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산리
- 날짜
- 2020.04.16
- 조회수
- 919
- 등록자
- 관리자
용산리 (龍山里)
본래 나주군 금안면의 지역으로 1914년 행정구역폐합에 따라 사룡리, 남산리, 오정리와 이로면의 금곡리를 병합하여 남산의 이름을 따서 용산리라 하여 노안면에 편입되었다.
용산1구 기룡(起龍) 마을
선산김씨 김규수(金圭洙)가 나주에서 살다가 형제들이 각각 흩어져서 3백여 년 전 이곳에 이주하여 정착 후 다른 성씨들이 이주해와 오늘에 이르고 있으며. 마을 사람들에 따르면 담 너머의 지형이 개의 머리처럼 생겼다하여 마을 입구를 개머리라 불렀 으며, 금성산의 줄기에서 뻗어 내려온 마을 뒷산이 기봉(起捧) 하여 용이 일어나느 형국이라는 유래에서 기룡(起龍)이라 하였 다고 하는데 1914년 행정구역개편 때 기룡(己龍)으로 바뀌었다고 한다
용산2구 남산(南山) 마을
주로 의성김씨가 살고 있었는데, 현재는 여러 성씨들이 모여 산다. 이 마을은 연산군 때 경순왕 33세손인 의성김씨가 여수에서 연산군의 안을 피하여 이곳에 와 정착하면서 의성김씨와 서흥 김씨가 10여 가구로 이루어져서 오늘에 이른 것이다.
용산3구 월송(월송) 마을
210년 전에 설재(雪齋) 정가신(鄭可臣)의 후손 정석(鄭錫)이 금안리에서 살다가 이 마을에 들어와 살면서 마을을 이루었고 그 후 다른 성씨들이 이주 현재에 이르고 있다. 마을 사람들에 따르면 금안동 열 두 동네에 들어오는 첫 머리라 하여 들머리, 등 머리라 하였다고 한다, 또한 금성산에서 뻗어 내려 들머리 달 같은 형국이라 하였는데, 1914년 행정구역 개편 때 마을 지형이 달 모양이라 하여 월송(月松)이라 하였다. 안 송정과 바깥 송정으로 나누어 불렀는데 현재는 월송으로 함께 부르고 있다.
용산4구 금곡(琴谷) 마을
1650년경 나주정씨와 1700년경 서흥김씨가 정착하였는데 1920년 부터 여러 성씨가 이주하여 현재는 15개 성씨가 마을을 이루고 있다. 마을 형성당시 마을 명을 금곡(金谷)이라 하였으며 일제 시에는 금곡(今谷). 해방후 금곡(琴谷)이라 하였다. 풍수 지리설에 의하면 마을 지형이 매화락지(梅花落地)형에 옥녀탄금(玉女彈琴)형 이라 하여 명당이라 하는데 마을 이름도 가야금 '금(琴)'자를 머리글자로 하여 금곡(琴谷)이라 칭하였다고 한다.
본래 나주군 금안면의 지역으로 1914년 행정구역폐합에 따라 사룡리, 남산리, 오정리와 이로면의 금곡리를 병합하여 남산의 이름을 따서 용산리라 하여 노안면에 편입되었다.
용산1구 기룡(起龍) 마을
선산김씨 김규수(金圭洙)가 나주에서 살다가 형제들이 각각 흩어져서 3백여 년 전 이곳에 이주하여 정착 후 다른 성씨들이 이주해와 오늘에 이르고 있으며. 마을 사람들에 따르면 담 너머의 지형이 개의 머리처럼 생겼다하여 마을 입구를 개머리라 불렀 으며, 금성산의 줄기에서 뻗어 내려온 마을 뒷산이 기봉(起捧) 하여 용이 일어나느 형국이라는 유래에서 기룡(起龍)이라 하였 다고 하는데 1914년 행정구역개편 때 기룡(己龍)으로 바뀌었다고 한다
용산2구 남산(南山) 마을
주로 의성김씨가 살고 있었는데, 현재는 여러 성씨들이 모여 산다. 이 마을은 연산군 때 경순왕 33세손인 의성김씨가 여수에서 연산군의 안을 피하여 이곳에 와 정착하면서 의성김씨와 서흥 김씨가 10여 가구로 이루어져서 오늘에 이른 것이다.
용산3구 월송(월송) 마을
210년 전에 설재(雪齋) 정가신(鄭可臣)의 후손 정석(鄭錫)이 금안리에서 살다가 이 마을에 들어와 살면서 마을을 이루었고 그 후 다른 성씨들이 이주 현재에 이르고 있다. 마을 사람들에 따르면 금안동 열 두 동네에 들어오는 첫 머리라 하여 들머리, 등 머리라 하였다고 한다, 또한 금성산에서 뻗어 내려 들머리 달 같은 형국이라 하였는데, 1914년 행정구역 개편 때 마을 지형이 달 모양이라 하여 월송(月松)이라 하였다. 안 송정과 바깥 송정으로 나누어 불렀는데 현재는 월송으로 함께 부르고 있다.
용산4구 금곡(琴谷) 마을
1650년경 나주정씨와 1700년경 서흥김씨가 정착하였는데 1920년 부터 여러 성씨가 이주하여 현재는 15개 성씨가 마을을 이루고 있다. 마을 형성당시 마을 명을 금곡(金谷)이라 하였으며 일제 시에는 금곡(今谷). 해방후 금곡(琴谷)이라 하였다. 풍수 지리설에 의하면 마을 지형이 매화락지(梅花落地)형에 옥녀탄금(玉女彈琴)형 이라 하여 명당이라 하는데 마을 이름도 가야금 '금(琴)'자를 머리글자로 하여 금곡(琴谷)이라 칭하였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