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동리
- 날짜
- 2020.04.16
- 조회수
- 882
- 등록자
- 관리자
금동리 (錦洞里)
본래 나주군 이로면의 지역으로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복호리, 황계리, 회룡리, 만복리와 복암면의 금안리와 금안면의 신아리를 병합하여 금성산 동쪽이 되므로 금동리라 하여 노안면에 편입되었다.
금동1구 신암(新岩)마을
마을 지형이 용(龍)의 형상이며 마을 주변에 군데군데 바위가 산재 되어 있어 용암(龍岩)으로 불리우다가 1914년 행정구역 개편 때 용암마을을 신암(新岩)으로 개칭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으며, 청송심씨 심홍원(沈弘源)이 1600년대에 이 마을에 터를 잡아 살면서 마을이 형성되어 현재 청송심씨 집성촌을 형성하고 있다.
금동2구 회룡(回龍)마을
삼도(三道) 도야(道野)산맥으로부터 산이 용(龍)의 형상으로 구불구불 돌아왔다 하여 회룡(回龍)이라 불리고, 자연마을 회룡(回龍), 황계(黃溪), 새터(新村)를 합한 마을로 현재에 이르고 있으며, 나주임씨 임탁(林卓)의 손자 임유업(林有業)이 나주 회진에서 거주하다 경상도 함양으로 이주하였는데 그 4세손이 약 400년 전에 이 마을로 이주하여 정착하였다 하며, 또 1600년을 전후하여 청송심씨가 입향하여 마을을 형성했다고도 전한다.
금동3구 금암(今岩)마을
자연마을인 금암, 빗가리, 쥐업정, 복호촌, 매골을 합하여 금암 이라 불리고, 금동리 3개 마을 중 가장 큰 마을로 1740년경에 탐진최씨 최정관(崔廷寬)이 평야지대로서 교통이 편리하고 농경지와 하천을 끼고 있어 생활하기 편리한 곳이라 하여 정착 마을이 형성되었으며 원래 마을 이름을 보우 또는 복호촌(伏虎村)이라 하였는데 엎드려 있는 호랑이는 바위가 있어야 활기가 있는 법이라 현재마을 서복교 밑에 991㎡ 정도의 커다란 바위가 깔려 있다 하여 금암(今岩)이라 부르게 되었다 한다.
본래 나주군 이로면의 지역으로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복호리, 황계리, 회룡리, 만복리와 복암면의 금안리와 금안면의 신아리를 병합하여 금성산 동쪽이 되므로 금동리라 하여 노안면에 편입되었다.
금동1구 신암(新岩)마을
마을 지형이 용(龍)의 형상이며 마을 주변에 군데군데 바위가 산재 되어 있어 용암(龍岩)으로 불리우다가 1914년 행정구역 개편 때 용암마을을 신암(新岩)으로 개칭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으며, 청송심씨 심홍원(沈弘源)이 1600년대에 이 마을에 터를 잡아 살면서 마을이 형성되어 현재 청송심씨 집성촌을 형성하고 있다.
금동2구 회룡(回龍)마을
삼도(三道) 도야(道野)산맥으로부터 산이 용(龍)의 형상으로 구불구불 돌아왔다 하여 회룡(回龍)이라 불리고, 자연마을 회룡(回龍), 황계(黃溪), 새터(新村)를 합한 마을로 현재에 이르고 있으며, 나주임씨 임탁(林卓)의 손자 임유업(林有業)이 나주 회진에서 거주하다 경상도 함양으로 이주하였는데 그 4세손이 약 400년 전에 이 마을로 이주하여 정착하였다 하며, 또 1600년을 전후하여 청송심씨가 입향하여 마을을 형성했다고도 전한다.
금동3구 금암(今岩)마을
자연마을인 금암, 빗가리, 쥐업정, 복호촌, 매골을 합하여 금암 이라 불리고, 금동리 3개 마을 중 가장 큰 마을로 1740년경에 탐진최씨 최정관(崔廷寬)이 평야지대로서 교통이 편리하고 농경지와 하천을 끼고 있어 생활하기 편리한 곳이라 하여 정착 마을이 형성되었으며 원래 마을 이름을 보우 또는 복호촌(伏虎村)이라 하였는데 엎드려 있는 호랑이는 바위가 있어야 활기가 있는 법이라 현재마을 서복교 밑에 991㎡ 정도의 커다란 바위가 깔려 있다 하여 금암(今岩)이라 부르게 되었다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