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안리
- 날짜
- 2020.04.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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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안리 (金安里)
금안리는 금안동이라 불리었으나 중국에서 한림학사를 지낸 정가신이 금안정에 백마를 타고 금의환향을 한데서 동명의 유래가 생겼으며, 각 성씨가 많이 들어와 인천, 천변, 반송, 광곡, 수각, 원당, 송대, 영안, 구축, 월송, 송정, 금곡 등 12 동내를 형성 하였다. 나주는 예로부터 위대한 인물 문장가가 학자를 많이 배출 한 고장이다. 이러한 나주에서도 첫손에 꼽히는 곳이 노안면 금안동 이다. 금안동은 정읍의 태인, 영암의 구림과 함께 호남의 3대 명촌 으로 꼽힌다. 12개의 자연마을에는 서원, 정자, 재실이 20여개가 있고 효자비 등 비석이 100여개, 고인돌이 56기가 널려 있다. 고려 때의 첨의중찬 정가신과 조선시대의 대 학자인 신숙주도 이곳 태생이다. 이 고장 사람들은 '일 금안 이 회진'이라 하면서 자부 심이 대단하다.
금안동은 비단 정가신이나 신숙주를 배출해서 명촌이 아니라 4백 여년간 마을 사람들이 화목하고 마음을 합쳐서 동내를 가꾸자는 취지의 대동계를 이어 내려온 점에서 더욱 명촌으로 꼽힐만하다. 그 대동계는 임란 직후 황폐해진 마을을 다시 일으켜 세우자는 뜻에서 이어져 내려오던 계를 발전시키면서부터라고 한다. 이러한 대동계는 오늘날 지방자치의 근원이라 할 수 있다. 주요 문화제는 전라남도유형문화재 제 34호인 상계정(雙溪亭)과 설재 정가신을 배양하기 위해 1688년(숙종14)에 세운 설재서원, 사암(思庵) 박순(朴淳)을 흠모하여 1659년(효종10년)에 세운 월정서원이 있다.
금안1구 광곡(光谷), 수각(水各) 마을
마을형성 유래는 1400년대 전후로 나주나씨와 지씨가 마을에 정착한 이후, 문평면 죽곡에서 거주하던 하동정씨 정지(鄭地) 장군의 증손인 정서(鄭鋤)가 1500년대 전후로 금성산 아래 금안리에 정착하여 집성촌을 형성하였다고 한다. 원래는 숲이 우거져 새들의 낙원이라 일컬어 금안동(禽安洞)이라 하기도 하고, 나주정씨 정가신이 금혁(金革), 백마(白馬), 옥대 (玉帶)를 하사 받아 터를 잡은 곳이라 하여 금안동(金鞍洞)이라 고도 한다. 제일 위쪽 넓은 골에 터를 잡아 넓은 골짜기란 뜻으로 광곡(廣谷)이라 했던 것이 행정구역 개편으로 송대(松大)와 백사정(白沙亭)을 합하여 광곡(光谷)으로 바뀌었다 한다. 수각마을은 쌍계정의 양쪽으로 개울이 흐르고 있어 마을 이름을 수곡(水谷)이라 부르다가 수각이라 하였는데 행정구역 통폐합 때 수각(水各)으로 바뀌었다.
금안2구 원당(元當),반송(半松) 마을
1300년 전후로 나주정씨가, 1400년 전후로 풍산홍씨가 정착 마을을 형성하였으며, 마을사람들은 원당 이라는 마을 이름에 대해 금안동 일대 자연마을에서 으뜸가는 마을이라 하여 원당 이라 하는데, 원님 경원공의 별당이 있었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 이라고도 한다. 또 반송이라는 마을이름에 대해서는 마을 주변에 소나무, 특히 노송이 많고 반석(盤石)과 같은 형상이 되어 있어 반송(盤松)이라 칭하였는데, 914년 행정구역 개편 때 반송(半松) 이라 불렸다. 특히 마을에는 풍수지리와 연관되어 마을을 배 형국 이라 하여 우물을 파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다. 마을에 전하는 주요 지명은
바우배기 : 큰 바위가 있다해서 부르는 이름
사장등 : 원당과 인천사이에 있는 등성이
쌍시암거리 : 샘이 두 개 나란히 있는 들 이름
숲정이 : 금안리 동내 안에 흐르고 있는 냇물이 너무 급하게 동쪽으로 흘러내리니 이 물을 가두고 막기 위해 동내 동쪽으로 팽이나무와 느티나무를 심어 '숲정이'라고 했으나 지금은 나무들이 늙어 모두 없어지고 두 구루만 남아 있다.
금안3구 인천(仁川) 마을
처음에 나주정씨 정가신이 터를 잡고, 그 후 서성씨, 고령신씨, 여산송씨, 풍산홍씨, 하동정씨, 서흥김씨의 순으로 집성을 이루고 살았다. 마을사람들에 의하면 마을 앞 숲을 울타리 삼아 있는 마을이라고 해서 처음에는 이내촌( 內村)이라 하였다가 행정구역 개편 때 인천(仁川)으로 바꿔 부르게 되었다. 마을에는 금석문으로 효자성와김공실적비(孝子省窩金公失跡碑)와 반환홍선생유허비(盤桓洪先生遺墟碑), 문정공설재선생유허비 (文靖公雪齋先生遺墟碑), 효자송산홍공기행비(孝子松山洪公紀行碑)가 있다.
금안리는 금안동이라 불리었으나 중국에서 한림학사를 지낸 정가신이 금안정에 백마를 타고 금의환향을 한데서 동명의 유래가 생겼으며, 각 성씨가 많이 들어와 인천, 천변, 반송, 광곡, 수각, 원당, 송대, 영안, 구축, 월송, 송정, 금곡 등 12 동내를 형성 하였다. 나주는 예로부터 위대한 인물 문장가가 학자를 많이 배출 한 고장이다. 이러한 나주에서도 첫손에 꼽히는 곳이 노안면 금안동 이다. 금안동은 정읍의 태인, 영암의 구림과 함께 호남의 3대 명촌 으로 꼽힌다. 12개의 자연마을에는 서원, 정자, 재실이 20여개가 있고 효자비 등 비석이 100여개, 고인돌이 56기가 널려 있다. 고려 때의 첨의중찬 정가신과 조선시대의 대 학자인 신숙주도 이곳 태생이다. 이 고장 사람들은 '일 금안 이 회진'이라 하면서 자부 심이 대단하다.
금안동은 비단 정가신이나 신숙주를 배출해서 명촌이 아니라 4백 여년간 마을 사람들이 화목하고 마음을 합쳐서 동내를 가꾸자는 취지의 대동계를 이어 내려온 점에서 더욱 명촌으로 꼽힐만하다. 그 대동계는 임란 직후 황폐해진 마을을 다시 일으켜 세우자는 뜻에서 이어져 내려오던 계를 발전시키면서부터라고 한다. 이러한 대동계는 오늘날 지방자치의 근원이라 할 수 있다. 주요 문화제는 전라남도유형문화재 제 34호인 상계정(雙溪亭)과 설재 정가신을 배양하기 위해 1688년(숙종14)에 세운 설재서원, 사암(思庵) 박순(朴淳)을 흠모하여 1659년(효종10년)에 세운 월정서원이 있다.
금안1구 광곡(光谷), 수각(水各) 마을
마을형성 유래는 1400년대 전후로 나주나씨와 지씨가 마을에 정착한 이후, 문평면 죽곡에서 거주하던 하동정씨 정지(鄭地) 장군의 증손인 정서(鄭鋤)가 1500년대 전후로 금성산 아래 금안리에 정착하여 집성촌을 형성하였다고 한다. 원래는 숲이 우거져 새들의 낙원이라 일컬어 금안동(禽安洞)이라 하기도 하고, 나주정씨 정가신이 금혁(金革), 백마(白馬), 옥대 (玉帶)를 하사 받아 터를 잡은 곳이라 하여 금안동(金鞍洞)이라 고도 한다. 제일 위쪽 넓은 골에 터를 잡아 넓은 골짜기란 뜻으로 광곡(廣谷)이라 했던 것이 행정구역 개편으로 송대(松大)와 백사정(白沙亭)을 합하여 광곡(光谷)으로 바뀌었다 한다. 수각마을은 쌍계정의 양쪽으로 개울이 흐르고 있어 마을 이름을 수곡(水谷)이라 부르다가 수각이라 하였는데 행정구역 통폐합 때 수각(水各)으로 바뀌었다.
금안2구 원당(元當),반송(半松) 마을
1300년 전후로 나주정씨가, 1400년 전후로 풍산홍씨가 정착 마을을 형성하였으며, 마을사람들은 원당 이라는 마을 이름에 대해 금안동 일대 자연마을에서 으뜸가는 마을이라 하여 원당 이라 하는데, 원님 경원공의 별당이 있었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 이라고도 한다. 또 반송이라는 마을이름에 대해서는 마을 주변에 소나무, 특히 노송이 많고 반석(盤石)과 같은 형상이 되어 있어 반송(盤松)이라 칭하였는데, 914년 행정구역 개편 때 반송(半松) 이라 불렸다. 특히 마을에는 풍수지리와 연관되어 마을을 배 형국 이라 하여 우물을 파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다. 마을에 전하는 주요 지명은
바우배기 : 큰 바위가 있다해서 부르는 이름
사장등 : 원당과 인천사이에 있는 등성이
쌍시암거리 : 샘이 두 개 나란히 있는 들 이름
숲정이 : 금안리 동내 안에 흐르고 있는 냇물이 너무 급하게 동쪽으로 흘러내리니 이 물을 가두고 막기 위해 동내 동쪽으로 팽이나무와 느티나무를 심어 '숲정이'라고 했으나 지금은 나무들이 늙어 모두 없어지고 두 구루만 남아 있다.
금안3구 인천(仁川) 마을
처음에 나주정씨 정가신이 터를 잡고, 그 후 서성씨, 고령신씨, 여산송씨, 풍산홍씨, 하동정씨, 서흥김씨의 순으로 집성을 이루고 살았다. 마을사람들에 의하면 마을 앞 숲을 울타리 삼아 있는 마을이라고 해서 처음에는 이내촌( 內村)이라 하였다가 행정구역 개편 때 인천(仁川)으로 바꿔 부르게 되었다. 마을에는 금석문으로 효자성와김공실적비(孝子省窩金公失跡碑)와 반환홍선생유허비(盤桓洪先生遺墟碑), 문정공설재선생유허비 (文靖公雪齋先生遺墟碑), 효자송산홍공기행비(孝子松山洪公紀行碑)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