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정리
- 날짜
- 2020.04.16
- 조회수
- 952
- 등록자
- 관리자
오정리 (五亭里)
본래 나주군 이로면의 지역으로 1914년 행정구역폐합에 따라 석정리, 괴정리, 우산리, 오리촌, 기동을 별합하여 오리와 석정의 이름을 따서 오정리라 하여 노안면에 편입되었다
오정1구 오리(五里) 마을
1600년경 김해김씨 김국서가 김해에서 살다가 자손이 번창하여 이곳으로 이주 정착한 후 장수황씨, 밀양박씨, 전주이씨 등이 차례로 정착 현재의 마을을 이루고 있다. 마을 지형이 오리처럼 생겼다하여 오리라 하기도 하고, 몇 백년 전에 마을 입구의 공동우물터 샘 가에 큰 버드나무로 당산나무 다섯 그루가 있다고 해서 오류촌(五柳村), 오류곡이라 불렀는데 1914년 행정구역 개편으로 오리(五里)가 되었다고 하기도 한다.
오정2구 석정(石亭) 마을
1586년 밀양박씨 박윤훈(朴允訓)이 장성에서 살다가 아버지 박상설(朴相雪)이 임란으로 인해 세상을 떠나자 거기에서 살지 못하고 조용한 곳을 찾아 이 마을에 살기 시작하면서 마을이 형성되었다. 이 마을엔 당산나무가 있는데 이 마을이 형성되기 400여년 전의 것으로 추정되어 지금의 수령이 약 800년 된 것 으로 추정한다. 지명유래는 어느 노승이 배 형국이고 돌이 많아 유별나게 석혼 (石魂)이 다포(多包)하고 수려한 정자나무가 동반하였다고 하여 석정(石亭)이라 하였는데, 이 마을 이름이 오늘날에 이르고 있다고 한다. 또한 마을 어귀에 정자나무가 있고 그 아래 평상 같이 큰 바위가 있어 적정이라 불렀다고도 한다. 마을에 전하는 이야기로는 고려 고종 때 승려들이 옥산절을 지으면서 질병과 잡귀의 재난을 막기 위한 액막이로 느티나무와 회화나무(일명 失婦나무)를 심고, 선돌 2기를 세웠는데 이를 통해 마을의 무병장수와 절의 번영을 기원하였다고 한다. 이 느티나무는 수령이 900년 가량 되었는데 국난과 마을에 불길한 징조가 있으면 사흘 전부터 수액을 흘려서 사전에 마을 사람들에게 예시하였고, 나뭇잎이 한번 피면 우순풍조(雨順風調)가, 두 번 피면 농사짓는데 어려움이 있다한다. 이로인하여 마을의 수호신 으로 불리워 보호하고 있다.
본래 나주군 이로면의 지역으로 1914년 행정구역폐합에 따라 석정리, 괴정리, 우산리, 오리촌, 기동을 별합하여 오리와 석정의 이름을 따서 오정리라 하여 노안면에 편입되었다
오정1구 오리(五里) 마을
1600년경 김해김씨 김국서가 김해에서 살다가 자손이 번창하여 이곳으로 이주 정착한 후 장수황씨, 밀양박씨, 전주이씨 등이 차례로 정착 현재의 마을을 이루고 있다. 마을 지형이 오리처럼 생겼다하여 오리라 하기도 하고, 몇 백년 전에 마을 입구의 공동우물터 샘 가에 큰 버드나무로 당산나무 다섯 그루가 있다고 해서 오류촌(五柳村), 오류곡이라 불렀는데 1914년 행정구역 개편으로 오리(五里)가 되었다고 하기도 한다.
오정2구 석정(石亭) 마을
1586년 밀양박씨 박윤훈(朴允訓)이 장성에서 살다가 아버지 박상설(朴相雪)이 임란으로 인해 세상을 떠나자 거기에서 살지 못하고 조용한 곳을 찾아 이 마을에 살기 시작하면서 마을이 형성되었다. 이 마을엔 당산나무가 있는데 이 마을이 형성되기 400여년 전의 것으로 추정되어 지금의 수령이 약 800년 된 것 으로 추정한다. 지명유래는 어느 노승이 배 형국이고 돌이 많아 유별나게 석혼 (石魂)이 다포(多包)하고 수려한 정자나무가 동반하였다고 하여 석정(石亭)이라 하였는데, 이 마을 이름이 오늘날에 이르고 있다고 한다. 또한 마을 어귀에 정자나무가 있고 그 아래 평상 같이 큰 바위가 있어 적정이라 불렀다고도 한다. 마을에 전하는 이야기로는 고려 고종 때 승려들이 옥산절을 지으면서 질병과 잡귀의 재난을 막기 위한 액막이로 느티나무와 회화나무(일명 失婦나무)를 심고, 선돌 2기를 세웠는데 이를 통해 마을의 무병장수와 절의 번영을 기원하였다고 한다. 이 느티나무는 수령이 900년 가량 되었는데 국난과 마을에 불길한 징조가 있으면 사흘 전부터 수액을 흘려서 사전에 마을 사람들에게 예시하였고, 나뭇잎이 한번 피면 우순풍조(雨順風調)가, 두 번 피면 농사짓는데 어려움이 있다한다. 이로인하여 마을의 수호신 으로 불리워 보호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