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산리
- 등록일 2020.04.16 17:30
- 조회수 1273
- 등록자 관리자
학산리 (鶴山里)
나주군 복암면 지역으로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용산리, 봉호리, 계림리, 용당 일부와 서부면의 동산리 일부, 또 광주군 마곡면의 용동리 일부를 병합하여 학림과 용산의 이름을 따서 학산리라 하였고, 노안면에 편입되었다.
학산1구 용산(龍山) 마을
고려태조 왕건이 후백제로부터 나주를 점거하기 위하여 이곳 태매산(또는 왕자봉, 치마봉)에 3일간 진을 치고 전쟁을 치뤄 나주를 점령하였다. 이 과정에서 왕건의 군사 중 2명의 잔여병 (김해김씨, 인동장씨)이 마을에 거주하기 시작하고 군사가 머물 다간 왕조대가 있다하여 용산이라 부른다고 한다, 또한 풍수지리상에 의해 이곳에 황룡부주(黃龍負舟)라는 명당이 있다하여 이름에'용(龍)'자를 넣어 용동(龍洞) 또는 용산(龍山)이라 하였다고 한다.
학산2구 봉호(鳳湖) 마을
당초 1600년대에 장흥고씨, 금성나씨가 거주하기 시작하여 마을을 형성 그 후 1780년경 김해김씨, 1850년대 함평문씨등이 함께 거주하여 하였으며, 마을앞에 영산강이 흐르고 예부터 선착장이 있었는데 나루터 앞에 물이 잘나오는 샘이 있다고 하여 천동(泉洞)이라 불렀으나 지금은 다리가 가설되고 선착장은 없어졌다. 마을 앞으로 흐르는 강에 용같이 생긴 바위가 있어 '용바위골' 이라 불렸다고도 하며, 1914년 행정구역 개편에 의해 봉호(鳳湖)라 개칭되었다. 마을에 전하는 주요 지명 이름은
황룡부주 : 마을 형국을 황룡부주라 하여 깊은 샘을 파지 못 했다고 한다
서원앞들 : 마을에 천동서원이 있다하여 마을앞 들녘을 이름 하여 부른다
태 미 산 : 마을뒷산으로 토성태가 있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인데 과거 가뭄이 심하게 들면 태미산에서 기우제를 지냈다고 한다.
학산3구 학림(鶴林) 마을
1800년대 초기 창원황씨 황기영(黃基永)이 창원에서 이곳으로 이주 마을이 형성되었으며, 마을사람들에 따르면 마을 위에 울창한 송림이 있는데, 그 송림에 학이 많이 서식하고 있어 학림이라 부른다고 한다. 한편에서는 풍수 지리상 지형이 소나무에 학이 앉아 있는 형상이라하여 학림(鶴林)이라 부른다고도 한다. 또 마을에는 예전부터 복바위라는 바위가 있었으나 지금은 그 유래를 알 수 없고 그 형태마져 개울속에 잠겨 흔적을 찾을 수가 없게 되었다고 한다.
학산4구 동산(東山) 마을
바다의 복어가 이곳에와서 점을받아 내려가야 참복이 된다하여 복암리라 하였고, 마을뒤에 오래된 바위가 있다하여 비석등이라 불렸는데 1914년 행정구역 개편때 마을 뒤 동쪽에 산이있다하여 마을이름을 동산(東山)이라 개칭하였다. 마을에 전하는 주요지명은
고즉위 : 동산 동쪽에 있던 마을
광탄(廣灘) : 마을 남쪽 영산강 상류에 있는 여울을 지칭
동산들 : 마을남쪽에 있는 들
똥섬 : 마을남쪽에 있는 들로 강과 내로 둘러싸여 섬이 되었다.
용소 : 동산 마을 뒤쪽에 있는 소로 위에 용 바위가 있다.
신촌들 : 동산마을 앞으로 흐르는 내
학산5구 신동산(新東山) 마을
정확한 입향 유래는 알 수 없으나 많은 사람이 와서 살곳이라 하여 만호동이라 하였고 한국전쟁 후 5일장인 노안장이 노안역 앞에 서게 되면서 많은 사람이 들어와 살기 시작하였다 한다. 그 후 마을에 노안역이 있다고 하여 역전마을이라고 하였다.
학산6구 만호(萬濠) 마을
560년 전(1443년) 일본 통신사 서장관으로 갔던 본면 오룡동 (현 기말리)에서 출생했던 보한제 신숙주가 그해 10월 19일 귀국 하면서 본가에 들러 조상에 집배한 후 귀경하던 중 본 마을을 가리키며 편안한 땅 만호터가 되리라는 풍수지리를 봤다는 구전이 내려와 현 마을이 조성되었으며, 나주목사가 자식을 분가 하고자 집터를 정하지 못하던 차에 선몽에 동북쪽으로 활을 쏘아 꽃힌 곳에 성주 하라는 꿈을 꿔 화살을 쏘았으나 화살을 찾지 못해 다른 곳에 성주 하였는데 그 후 화살이 꽃힌 곳이 발견 된곳이 본 마을이었기에 목사는 만호터가 축성되리라고 화담을 한 곳이라고 구전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
나주군 복암면 지역으로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용산리, 봉호리, 계림리, 용당 일부와 서부면의 동산리 일부, 또 광주군 마곡면의 용동리 일부를 병합하여 학림과 용산의 이름을 따서 학산리라 하였고, 노안면에 편입되었다.
학산1구 용산(龍山) 마을
고려태조 왕건이 후백제로부터 나주를 점거하기 위하여 이곳 태매산(또는 왕자봉, 치마봉)에 3일간 진을 치고 전쟁을 치뤄 나주를 점령하였다. 이 과정에서 왕건의 군사 중 2명의 잔여병 (김해김씨, 인동장씨)이 마을에 거주하기 시작하고 군사가 머물 다간 왕조대가 있다하여 용산이라 부른다고 한다, 또한 풍수지리상에 의해 이곳에 황룡부주(黃龍負舟)라는 명당이 있다하여 이름에'용(龍)'자를 넣어 용동(龍洞) 또는 용산(龍山)이라 하였다고 한다.
학산2구 봉호(鳳湖) 마을
당초 1600년대에 장흥고씨, 금성나씨가 거주하기 시작하여 마을을 형성 그 후 1780년경 김해김씨, 1850년대 함평문씨등이 함께 거주하여 하였으며, 마을앞에 영산강이 흐르고 예부터 선착장이 있었는데 나루터 앞에 물이 잘나오는 샘이 있다고 하여 천동(泉洞)이라 불렀으나 지금은 다리가 가설되고 선착장은 없어졌다. 마을 앞으로 흐르는 강에 용같이 생긴 바위가 있어 '용바위골' 이라 불렸다고도 하며, 1914년 행정구역 개편에 의해 봉호(鳳湖)라 개칭되었다. 마을에 전하는 주요 지명 이름은
황룡부주 : 마을 형국을 황룡부주라 하여 깊은 샘을 파지 못 했다고 한다
서원앞들 : 마을에 천동서원이 있다하여 마을앞 들녘을 이름 하여 부른다
태 미 산 : 마을뒷산으로 토성태가 있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인데 과거 가뭄이 심하게 들면 태미산에서 기우제를 지냈다고 한다.
학산3구 학림(鶴林) 마을
1800년대 초기 창원황씨 황기영(黃基永)이 창원에서 이곳으로 이주 마을이 형성되었으며, 마을사람들에 따르면 마을 위에 울창한 송림이 있는데, 그 송림에 학이 많이 서식하고 있어 학림이라 부른다고 한다. 한편에서는 풍수 지리상 지형이 소나무에 학이 앉아 있는 형상이라하여 학림(鶴林)이라 부른다고도 한다. 또 마을에는 예전부터 복바위라는 바위가 있었으나 지금은 그 유래를 알 수 없고 그 형태마져 개울속에 잠겨 흔적을 찾을 수가 없게 되었다고 한다.
학산4구 동산(東山) 마을
바다의 복어가 이곳에와서 점을받아 내려가야 참복이 된다하여 복암리라 하였고, 마을뒤에 오래된 바위가 있다하여 비석등이라 불렸는데 1914년 행정구역 개편때 마을 뒤 동쪽에 산이있다하여 마을이름을 동산(東山)이라 개칭하였다. 마을에 전하는 주요지명은
고즉위 : 동산 동쪽에 있던 마을
광탄(廣灘) : 마을 남쪽 영산강 상류에 있는 여울을 지칭
동산들 : 마을남쪽에 있는 들
똥섬 : 마을남쪽에 있는 들로 강과 내로 둘러싸여 섬이 되었다.
용소 : 동산 마을 뒤쪽에 있는 소로 위에 용 바위가 있다.
신촌들 : 동산마을 앞으로 흐르는 내
학산5구 신동산(新東山) 마을
정확한 입향 유래는 알 수 없으나 많은 사람이 와서 살곳이라 하여 만호동이라 하였고 한국전쟁 후 5일장인 노안장이 노안역 앞에 서게 되면서 많은 사람이 들어와 살기 시작하였다 한다. 그 후 마을에 노안역이 있다고 하여 역전마을이라고 하였다.
학산6구 만호(萬濠) 마을
560년 전(1443년) 일본 통신사 서장관으로 갔던 본면 오룡동 (현 기말리)에서 출생했던 보한제 신숙주가 그해 10월 19일 귀국 하면서 본가에 들러 조상에 집배한 후 귀경하던 중 본 마을을 가리키며 편안한 땅 만호터가 되리라는 풍수지리를 봤다는 구전이 내려와 현 마을이 조성되었으며, 나주목사가 자식을 분가 하고자 집터를 정하지 못하던 차에 선몽에 동북쪽으로 활을 쏘아 꽃힌 곳에 성주 하라는 꿈을 꿔 화살을 쏘았으나 화살을 찾지 못해 다른 곳에 성주 하였는데 그 후 화살이 꽃힌 곳이 발견 된곳이 본 마을이었기에 목사는 만호터가 축성되리라고 화담을 한 곳이라고 구전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
- 담당부서 노안면 총무
- 전화 061-339-37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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