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제리
- 등록일 2020.04.16 18:26
- 조회수 1189
- 등록자 관리자
산제리(산제, 매화동, 원옥동, 새터)
네 개 자연마을로 나누어지는 큰 마을
다도에서 남평으로 넘어가는 지방도 819호선. 화지리로 들어가는 오른편 길을 넘어 300여 미터쯤 지나면 오른편으로 산제마을이 자리하고 있다. 동쪽으로는 그리 높지 않은 야산이 있고 이 야산을 넘어 남평읍과 경계를 이룬다. 서쪽으로는 지방도를 넘어 화지리 화지마을이 자리하고 남쪽으로는 새터마을을 넘어 다도면이 경계한다. 북으로는 농촌기술원과 매화동이 있다. 마을은 모두 4개 마을. 즉, 산제(山齊), 매화동(梅花洞), 새터(新基), 원옥동(遠玉洞)으로 나누어지는 큰 마을이다.
처음에는 산저(山底)리로 불렸던 곳
산제리는 처음에 산저(山底)리로 불렸던 듯 하다. 산아래 마을이라는 뜻인데 이와 관련해 1789년 의 기록에 남평현 등개면(等介面) 4개 마을 가운데 한 마을인 산저리로 기록되어 있다. 주미들 또한 마을의 생김새가 산아래 마을이라는 뜻으로 산저리라 불렸다고 하고 있어 1789년 기록이 그렇게 표기된 것으로 보인다. 이후 1912년 에는 등포면(等浦面) 12개 마을 가운데 한 마을인 산제리가 기록되어 나온다. 그리고 1941년 행정구역 개편으로 산포면에 속한 산제리가 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 한편 1912년 기록에는 산제리와 함께 원옥(元玉)리가 보이는데 이는 지금의 원옥동(遠玉洞)이 그렇게 표기된 것으로 보인다. 산제리는 후에 마을 뒷산이 가지런하다고 해서 가지런할 제(齊)로 바뀌어 오늘에 이른다. 이와 함께 마을의 이름과 관련 있는 뒷산에는 시루를 걸고 떡을 하는 '시루봉바위'라든지, 자손을 얻기 위해 공을 드리는 '매봉', 떡을 차려 공을 드리는 '떡봉', 옥녀의 달(月)인 '계주봉' 등이 있어, 유래와 함께 주민들의 기자(麒子)나 가정의 안녕을 기원하는 민속적인 신앙의 하나로 자리잡고 있었음을 알게 해준다. 마을 이름 외에도 예전에 배를 매었다는 '계주봉'이나 계주봉 옆을 흐르는 하천을 부르는 '세몰강', 그리고 '무내미들' 등은 시골 마을의 정겨움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는 지명들이다. 현재 산제리는 행정적으로 하나의 구(區)로 되어 있지만 자연 마을은 4개로 나뉘어져있다. 하지만 마을간의 의식구조나 생활문화의 접촉, 그리고 동질성등은 큰 마을인 산제마을을 중심으로 이뤄지고 있다. 성씨의 구성은 특별한 집성촌락은 아니지만 파평윤씨, 개성이씨, 풍산홍씨 등이 가장 많이 살고 있다.
산제마을이 가장 먼저 터를 잡고 4개 마을로 나뉘어져
산제마을은 파평윤씨(坡平尹氏)와 개성이씨(開城李氏)가 먼저 터를 잡았다고 전한다. 이들은 1500년대 초반 거의 같은 시기에 이 곳에 들어왔고 서로 협력해 마을을 이루었다고 한다. 이 가운데 파평윤씨의 경우 19세인 윤확(尹確)이 갑자사화가 일어나자 이를 피해 낙향하게 되었고 처음으로 정착한 것이 이곳이라는 것이다. 대체적인 시기는 갑자사화가 일어나고 4년 후인 1507년으로 알려지고 있다. 이와 함께 1789년의 기록에 이미 산저리가 등개면의 한 마을로 나와있고, 1722년(경종2) 건립된 풍산사(楓山祠)나 1849년(철종원년) 건립된 부조묘(不祧廟) 등의 존재는 마을에서 전하는 것처럼 1700년대 초반, 혹은 훨씬 그 이전에 마을이 형성됐음을 추측하는데 큰 어려움이 없다. 이와 함께 매화마을에 있었던 고인돌이나 산제마을에 산재한 20여기의 고인돌은 이미 선사시대에도 사람이 거주했을 만큼 살기 좋은 고장이었음을 알게 해준다. 산제마을이 1700년대 초반 혹은 그 이전에 가장 먼저 마을을 형성했다면 매화동을 비롯한 3개 마을은 언제 형성되었는가. 마을에서는 1800년대 초반 진주강씨(晋州姜氏)에 의해, 새터가 상산김씨(商山金氏)에 의해 역시 1800년대 초반에, 원옥동은 전의이씨(全義李氏)에 의해 1800년대 중반 형성되었다고 전해지고 있다. 이와 관련해 원옥동은 1912년 기록에 나타나고 있어 이미 1800년대 중반에는 마을이 형성되었음을 알 수 있다. 이들을 종합해 볼 때 산제마을은 이미 1700년대 이전에 마을이 형성되었고, 원옥동을 비롯한 3개 마을은 1800년대 중반에 촌락적 기반이 형성되어 마을로 발전된 것으로 보인다.
민족사회운동가 김창용의 출생지
마을의 인물로는 독립운동가이자 나주 초대 군수를 지낸 김창용이 있다. 김창용은 독립운동에 관해 많은 일화가 전해진다. 그는 1893년 산제리에서 출생한다. 상산김씨(商山金氏)로 부친 인식(仁植)은 400두락 정도의 농업을 경영하는 지주였다. 1910년 3년제였던 경성 융희학교를 졸업하고 1910년대 산포면장을 지낸다. 1927년 신간회 나주지회 부회장을 지내고 1928년에는 회장으로 취임한다. 그해 1월 산포면 유림각 사건으로 구속되어 1929년 5월 대구복심법원에서 벌금 2백원을 선고받는다. 1929년 6월 신간회 대표대회에서 중앙집행위원으로 선출되고 같은해 8월에는 신간회 나주지회 위원장이 된다. 1930년 1월 조선청년총동맹의 광주학생운동 관계 격문유포와 관련하여 자금을 지원했다는 혐의로 연행되어 조사를 받는다. 1930년 11월 신간회 전체대회대행의 중앙집행위원회에서 중앙집행의원으로 선출되는 등 일제강점기 나주 지역의 대표적인 민족 사회운동가로 활동한 중요인물이었다. 광복후 나주 초대군수를 역임하고 1963년 타계했다.
한편 마을에는 그 오랜 역사만큼이나 문화유적 또한 곳곳에 있다. 먼저 선사유적으로 16여기의 고인돌이 산제마을과 매화마을에 산재해있었다. 이들 고인돌 가운데는 아들을 기원하는 아들 바위라는 바위가 있어 기자(祈子) 신앙의 한 단면을 보여주고 있었다. 그러나 매화마을의 고인돌 4기는 최근 도로 확장공사로 인해 파괴되어 없어졌다. 역사 유적으로는 1722(경종2)년 건립된 풍산사(楓山祠)가 있는데, 훼철된 후 1947년 유림들에 의해 복설되었다. 풍산사에는 세마(洗馬)를 지낸 남포(南圃) 김만영과 일신제(日新齊) 임세복, 제안제(制安齊) 성지선, 남호(南湖) 윤동정(尹東貞)을 배향했다. 이와함께 1849년 건립된 부조묘(不祧廟)에는 개성이씨 이등(李登)과 의령옹주(宜寧翁主)가 배향되었으며, 부조며 앞에는 1874년(고종11)에 세워진 홍살문이 있다.
네 개 자연마을로 나누어지는 큰 마을
다도에서 남평으로 넘어가는 지방도 819호선. 화지리로 들어가는 오른편 길을 넘어 300여 미터쯤 지나면 오른편으로 산제마을이 자리하고 있다. 동쪽으로는 그리 높지 않은 야산이 있고 이 야산을 넘어 남평읍과 경계를 이룬다. 서쪽으로는 지방도를 넘어 화지리 화지마을이 자리하고 남쪽으로는 새터마을을 넘어 다도면이 경계한다. 북으로는 농촌기술원과 매화동이 있다. 마을은 모두 4개 마을. 즉, 산제(山齊), 매화동(梅花洞), 새터(新基), 원옥동(遠玉洞)으로 나누어지는 큰 마을이다.
처음에는 산저(山底)리로 불렸던 곳
산제리는 처음에 산저(山底)리로 불렸던 듯 하다. 산아래 마을이라는 뜻인데 이와 관련해 1789년 의 기록에 남평현 등개면(等介面) 4개 마을 가운데 한 마을인 산저리로 기록되어 있다. 주미들 또한 마을의 생김새가 산아래 마을이라는 뜻으로 산저리라 불렸다고 하고 있어 1789년 기록이 그렇게 표기된 것으로 보인다. 이후 1912년 에는 등포면(等浦面) 12개 마을 가운데 한 마을인 산제리가 기록되어 나온다. 그리고 1941년 행정구역 개편으로 산포면에 속한 산제리가 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 한편 1912년 기록에는 산제리와 함께 원옥(元玉)리가 보이는데 이는 지금의 원옥동(遠玉洞)이 그렇게 표기된 것으로 보인다. 산제리는 후에 마을 뒷산이 가지런하다고 해서 가지런할 제(齊)로 바뀌어 오늘에 이른다. 이와 함께 마을의 이름과 관련 있는 뒷산에는 시루를 걸고 떡을 하는 '시루봉바위'라든지, 자손을 얻기 위해 공을 드리는 '매봉', 떡을 차려 공을 드리는 '떡봉', 옥녀의 달(月)인 '계주봉' 등이 있어, 유래와 함께 주민들의 기자(麒子)나 가정의 안녕을 기원하는 민속적인 신앙의 하나로 자리잡고 있었음을 알게 해준다. 마을 이름 외에도 예전에 배를 매었다는 '계주봉'이나 계주봉 옆을 흐르는 하천을 부르는 '세몰강', 그리고 '무내미들' 등은 시골 마을의 정겨움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는 지명들이다. 현재 산제리는 행정적으로 하나의 구(區)로 되어 있지만 자연 마을은 4개로 나뉘어져있다. 하지만 마을간의 의식구조나 생활문화의 접촉, 그리고 동질성등은 큰 마을인 산제마을을 중심으로 이뤄지고 있다. 성씨의 구성은 특별한 집성촌락은 아니지만 파평윤씨, 개성이씨, 풍산홍씨 등이 가장 많이 살고 있다.
산제마을이 가장 먼저 터를 잡고 4개 마을로 나뉘어져
산제마을은 파평윤씨(坡平尹氏)와 개성이씨(開城李氏)가 먼저 터를 잡았다고 전한다. 이들은 1500년대 초반 거의 같은 시기에 이 곳에 들어왔고 서로 협력해 마을을 이루었다고 한다. 이 가운데 파평윤씨의 경우 19세인 윤확(尹確)이 갑자사화가 일어나자 이를 피해 낙향하게 되었고 처음으로 정착한 것이 이곳이라는 것이다. 대체적인 시기는 갑자사화가 일어나고 4년 후인 1507년으로 알려지고 있다. 이와 함께 1789년의 기록에 이미 산저리가 등개면의 한 마을로 나와있고, 1722년(경종2) 건립된 풍산사(楓山祠)나 1849년(철종원년) 건립된 부조묘(不祧廟) 등의 존재는 마을에서 전하는 것처럼 1700년대 초반, 혹은 훨씬 그 이전에 마을이 형성됐음을 추측하는데 큰 어려움이 없다. 이와 함께 매화마을에 있었던 고인돌이나 산제마을에 산재한 20여기의 고인돌은 이미 선사시대에도 사람이 거주했을 만큼 살기 좋은 고장이었음을 알게 해준다. 산제마을이 1700년대 초반 혹은 그 이전에 가장 먼저 마을을 형성했다면 매화동을 비롯한 3개 마을은 언제 형성되었는가. 마을에서는 1800년대 초반 진주강씨(晋州姜氏)에 의해, 새터가 상산김씨(商山金氏)에 의해 역시 1800년대 초반에, 원옥동은 전의이씨(全義李氏)에 의해 1800년대 중반 형성되었다고 전해지고 있다. 이와 관련해 원옥동은 1912년 기록에 나타나고 있어 이미 1800년대 중반에는 마을이 형성되었음을 알 수 있다. 이들을 종합해 볼 때 산제마을은 이미 1700년대 이전에 마을이 형성되었고, 원옥동을 비롯한 3개 마을은 1800년대 중반에 촌락적 기반이 형성되어 마을로 발전된 것으로 보인다.
민족사회운동가 김창용의 출생지
마을의 인물로는 독립운동가이자 나주 초대 군수를 지낸 김창용이 있다. 김창용은 독립운동에 관해 많은 일화가 전해진다. 그는 1893년 산제리에서 출생한다. 상산김씨(商山金氏)로 부친 인식(仁植)은 400두락 정도의 농업을 경영하는 지주였다. 1910년 3년제였던 경성 융희학교를 졸업하고 1910년대 산포면장을 지낸다. 1927년 신간회 나주지회 부회장을 지내고 1928년에는 회장으로 취임한다. 그해 1월 산포면 유림각 사건으로 구속되어 1929년 5월 대구복심법원에서 벌금 2백원을 선고받는다. 1929년 6월 신간회 대표대회에서 중앙집행위원으로 선출되고 같은해 8월에는 신간회 나주지회 위원장이 된다. 1930년 1월 조선청년총동맹의 광주학생운동 관계 격문유포와 관련하여 자금을 지원했다는 혐의로 연행되어 조사를 받는다. 1930년 11월 신간회 전체대회대행의 중앙집행위원회에서 중앙집행의원으로 선출되는 등 일제강점기 나주 지역의 대표적인 민족 사회운동가로 활동한 중요인물이었다. 광복후 나주 초대군수를 역임하고 1963년 타계했다.
한편 마을에는 그 오랜 역사만큼이나 문화유적 또한 곳곳에 있다. 먼저 선사유적으로 16여기의 고인돌이 산제마을과 매화마을에 산재해있었다. 이들 고인돌 가운데는 아들을 기원하는 아들 바위라는 바위가 있어 기자(祈子) 신앙의 한 단면을 보여주고 있었다. 그러나 매화마을의 고인돌 4기는 최근 도로 확장공사로 인해 파괴되어 없어졌다. 역사 유적으로는 1722(경종2)년 건립된 풍산사(楓山祠)가 있는데, 훼철된 후 1947년 유림들에 의해 복설되었다. 풍산사에는 세마(洗馬)를 지낸 남포(南圃) 김만영과 일신제(日新齊) 임세복, 제안제(制安齊) 성지선, 남호(南湖) 윤동정(尹東貞)을 배향했다. 이와함께 1849년 건립된 부조묘(不祧廟)에는 개성이씨 이등(李登)과 의령옹주(宜寧翁主)가 배향되었으며, 부조며 앞에는 1874년(고종11)에 세워진 홍살문이 있다.
- 담당부서 산포면 총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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