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정리
- 등록일 2020.04.16 18:25
- 조회수 1018
- 등록자 관리자
등정1리 (정자마을)
시설원예로 소득 올리는 국도변 마을
동쪽으로는 시녀울 마을을 넘어 남평읍과 경계를 이루고 서쪽으로는 금와마을이 자리한다. 남쪽으로는 국도1호선의 옛 도로가 새로 생긴 도로와 함께 '육림들'의 널따란 평야가 펼쳐지며, 북쪽으로는 평야를 넘어 지석강이 흘러간다. 논농사의 주산물인 미맥농사도 재배하지만 국도 1호선 주변 마을들의 특징인 시설하우스를 이용한 특작물의 재배가 주된 소득원이다.
마을 뒷산에서 지명 유래
마을의 처음 이름은 정자산(亭子山)이었다. 마을 뒷산에서 유래됐다는데 그에 관한 최초의 기록은 1789년 이다. 이 기록에는 남평현 두산면(頭山面)에 속한 11개 마을 가운데 한 마을인 정자산이 나온다. 이후 1912년의 에는 남평군 두산면에 속한 17개 마을 가운데 한 마을인 정자리로 기록되어 있다. 이 기록들을 종합해 볼 때 이 마을은 1700년대 이전까지는 정자산으로 불리다가 1800년대 이후에 정자리로 개칭되었음을 알 수 있다. 그 뒤 1914년 행정구역 개편으로 인해 산포면 등정리에 속하게 되고 현재에 이른다. 마을의 이름은 뒷동산이 평지에서 돌출된 산인데 귀목나무가 산 전체에 무성해 정자라는 이름이 유래되었다고 주민들은 말한다. 이와는 달리 마을 뒷산에 큰 정자(亭子)나무 2그루가 있으므로 정자마을이라 불렀다고도 한다. 그러나 이 정자나무는 일제강점기 일본사람들에 의해 신사건립 때문에 베어졌다고 한다. 한편 마을에는 여러 지명과 그 유래들이 전해왔는데 경지정리 이후 지형이 변하게 됨에 따라 지금은 모두들 사라지고 기억하는 주민들조차 없게 됐다. 하지만 남평읍으로 가는 비행기 활주로의 들을 부르는 '육림들'이라는 지명은 전해오고 있었다. '육림들'의 유래는 남평읍 교촌리에 있떤 육림사에서 연유한다. 성씨의 구성은 전주이씨, 밀양박씨, 도광김씨 등의 비율이 대체적으로 높으나 특별히 집성촌락이라 할 수 있는 마을은 아니다.
마을의 형성은 1700년대 이전으로 추정
정자마을은 누가 언제 터를 잡고 마을이 발전됐는지 확실한 기록은 전하지 않는다. 다만 1989년 간행된 에 전주이씨(全州李氏) 이현구(李顯求)가 전북 순창에서 살다가 나주에 있는 파평윤씨(坡平尹氏)의 딸을 맞아 혼인을 하게 된 것이 계기가 되었다고 한다. 그 후 처가인 나주로 오게 되었고 평야가 좋은 이곳에 정착한 것이 마을형성의 시초가 되었다고 기록 되어 있다.
수리시설의 현대화 시급
정자마을은 농업을 주업으로 하는 농촌마을이다. 그러기에 영농의 현대화는 필수적이었다. 이에 1960년대 후반에서부터 70년대에 걸쳐 대대적인 경지정리와 수리시설확충으로 농경의 기계화를 꾀했으며, 이후 후진적인 농업경영방식에서 벗어나 하우스 시설재배를 통해 큰 소득을 올렸다. 이같은 시설작물재배를 가능하게 한 요인 중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한 것은 무엇보다도 치수 사업의 선진화였다. 이 마을에는 일찍이 '하보'라고 불리는 대촌지역의 수리시설과 함께 시상수도를 사용하는 88가구와 자가급수시설을 갖춘 4가구 등 충분한 급수시설을 갖추고 있다. 그러나 수리시설의 경우 이제는 이미 노후화되어 수로의 보수를 통한 현대화가 시급한 실정이다.
등정2리 (구등마을)
편리한 교통으로 나날이 발전하는 마을
동쪽으로는 넓은 평야를 넘어 남평읍과 경계를 이루고 서쪽으로는 나주평야의 들녘과 국도1호선, 그리고 곳곳에 서있는 시설하우스들이 자리잡고 있다. 남쪽으로는 등수리 등계마을이 자리하고 북쪽으로는 평야 사이에 국도 1호선과 나머지 도로들이 보인다.
하천 위에 형성된 마을
마을의 이름이 최초로 보이는 기록은 1912년의 이다. 이 기록에 의하면 남평군에 속한 두산면(頭山面) 17개 마을 가운데 한마을인 구등리(溝嶝里)로 표기되어 있다. 이후 1914년 지방행정구역개편으로 산포면에 속한 등정리의 자연마을로 소속되어 현재에 이른다. 마을 이름인 구등(溝嶝)은 마을이 형성되기 전 마을 일대의 땅이 구거(溝渠 : 하천, 도랑)였다고 한다. 그리고 마을은 구거 즉, 하천 위에 형성되었고 마을의 이름 또한 하천 위의 고개라는 뜻으로 구등(溝嶝)이라 붙였다고 한다. 이와 관련해 마을 주변으로 산포천과 남평천이 흐르고 있어 이를 입증해준다. 또한 배가 들어와 닿았다는 '똘둑'이라는 지명은 이 마을과 주변 지역이 물이 흐르던 지역이었음을 말해주고 있다. 성씨의 구성은 밀양박씨, 김해김씨, 이천서씨와 그 외에 광산김씨와 진주강씨등 여러 성씨들이 살고 있다.
일제강점기 면사무소가 자리했던 곳
마을의 최초 입향성씨는 밀양박씨로 알려져 있다. 전하는 이야기로는 밀양박씨가 1700년대에 이 마을에 정착하게 되어 지금의 마을이 형성되었다고 한다. 하지만 현재 확인할 수 있는 기록은 없다. 1989년 간행된 에는 전북 순창에서 살던 밀양박씨 박인용(朴仁用)이 이곳에 정착한 것이 시초라고 표기되어 있다. 이에 대해서도 확인할 방법은 없다. 한편 구등마을에는 1914년부터 1925년까지 약 11년 동안 산포면사무소가 자리하고 있었다. 1914년 행정구역 개편으로 두산면과 등포면이 합쳐져 산포면이 되자 산포면사무소를 구등마을에 설치한 것이다. 11년여 동안 이 곳이서 면정(面政)을 수행하던 산포면사무소는 중심부와 떨어져 행정 수행에 불편함을 느끼게 되었고 1925년 4월 25일 면의 중앙인 매성리로 옮기었다.
등정3리(시녀울마을)
산포면의 최동단 마을
국도1호선의 구도로와 신도로가 합류하는 지점의 왼편에 시녀울 마을이 있다. 동쪽으로는 남평읍과 경계를 이루는 산포면의 최동단 마을이다. 서쪽으로는 오직 넓은 평야와 국도1호선만이 보일 뿐이다. 남쪽 또한 국도의 도로변과 평야만이 눈에 보인다. 북으로는 지석강이 마을을 등지고 흐르고 있다.
신여울에서 시녀울로 변화
마을이 형성되기 전에는 마을 앞에 여울이 있었다고 한다. 그후 이 여울이 있는 곳에 마을이 생겼고 여울에 새로이 생긴 마을이라는 뜻으로 신여울이라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그리고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면서 지금은 부르기 쉽게 시녀울이라 하고 있다. 마을은 누구에 의해 언제 형성됐는지 알 수 없다. 다만 1989년 간행된 에 김해김씨 김현진(金賢珍)이 광양에서 살다가 평야가 넓고 물이 좋은 이곳에 정착하게 되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이에 대한 기록은 마을에 남아있지 않다. 조선시대 각종 기록에서도 이 마을의 지명을 찾을 수 없다. 다만 한글로 된 마을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근세에 새긴 마을임을 짐작할 수 있다.
상습침수에 대한 장기적인 대책 필요
1989년 태풍으로 인한 호우때 이 마을은 지석강이 범람하여 마을 전체가 물에 잠긴 적이 있다. 현재도 장마 때만 되면 농경지가 상습적으로 침수되고 있다. 이에 대한 근본적인 수해대책이 절실하다고 주민들은 입을 모은다. 그러나 상습 침수 지역임에도 불구하고 농업 용수는 약간 부족한 편이다.
등정4리(금와마을)
등정리의 첫 들머리
동서쪽으로는 오직 도로와 '육림들'의 너른 들녘뿐이다. 남쪽으로는 국도 1호선과 함께 구등마을이 자리하고 있다. 북쪽으로는 활주로를 가운데 두고 너른 들녘과 지석강이 자리한다.
1935년경 형성될 때는 새동네로 불려
지금의 금와(金蛙)라는 행정명칭으로 불리기 전에는 새동네라는 이름으로 불렸다. 새집터에 새로이 마을이 형성됐다고 해서 그렇게 붙여졌다고 한다. 마을이 형성된 후 마을 뒤로 흐르는 지석강 하류에 정자강 둑이 형성되기 전에는 비만 내리면 주위가 하천으로 변하며 물이 흘렀다고 한다. 그런데 유독 이 마을만이 섬처럼 물에 잠기지 않았고 섬처럼 변한 마을의 지형이 꼭 개구리 같아서 지금의 명칭인 금와(金蛙)라 불리게 됐다고 한다. 최초 형성연대는 1935년경 이라 전해 온다. 당시 목수였던 김정연(金正然)의 아들 김팔복(金八福)이 결혼을 하게 되었는데 결혼한 아들의 분가를 위해 새 집터를 찾던 중 지금의 마을 터에 집을 지어주게 되었고 그것이 이 마을이 생긴 배경이라고 한다. 당시 집을 지어주었던 김정연은 도광김씨로 알려졌다. 마을이 형성된 후 농사를 짓기에 천혜의 조건이기에 마을은 주민들의 이주가 계속되어 번창했고 현재에 이르게 됐다
시설원예로 소득 올리는 국도변 마을
동쪽으로는 시녀울 마을을 넘어 남평읍과 경계를 이루고 서쪽으로는 금와마을이 자리한다. 남쪽으로는 국도1호선의 옛 도로가 새로 생긴 도로와 함께 '육림들'의 널따란 평야가 펼쳐지며, 북쪽으로는 평야를 넘어 지석강이 흘러간다. 논농사의 주산물인 미맥농사도 재배하지만 국도 1호선 주변 마을들의 특징인 시설하우스를 이용한 특작물의 재배가 주된 소득원이다.
마을 뒷산에서 지명 유래
마을의 처음 이름은 정자산(亭子山)이었다. 마을 뒷산에서 유래됐다는데 그에 관한 최초의 기록은 1789년 이다. 이 기록에는 남평현 두산면(頭山面)에 속한 11개 마을 가운데 한 마을인 정자산이 나온다. 이후 1912년의 에는 남평군 두산면에 속한 17개 마을 가운데 한 마을인 정자리로 기록되어 있다. 이 기록들을 종합해 볼 때 이 마을은 1700년대 이전까지는 정자산으로 불리다가 1800년대 이후에 정자리로 개칭되었음을 알 수 있다. 그 뒤 1914년 행정구역 개편으로 인해 산포면 등정리에 속하게 되고 현재에 이른다. 마을의 이름은 뒷동산이 평지에서 돌출된 산인데 귀목나무가 산 전체에 무성해 정자라는 이름이 유래되었다고 주민들은 말한다. 이와는 달리 마을 뒷산에 큰 정자(亭子)나무 2그루가 있으므로 정자마을이라 불렀다고도 한다. 그러나 이 정자나무는 일제강점기 일본사람들에 의해 신사건립 때문에 베어졌다고 한다. 한편 마을에는 여러 지명과 그 유래들이 전해왔는데 경지정리 이후 지형이 변하게 됨에 따라 지금은 모두들 사라지고 기억하는 주민들조차 없게 됐다. 하지만 남평읍으로 가는 비행기 활주로의 들을 부르는 '육림들'이라는 지명은 전해오고 있었다. '육림들'의 유래는 남평읍 교촌리에 있떤 육림사에서 연유한다. 성씨의 구성은 전주이씨, 밀양박씨, 도광김씨 등의 비율이 대체적으로 높으나 특별히 집성촌락이라 할 수 있는 마을은 아니다.
마을의 형성은 1700년대 이전으로 추정
정자마을은 누가 언제 터를 잡고 마을이 발전됐는지 확실한 기록은 전하지 않는다. 다만 1989년 간행된 에 전주이씨(全州李氏) 이현구(李顯求)가 전북 순창에서 살다가 나주에 있는 파평윤씨(坡平尹氏)의 딸을 맞아 혼인을 하게 된 것이 계기가 되었다고 한다. 그 후 처가인 나주로 오게 되었고 평야가 좋은 이곳에 정착한 것이 마을형성의 시초가 되었다고 기록 되어 있다.
수리시설의 현대화 시급
정자마을은 농업을 주업으로 하는 농촌마을이다. 그러기에 영농의 현대화는 필수적이었다. 이에 1960년대 후반에서부터 70년대에 걸쳐 대대적인 경지정리와 수리시설확충으로 농경의 기계화를 꾀했으며, 이후 후진적인 농업경영방식에서 벗어나 하우스 시설재배를 통해 큰 소득을 올렸다. 이같은 시설작물재배를 가능하게 한 요인 중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한 것은 무엇보다도 치수 사업의 선진화였다. 이 마을에는 일찍이 '하보'라고 불리는 대촌지역의 수리시설과 함께 시상수도를 사용하는 88가구와 자가급수시설을 갖춘 4가구 등 충분한 급수시설을 갖추고 있다. 그러나 수리시설의 경우 이제는 이미 노후화되어 수로의 보수를 통한 현대화가 시급한 실정이다.
등정2리 (구등마을)
편리한 교통으로 나날이 발전하는 마을
동쪽으로는 넓은 평야를 넘어 남평읍과 경계를 이루고 서쪽으로는 나주평야의 들녘과 국도1호선, 그리고 곳곳에 서있는 시설하우스들이 자리잡고 있다. 남쪽으로는 등수리 등계마을이 자리하고 북쪽으로는 평야 사이에 국도 1호선과 나머지 도로들이 보인다.
하천 위에 형성된 마을
마을의 이름이 최초로 보이는 기록은 1912년의 이다. 이 기록에 의하면 남평군에 속한 두산면(頭山面) 17개 마을 가운데 한마을인 구등리(溝嶝里)로 표기되어 있다. 이후 1914년 지방행정구역개편으로 산포면에 속한 등정리의 자연마을로 소속되어 현재에 이른다. 마을 이름인 구등(溝嶝)은 마을이 형성되기 전 마을 일대의 땅이 구거(溝渠 : 하천, 도랑)였다고 한다. 그리고 마을은 구거 즉, 하천 위에 형성되었고 마을의 이름 또한 하천 위의 고개라는 뜻으로 구등(溝嶝)이라 붙였다고 한다. 이와 관련해 마을 주변으로 산포천과 남평천이 흐르고 있어 이를 입증해준다. 또한 배가 들어와 닿았다는 '똘둑'이라는 지명은 이 마을과 주변 지역이 물이 흐르던 지역이었음을 말해주고 있다. 성씨의 구성은 밀양박씨, 김해김씨, 이천서씨와 그 외에 광산김씨와 진주강씨등 여러 성씨들이 살고 있다.
일제강점기 면사무소가 자리했던 곳
마을의 최초 입향성씨는 밀양박씨로 알려져 있다. 전하는 이야기로는 밀양박씨가 1700년대에 이 마을에 정착하게 되어 지금의 마을이 형성되었다고 한다. 하지만 현재 확인할 수 있는 기록은 없다. 1989년 간행된 에는 전북 순창에서 살던 밀양박씨 박인용(朴仁用)이 이곳에 정착한 것이 시초라고 표기되어 있다. 이에 대해서도 확인할 방법은 없다. 한편 구등마을에는 1914년부터 1925년까지 약 11년 동안 산포면사무소가 자리하고 있었다. 1914년 행정구역 개편으로 두산면과 등포면이 합쳐져 산포면이 되자 산포면사무소를 구등마을에 설치한 것이다. 11년여 동안 이 곳이서 면정(面政)을 수행하던 산포면사무소는 중심부와 떨어져 행정 수행에 불편함을 느끼게 되었고 1925년 4월 25일 면의 중앙인 매성리로 옮기었다.
등정3리(시녀울마을)
산포면의 최동단 마을
국도1호선의 구도로와 신도로가 합류하는 지점의 왼편에 시녀울 마을이 있다. 동쪽으로는 남평읍과 경계를 이루는 산포면의 최동단 마을이다. 서쪽으로는 오직 넓은 평야와 국도1호선만이 보일 뿐이다. 남쪽 또한 국도의 도로변과 평야만이 눈에 보인다. 북으로는 지석강이 마을을 등지고 흐르고 있다.
신여울에서 시녀울로 변화
마을이 형성되기 전에는 마을 앞에 여울이 있었다고 한다. 그후 이 여울이 있는 곳에 마을이 생겼고 여울에 새로이 생긴 마을이라는 뜻으로 신여울이라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그리고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면서 지금은 부르기 쉽게 시녀울이라 하고 있다. 마을은 누구에 의해 언제 형성됐는지 알 수 없다. 다만 1989년 간행된 에 김해김씨 김현진(金賢珍)이 광양에서 살다가 평야가 넓고 물이 좋은 이곳에 정착하게 되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이에 대한 기록은 마을에 남아있지 않다. 조선시대 각종 기록에서도 이 마을의 지명을 찾을 수 없다. 다만 한글로 된 마을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근세에 새긴 마을임을 짐작할 수 있다.
상습침수에 대한 장기적인 대책 필요
1989년 태풍으로 인한 호우때 이 마을은 지석강이 범람하여 마을 전체가 물에 잠긴 적이 있다. 현재도 장마 때만 되면 농경지가 상습적으로 침수되고 있다. 이에 대한 근본적인 수해대책이 절실하다고 주민들은 입을 모은다. 그러나 상습 침수 지역임에도 불구하고 농업 용수는 약간 부족한 편이다.
등정4리(금와마을)
등정리의 첫 들머리
동서쪽으로는 오직 도로와 '육림들'의 너른 들녘뿐이다. 남쪽으로는 국도 1호선과 함께 구등마을이 자리하고 있다. 북쪽으로는 활주로를 가운데 두고 너른 들녘과 지석강이 자리한다.
1935년경 형성될 때는 새동네로 불려
지금의 금와(金蛙)라는 행정명칭으로 불리기 전에는 새동네라는 이름으로 불렸다. 새집터에 새로이 마을이 형성됐다고 해서 그렇게 붙여졌다고 한다. 마을이 형성된 후 마을 뒤로 흐르는 지석강 하류에 정자강 둑이 형성되기 전에는 비만 내리면 주위가 하천으로 변하며 물이 흘렀다고 한다. 그런데 유독 이 마을만이 섬처럼 물에 잠기지 않았고 섬처럼 변한 마을의 지형이 꼭 개구리 같아서 지금의 명칭인 금와(金蛙)라 불리게 됐다고 한다. 최초 형성연대는 1935년경 이라 전해 온다. 당시 목수였던 김정연(金正然)의 아들 김팔복(金八福)이 결혼을 하게 되었는데 결혼한 아들의 분가를 위해 새 집터를 찾던 중 지금의 마을 터에 집을 지어주게 되었고 그것이 이 마을이 생긴 배경이라고 한다. 당시 집을 지어주었던 김정연은 도광김씨로 알려졌다. 마을이 형성된 후 농사를 짓기에 천혜의 조건이기에 마을은 주민들의 이주가 계속되어 번창했고 현재에 이르게 됐다
- 담당부서 산포면 총무
- 전화 061-339-35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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