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평리
- 날짜
- 2020.04.16
- 조회수
- 744
- 등록자
- 관리자
영평리 (永平里)
본래 나주군 금안면의 지역으로 1914년 행정구역폐합에 따라 연안촌, 대평리, 신곡리, 복룡리, 옥동과 이로면의 용암리 일부와 서부면의 마제촌 일부를 병합하여, 영안과 태평의 이름을 따서 영평리라 하여 노안면에 편입되었다. 마을에는 백원헌(百元軒) 건립유래인 효자 김오 이야기가 전해오고 있다. 노안면 영평리 청산마을에 사는 서흥김씨 오라는 사람의 효행으로 그 사실이 조정에 알려지자 고종은 백원헌(百元軒)이라는 현판을 써서 하사 하였다. 그 뜻을 기리고자 1922년 효자각을 세워 오늘에 전한다. 고종의 친필 현판은 도난 당하여 전하지 안고 있으며 또한 설재서원이 있어 정가신(鄭可臣), 정식(鄭軾), 정 심 등과 함께 신숙주(申叔舟)의 아버지 신장(申檣)을 모신다.
영평1구 복룡(伏龍) 마을
1600년께 함평이씨의 16세손 이광서(李光瑞)가 정착하였는데, 그 후 진주강씨의 30세손 강재양(姜在陽)과 하남정씨의 정귀모 (程貴模)가 광주에서 이곳으로 이주 현재의 마을이 형성되었다. 복룡(伏龍), 태평(太平), 옥동(玉洞), 새터(新基)를 합하여 복룡 (伏龍)이라 하고, 마을사람들에 따르면 예로부터 마을에 부자가 많아서 복이 많은 마을이라 불렀다고 하는데 이는 마을에 용이 엎드려 있는 형국 때문이라 하였다. 이로 인해 지금도 마을 이름을 복룡이라 부른다고 한다. 마을에 전하는 주요지명은
용머리 : 용의 머리를 닮은 바위
노가싯등 : 나주시 마제 촌과의 사이에 있는 등성이로 노가시 (노간주)나무가 많다.
영평2구 영안(영안) 마을
1300년대 중기 나주정씨가 정착한 이후 1750년 전후로 전주이씨와 진주정씨, 해주최씨, 경주김씨, 서흥김씨, 김해김씨 등이 정착하여 현재의 마을을 이루고 있으며, 대대로 안전하게 오래 살만한 곳이라 하여 영안 촌이라 하엿다가 1914년 행정구역 개편 때 영안 (永安)이라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마을사람들은 영평리 에서 으뜸 되는 마을이 바로 영안 이라고 자랑한다.
영평3구 용암(龍岩) 마을
1700년대 후반에 함평이씨 16세손 이광서(李光瑞)가 복룡촌에 정착하였는데, 그 후 21세손인 이유성(李儒成)과 이유현(李儒玄) 형제가 농경지를 따라 현재의 용암마을인 목자동에 정착 마을이 형성되었다고 한다. 마을사람들에 따르면 이 마을은 함평이씨가 터를 잡고 대대로 살았다고 한다. 그런 연유로 이씨 마을이라 하여 주위에서는 목자동(木子洞)이라 불렀다고 한다. 그 후 1914년 행정구역 개편으로 마을 주변에 용과 같이 생긴 바위가 있다고 하여 용암(龍岩)마을이라고 불렀다고 한다. 다른 이야기로 행정구역 개편당시 마을 이장의 호가 용암이었는데 이 호를 따서 용암이라 불렀다고도 한다. 마을에 전하는 주요 지명은
구치실 : 용암 앞에 있는 골짜기로 구정리 구축의 뒤가 된다.
복호동 : 호랑이가 엎드려 있는 형국이라고 한다.
용바우 : 용암 뒤쪽에 있는 바위 이름이다.
본래 나주군 금안면의 지역으로 1914년 행정구역폐합에 따라 연안촌, 대평리, 신곡리, 복룡리, 옥동과 이로면의 용암리 일부와 서부면의 마제촌 일부를 병합하여, 영안과 태평의 이름을 따서 영평리라 하여 노안면에 편입되었다. 마을에는 백원헌(百元軒) 건립유래인 효자 김오 이야기가 전해오고 있다. 노안면 영평리 청산마을에 사는 서흥김씨 오라는 사람의 효행으로 그 사실이 조정에 알려지자 고종은 백원헌(百元軒)이라는 현판을 써서 하사 하였다. 그 뜻을 기리고자 1922년 효자각을 세워 오늘에 전한다. 고종의 친필 현판은 도난 당하여 전하지 안고 있으며 또한 설재서원이 있어 정가신(鄭可臣), 정식(鄭軾), 정 심 등과 함께 신숙주(申叔舟)의 아버지 신장(申檣)을 모신다.
영평1구 복룡(伏龍) 마을
1600년께 함평이씨의 16세손 이광서(李光瑞)가 정착하였는데, 그 후 진주강씨의 30세손 강재양(姜在陽)과 하남정씨의 정귀모 (程貴模)가 광주에서 이곳으로 이주 현재의 마을이 형성되었다. 복룡(伏龍), 태평(太平), 옥동(玉洞), 새터(新基)를 합하여 복룡 (伏龍)이라 하고, 마을사람들에 따르면 예로부터 마을에 부자가 많아서 복이 많은 마을이라 불렀다고 하는데 이는 마을에 용이 엎드려 있는 형국 때문이라 하였다. 이로 인해 지금도 마을 이름을 복룡이라 부른다고 한다. 마을에 전하는 주요지명은
용머리 : 용의 머리를 닮은 바위
노가싯등 : 나주시 마제 촌과의 사이에 있는 등성이로 노가시 (노간주)나무가 많다.
영평2구 영안(영안) 마을
1300년대 중기 나주정씨가 정착한 이후 1750년 전후로 전주이씨와 진주정씨, 해주최씨, 경주김씨, 서흥김씨, 김해김씨 등이 정착하여 현재의 마을을 이루고 있으며, 대대로 안전하게 오래 살만한 곳이라 하여 영안 촌이라 하엿다가 1914년 행정구역 개편 때 영안 (永安)이라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마을사람들은 영평리 에서 으뜸 되는 마을이 바로 영안 이라고 자랑한다.
영평3구 용암(龍岩) 마을
1700년대 후반에 함평이씨 16세손 이광서(李光瑞)가 복룡촌에 정착하였는데, 그 후 21세손인 이유성(李儒成)과 이유현(李儒玄) 형제가 농경지를 따라 현재의 용암마을인 목자동에 정착 마을이 형성되었다고 한다. 마을사람들에 따르면 이 마을은 함평이씨가 터를 잡고 대대로 살았다고 한다. 그런 연유로 이씨 마을이라 하여 주위에서는 목자동(木子洞)이라 불렀다고 한다. 그 후 1914년 행정구역 개편으로 마을 주변에 용과 같이 생긴 바위가 있다고 하여 용암(龍岩)마을이라고 불렀다고 한다. 다른 이야기로 행정구역 개편당시 마을 이장의 호가 용암이었는데 이 호를 따서 용암이라 불렀다고도 한다. 마을에 전하는 주요 지명은
구치실 : 용암 앞에 있는 골짜기로 구정리 구축의 뒤가 된다.
복호동 : 호랑이가 엎드려 있는 형국이라고 한다.
용바우 : 용암 뒤쪽에 있는 바위 이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