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강리
- 날짜
- 2020.04.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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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1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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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관리자
오강1리 : 금구(金龜 또는 金九)ㆍ새터
자연환경과 인문환경
오강리는 1리~5리 모두 면사무소를 중심으로 형성되어 있어 행정의 중심지이며, 인근에는 상가들이 밀집하고 있다. 금구와 새터는 이웃하고 있는 마을로 편의상 구분하지 않고 함께 기술한다. 주민들 역시 그들의 의식속에 마을을 구분하지 않고 한 마을로 인식하고 있으며, 금구마을 안에 새터를 포함시키기도 한다.
금구와 새터마을의 동남쪽으로는 연동과 용동마을이 있고, 서쪽으로는 벽류마을이 있으며, 북쪽으로는 신동마을이 위치하고 있다. 마을에는 106가구, 350여명이 거주하고 있는데 농업 15가구와 상업 20여가구를 제외하면 대부분 직장인으로 구성되어 있어 토착민보다 외지사람이 더 많이 들어와 살고 있다.
주산물은 쌀과 배이다. 농경지는 마을 앞 속칭 ‘등가리고랑’과 ‘방목들’에 펼쳐져 있으며, 나주호와 관정을 이용하여 농업용수를 공급하고 있다. 마을에는 논 7㏊, 과수원을 포함하여 밭 10㏊가 있다. 농경지 토양은 점질토ㆍ황토로 농사를 짓기에 적당하며 대부분의 농가가 일모작을 하고 있다. 10여 가구가 배를 재배하고 있는데 김용기(남, 73세)가 30년 전에 처음 시작하였다. 과거에는 복숭아 재배를 많이 하였는데 1960~1970년대에 복숭아의 과잉생산으로 인해 정부에서 복숭아나무를 베라고 하여 이후부터는 복숭아 재배를 그만 두었다. 밭은 10년 전부터 배과수원으로 변경되었는데, 밭작물보다는 배가 더 소득이 높기 때문이다.
교통은 편리하다. 사거리까지 걸어 나가면 쉽게 버스를 이용할 수 있다. 아울러 마을 앞에서 광주-봉황간, 광주-영산포간 버스가 운행되고 있다. 따라서 주민들의 생필품 구입은 나주장ㆍ남평장ㆍ영산포장ㆍ마트를 이용하고 있다. 마을에 소재하고 있는 공공기관으로는 금천파출소, 전남과학고등학교가 있다.
지명유래와 마을연혁
금구마을은 형태가 금 거북과 흡사하여 쇠 금(金), 거북 구(龜)자를 써서 금구(金龜)라 칭하였다. 그러나 행정상으로는 금구(金九)라 표기되고 있다.새터마을은 과거 소나무 숲이 울창하여 새들의 보금자리가 많아 새터라 칭하였다.
문헌상 마을의 지명이 처음 나온 곳은 1912년 『지방행정구역명칭일람』이다. 이 기록에 의하면 금마산면(金馬山面) 12개 마을 중 금구리(金九里)라는 지명이 보인다. 1914년 일제강점기 때 행해진 행정구역개편으로 어천면(魚川面) 세류리(細柳里)ㆍ용동(龍洞)ㆍ연동(蓮洞)ㆍ벽류리(碧柳里) 일부와 금마산면 금구리가 병합하여 오강리(烏江里)가 되고, 금천면(金川面) 소속으로 바뀐다. 광복 이후 본 마을은 오강1리로 편제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
전언에 의하면 마을은 전라북도 남원에서 거주하던 김해김씨가 병자호란 당시 남원을 떠나 나주 용문동 백운촌에 정착하였고 이후 김유백이 자모리로 이거하였다고 한다. 그리고 1848년(헌종 13)에 그의 차남인 철갑(哲甲)이 이곳 금구마을에 터를 마련하였다. 마을에는 제보자인 김용기(남, 73세)와 그의 일가 10여 가구가 살고 있다. 마을은 김씨 36, 조씨 14, 이씨 10, 최씨 8, 박씨 7, 나씨 5, 정씨 5, 송씨 3, 장씨 3, 문씨 2, 신씨 2, 양씨 2, 유씨 2, 한씨 2, 황씨 1, 임씨 1, 강씨 1, 서씨 1, 주씨 1호 등 총 106호가 산다.
마을조직과 근ㆍ현대적 변화
마을 총회는 매년 양력 12월 15일에 개최한다. 총회에서는 마을자금의 결산과 마을사업 토론, 2년을 주기로 마을 임원을 선출한다. 그리고 매년 음력 2월 1일을 리민의 날로 정하여 마을자금으로 마을잔치를 연다. 상포계는 1970년에 조직되었으며 43명의 회원이 상례 시 상부상조를 목적으로 활동하고 있다. 경오회는 1999년에 조직되었으며 마을 노인 30여명이 노인복지를 위해 활동하고 있다. 부녀회는 1999년에 조직되었으며 20여명의 회원이 친목과 봉사활동 그리고 마을 일 돕기 등을 하고 있다.
전기는 1960년대 초에 가설되었고 전화는 행정전화가 1970년대에, 일반전화가 1980년대에 들어왔다. 연료는 연탄보일러 1호, 기름보일러 119호이고, 취사연료는 대부분의 집에서 LPG를 사용하고 있다. 상업 활동으로는 슈퍼 2, 마트 1, 건강원 3, 식당 7, 노래방 2, 술집 2, 다방 1, 당구장 1, 카센터 1, 농협농기구센터 1, 통닭집 3, 오토바이센터 1, 중화요리 1, 의원 1, 철물점 1, 분식집 1, 학원 2, 샷슈 1, 약국 1, 미용실 1, 공업사 1, 이용원 1개소 등이다. 이밖에 일제강점기때 나정환이 마을에서 식당을 운영 하였다고 한다. 마을회관은 1동 99㎡으로 1997년에 개축하였으며, 노인정과 사무실로 사용하고 있다. 마을회관 개축 기념으로 세운 기념비가 서 있다.
오강2리 : 연동(蓮洞)ㆍ용동(龍洞)
자연환경과 인문환경
연동과 용동마을 앞으로는 과수원과 들판이 펼쳐져 있고, 뒤로는 면사무소와 상가들이 밀집하고 있다. 마을의 동쪽으로는 석전리가 있고, 서쪽으로는 세류마을이 있다. 남쪽으로는 고동1리 고안마을이 있고, 북쪽으로는 금구마을이 위치하고 있다. 마을에는 103가구, 290여명이 거주하고 있는데 대부분 농업에 종사하고 있으며, 주산물은 쌀과 배이다. 농경지는 마을 앞과 방목들에 펼쳐져 있으며, 오강제의 물과 나주호 그리고 관정을 이용하여 농업용수를 공급한다. 마을에는 논 25㏊, 과수원을 포함하여 밭 40㏊가 있다. 농경지 토양은 점질토ㆍ황토로 농사짓기에 적당하며 대부분의 농가가 일모작을 하고 있다. 50여 가구가 배를 재배하고 있는데 김병호와 나삼성이 처음 시작하였다. 15가구가 포도를 10년 전부터 재배해 오고 있는데 이들은 모두 작목반을 조직하여 활동하고 있다.
이밖에 일제 강점기부터 복숭아 재배를 많이 하였다. 그러나 1960~1970년대 복숭아의 과잉생산은 복숭아나무를 베어내는 현상을 초래하였다. 지금은 1가구만이 재배를 하고 있다. 밭은 10년 전부터 배 과수원으로 변경되었다. 밭작물보다는 배가 더 소득이 높기 때문이다. 교통은 편리하다. 사거리까지 걸어 나가 버스를 타기도 하고, 마을 앞에서 광주-봉황간, 광주-영산포간 버스를 이용한다. 따라서 주민들의 생필품 구입은 나주장ㆍ남평장ㆍ영산포장ㆍ마트를 이용하고 있다. 공공기관으로는 금천면사무소가 있다. 본래 면사무소는 용동마을 227번지 현 소유주 양말림(여)집 인근에 있다가 1930년대에 현재의 위치로 옮겨졌다. 용동마을 뒷등에 일제강점기때는 신사가 있었다고 전해진다.
지명유래와 마을연혁
연동마을은 지형이 연화도수(蓮花倒水)형이라 해서 지은 이름이고, 용동마을은 지형이 용 형태로 되어 있어 용동(龍洞)이라 하였다. 문헌상 마을의 이름이 처음 나온 곳은 1912년 『지방행정구역명칭일람』이다. 이 기록에 의하면 어천면(魚川面) 31개 마을 중 연동리(蓮洞里)ㆍ용동리(龍洞里)라는 지명이 보인다. 1914년 행정구역개편으로 어천면 세류리(細柳里)ㆍ용동(龍洞)ㆍ연동(蓮洞)ㆍ벽류리(碧柳里) 일부와 금마산면(金馬山面) 금구리(金九里)가 병합하여 오강리(烏江里)가 되고, 금천면(金川面) 소속으로 바뀐다. 광복 이후 본 마을은 오강2리로 편제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
마을사람들의 전언에 의하면 마을은 주씨가 터를 잡았다고 한다. 그러나 현재 마을에는 주씨가 3가구 거주하고 있는데 족보를 통한 입향조의 내력은 파악할 수 없다. 주씨 이후 나씨, 서씨, 김씨가 들어와 마을을 이루었다. 마을에는 주씨 3호, 김씨 25호, 이씨 12호, 나씨 7호, 서씨 6호, 박씨 6호, 기타 44호 등 총 103가구가 거주하고 있다.
마을조직과 근ㆍ현대적 변화
마을총회는 매년 양력 12월 30일경에 개최한다. 총회에서는 마을자금의 결산과 마을사업 토론, 2년을 주기로 마을 임원을 선출한다. 그리고 매년 음력 2월 1일을 리민의 날로 정하여 마을자금으로 마을잔치를 연다. 마을잔치는 마을 3개반에서 돌아가면서 주관한다. 금오계는 과거에 조직되었으며 마을 원로들로 구성된 17명의 회원이 상례 시 상부상조를 목적으로 하고 있다. 위친계는 25년 전에 조직되었으며 금오계의 계원보다 젊은 35명의 계원이 상례 시 상부상조를 한다. 부녀회는 1970년대에 조직되어 60여명의 회원이 친목과 봉사활동 그리고 마을 일 돕기 등을 하고 있다. 청년회는 20년 전에 조직되었으며 15명의 회원이 친목과 봉사활동 그리고 마을 일 돕기 등을 하고 있다.
전기는 1960년대 초에 가설되었고 전화는 행정전화가 1970년대에, 일반전화가 1980년대에 들어왔다. 연료는 연탄보일러 3호, 기름보일러 100호이고 취사연료는 대부분의 집에서 LPG를 사용하고 있다. 상업 활동으로는 구멍가게 2개소, 가구공장 1개소, 어린이놀이기구 제조공장 1개소, 석유판매소 1개소 등이다. 이밖에 면사무소 옆 광명슈퍼가 일제강점기에 자전거포 자리였으며 이곳에서 과자를 팔기도 하였다. 마을회관은 1동으로 1999년에 개축하여 노인정과 사무실 그리고 농업인건강관리실로 사용하고 있다. 마을회관 개축 기념으로 세운 기념비가 있다. 이밖에 이 마을은 10여년 전 마을 인근에 위치하고 있는 오강제의 둑이 무너져 피해를 보았다.
오강3리 : 벽류(碧柳)ㆍ비학
자연환경과 인문환경
벽류와 비학은 한 마을로 인식하고 있다. 비학은 나주배연구소 인근을 말하는데 7가구가 살고 있다. 마을의 동쪽으로는 금구마을이 있고, 서쪽으로는 영산강이 흐르고 있다. 남쪽으로는 방목들이 있고, 북쪽으로는 원곡3리 미곡마을이 위치하고 있다. 마을에는 47가구, 140여명이 거주하고 있는데 대부분 농업에 종사하고 있으며, 주산물은 쌀과 배이다. 농경지는 마을 앞 방목들과 영산강변에 펼쳐져 있어, 영산강 물과 관정을 이용하여 농업용수로 사용하고 있다. 마을에는 논 17㏊, 과수원을 포함하여 밭 50㏊가 있고 농경지 토양은 점질토ㆍ사질토로 농사짓기에는 적당하며 방목들에서는 일모작, 영산강변에서는 이모작을 하고 있다.
현재 밭은 대부분 과수원으로 변경하여 24가구가 배를 재배하고 있는데 이만근ㆍ이의심ㆍ윤병태가 1960년대부터 시작하였다. 또 한 가구가 1980년경부터 하우스에서 꽃을 재배하고 있다. 과거에는 마을이 축산마을로 인식되었으나 지금은 3가구만이 한우 80여두를 사육하고 있다. 교통편은 편리하여 사거리까지 걸어 나가 버스를 탄다. 주민들의 생필품 구입은 나주장ㆍ남평장ㆍ영산포장ㆍ마트를 이용하고 있다. 1946년 나주원예중학교가 설립될 때 본 마을에 소재하고 있었으나 1951년 원곡리 광탄마을로 옮겨갔다. 이밖에 마을에는 사회복지시설인 금성원이 자리하고 있다.
지명유래와 마을연혁
전언에 의하면 마을은 게의 형국이라고 하는데 마을 앞에 버드나무가 우거져 있어 벽류(碧柳)라 칭하였다. 문헌상 마을의 지명이 처음 나온 곳은 1912년 『지방행정구역명칭일람』으로 어천면(魚川面) 31개 마을 중 벽류리(碧柳里)라는 지명이 보인다. 1914년의 행정구역개편으로 어천면 세류리(細柳里)ㆍ용동(龍洞)ㆍ연동(蓮洞)ㆍ벽류리(碧柳里) 일부와 금마산면(金馬山面) 금구리(金九里)가 병합하여 오강리(烏江里)가 되고, 금천면(金川面) 소속으로 바뀐다. 광복 이후 본 마을은 오강3리로 편제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
전언에 의하면 과거에는 나씨가 살았다고 한다. 그리고 이씨ㆍ김씨 등 여러 성씨가 입향하여 마을을 형성하였다. 마을에는 김씨 16, 이씨 8, 박씨 6, 민씨 3, 장씨ㆍ승씨ㆍ오씨 각 1호, 최씨 2, 남씨ㆍ나씨ㆍ조씨ㆍ윤씨ㆍ한씨 각 1호, 황씨 3, 신씨 1호 등 총 47가구가 거주하고 있다.
마을조직과 근ㆍ현대적 변화
마을총회는 매년 음력 1월 15일에 개최한다. 총회에서는 마을자금의 결산과 마을사업 토론, 2년을 주기로 마을 임원을 선출한다. 지난날 조직된 동계는 마을총회 때 회의를 하고 주민의 애경사 시 상부상조를 목적으로 하고 있다. 부녀회는 1970년대에 조직되어 50여명의 회원이 친목과 봉사활동 그리고 마을 일 돕기 등을 하고 있다. 전기는 1959년에 가설되었고 전화는 행정전화가 1970년대에, 일반전화가 1980년대에 들어왔다. 연료는 연탄보일러 4가구, 기름보일러 41가구, 심야전기보일러 2가구이고 취사연료는 대부분의 집에서 LPG를 사용하고 있다. 상업 활동으로는 구멍가게 1개소, 양송이공장 1개소가 있다.
마을회관은 1동으로 1970년대에 건립하였으며 노인정과 사무실로 사용하고 있고 2002년에 건립한 66㎡ 규모의 곡물 건조장이 있다. 이밖에 1931년 5월 홍수때 이재민은 면사무소에 수용되었으며, 질병으로 피해를 입기도 하였다.
오강4리 : 세류(細柳)
자연환경과 인문환경
마을 앞으로는 속칭 ‘오강리들’이 있고, 뒤로는 상가가 밀집하고 있다. 마을 동쪽으로 연동마을이 있고, 서쪽으로 벽류마을이 있으며 남쪽으로 고동리가 있고, 북쪽으로 금구마을이 위치하고 있다. 마을에는 51가구, 150여명이 거주하고 있다. 마을 사람들은 대부분 농업에 종사하고 있으며, 주산물은 쌀과 배이다. 농경지는 마을 앞 방목들과 영산강변(하천 답)에 펼쳐져 있으며, 영산강과 연동마을에 소재하고 있는 오강제 그리고 관정을 이용하여 농업용수를 공급한다. 마을에는 논 30㏊, 과수원을 포함하여 밭 40㏊가 있다. 농경지 토양은 점질토ㆍ사질토ㆍ황토로 농사짓기에 적당하며 대부분의 농가가 1~2모작을 하고 있다.
마을에서는 30가구가 배를 재배하고 있는데 40년 전에 시작하였다. 그리고 8가구가 포도를 20여년 전부터 재배해 오고 있으며 1가구가 한우를 30여두 사육하고 있다. 밭은 대부분 배과수원으로 바뀌었다. 이러한 변화는 10여년 전부터 밭작물보다는 배가 더 소득이 높아지면서 생긴 현상이다. 마을에서는 2가구가 하우스를 하고 있는데 1가구는 10여년 전부터 장미를 재배하고 있고, 다른 1가구는 5~6년 전부터 상추와 수박을 재배하고 있다.
교통은 편리하다. 사거리까지 걸어 나가 버스를 타기도 하고, 마을 앞에서 광주-봉황간ㆍ광주-영산포간 버스를 이용한다. 주민들의 생필품 구입은 나주장ㆍ남평장ㆍ영산포장ㆍ마트를 이용하고 있다. 일제강점기 때 본 마을에 거주하던 이시가와(石川)가 양잠을 크게 하였다. 약 10만㎡ 규모의 뽕밭이 조성되었는데 지금의 노인정과 우체국도 당시에는 뽕밭이었다고 한다. 광복 이후 김옥두가 인수하여 1963년도까지 양잠을 하였다. 공공기관으로는 금천우체국이 있다. 또한 노인정(永樂堂) 내에는 1974년에 세운 「신성계원영혼추모비 信成契員靈魂追慕碑」와 1994년에 세운 「영락당창건기념비」가 있다.
지명유래와 마을연혁
과거에는 마을 뒤로 산이 있고, 마을 앞으로 강물이 흘렀으며 버드나무가 많이 우거져 있어 세류(細柳)라 칭하였다. 그러나 마을 뒷산은 모두 밭으로 개간하여 현재 그 모습을 찾아볼 수 없고, 영산강 물이 과거에는 마을 앞까지 흘러 들어왔다. 이밖에 지난날 마을 전체가 이시가와(石川)의 뽕밭이었는데 이후 이곳에 집도 짓고 과수도 심었다.
문헌상 마을의 지명이 처음 나온 곳은 1912년 『지방행정구역명칭일람』이다. 이 기록에 의하면 어천면(魚川面) 31개 마을 중 세류리(細柳里)라는 지명이 보인다. 1914년에 행해진 행정구역개편으로 어천면 세류리(細柳里)ㆍ용동(龍洞)ㆍ연동(蓮洞)ㆍ벽류리(碧柳里)일부와 금마산면(金馬山面) 금구리(金九里)가 병합하여 오강리(烏江里)가 되고, 금천면(金川面) 소속으로 바뀐다. 광복 이후 본 마을은 오강2리로 편제되어 있다가 1982년 4리로 분구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
전해오는 말에 의하면 본 마을은 약 180년 전 김해김씨(金海金氏) 사군파 김인택(金仁澤)이 처음으로 입향하였으며, 이후 제주양씨(濟州梁氏) 송촌공파 양상영이 이주해 왔다고 한다. 마을에는 김해김씨 7, 제주양씨 5, 이씨 12, 해주최씨 6, 이천서씨 4, 박씨 4, 금성나씨 2, 강씨 2, 전씨ㆍ조씨ㆍ노씨ㆍ모씨ㆍ백씨ㆍ차씨ㆍ한씨ㆍ황씨ㆍ청주김씨 등 각 1호 총 51가구가 거주하고 있다.
마을조직과 근ㆍ현대적 변화
마을총회는 매년 음력 2월 1일 개최한다. 총회에서는 마을자금의 결산과 마을사업 토론, 2년을 주기로 마을 임원을 선출한다. 그리고 이 날을 리민의 날로 정하여 마을 친목회 주관으로 마을잔치를 연다. 상포계는 1950년에 조직되었으며 45명의 회원이 상례 때 활동하고 있다. 친목회는 45가구가 가입되어 리민의 날 행사를 주관하고 마을자금을 관리한다. 부녀회는 1970년대에 조직되어 40여명의 회원이 친목과 봉사활동 등을 하고 있다. 청년회는 4년 전에 재조직되었는데, 광주와 전라남도에 살고 있는 33명의 마을 출신 청년들이 활동을 하고 있다.
전기는 1960년대 초에 가설되었다. 전화는 행정전화가 1970년대에, 일반전화가 1980년대에 들어왔다. 연료는 기름보일러 51가구이고 취사연료는 대부분의 가구에서 LPG를 사용하고 있다. 상업 활동으로는 방앗간 1, 벽돌공장 1개소, 택시부 1개소 등이 있다. 마을회관은 1동 115㎡으로 1998년에 건립하였으며, 노인정과 사무실로 사용하고 있다.
오강5리 : 신동(新洞)
자연환경과 인문환경
면소재지로 인근에 초등학교와 상가가 밀집하고 있는 교육과 금융의 중심지이다. 동쪽으로 석전리수랑마을이 있고,서쪽으로 원곡리 미곡마을이 있다. 남쪽으로 금구마을이 있고, 북쪽으로 원곡리 광탄마을이 위치하고있다. 마을에는 60가구, 170여명이 거주하고 있는데 몇몇 농가를 제외하고 대부분 상업에 종사하고 있으며, 토착인보다 외지인이 더 많이 들어와 살고 있다.
주산물은 쌀과 배이고, 농경지는 마을 뒤와 방목들에 펼쳐져 있다. 그리고 영산강 물과 관정을 이용하여 농업용수를 공급하고 있다. 마을에는 논 3.5㏊, 과수원을 포함하여 밭 5㏊가 있고 농경지 토양은 점질토로 농사를 짓기에 적당하며 대부분의 농가가 일모작을 하고 있다. 15가구가 배를 재배하고 있는데 박성남ㆍ박항무가 25년 전에 시작하였으며, 밭은 대부분 과수원으로 변경되어 배를 재배하고 있다. 교통은 편리하다. 마을 앞 금천사거리에서 버스를 이용하고 생필품 구입은 나주장ㆍ남평장ㆍ영산포장ㆍ마트를 이용하고 있다. 마을에 소재하고 있는 공공기관으로는 금천초등학교, 금천농협, 신용협동조합, 나주소방서 금천출장소, 금천면농업인상담소가 있다. 이밖에 농업인상담소 인근에 과거에는 시장이 있었으며 몇 년 동안 운영되다가 1980년대에 폐쇄되었다.
지명유래와 마을연혁
1992년 오강리 1구인 금구에서 분구되면서 마을 이름을 새로운 마을이라 하여 신동(新洞)이라 하였다. 마을에는 김씨 12, 이씨 9, 최씨 5, 박씨 5, 양씨 5, 정씨 5, 조씨 4, 임씨 2, 나씨 2, 강씨 2, 송씨 2, 장씨ㆍ차씨ㆍ오씨ㆍ한씨ㆍ안씨ㆍ배씨ㆍ손씨 7호가 각 1호씩 총 60가구가 거주하고 있다.
마을조직과 근ㆍ현대적 변화
마을총회는 매년 양력 1월 1일에 개최한다. 총회에서는 마을자금의 결산과 마을사업 토론, 2년을 주기로 마을 임원을 선출한다. 상포계는 1구인 금구마을과 함께 하고 있다. 1970년에 조직되었으며 43명의 회원이 초상이 났을 때 상부상조를 목적으로 하고 있다. 부녀회는 1992년에 조직하였는데 25명의 회원이 친목과 봉사활동 그리고 마을 일 돕기 등을 하고 있다. 전기는 1960년대 초에 가설되었고 전화는 일반전화가 1980년대에 들어왔다. 연료는 기름보일러 60가구이고 취사연료는 대부분의 가구에서 LPG를 사용하고 있다.
상업 활동으로는 슈퍼 1, 마트 1, 건강원 3, 식당 6, 다방 2, 농용자재백화점 1, 통닭집 1, 오토바이센터 1, 중화요리 2, 수예점 1, 금은방 1, 사진관 1, 한약방 1, 약국 1, 미용실 3, 식육점 1, 이용원 1, 체육사 1, 세탁소 1, 자전거포 1, 가전제품 2, 커피숍 1, 문구사 2, 부동산 1, 포목집 1, 상회 1, 술집 1, 찜질방 1, 카센터 1, 농약집 2개소 등이다. 이밖에 일제강점기부터 노약방(한약방)이 운영되다가 67년 전 광암리로 옮겨졌으며, 이 자리에 정창원이 초가집을 짓고 식당을 운영하였다.
자연환경과 인문환경
오강리는 1리~5리 모두 면사무소를 중심으로 형성되어 있어 행정의 중심지이며, 인근에는 상가들이 밀집하고 있다. 금구와 새터는 이웃하고 있는 마을로 편의상 구분하지 않고 함께 기술한다. 주민들 역시 그들의 의식속에 마을을 구분하지 않고 한 마을로 인식하고 있으며, 금구마을 안에 새터를 포함시키기도 한다.
금구와 새터마을의 동남쪽으로는 연동과 용동마을이 있고, 서쪽으로는 벽류마을이 있으며, 북쪽으로는 신동마을이 위치하고 있다. 마을에는 106가구, 350여명이 거주하고 있는데 농업 15가구와 상업 20여가구를 제외하면 대부분 직장인으로 구성되어 있어 토착민보다 외지사람이 더 많이 들어와 살고 있다.
주산물은 쌀과 배이다. 농경지는 마을 앞 속칭 ‘등가리고랑’과 ‘방목들’에 펼쳐져 있으며, 나주호와 관정을 이용하여 농업용수를 공급하고 있다. 마을에는 논 7㏊, 과수원을 포함하여 밭 10㏊가 있다. 농경지 토양은 점질토ㆍ황토로 농사를 짓기에 적당하며 대부분의 농가가 일모작을 하고 있다. 10여 가구가 배를 재배하고 있는데 김용기(남, 73세)가 30년 전에 처음 시작하였다. 과거에는 복숭아 재배를 많이 하였는데 1960~1970년대에 복숭아의 과잉생산으로 인해 정부에서 복숭아나무를 베라고 하여 이후부터는 복숭아 재배를 그만 두었다. 밭은 10년 전부터 배과수원으로 변경되었는데, 밭작물보다는 배가 더 소득이 높기 때문이다.
교통은 편리하다. 사거리까지 걸어 나가면 쉽게 버스를 이용할 수 있다. 아울러 마을 앞에서 광주-봉황간, 광주-영산포간 버스가 운행되고 있다. 따라서 주민들의 생필품 구입은 나주장ㆍ남평장ㆍ영산포장ㆍ마트를 이용하고 있다. 마을에 소재하고 있는 공공기관으로는 금천파출소, 전남과학고등학교가 있다.
지명유래와 마을연혁
금구마을은 형태가 금 거북과 흡사하여 쇠 금(金), 거북 구(龜)자를 써서 금구(金龜)라 칭하였다. 그러나 행정상으로는 금구(金九)라 표기되고 있다.새터마을은 과거 소나무 숲이 울창하여 새들의 보금자리가 많아 새터라 칭하였다.
문헌상 마을의 지명이 처음 나온 곳은 1912년 『지방행정구역명칭일람』이다. 이 기록에 의하면 금마산면(金馬山面) 12개 마을 중 금구리(金九里)라는 지명이 보인다. 1914년 일제강점기 때 행해진 행정구역개편으로 어천면(魚川面) 세류리(細柳里)ㆍ용동(龍洞)ㆍ연동(蓮洞)ㆍ벽류리(碧柳里) 일부와 금마산면 금구리가 병합하여 오강리(烏江里)가 되고, 금천면(金川面) 소속으로 바뀐다. 광복 이후 본 마을은 오강1리로 편제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
전언에 의하면 마을은 전라북도 남원에서 거주하던 김해김씨가 병자호란 당시 남원을 떠나 나주 용문동 백운촌에 정착하였고 이후 김유백이 자모리로 이거하였다고 한다. 그리고 1848년(헌종 13)에 그의 차남인 철갑(哲甲)이 이곳 금구마을에 터를 마련하였다. 마을에는 제보자인 김용기(남, 73세)와 그의 일가 10여 가구가 살고 있다. 마을은 김씨 36, 조씨 14, 이씨 10, 최씨 8, 박씨 7, 나씨 5, 정씨 5, 송씨 3, 장씨 3, 문씨 2, 신씨 2, 양씨 2, 유씨 2, 한씨 2, 황씨 1, 임씨 1, 강씨 1, 서씨 1, 주씨 1호 등 총 106호가 산다.
마을조직과 근ㆍ현대적 변화
마을 총회는 매년 양력 12월 15일에 개최한다. 총회에서는 마을자금의 결산과 마을사업 토론, 2년을 주기로 마을 임원을 선출한다. 그리고 매년 음력 2월 1일을 리민의 날로 정하여 마을자금으로 마을잔치를 연다. 상포계는 1970년에 조직되었으며 43명의 회원이 상례 시 상부상조를 목적으로 활동하고 있다. 경오회는 1999년에 조직되었으며 마을 노인 30여명이 노인복지를 위해 활동하고 있다. 부녀회는 1999년에 조직되었으며 20여명의 회원이 친목과 봉사활동 그리고 마을 일 돕기 등을 하고 있다.
전기는 1960년대 초에 가설되었고 전화는 행정전화가 1970년대에, 일반전화가 1980년대에 들어왔다. 연료는 연탄보일러 1호, 기름보일러 119호이고, 취사연료는 대부분의 집에서 LPG를 사용하고 있다. 상업 활동으로는 슈퍼 2, 마트 1, 건강원 3, 식당 7, 노래방 2, 술집 2, 다방 1, 당구장 1, 카센터 1, 농협농기구센터 1, 통닭집 3, 오토바이센터 1, 중화요리 1, 의원 1, 철물점 1, 분식집 1, 학원 2, 샷슈 1, 약국 1, 미용실 1, 공업사 1, 이용원 1개소 등이다. 이밖에 일제강점기때 나정환이 마을에서 식당을 운영 하였다고 한다. 마을회관은 1동 99㎡으로 1997년에 개축하였으며, 노인정과 사무실로 사용하고 있다. 마을회관 개축 기념으로 세운 기념비가 서 있다.
오강2리 : 연동(蓮洞)ㆍ용동(龍洞)
자연환경과 인문환경
연동과 용동마을 앞으로는 과수원과 들판이 펼쳐져 있고, 뒤로는 면사무소와 상가들이 밀집하고 있다. 마을의 동쪽으로는 석전리가 있고, 서쪽으로는 세류마을이 있다. 남쪽으로는 고동1리 고안마을이 있고, 북쪽으로는 금구마을이 위치하고 있다. 마을에는 103가구, 290여명이 거주하고 있는데 대부분 농업에 종사하고 있으며, 주산물은 쌀과 배이다. 농경지는 마을 앞과 방목들에 펼쳐져 있으며, 오강제의 물과 나주호 그리고 관정을 이용하여 농업용수를 공급한다. 마을에는 논 25㏊, 과수원을 포함하여 밭 40㏊가 있다. 농경지 토양은 점질토ㆍ황토로 농사짓기에 적당하며 대부분의 농가가 일모작을 하고 있다. 50여 가구가 배를 재배하고 있는데 김병호와 나삼성이 처음 시작하였다. 15가구가 포도를 10년 전부터 재배해 오고 있는데 이들은 모두 작목반을 조직하여 활동하고 있다.
이밖에 일제 강점기부터 복숭아 재배를 많이 하였다. 그러나 1960~1970년대 복숭아의 과잉생산은 복숭아나무를 베어내는 현상을 초래하였다. 지금은 1가구만이 재배를 하고 있다. 밭은 10년 전부터 배 과수원으로 변경되었다. 밭작물보다는 배가 더 소득이 높기 때문이다. 교통은 편리하다. 사거리까지 걸어 나가 버스를 타기도 하고, 마을 앞에서 광주-봉황간, 광주-영산포간 버스를 이용한다. 따라서 주민들의 생필품 구입은 나주장ㆍ남평장ㆍ영산포장ㆍ마트를 이용하고 있다. 공공기관으로는 금천면사무소가 있다. 본래 면사무소는 용동마을 227번지 현 소유주 양말림(여)집 인근에 있다가 1930년대에 현재의 위치로 옮겨졌다. 용동마을 뒷등에 일제강점기때는 신사가 있었다고 전해진다.
지명유래와 마을연혁
연동마을은 지형이 연화도수(蓮花倒水)형이라 해서 지은 이름이고, 용동마을은 지형이 용 형태로 되어 있어 용동(龍洞)이라 하였다. 문헌상 마을의 이름이 처음 나온 곳은 1912년 『지방행정구역명칭일람』이다. 이 기록에 의하면 어천면(魚川面) 31개 마을 중 연동리(蓮洞里)ㆍ용동리(龍洞里)라는 지명이 보인다. 1914년 행정구역개편으로 어천면 세류리(細柳里)ㆍ용동(龍洞)ㆍ연동(蓮洞)ㆍ벽류리(碧柳里) 일부와 금마산면(金馬山面) 금구리(金九里)가 병합하여 오강리(烏江里)가 되고, 금천면(金川面) 소속으로 바뀐다. 광복 이후 본 마을은 오강2리로 편제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
마을사람들의 전언에 의하면 마을은 주씨가 터를 잡았다고 한다. 그러나 현재 마을에는 주씨가 3가구 거주하고 있는데 족보를 통한 입향조의 내력은 파악할 수 없다. 주씨 이후 나씨, 서씨, 김씨가 들어와 마을을 이루었다. 마을에는 주씨 3호, 김씨 25호, 이씨 12호, 나씨 7호, 서씨 6호, 박씨 6호, 기타 44호 등 총 103가구가 거주하고 있다.
마을조직과 근ㆍ현대적 변화
마을총회는 매년 양력 12월 30일경에 개최한다. 총회에서는 마을자금의 결산과 마을사업 토론, 2년을 주기로 마을 임원을 선출한다. 그리고 매년 음력 2월 1일을 리민의 날로 정하여 마을자금으로 마을잔치를 연다. 마을잔치는 마을 3개반에서 돌아가면서 주관한다. 금오계는 과거에 조직되었으며 마을 원로들로 구성된 17명의 회원이 상례 시 상부상조를 목적으로 하고 있다. 위친계는 25년 전에 조직되었으며 금오계의 계원보다 젊은 35명의 계원이 상례 시 상부상조를 한다. 부녀회는 1970년대에 조직되어 60여명의 회원이 친목과 봉사활동 그리고 마을 일 돕기 등을 하고 있다. 청년회는 20년 전에 조직되었으며 15명의 회원이 친목과 봉사활동 그리고 마을 일 돕기 등을 하고 있다.
전기는 1960년대 초에 가설되었고 전화는 행정전화가 1970년대에, 일반전화가 1980년대에 들어왔다. 연료는 연탄보일러 3호, 기름보일러 100호이고 취사연료는 대부분의 집에서 LPG를 사용하고 있다. 상업 활동으로는 구멍가게 2개소, 가구공장 1개소, 어린이놀이기구 제조공장 1개소, 석유판매소 1개소 등이다. 이밖에 면사무소 옆 광명슈퍼가 일제강점기에 자전거포 자리였으며 이곳에서 과자를 팔기도 하였다. 마을회관은 1동으로 1999년에 개축하여 노인정과 사무실 그리고 농업인건강관리실로 사용하고 있다. 마을회관 개축 기념으로 세운 기념비가 있다. 이밖에 이 마을은 10여년 전 마을 인근에 위치하고 있는 오강제의 둑이 무너져 피해를 보았다.
오강3리 : 벽류(碧柳)ㆍ비학
자연환경과 인문환경
벽류와 비학은 한 마을로 인식하고 있다. 비학은 나주배연구소 인근을 말하는데 7가구가 살고 있다. 마을의 동쪽으로는 금구마을이 있고, 서쪽으로는 영산강이 흐르고 있다. 남쪽으로는 방목들이 있고, 북쪽으로는 원곡3리 미곡마을이 위치하고 있다. 마을에는 47가구, 140여명이 거주하고 있는데 대부분 농업에 종사하고 있으며, 주산물은 쌀과 배이다. 농경지는 마을 앞 방목들과 영산강변에 펼쳐져 있어, 영산강 물과 관정을 이용하여 농업용수로 사용하고 있다. 마을에는 논 17㏊, 과수원을 포함하여 밭 50㏊가 있고 농경지 토양은 점질토ㆍ사질토로 농사짓기에는 적당하며 방목들에서는 일모작, 영산강변에서는 이모작을 하고 있다.
현재 밭은 대부분 과수원으로 변경하여 24가구가 배를 재배하고 있는데 이만근ㆍ이의심ㆍ윤병태가 1960년대부터 시작하였다. 또 한 가구가 1980년경부터 하우스에서 꽃을 재배하고 있다. 과거에는 마을이 축산마을로 인식되었으나 지금은 3가구만이 한우 80여두를 사육하고 있다. 교통편은 편리하여 사거리까지 걸어 나가 버스를 탄다. 주민들의 생필품 구입은 나주장ㆍ남평장ㆍ영산포장ㆍ마트를 이용하고 있다. 1946년 나주원예중학교가 설립될 때 본 마을에 소재하고 있었으나 1951년 원곡리 광탄마을로 옮겨갔다. 이밖에 마을에는 사회복지시설인 금성원이 자리하고 있다.
지명유래와 마을연혁
전언에 의하면 마을은 게의 형국이라고 하는데 마을 앞에 버드나무가 우거져 있어 벽류(碧柳)라 칭하였다. 문헌상 마을의 지명이 처음 나온 곳은 1912년 『지방행정구역명칭일람』으로 어천면(魚川面) 31개 마을 중 벽류리(碧柳里)라는 지명이 보인다. 1914년의 행정구역개편으로 어천면 세류리(細柳里)ㆍ용동(龍洞)ㆍ연동(蓮洞)ㆍ벽류리(碧柳里) 일부와 금마산면(金馬山面) 금구리(金九里)가 병합하여 오강리(烏江里)가 되고, 금천면(金川面) 소속으로 바뀐다. 광복 이후 본 마을은 오강3리로 편제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
전언에 의하면 과거에는 나씨가 살았다고 한다. 그리고 이씨ㆍ김씨 등 여러 성씨가 입향하여 마을을 형성하였다. 마을에는 김씨 16, 이씨 8, 박씨 6, 민씨 3, 장씨ㆍ승씨ㆍ오씨 각 1호, 최씨 2, 남씨ㆍ나씨ㆍ조씨ㆍ윤씨ㆍ한씨 각 1호, 황씨 3, 신씨 1호 등 총 47가구가 거주하고 있다.
마을조직과 근ㆍ현대적 변화
마을총회는 매년 음력 1월 15일에 개최한다. 총회에서는 마을자금의 결산과 마을사업 토론, 2년을 주기로 마을 임원을 선출한다. 지난날 조직된 동계는 마을총회 때 회의를 하고 주민의 애경사 시 상부상조를 목적으로 하고 있다. 부녀회는 1970년대에 조직되어 50여명의 회원이 친목과 봉사활동 그리고 마을 일 돕기 등을 하고 있다. 전기는 1959년에 가설되었고 전화는 행정전화가 1970년대에, 일반전화가 1980년대에 들어왔다. 연료는 연탄보일러 4가구, 기름보일러 41가구, 심야전기보일러 2가구이고 취사연료는 대부분의 집에서 LPG를 사용하고 있다. 상업 활동으로는 구멍가게 1개소, 양송이공장 1개소가 있다.
마을회관은 1동으로 1970년대에 건립하였으며 노인정과 사무실로 사용하고 있고 2002년에 건립한 66㎡ 규모의 곡물 건조장이 있다. 이밖에 1931년 5월 홍수때 이재민은 면사무소에 수용되었으며, 질병으로 피해를 입기도 하였다.
오강4리 : 세류(細柳)
자연환경과 인문환경
마을 앞으로는 속칭 ‘오강리들’이 있고, 뒤로는 상가가 밀집하고 있다. 마을 동쪽으로 연동마을이 있고, 서쪽으로 벽류마을이 있으며 남쪽으로 고동리가 있고, 북쪽으로 금구마을이 위치하고 있다. 마을에는 51가구, 150여명이 거주하고 있다. 마을 사람들은 대부분 농업에 종사하고 있으며, 주산물은 쌀과 배이다. 농경지는 마을 앞 방목들과 영산강변(하천 답)에 펼쳐져 있으며, 영산강과 연동마을에 소재하고 있는 오강제 그리고 관정을 이용하여 농업용수를 공급한다. 마을에는 논 30㏊, 과수원을 포함하여 밭 40㏊가 있다. 농경지 토양은 점질토ㆍ사질토ㆍ황토로 농사짓기에 적당하며 대부분의 농가가 1~2모작을 하고 있다.
마을에서는 30가구가 배를 재배하고 있는데 40년 전에 시작하였다. 그리고 8가구가 포도를 20여년 전부터 재배해 오고 있으며 1가구가 한우를 30여두 사육하고 있다. 밭은 대부분 배과수원으로 바뀌었다. 이러한 변화는 10여년 전부터 밭작물보다는 배가 더 소득이 높아지면서 생긴 현상이다. 마을에서는 2가구가 하우스를 하고 있는데 1가구는 10여년 전부터 장미를 재배하고 있고, 다른 1가구는 5~6년 전부터 상추와 수박을 재배하고 있다.
교통은 편리하다. 사거리까지 걸어 나가 버스를 타기도 하고, 마을 앞에서 광주-봉황간ㆍ광주-영산포간 버스를 이용한다. 주민들의 생필품 구입은 나주장ㆍ남평장ㆍ영산포장ㆍ마트를 이용하고 있다. 일제강점기 때 본 마을에 거주하던 이시가와(石川)가 양잠을 크게 하였다. 약 10만㎡ 규모의 뽕밭이 조성되었는데 지금의 노인정과 우체국도 당시에는 뽕밭이었다고 한다. 광복 이후 김옥두가 인수하여 1963년도까지 양잠을 하였다. 공공기관으로는 금천우체국이 있다. 또한 노인정(永樂堂) 내에는 1974년에 세운 「신성계원영혼추모비 信成契員靈魂追慕碑」와 1994년에 세운 「영락당창건기념비」가 있다.
지명유래와 마을연혁
과거에는 마을 뒤로 산이 있고, 마을 앞으로 강물이 흘렀으며 버드나무가 많이 우거져 있어 세류(細柳)라 칭하였다. 그러나 마을 뒷산은 모두 밭으로 개간하여 현재 그 모습을 찾아볼 수 없고, 영산강 물이 과거에는 마을 앞까지 흘러 들어왔다. 이밖에 지난날 마을 전체가 이시가와(石川)의 뽕밭이었는데 이후 이곳에 집도 짓고 과수도 심었다.
문헌상 마을의 지명이 처음 나온 곳은 1912년 『지방행정구역명칭일람』이다. 이 기록에 의하면 어천면(魚川面) 31개 마을 중 세류리(細柳里)라는 지명이 보인다. 1914년에 행해진 행정구역개편으로 어천면 세류리(細柳里)ㆍ용동(龍洞)ㆍ연동(蓮洞)ㆍ벽류리(碧柳里)일부와 금마산면(金馬山面) 금구리(金九里)가 병합하여 오강리(烏江里)가 되고, 금천면(金川面) 소속으로 바뀐다. 광복 이후 본 마을은 오강2리로 편제되어 있다가 1982년 4리로 분구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
전해오는 말에 의하면 본 마을은 약 180년 전 김해김씨(金海金氏) 사군파 김인택(金仁澤)이 처음으로 입향하였으며, 이후 제주양씨(濟州梁氏) 송촌공파 양상영이 이주해 왔다고 한다. 마을에는 김해김씨 7, 제주양씨 5, 이씨 12, 해주최씨 6, 이천서씨 4, 박씨 4, 금성나씨 2, 강씨 2, 전씨ㆍ조씨ㆍ노씨ㆍ모씨ㆍ백씨ㆍ차씨ㆍ한씨ㆍ황씨ㆍ청주김씨 등 각 1호 총 51가구가 거주하고 있다.
마을조직과 근ㆍ현대적 변화
마을총회는 매년 음력 2월 1일 개최한다. 총회에서는 마을자금의 결산과 마을사업 토론, 2년을 주기로 마을 임원을 선출한다. 그리고 이 날을 리민의 날로 정하여 마을 친목회 주관으로 마을잔치를 연다. 상포계는 1950년에 조직되었으며 45명의 회원이 상례 때 활동하고 있다. 친목회는 45가구가 가입되어 리민의 날 행사를 주관하고 마을자금을 관리한다. 부녀회는 1970년대에 조직되어 40여명의 회원이 친목과 봉사활동 등을 하고 있다. 청년회는 4년 전에 재조직되었는데, 광주와 전라남도에 살고 있는 33명의 마을 출신 청년들이 활동을 하고 있다.
전기는 1960년대 초에 가설되었다. 전화는 행정전화가 1970년대에, 일반전화가 1980년대에 들어왔다. 연료는 기름보일러 51가구이고 취사연료는 대부분의 가구에서 LPG를 사용하고 있다. 상업 활동으로는 방앗간 1, 벽돌공장 1개소, 택시부 1개소 등이 있다. 마을회관은 1동 115㎡으로 1998년에 건립하였으며, 노인정과 사무실로 사용하고 있다.
오강5리 : 신동(新洞)
자연환경과 인문환경
면소재지로 인근에 초등학교와 상가가 밀집하고 있는 교육과 금융의 중심지이다. 동쪽으로 석전리수랑마을이 있고,서쪽으로 원곡리 미곡마을이 있다. 남쪽으로 금구마을이 있고, 북쪽으로 원곡리 광탄마을이 위치하고있다. 마을에는 60가구, 170여명이 거주하고 있는데 몇몇 농가를 제외하고 대부분 상업에 종사하고 있으며, 토착인보다 외지인이 더 많이 들어와 살고 있다.
주산물은 쌀과 배이고, 농경지는 마을 뒤와 방목들에 펼쳐져 있다. 그리고 영산강 물과 관정을 이용하여 농업용수를 공급하고 있다. 마을에는 논 3.5㏊, 과수원을 포함하여 밭 5㏊가 있고 농경지 토양은 점질토로 농사를 짓기에 적당하며 대부분의 농가가 일모작을 하고 있다. 15가구가 배를 재배하고 있는데 박성남ㆍ박항무가 25년 전에 시작하였으며, 밭은 대부분 과수원으로 변경되어 배를 재배하고 있다. 교통은 편리하다. 마을 앞 금천사거리에서 버스를 이용하고 생필품 구입은 나주장ㆍ남평장ㆍ영산포장ㆍ마트를 이용하고 있다. 마을에 소재하고 있는 공공기관으로는 금천초등학교, 금천농협, 신용협동조합, 나주소방서 금천출장소, 금천면농업인상담소가 있다. 이밖에 농업인상담소 인근에 과거에는 시장이 있었으며 몇 년 동안 운영되다가 1980년대에 폐쇄되었다.
지명유래와 마을연혁
1992년 오강리 1구인 금구에서 분구되면서 마을 이름을 새로운 마을이라 하여 신동(新洞)이라 하였다. 마을에는 김씨 12, 이씨 9, 최씨 5, 박씨 5, 양씨 5, 정씨 5, 조씨 4, 임씨 2, 나씨 2, 강씨 2, 송씨 2, 장씨ㆍ차씨ㆍ오씨ㆍ한씨ㆍ안씨ㆍ배씨ㆍ손씨 7호가 각 1호씩 총 60가구가 거주하고 있다.
마을조직과 근ㆍ현대적 변화
마을총회는 매년 양력 1월 1일에 개최한다. 총회에서는 마을자금의 결산과 마을사업 토론, 2년을 주기로 마을 임원을 선출한다. 상포계는 1구인 금구마을과 함께 하고 있다. 1970년에 조직되었으며 43명의 회원이 초상이 났을 때 상부상조를 목적으로 하고 있다. 부녀회는 1992년에 조직하였는데 25명의 회원이 친목과 봉사활동 그리고 마을 일 돕기 등을 하고 있다. 전기는 1960년대 초에 가설되었고 전화는 일반전화가 1980년대에 들어왔다. 연료는 기름보일러 60가구이고 취사연료는 대부분의 가구에서 LPG를 사용하고 있다.
상업 활동으로는 슈퍼 1, 마트 1, 건강원 3, 식당 6, 다방 2, 농용자재백화점 1, 통닭집 1, 오토바이센터 1, 중화요리 2, 수예점 1, 금은방 1, 사진관 1, 한약방 1, 약국 1, 미용실 3, 식육점 1, 이용원 1, 체육사 1, 세탁소 1, 자전거포 1, 가전제품 2, 커피숍 1, 문구사 2, 부동산 1, 포목집 1, 상회 1, 술집 1, 찜질방 1, 카센터 1, 농약집 2개소 등이다. 이밖에 일제강점기부터 노약방(한약방)이 운영되다가 67년 전 광암리로 옮겨졌으며, 이 자리에 정창원이 초가집을 짓고 식당을 운영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