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동리
- 날짜
- 2020.04.16
- 조회수
- 752
- 등록자
- 관리자
국동리(國洞里) 1구 [종명(鐘鳴), 국사(國士), 신촌(新村), 절골마을]
마을형성
종명마을과 국사마을의 입향조는 1500년경에 광산김씨가 맨처음 들어와 살았다고 하 고 신촌마을의 입향조는 함평이씨가 처음 틀을 잡았다고 하며, 보흥마을은 광산김씨 가 들어와 살았다고 전해진다. 그러나 보흥에는 아무도 살지 않는다. 또한 절골에는 소수의 가구가 지금까지 맥을 이어오고 있다.
유래
소가 울어 종명이라 전해지고 국사봉아래 마을이라 국사촌이라 명하며, 항상 새롭기 를 바라는 뜻에서 신촌이라... 산속으로 들어간 골짜기 마을이란 뜻으로 절골이라 칭 한다.
문화유산
회헌정 : 광산김씨 김기주가 지은 정자인데 증손이 참봉 김재천이 지붕을 띠에서 기 와로 바꾸었다는 기록이 있다. 그러나 6.25때 불타 없어지고, 1963년에 그 자리에 유 허비만 세워 놓았다
국동리(國洞里) 2구 [유전(西田), 기동(己洞), 동막(東幕) 마을]
마을형성
유전마을의 입향조는 광산김씨이고 이천서씨 서관섭씨가 나주에 살다가 난을 당하여 형제가 흩어져, 기동마을로 와서 정착하였으며, 파평윤씨와 해주오씨로 전해져오는 동 막마을을 합하여 국동리 2구라 칭한다. 현재는 수원백씨, 전주이씨, 나주임씨, 광주김 씨, 탐진최씨, 이천서씨, 광산김씨, 아산이씨, 평산신씨 등이 살고 있다.
유래
예전에는 대각촌이라 불렀던 유전은 닥나무 밭이 닭밭으로 변해 이를 한자로 풀이하 여 유전이라 한 것으로 보이고, 깃대봉아래의 마을이라 하여 기동이라 명하며, 문평의 끝인 골짜기 마을로 동막이라 칭한다.
문화유산
효열각 : 이천서씨 집안의 효자, 열부, 효부를 모신 목조기와 건물
효 자 : 서원열
열 부 : 증가선대부 호조참판 서철수의 처 제주양씨
효 부 : 증가선대부 예초참판 서상진의 처 광산김씨
마을형성
종명마을과 국사마을의 입향조는 1500년경에 광산김씨가 맨처음 들어와 살았다고 하 고 신촌마을의 입향조는 함평이씨가 처음 틀을 잡았다고 하며, 보흥마을은 광산김씨 가 들어와 살았다고 전해진다. 그러나 보흥에는 아무도 살지 않는다. 또한 절골에는 소수의 가구가 지금까지 맥을 이어오고 있다.
유래
소가 울어 종명이라 전해지고 국사봉아래 마을이라 국사촌이라 명하며, 항상 새롭기 를 바라는 뜻에서 신촌이라... 산속으로 들어간 골짜기 마을이란 뜻으로 절골이라 칭 한다.
문화유산
회헌정 : 광산김씨 김기주가 지은 정자인데 증손이 참봉 김재천이 지붕을 띠에서 기 와로 바꾸었다는 기록이 있다. 그러나 6.25때 불타 없어지고, 1963년에 그 자리에 유 허비만 세워 놓았다
국동리(國洞里) 2구 [유전(西田), 기동(己洞), 동막(東幕) 마을]
마을형성
유전마을의 입향조는 광산김씨이고 이천서씨 서관섭씨가 나주에 살다가 난을 당하여 형제가 흩어져, 기동마을로 와서 정착하였으며, 파평윤씨와 해주오씨로 전해져오는 동 막마을을 합하여 국동리 2구라 칭한다. 현재는 수원백씨, 전주이씨, 나주임씨, 광주김 씨, 탐진최씨, 이천서씨, 광산김씨, 아산이씨, 평산신씨 등이 살고 있다.
유래
예전에는 대각촌이라 불렀던 유전은 닥나무 밭이 닭밭으로 변해 이를 한자로 풀이하 여 유전이라 한 것으로 보이고, 깃대봉아래의 마을이라 하여 기동이라 명하며, 문평의 끝인 골짜기 마을로 동막이라 칭한다.
문화유산
효열각 : 이천서씨 집안의 효자, 열부, 효부를 모신 목조기와 건물
효 자 : 서원열
열 부 : 증가선대부 호조참판 서철수의 처 제주양씨
효 부 : 증가선대부 예초참판 서상진의 처 광산김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