 한다. 입향조인 강위구는 1542년에 태어나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가산을 털어 장사 50여명을 모집하고 23세 된 아들 봉령(鳳翎)과 함께 금산군(錦山郡)으로 진군하여 조헌(趙憲)과 합류한 그는 조헌의 막료가 되어 왜적과 맞서 싸우다가 700의사와 함께 부자(父子)가 같은 날 순절하였다. 이 소식을 들은 봉령의 아내인 남평문씨는 초혼장(招魂葬)을 마친후 남편의 무덤 앞에서 자결한다. 이 보고를 들은 조정에서는 철종9년(1858) 강위구에게는 충신정려(忠臣旌閭)를. 아들 봉령에게는 효자정려(孝子旌閭)를, 봉령의 아내인 남평문씨에게는 열녀정려(烈女旌閭)를 각각 내렸다. 이 마을의 진주강씨들은 그후 이웃 송림마을로도 그 영역을 넓혀갔다. 강위구의 4세손이 송림리 송촌마을로 이주하게 되고 그후 예림과 통정마을도 개촌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이와 함께 1789년 의 기록이나 1771년 건립된 진주강씨 삼강문의 존재, 그리고 삼강문에 배향된 이들이 임진왜란의 공신이었다는 점은 의 기록보다는 훨씬 이전에 마을이 형성되었음을 유추하는데 무리가 없을 것이다.
마을의 오랜 역사만큼이나 산재한 문화유적
마을에는 오랜 역사만큼이나 곳곳에 문화유적이 산재해 있다. 먼저 마을 입구에 진주강씨 삼강문이 있다. 1771년 세워진 이 삼강문은 임진왜란 공신으로 동몽교관(童蒙敎官) 병조판서(兵曹判書)를 추증받은 강위구(姜渭龜)와 효자로 이조참의(吏曹參議)를 추증받은 강봉령(姜鳳翎), 그리고 시아버지와 남편의 전사소식을 듣고 자결한 남평문씨(南平文氏) 등 세 분을 모시고 있다. 정면 3칸, 측면 1칸의 이 삼강문은 최초 건립 후 한차례의 중수를 거쳤고 1914년 현재의 위치로 옮겼으며 1972년 다시 중수했다. 이밖에 삼강문과 관련된 교지와 옛 문헌을 강석기(83세)가 보관하고 있으며 '장사리등'이라 불리는 마을 뒷산 도요지터가 있다. 또한 강씨문중에 의해 1995년 건립된 화송사(花松祠)가 있어 앞서 언급한 임란공신 두 분과 열부 남평문씨를 배향하고 있고, 제향일은 9월 9일이다. 한편 예전에는 마을주변에 여러 개의 선돌이 있었으나, 경지정리와 저수지 축조 등으로 이전되거나 없어졌다. 또한 기우제를 지냈던 마을 앞산인 '무제등'이 있고 몇해 전까지도 동부와 서부로 나누어 줄다리기와 불싸움의 놀이가 벌어지기도 했다.
마을유래
아주 먼 옛날 지금의 나주시 산포면 화지리 마을 앞에는 멀리 식산이 바라다 보이는 골짜기에 조그마한 못이 하나 있었습니다. 그 못 옆으로 기름진 논이 펼쳐져 있었고 그 아래로는 멀리 영산강물이 흘러내리고 있었습니다. 영산강 물결 따라 가보면 나주 금성산이 평야 끝에 높이 솟아 있었고 북으로는 광주 무등산이 솟아있었습니다. 그 못에서 북으로 바라보면 낮은 등성이가 있었는데 북쪽에서 불어오는 바람을 막아주는 역할을 했습니다. 그 등성이에 멀리서 온 몇몇 사람들이 터를 잡아 초가집을 짓고 연못 주변의 논을 일구어 농사를 짓고 살기 시작했습니다.새둥우리처럼 아늑한 형국의 지형 덕분인지 이 곳에 지은 집은 매우 따뜻했습니다. 그리고 여름에는 먼 식산에서 불어오는 바람이 매우 시원한 곳이었습니다.
이곳에 터를 잡고 살기 시작한 사람들은 이 마을 이름을 무엇으로 지을까하고 고민했습니다. 그해 봄날 우연히 못 주변의 논을 갈던 사람의 눈에 새까만 까마귀 한 마리가 하늘에서 날아오는 것이었습니다. 보니 그 까마귀는 입에 무엇을 물고 있었습니다. 그것은 연씨였는데 그것을 그 못에 퐁당 떨어뜨리고 가는 것이었습니다. 물론 당시 그것을 본 사람은 그것이 연씨인 줄 몰랐는데 그 해 여름 그 못에 푸르게 돋아나는 연잎을 보고는 그 까마귀가 연씨를 물고와 떨어뜨린 것을 알았던 것입니다.그 못에 떨어진 씨앗은 그렇게 그곳에 뿌리를 내리더니 이듬해에는 붉은 연꽃을 피워 올리는 것이었습니다. 그것을 본 사람의 이야기를 들은 사람들은 이곳 마을 이름을 꽃화(花)자와 못지(池)자를 따서 화지라고 이름 붙였던 것입니다. 너무 오랜 옛날인지라 확실한 내력은 알 길이 없으나 입을 통해 구전으로 내려온 이야기를 증명이라도 하듯이 그 못 자리에 연꽃이 해마다 피어났고, 일제 때 일본인들이 저수지를 막느라 그 못 주변의 땅을 구입해 커다란 인공 저수지를 축조하였는데 그 저수지 안에 연꽃이 가득 퍼져 여름에는 온통 붉은 연꽃이 만발하여 향기가 온 마을에 가득합니다.
주로 진주 강씨족이 모여 사는데, 진주 강씨가 이곳 화지리로 와서 터 잡아 산 것은 1500년 대로 전해져 옵니다. 나주에 살고있던 진주 강씨 중 강위구라는 분이 이곳 화지리가 지세가 좋아 이주 해 살았다고 합니다. 강위구는 1592년 임란공신으로 왜적을 맞아 큰아들 강봉령과 함께 조헌의 수하로 들어가 금산에서 의병으로 분전하다 전사했습니다. 지금 화지리 입구에는 동몽교관 병조판서 강위구와 큰아들 강봉령, 그리고 며느리 남평 문씨를 기리는 삼강문이라는 정려가 건립되어 있습니다.화지리는 풍수학상으로는 연화도수(蓮花道水) 형국이라고 합니다. 연못에 물이 있고 아름다운 꽃이 있는 만큼 이곳에 사는 사람들은 인간과 세상의 도를 깨달아 세상을 이롭게 하는 훌륭한 인재가 많이 나온다는 것을 뜻하는 것 이랍니다.이처럼 구전되어 오는 화지리 마을 형성 유래는 연못과 까마귀와 물과 연꽃으로 어우러져 그 전해져 오는 이야기가 거짓이 아니듯 오늘을 증명하고 있는 것이니 참으로 신비로울 따름입니다.
- 담당부서 산포면 총무
- 전화 061-339-3585
제출완료
제출이 완료되었습니다.
의견을 남겨주셔서 감사합니다.
보내주신 소중한 의견은 페이지 개선에 도움이 됩니다.
보내주신 소중한 의견은 페이지 개선에 도움이 됩니다.
만족도조사 결과보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