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곡리
- 날짜
- 2020.04.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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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8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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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관리자
유곡리 (柳谷里)
본래 나주군 복암면의 지역으로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영평리, 가곡리, 석곡리, 유림리, 토등리, 성동과 이로면의 언구리 금치리, 하치리, 경산리를 병합하여 유림과 가곡의 이름을 따서 유곡리하 하였고 노안면에 편입되었다.
유곡1구 감정(甘丁),가곡(佳谷) 마을
가곡마을은 창년조씨 송호(송호) 조석신(조석신)이 유곡리 계리에 살다가 농경지를 따라 1814년에 정착하여 살면서 마을이 형성 되었고, 감정마을은 밀양박씨 박두일(박두일)이 광주 광산 동곡 상경에서 살다가 성씨에 대한 구박을 받아 산 너머 마을인 감정으로 1850년경에 이주 마을이 형성되었다. 감정마을은 조선조 말 암반수가 나오는 셈이 있어 터를 잡고 마을을 형성하였는데 마을 앞에 있는 암반수에서 나오는 우물이 좋다 하여 감정(甘井)이라 하였으며 1914년 행정구역 개편 때 쓰기 쉽다하여 우물'정(井)'자를 고쳐 감정(甘丁)이라 부르게 되었다고 하며, 가곡마을은 조선조 말 아름다운 터가 있어 터를 잡고 아름다운 고장이라 하여 설립당시에 가작동(佳作洞)이라 불러오다가 행정 구역 개편 때 가곡(佳谷)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유곡2구 하치(下치) 마을
1456년 전서(典書) 조수담(曺秀膽)의 아들 가선대부(嘉善大夫) 동지 중추부사(中樞府事) 조백수(曺百粹)가 세조의 왕위 찬탈에 세상을 크게 한탄하고 벼슬을 버리고 남쪽 나주고을 가일리(可 逸里)로 내려와 터를 잡아 정착하면서 마을이 형성되었고 마을 사람들에 따르면 지형이 편히 살만한 곳이라 하여 가일리(可逸 里)라 하였는데 부르기 쉽다고 하여 가리(佳里)라 부르게 되었 다고도 한다, 또 풍수 지리학 상으로 마을 형국이 꿩이 누워있 는 복치형(伏雉形)이라 하여 상치(上雉), 중치(中雉), 하치(下雉) 라 하였던 것을 1914년 행정구역 개편 시 가장 큰 마을인 하치의 이름을 따서 하치라 통합하여 부르게 되었다. 마을에 전하는 주요지명은
금치 : 하치에서 광주시 광산구 평동 동산리로 가는 고개 이름
바랑산(베락산) : 하치 북쪽에 있는 산으로 바람이 무척 세다.
유곡3구 현애원(玄愛園)마을
한국전쟁으로 인한 의지할 곳 없던 음성나환자의 정착지로서 천주교 광주대교구 하롤드 헨리 대주교가 이곳에 부지 약 15만 평을 확보 집을 짓고 환자들을 돌보았는데 1954년 전남도당국 이 수용소로 인가하고 1956년 7월 보건사회부에서 인가 확장 공사추진, 1958년 1월 국고보조영달, 1962년 정착지로 선정 현재 에 이르고 있다. 주 소득은 가축(돼지)을 사육 생계를 유지하고 있다.
유곡4구 영평(永平),유림(柳林) 마을
광산김씨 김기창(金基昌)이 광산군 평동면 옥동에서 살았는데 그 후손 김규상(金珪尙)이 분가하여 이 마을로 와 정착하였다. 가일리에서 창녕조씨 조석익(曺錫益)이 버드나무가 울창하고 산수가 수려한 지형을 보니 앵소(鶯巢)와 같아 안전하게 살 곳 이라 생각하여 터를 잡게 되었다. 마을사람들에 따르면 영평(永平)마을은 오래도록 편안히 살 수 있는 곳이라 하여 영평이라 불러왔다. 또 유림(柳林)마을은 지형이 나무 끈에 매달려 있는 꽤꼬리집 같이 아담한 곳에 버드나무 숲이 울창하게 둘러싸여 있어 버드실로 불리다가 일제때 부터 유림(柳林)으로 불렀다고 한다. 마을에 커다란 버드나무가 있어 계림이라 불렀다고도 한다.
본래 나주군 복암면의 지역으로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영평리, 가곡리, 석곡리, 유림리, 토등리, 성동과 이로면의 언구리 금치리, 하치리, 경산리를 병합하여 유림과 가곡의 이름을 따서 유곡리하 하였고 노안면에 편입되었다.
유곡1구 감정(甘丁),가곡(佳谷) 마을
가곡마을은 창년조씨 송호(송호) 조석신(조석신)이 유곡리 계리에 살다가 농경지를 따라 1814년에 정착하여 살면서 마을이 형성 되었고, 감정마을은 밀양박씨 박두일(박두일)이 광주 광산 동곡 상경에서 살다가 성씨에 대한 구박을 받아 산 너머 마을인 감정으로 1850년경에 이주 마을이 형성되었다. 감정마을은 조선조 말 암반수가 나오는 셈이 있어 터를 잡고 마을을 형성하였는데 마을 앞에 있는 암반수에서 나오는 우물이 좋다 하여 감정(甘井)이라 하였으며 1914년 행정구역 개편 때 쓰기 쉽다하여 우물'정(井)'자를 고쳐 감정(甘丁)이라 부르게 되었다고 하며, 가곡마을은 조선조 말 아름다운 터가 있어 터를 잡고 아름다운 고장이라 하여 설립당시에 가작동(佳作洞)이라 불러오다가 행정 구역 개편 때 가곡(佳谷)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유곡2구 하치(下치) 마을
1456년 전서(典書) 조수담(曺秀膽)의 아들 가선대부(嘉善大夫) 동지 중추부사(中樞府事) 조백수(曺百粹)가 세조의 왕위 찬탈에 세상을 크게 한탄하고 벼슬을 버리고 남쪽 나주고을 가일리(可 逸里)로 내려와 터를 잡아 정착하면서 마을이 형성되었고 마을 사람들에 따르면 지형이 편히 살만한 곳이라 하여 가일리(可逸 里)라 하였는데 부르기 쉽다고 하여 가리(佳里)라 부르게 되었 다고도 한다, 또 풍수 지리학 상으로 마을 형국이 꿩이 누워있 는 복치형(伏雉形)이라 하여 상치(上雉), 중치(中雉), 하치(下雉) 라 하였던 것을 1914년 행정구역 개편 시 가장 큰 마을인 하치의 이름을 따서 하치라 통합하여 부르게 되었다. 마을에 전하는 주요지명은
금치 : 하치에서 광주시 광산구 평동 동산리로 가는 고개 이름
바랑산(베락산) : 하치 북쪽에 있는 산으로 바람이 무척 세다.
유곡3구 현애원(玄愛園)마을
한국전쟁으로 인한 의지할 곳 없던 음성나환자의 정착지로서 천주교 광주대교구 하롤드 헨리 대주교가 이곳에 부지 약 15만 평을 확보 집을 짓고 환자들을 돌보았는데 1954년 전남도당국 이 수용소로 인가하고 1956년 7월 보건사회부에서 인가 확장 공사추진, 1958년 1월 국고보조영달, 1962년 정착지로 선정 현재 에 이르고 있다. 주 소득은 가축(돼지)을 사육 생계를 유지하고 있다.
유곡4구 영평(永平),유림(柳林) 마을
광산김씨 김기창(金基昌)이 광산군 평동면 옥동에서 살았는데 그 후손 김규상(金珪尙)이 분가하여 이 마을로 와 정착하였다. 가일리에서 창녕조씨 조석익(曺錫益)이 버드나무가 울창하고 산수가 수려한 지형을 보니 앵소(鶯巢)와 같아 안전하게 살 곳 이라 생각하여 터를 잡게 되었다. 마을사람들에 따르면 영평(永平)마을은 오래도록 편안히 살 수 있는 곳이라 하여 영평이라 불러왔다. 또 유림(柳林)마을은 지형이 나무 끈에 매달려 있는 꽤꼬리집 같이 아담한 곳에 버드나무 숲이 울창하게 둘러싸여 있어 버드실로 불리다가 일제때 부터 유림(柳林)으로 불렀다고 한다. 마을에 커다란 버드나무가 있어 계림이라 불렀다고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