덕례리
- 등록일 2020.04.16 18:24
- 조회수 1199
- 등록자 관리자
덕례 1리(내촌마을)
지석강을 앞에 둔 평야마을
지석강을 앞에 두고 있는 평야 마을이다. 산포면의 다른 마을들과 마찬가지로 주변에는 곳곳에 시설하우스들이 자리하고 있다. 동쪽으로는 옛 마을 터인 도장촌과 산포면에 속해있었던 작수마을을 넘어 남평읍과 경계한다. 서쪽으로는 덕례리에서 유일한 교육 시설인 산포초등학교 덕례분교가 자리하고 있고 남쪽으로는 지석강이 흘러간다. 북쪽으로는 광주광역시 광산구가 위치한 나주와 광주의 경계 지역이다.
냇물 안에 위치한 마을이라 내촌(內村)이라 불려
지석강의 제방을 쌓기 전에는 마을 앞으로 냇물이 흘렀다고 한다. 냇물 안에 마을이 자리하고 있다고 해서 마을 이름을 안에 있는 마을. 즉, 내촌(內村)이라 불려지게 됐다고 전한다. 하지만 그에 관한 기록은 찾을 수 없다. 1789년 는 물론 1912년의 에도 내촌에 관한 기록은 없다. 이는 마을이 일제 강점기 이후에 생겼거나 기록에 누락된 것으로 볼 수 있다. 한편 일제강점기 이후 산포면 덕례리렝 속해 공동체적 생활을 했던 작수마을은 1999년 9월 28일 남평읍으로 편입되기에 이른다. 작수(作水)라는 명칭은 지석강에 제방이 없어 홍수때만 되면 피해가 잦아 제방을 쌓았으나 비가 오면 다시 무너지는 피해를 당해 작수(作水)라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이외에도 마을에는 남평현에 속해있을 당시 남평팔경의 첫 번째인 강정산이 있어 그 자태를 자랑하고 있다. 성씨의 구성은 광주최씨, 나주장씨, 경주최씨 등이 많은 분포를 보이고 그 외에 다양한 성씨가 모여살고 있다.
동곡에서 이주해 마을 형성
마을의 최초 입향 성씨는 보성오씨(寶城吳氏)로 알려져 있다. 마을의 형성연대는 미상이나 400여년 전에 보성오씨(寶城吳氏) 오한림(吳翰林)이 광산구 동곡면에서 살다가 이곳에 정착하게 되어 지금의 마을이 형성되었다고 한다. 하지만 현재 보성오씨는 마을에 한 가구도 거주하고 있지 않다. 앞서 밝혔듯이 1789년이나 1912년의 기록에 마을이 전혀 나타나지 않고 있는데 이는 당시 마을 형성이 안되었다기보다는 기록에서 누락된 것으로 보는 것이 더욱 신빙성이 간다. 기록누락으로 추정하는 이유는 마을의 동쪽에 자리했던 도장촌(都狀村)이라는 마을이 이미 1789년 기록에 나타나고 있기 때문이다. 여기에 100여년 전부터 전해돈다는 동계모임 또한 마을의 오랜 역사를 짐작케 한다. 하지만 이 도장촌은 1912년의 기록에는 나타나지 않고 있어 이후 마을로서 그 형태가 차츰 소멸되어 간 것으로 볼 수 있다.
동계 남아있어 협동심 과시
마을 조직으로는 주민 전체가 참여하는 동계가 있다. 이 동계에서는 주민들의 대소사시 모든 일에 참여해 서로 돕는다. 또한 매년 5월 8일에는 효도관광을 실시해 노인들에 대한 공경심도 과시하고 있다. 민속놀이로는 농악이 있었으나 현대화에 밀려 1990년도 초반 사라지고 말았다. 한편 마을 앞에 지석강이 흐르는 지리적인 여건은 홍수때만 되면 큰 피해를 입었는데 1980년 지석강 제방이 두 차례나 무너져 일부 가옥이 침수피해를 보기도 했다.
근현대 문화유적 많이 남아 있어
마을에는 근현대의 문화유적이 많이 남아있다. 특히 장은주는 마을 동계문건을 모두 관리하고 있어 기층민들의 생활사 자료로서 큰 몫을 차지하고 있다. 또한 마을 입구에는 1941년 남평유림의 추천을 받아 효자 최병호(崔秉鎬)의 효행을 알리기 위한 경주최씨 문종에서 건립한 효자비가 서 있어 후손들에게 귀감이 되고 있다. 여기에 1981년 효열부 장영례(張永禮)의 효열행을 추모하기 위해 경주최씨 문중에서 건립한 효열비가 있다.
덕례 2리(신평마을)
너른 평야와 함께 강이 흐르는 평온한 마을
동쪽으로는 광주광역시 광산구와 경계하고 있어 나주와 광주의 경계를 이루고 있다. 서쪽으로는 도로를 넘어 유촌이 자리하고 있고 남쪽으로는 평야를 넘어 지석강이 흘러간다. 북쪽으로는 덕림마을이 자리하고 있다.
처음에는 모래등이라 불려
마을의 이름이 최초로 보이는 기록은 1912년의 이다. 이 기록에는 두산면 17개 마을 가운데 한 마을인 신평(新坪)으로 나타난다. 1914년 행정구역 개편으로 산포면 덕례리에 속하게 되고 현재에 이른다. 마을은 처음에 '모래등'이라 불렸다고 한다. 마을 안으로 하천 물이 흘렀고 그 옆에는 모래로 된 제방이 있었는데 그 밑에 이룬 마을이라 하여 그렇게 불렀다고 하는데 약 80년 전에 현재의 이름으로 바뀌었다고 마을에서는 말하고 있다. 하지만 1912년의 기록에 마을의 이름이 나오고 있어 1800년대 후반에는 이미 신평이라는 이름으로 불렸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신평이라는 이름은 평평한 곳에 새로 마을이 형성됐다는 뜻으로 보인다. 한폄 마을을 입구에는 '옹등구리'라는 지형이 있는데 모양이 웅덩이 같이 생겨서 붙여진 지명이라고 한다. 성씨의 구성은 김해김씨와 이천서씨, 청주한씨 등이 많은 분포를 보이며 그 외 많은 성씨들이 모여 살고 있다.
이천서씨에 의해 개촌
마을을 최초로 형성했떤 성씨는 이천서씨로 알려지고 있다. 이천서씨 서상원(徐相元)이 나주 봉황면에서 살다가 가세가 기울자 1850년대를 전후해 이곳에 오게 됐다고 한다. 그리고 광산김씨의 딸을 맞아 결혼하게 되었고 정착해 마을을 형성한 곳이 바로 지금의 마을이라는 것이다. 그 후 마을은 번창을 거듭해 지금에 이르게 됐고 넓은 평야와 풍부한 농업용수는 농민들의 이주를 더욱 부채질했던 것으로 보인다. 한편 이 마을은 일제강점기 적휘농민조합사건(赤輝農民組合事件)으로 홍역을 치르기도 했다.
덕례 3리(덕림마을)
산포면의 최북단 마을
신평마을에서 북쪽으로 500여m 정도 가면 너른 평야의 한 가운데에 80여호의 큰 마을이 자리잡고 있다. 이 곳이 덕림마을이다. 마을의 앞뒤와 좌우에 펼쳐진 평야에는 곳곳에 시설하우스들이 자리하고 있다. 동북쪽으로는 나주시의 최북단으로 광주광역시 광산구와 경계한다. 서쪽으로는 저수지 너머 유촌이 자리하고 있고 남쪽으로는 신평마을이 있다.
덕을 베푸는 마을
마을 이름이 최초로 보이는 기록은 1912년의 이다. 이 기록에는 남평군 두산면에 속한 17개 마을 가운데 한 마을인 덕림(德林)리로 나온다. 이후 1914년 행정구역 개편으로 두산면과 등포면이 합쳐져 산포면 덕례리에 속하게 되고 현재에 이른다. 마을의 이름은 왕이 덕(德)을 베풀었다 해서 붙여진 지명이라 전한다. 1912년의 기록에 나오는 것으로 미루어 1800년대 후반에는 이미 마을로서 어느정도 발전되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덕림마을은 특별히 집성촌락이라 부를 수 있는 성씨는 없다. 마을을 이루고 있는 성씨로는 김해김씨가 가장많은 분포를 보이고 있고 다음으로 마을을 개촌한 것으로 알려진 제주양씨와 그 외에 충주박씨 등이다.
마을 형성과 양촌의 광주로 편입
마을을 최초로 이룬 성씨는 제주양씨로 알려지고 있다. 1800년대를 전후해 제주양씨(濟州梁氏) 한신(漢信)이 지금의 광주광역시 광산구인 광산군에서 살다가 분가하면서 광산군과 인접하고 농사짓기에 편한 이곳에 정착하게 되었다고 한다. 한편 1900년대 후반까지 덕림마을과 함께 덕례3구를 형성했던 양촌마을이 광주로 편입된다. '판촌'과 '신양촌', 그리고 '원양촌'을 합해 양촌마을로 불렀던 이 마을은 1900년대 후반 광주광역시 남구로 편입되어 지금은 다른 행정구역으로 불리고 있다. 하지만 개울 하나 사이로 인접한 마을이어서인지 서로의 친분관계는 아직도 잘 유지되고 있는 모습이다.
매년 효도관광 실시하는 효심깊은 마을
지석강 유역의 마을이 대부분 그랬듯이 1989년 홍수는 이 마을에도 큰 피해를 입혔다. 지석강 제방이 무너져 큰 수해를 당한 것이다. 그 후 마을에서는 홍수 피해에 만전을 기하고 있다. 한편 마을에서는 효도관광을 실시하고 있다. 매년 실시하는 이 행사로 주변 마을에서는 효심 깊은 마을로 이름이 나있다
덕례 4리 (유촌마을)
풍부한 농업용수가 있는 농촌마을
동쪽으로는 신평마을과 덕림마을이 자리하고 있고 서북쪽으로는 광주광역시 광산구와 경계하는 도계를 이루고 있다. 남쪽으로는 지석강이 흐르는 임수(臨水)형 마을이다.
버드나무가 많았던 마을
마을의 이름이 최초로 보이는 기록은 1912년의 이다. 이 기록에는 남평군 두산면에 속한 17개 마을가운데 한 마을인 유촌(柳村)리로 나온다. 1914년 행정구역 개편으로 두산면과 등포면이 합쳐져 산포면이 되자 산포면 덕례리에 속하게 되고 현재에 이르게 된 것이다. 마을의 이름은 버드나무 때문에 붙여졌다고 한다. 마을이 형성될 당시 마을 앞에 유난히도 버드나무가 많아 버들 유(柳)자를 써 이름을 유촌(柳村)이라 불렀다 한다. 유촌은 특별히 집성촌락이라 부를 수 있는 성씨는 없다. 마을을 이루고 있는 성씨로는 김해김씨가 가장 많고 다음으로 마을을 개촌한 것으로 알려진 전주이씨와 그 외에 밀양박씨등이 모여 살고 있다.
1800년대 중반 마을을 형성
마을을 최초로 이룬 성씨는 전주이씨로 알려지고 있다. 전주이씨 헌범(憲範)이 약 150년전에 지금의 광주광역시 광산구인 광산군에서 농사짓기에 편한 이곳으로 이주해 터를 잡은 것이 시초라고 한다. 마을에서는 1850년대 마을이 형성됐다고 전해지고 있었고, 이와 관련해 1912년의 의 두산면 17개 마을 가운데 한 마을로 기록돼 있음은 이를 증명해 주고 있다. 이미 1800년대 후반에는 마을이 형성되어 발전되고 있음을 알 수 있게 해준다
지석강을 앞에 둔 평야마을
지석강을 앞에 두고 있는 평야 마을이다. 산포면의 다른 마을들과 마찬가지로 주변에는 곳곳에 시설하우스들이 자리하고 있다. 동쪽으로는 옛 마을 터인 도장촌과 산포면에 속해있었던 작수마을을 넘어 남평읍과 경계한다. 서쪽으로는 덕례리에서 유일한 교육 시설인 산포초등학교 덕례분교가 자리하고 있고 남쪽으로는 지석강이 흘러간다. 북쪽으로는 광주광역시 광산구가 위치한 나주와 광주의 경계 지역이다.
냇물 안에 위치한 마을이라 내촌(內村)이라 불려
지석강의 제방을 쌓기 전에는 마을 앞으로 냇물이 흘렀다고 한다. 냇물 안에 마을이 자리하고 있다고 해서 마을 이름을 안에 있는 마을. 즉, 내촌(內村)이라 불려지게 됐다고 전한다. 하지만 그에 관한 기록은 찾을 수 없다. 1789년 는 물론 1912년의 에도 내촌에 관한 기록은 없다. 이는 마을이 일제 강점기 이후에 생겼거나 기록에 누락된 것으로 볼 수 있다. 한편 일제강점기 이후 산포면 덕례리렝 속해 공동체적 생활을 했던 작수마을은 1999년 9월 28일 남평읍으로 편입되기에 이른다. 작수(作水)라는 명칭은 지석강에 제방이 없어 홍수때만 되면 피해가 잦아 제방을 쌓았으나 비가 오면 다시 무너지는 피해를 당해 작수(作水)라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이외에도 마을에는 남평현에 속해있을 당시 남평팔경의 첫 번째인 강정산이 있어 그 자태를 자랑하고 있다. 성씨의 구성은 광주최씨, 나주장씨, 경주최씨 등이 많은 분포를 보이고 그 외에 다양한 성씨가 모여살고 있다.
동곡에서 이주해 마을 형성
마을의 최초 입향 성씨는 보성오씨(寶城吳氏)로 알려져 있다. 마을의 형성연대는 미상이나 400여년 전에 보성오씨(寶城吳氏) 오한림(吳翰林)이 광산구 동곡면에서 살다가 이곳에 정착하게 되어 지금의 마을이 형성되었다고 한다. 하지만 현재 보성오씨는 마을에 한 가구도 거주하고 있지 않다. 앞서 밝혔듯이 1789년이나 1912년의 기록에 마을이 전혀 나타나지 않고 있는데 이는 당시 마을 형성이 안되었다기보다는 기록에서 누락된 것으로 보는 것이 더욱 신빙성이 간다. 기록누락으로 추정하는 이유는 마을의 동쪽에 자리했던 도장촌(都狀村)이라는 마을이 이미 1789년 기록에 나타나고 있기 때문이다. 여기에 100여년 전부터 전해돈다는 동계모임 또한 마을의 오랜 역사를 짐작케 한다. 하지만 이 도장촌은 1912년의 기록에는 나타나지 않고 있어 이후 마을로서 그 형태가 차츰 소멸되어 간 것으로 볼 수 있다.
동계 남아있어 협동심 과시
마을 조직으로는 주민 전체가 참여하는 동계가 있다. 이 동계에서는 주민들의 대소사시 모든 일에 참여해 서로 돕는다. 또한 매년 5월 8일에는 효도관광을 실시해 노인들에 대한 공경심도 과시하고 있다. 민속놀이로는 농악이 있었으나 현대화에 밀려 1990년도 초반 사라지고 말았다. 한편 마을 앞에 지석강이 흐르는 지리적인 여건은 홍수때만 되면 큰 피해를 입었는데 1980년 지석강 제방이 두 차례나 무너져 일부 가옥이 침수피해를 보기도 했다.
근현대 문화유적 많이 남아 있어
마을에는 근현대의 문화유적이 많이 남아있다. 특히 장은주는 마을 동계문건을 모두 관리하고 있어 기층민들의 생활사 자료로서 큰 몫을 차지하고 있다. 또한 마을 입구에는 1941년 남평유림의 추천을 받아 효자 최병호(崔秉鎬)의 효행을 알리기 위한 경주최씨 문종에서 건립한 효자비가 서 있어 후손들에게 귀감이 되고 있다. 여기에 1981년 효열부 장영례(張永禮)의 효열행을 추모하기 위해 경주최씨 문중에서 건립한 효열비가 있다.
덕례 2리(신평마을)
너른 평야와 함께 강이 흐르는 평온한 마을
동쪽으로는 광주광역시 광산구와 경계하고 있어 나주와 광주의 경계를 이루고 있다. 서쪽으로는 도로를 넘어 유촌이 자리하고 있고 남쪽으로는 평야를 넘어 지석강이 흘러간다. 북쪽으로는 덕림마을이 자리하고 있다.
처음에는 모래등이라 불려
마을의 이름이 최초로 보이는 기록은 1912년의 이다. 이 기록에는 두산면 17개 마을 가운데 한 마을인 신평(新坪)으로 나타난다. 1914년 행정구역 개편으로 산포면 덕례리에 속하게 되고 현재에 이른다. 마을은 처음에 '모래등'이라 불렸다고 한다. 마을 안으로 하천 물이 흘렀고 그 옆에는 모래로 된 제방이 있었는데 그 밑에 이룬 마을이라 하여 그렇게 불렀다고 하는데 약 80년 전에 현재의 이름으로 바뀌었다고 마을에서는 말하고 있다. 하지만 1912년의 기록에 마을의 이름이 나오고 있어 1800년대 후반에는 이미 신평이라는 이름으로 불렸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신평이라는 이름은 평평한 곳에 새로 마을이 형성됐다는 뜻으로 보인다. 한폄 마을을 입구에는 '옹등구리'라는 지형이 있는데 모양이 웅덩이 같이 생겨서 붙여진 지명이라고 한다. 성씨의 구성은 김해김씨와 이천서씨, 청주한씨 등이 많은 분포를 보이며 그 외 많은 성씨들이 모여 살고 있다.
이천서씨에 의해 개촌
마을을 최초로 형성했떤 성씨는 이천서씨로 알려지고 있다. 이천서씨 서상원(徐相元)이 나주 봉황면에서 살다가 가세가 기울자 1850년대를 전후해 이곳에 오게 됐다고 한다. 그리고 광산김씨의 딸을 맞아 결혼하게 되었고 정착해 마을을 형성한 곳이 바로 지금의 마을이라는 것이다. 그 후 마을은 번창을 거듭해 지금에 이르게 됐고 넓은 평야와 풍부한 농업용수는 농민들의 이주를 더욱 부채질했던 것으로 보인다. 한편 이 마을은 일제강점기 적휘농민조합사건(赤輝農民組合事件)으로 홍역을 치르기도 했다.
덕례 3리(덕림마을)
산포면의 최북단 마을
신평마을에서 북쪽으로 500여m 정도 가면 너른 평야의 한 가운데에 80여호의 큰 마을이 자리잡고 있다. 이 곳이 덕림마을이다. 마을의 앞뒤와 좌우에 펼쳐진 평야에는 곳곳에 시설하우스들이 자리하고 있다. 동북쪽으로는 나주시의 최북단으로 광주광역시 광산구와 경계한다. 서쪽으로는 저수지 너머 유촌이 자리하고 있고 남쪽으로는 신평마을이 있다.
덕을 베푸는 마을
마을 이름이 최초로 보이는 기록은 1912년의 이다. 이 기록에는 남평군 두산면에 속한 17개 마을 가운데 한 마을인 덕림(德林)리로 나온다. 이후 1914년 행정구역 개편으로 두산면과 등포면이 합쳐져 산포면 덕례리에 속하게 되고 현재에 이른다. 마을의 이름은 왕이 덕(德)을 베풀었다 해서 붙여진 지명이라 전한다. 1912년의 기록에 나오는 것으로 미루어 1800년대 후반에는 이미 마을로서 어느정도 발전되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덕림마을은 특별히 집성촌락이라 부를 수 있는 성씨는 없다. 마을을 이루고 있는 성씨로는 김해김씨가 가장많은 분포를 보이고 있고 다음으로 마을을 개촌한 것으로 알려진 제주양씨와 그 외에 충주박씨 등이다.
마을 형성과 양촌의 광주로 편입
마을을 최초로 이룬 성씨는 제주양씨로 알려지고 있다. 1800년대를 전후해 제주양씨(濟州梁氏) 한신(漢信)이 지금의 광주광역시 광산구인 광산군에서 살다가 분가하면서 광산군과 인접하고 농사짓기에 편한 이곳에 정착하게 되었다고 한다. 한편 1900년대 후반까지 덕림마을과 함께 덕례3구를 형성했던 양촌마을이 광주로 편입된다. '판촌'과 '신양촌', 그리고 '원양촌'을 합해 양촌마을로 불렀던 이 마을은 1900년대 후반 광주광역시 남구로 편입되어 지금은 다른 행정구역으로 불리고 있다. 하지만 개울 하나 사이로 인접한 마을이어서인지 서로의 친분관계는 아직도 잘 유지되고 있는 모습이다.
매년 효도관광 실시하는 효심깊은 마을
지석강 유역의 마을이 대부분 그랬듯이 1989년 홍수는 이 마을에도 큰 피해를 입혔다. 지석강 제방이 무너져 큰 수해를 당한 것이다. 그 후 마을에서는 홍수 피해에 만전을 기하고 있다. 한편 마을에서는 효도관광을 실시하고 있다. 매년 실시하는 이 행사로 주변 마을에서는 효심 깊은 마을로 이름이 나있다
덕례 4리 (유촌마을)
풍부한 농업용수가 있는 농촌마을
동쪽으로는 신평마을과 덕림마을이 자리하고 있고 서북쪽으로는 광주광역시 광산구와 경계하는 도계를 이루고 있다. 남쪽으로는 지석강이 흐르는 임수(臨水)형 마을이다.
버드나무가 많았던 마을
마을의 이름이 최초로 보이는 기록은 1912년의 이다. 이 기록에는 남평군 두산면에 속한 17개 마을가운데 한 마을인 유촌(柳村)리로 나온다. 1914년 행정구역 개편으로 두산면과 등포면이 합쳐져 산포면이 되자 산포면 덕례리에 속하게 되고 현재에 이르게 된 것이다. 마을의 이름은 버드나무 때문에 붙여졌다고 한다. 마을이 형성될 당시 마을 앞에 유난히도 버드나무가 많아 버들 유(柳)자를 써 이름을 유촌(柳村)이라 불렀다 한다. 유촌은 특별히 집성촌락이라 부를 수 있는 성씨는 없다. 마을을 이루고 있는 성씨로는 김해김씨가 가장 많고 다음으로 마을을 개촌한 것으로 알려진 전주이씨와 그 외에 밀양박씨등이 모여 살고 있다.
1800년대 중반 마을을 형성
마을을 최초로 이룬 성씨는 전주이씨로 알려지고 있다. 전주이씨 헌범(憲範)이 약 150년전에 지금의 광주광역시 광산구인 광산군에서 농사짓기에 편한 이곳으로 이주해 터를 잡은 것이 시초라고 한다. 마을에서는 1850년대 마을이 형성됐다고 전해지고 있었고, 이와 관련해 1912년의 의 두산면 17개 마을 가운데 한 마을로 기록돼 있음은 이를 증명해 주고 있다. 이미 1800년대 후반에는 마을이 형성되어 발전되고 있음을 알 수 있게 해준다
- 담당부서 산포면 총무
- 전화 061-339-35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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