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동리
- 날짜
- 2020.04.16
- 조회수
- 930
- 등록자
- 관리자
고동1리 : 동고안(東古岸)ㆍ고안(古岸)
자연환경과 인문환경
동고안과 고안마을은 면소재지에서 남쪽으로 약 1.5㎞ 지점에 위치하고 있다. 마을 앞으로는 금천-봉황간, 금천-영산포간 지방도로가 개설되어 있으며, 마을 옆으로는 (주)화인코리아 공장이 들어서 있다. 이밖에 마을 뒤로는 ‘무제등’이 있어 과거 가뭄이 들면 이곳에서 기우제를 지내기도 하였다. 동쪽으로 석전리가 있고, 서쪽으로 서고안마을이 있으며 남쪽으로 광암리가 있고, 북쪽으로 오강리가 있다. 마을에는 81가구, 250여명이 거주하고 있는데 대부분 농업에 종사하고 있으며, 주산물은 쌀과 배이다. 그러나 마을에 (주)화인코리아 공장이 있기 때문에 외지인들이 많은 편이고 유동인구도 많다.
농경지는 방목들과 영산강 안 하천부지에 펼쳐져 있으며, 영산강물을 한 곳의 양수장을 통해 농업용수로 사용하고 있다. 이밖에 과수원과 밭은 개인 관정을 이용하고 있다. 밭과 과수원에서는 배ㆍ복숭아ㆍ포도ㆍ콩ㆍ고추ㆍ배추ㆍ참깨 등을 재배하고 있는데 8년 전부터 밭을 과수원으로 용도를 변경하는 추세이다.
농경지 토양은 점질토와 황토로 농사짓기에 적당하며, 대부분의 농가가 이모작을 하고 있다. 마을에서는 20여가구가 배를 재배하고 있는데 주민 박동준이 30여년 전에 시작하였으며 7가구는 복숭아를 재배하고 있고, 김양규가 10여년 전에 시작하였다. 이밖에 2가구가 포도 재배를 2001년부터 시작하였고 5가구가 한우와 젖소를 300여두 사육하고 있다. 교통은 좋은 편으로 마을 입구에서 광주-봉황간, 광주-영산포간 버스를 이용하고 생필품 구입은 나주장ㆍ남평장ㆍ영산포장ㆍ마트를 이용하고 있다.
이밖에 속칭 ‘뒷깽이’란 곳에 상여집이 있고 상여틀이 보관되어 있는데 상여는 개인이 구입하여 사용한다. 그리고 음력 1월 15일에 마을에서는 풍물을 치고 흥겹게 논다. 이외 마을에는 고동교회가 있으며, (주)화인코리아 건물이 있는 곳이 과거에는 정부 곡식창고인 창등이 있었던 곳이다.
지명유래와 마을연혁
고려시대 때 신안주씨ㆍ김해김씨ㆍ전주이씨ㆍ장흥마씨ㆍ나주나씨 등 여러 성씨가 궁 형국인 여기에 터를 잡았다고 전해온다. 마을은 영산강의 범람으로 자주 물에 잠겼고, 이때 마을과 농작물 피해를 막기 위하여 온 주민이 합심 단결하여 둑을 쌓고 수해를 막았다고 한다. 그로 인하여 마을 이름을 옛고ㆍ언덕안자를 써서 고안(古岸)이라 칭하였다. 그러나 1992년 고동4리가 분리되어 나가면서 고안마을은 동고안(東古岸)ㆍ서고안(西古岸)ㆍ고안(古岸)으로 마을 이름이 새롭게 바뀌었다.
문헌상 마을의 이름이 처음 나온 곳은 1912년 『지방행정구역명칭일람』이다. 이 기록에 어천면(魚川面) 31개 마을 중 고안리(古岸里)라는 지명이 보인다. 1914년에 행해진 행정구역개편으로 어천면 고안리ㆍ자모리(自毛里)ㆍ석동(石洞)ㆍ벽류리(碧柳里)일부와 병합하여 고동리(古洞里)가 되고, 금천면(金川面)에 속하게 된다. 광복 이후 본 마을은 고동1리로 편제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주민들의 말에 의하면 마을에 처음 정착한 성씨는 신안주씨라고 한다. 그러나 현재 마을에 신안주씨가 살고 있지 않아 자세한 입향 내력은 알 수 없다. 신안주씨 이후 김해김씨ㆍ전주이씨ㆍ장흥마씨ㆍ나주나씨 등 여러 성씨가 입향하여 마을을 형성하였다. 마을에는 김씨 22, 최씨 6, 박씨 6, 송씨 5, 이씨 5, 나씨 5, 조씨 4, 황씨 3, 안씨 3, 변씨 3, 서씨 3, 임씨 2, 문씨 2, 강씨ㆍ곽씨ㆍ노씨ㆍ마씨ㆍ배씨ㆍ성씨ㆍ유씨ㆍ장씨ㆍ정씨ㆍ주씨ㆍ한씨ㆍ홍씨 등 12호 총 81가구가 거주하고 있다.
마을조직과 근ㆍ현대적 변화
마을총회는 매년 양력 12월 30일에 개최한다. 총회에서는 마을자금의 결산과 마을사업 토론 그리고 2년을 주기로 마을 임원을 선출한다. 위친계(상포계)는 동고안과 서고안이 함께 1930년대에 조직하였으며 55명의 회원이 초상이 났을 때 상부상조를 목적으로 하고 있다. 상신계는 동고안과 서고안 주민이 함께 1988년 조직하였으며 72명의 회원이 상례 때 상부상조를 목적으로 하고 있다. 부녀회는 1992년 분구가 되면서 새롭게 조직되었으며 40여명의 회원이 친목과 봉사활동 등을 하고 있다. 청년회는 2년 전에 소멸되었으며 현재 자금만 관리하고 있다.
전기는 1960년대 초에 가설되었고 전화는 행정전화가 1970년대에, 일반전화가 1980년대에 들어왔다. 연료는 연탄보일러 5가구, 기름보일러 75가구이며 취사연료는 대부분의 가구에서 LPG를 사용하고 있다. 상업활동으로는 정미소 1개소, 식육점과 슈퍼 1개소, 구판장 1개소, 떡방앗간 1개소, (주)화인코리아 공장 등이 있다. 이중 (주)화인코리아는 전신인 금성축산이 1965년 3월에 설립되었으며, 1974년 12월 (주)나주식품공업을 설립하였다. 이후 1994년 (주)나주식품공업에서 (주)화인코리아로 상호를 변경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다.
마을회관은 1동 66㎡으로 1960년대 건립되었고 119㎡ 규모의 새로운 마을회관을 건립 중에 있다. 동각(우산각)은 1동이 있는데 동고안과 서고안이 공동으로 사용하고 있다. 마을은 1933년 큰 홍수가 나서 마을 안까지 범람하였던 일과 1967년과 1968년 가뭄, 그리고 1999년과 2002년 태풍으로 많은 피해를 입기도 하였다. 이밖에 마을에서는 음력 2월 1일을 ‘리민의 날’로 정하여 동고안과 서고안 주민들이 함께 음식을 장만하고 풍물을 치면서 마을잔치를 행하고 있다.
고동2리 : 자모(自毛)
자연환경과 인문환경
자모마을은 면소재지에서 남쪽으로 약 2㎞ 지점에 위치하고 있다. 마을 앞으로는 넓게 하우스가 펼쳐져 있는데 마을의 8농가가 4만㎡의 땅에서 토마토ㆍ호박ㆍ고추ㆍ오이 등의 시설원예를 하고 있다. 이 하우스 시설은 1995년 시 지원사업으로 시행되었으며 21세기 영농조합법인이 운영하고 있다.
마을 동쪽으로는 석전리와 동악리가 있고, 서쪽으로는 영산포가 있다. 남쪽으로 석동마을이 있고, 북쪽으로 동고안과 서고안마을이 있다.
마을에는 39가구, 100여명이 거주하고 있는데 대부분 농업에 종사하고 있으며, 주산물은 쌀과 배 그리고 채소류이다. 농경지는 방목들과 영산강 안 하천부지에 펼쳐져 있으며, 영산강의 물과 8개의 관정을 이용하여 농업용수가 공급되고 있다. 마을에는 논 23㏊, 밭 10㏊가 있는데 토양은 점질토와 황토로 농사짓기에 적당한 편이다. 그리고 많은 농가가 일모작과 이모작을 하고 있다.
밭과 과수원에서는 배ㆍ복숭아ㆍ포도ㆍ고추ㆍ참깨 등을 주로 재배하고 있는데 많은 논과 밭이 1995년경부터 하우스와 과수원으로 용도 변경되어 운영되고 있다.
21가구가 배를 재배하고 있는데 김영선(작고)이 일제강점기에 처음 시작하였고 복숭아는 4가구가 재배하고 있으며, 임일순이 40여년 전에 시작하였다. 그리고 포도를 3가구가 재배하고 있는데 김영선(작고)이 일제강점기 때부터 시작하였다. 교통은 광주-봉황간, 광주-영산포간 시내버스를 이용하며, 주민들의 생필품 구입은 나주장ㆍ남평장ㆍ영산포장ㆍ마트를 이용하고 있다.
지명유래와 마을연혁
마을은 과거 삼체오룡(三替五龍)이라는 이름으로 불리웠는데 세봉산(洗鳳山)의 다섯 마리 용이 마을 주위에 잠겨있다는 데서 유래되었다. 그리고 이후 현재의 명칭인 자모(自毛)로 개칭되었다.
문헌을 통해 마을의 이름이 처음 나온 곳은 1789년 《호구총수》로 어천면(魚川面)의 13개 마을 중 한 마을로 ‘자모롱리(自毛弄里)’라는 지명이 보인다. 그후 1912년 『지방행정구역명칭일람』는 어천면 31개 마을 중 자모리(自毛里)라는 지명이 보인다. 1914년에 행해진 행정구역개편으로 어촌면 고안리(古岸里)ㆍ자모리ㆍ석동(石洞)ㆍ벽류리(碧柳里) 일부와 병합하여 고동리(古洞里)가 되고, 금천면(金川面) 소속으로 바뀐다. 광복 이후 본 마을은 고동2리로 편제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
마을에 처음으로 입향한 성씨는 김해김씨(金海金氏) 해사공파(海史公派)이다. 파조(派祖)는 시조인 수로왕(首露王) 58세손인 치서(致瑞, 1572~?)인데 호는 해사(海史)이고 부인은 밀양박씨이다. 남원에서 금천으로 입향한 나주입향조이다. 이 마을 입향조는 치서의 5세손인 옥필(玉弼)이다. 옥필(1696~?)의 자는 사진(士珍)이고 부인은 천안김씨이며, 묘는 금천면 광암리에 있다. 옥필은 인근 광암리 광석마을에서 이곳 자모로 이거하였다. 인근에서는 이곳 자모에 살고 있는 김해김씨를 가리켜 ‘너바위김씨’라고 부른다.
마을에는 김씨 14, 이씨 4, 임씨 3, 강씨 3, 윤씨 3, 조씨 2, 박씨 2, 배씨 2, 송씨 2, 유씨 2, 최씨 1, 정씨 1호 등 총 39가구가 거주하고 있다.
마을조직과 근ㆍ현대적 변화
마을총회는 매년 양력 12월 20일에 개최한다. 총회에서는 마을 자금의 결산과 마을 사업 토론 그리고 마을 임원을 선출한다. 모청계와 상신계는 고동리 2구와 3구 마을사람들로 구성되어 있으며, 50여년 전에 조직되었다. 30가구가 가입되어 애경사 때 상부상조를 한다. 또한 본 마을과 석동마을 입구에는 1979년에 세운 와 가 있다.
부녀회는 1970년께 조직되었으며 32명의 회원이 봉사활동과 친목을 목적으로 하고 있다. 청년회는 1995년 새로 조직되었으며 8명의 회원이 마을발전과 경로행사를 주관하고 있다.
전기는 1960년대에 가설되었고 전화는 행정전화가 1970년대, 일반전화가 1980년대에 들어왔다. 연료는 연탄보일러 3가구, 기름보일러 31가구, 심야전기보일러 1가구이며 취사연료는 대부분의 가구에서 LPG를 사용하고 있다.
마을회관은 1동 86㎡으로 2002년 건립하여 경로당과 사무실로 사용하고 있다. 마을공동창고는 1동 20㎡으로 1970년대에 건립하였다. 이밖에 동각(우산각) 2동이 있다.
본 마을은 1970년대 모범마을로 선정되기도 하였으며, 매년 5월 8일 어버이날에는 청년회 주관으로 경로잔치를 행하고 있다.
고동3리 : 석동(石洞)
자연환경과 인문환경
석동은 면소재지에서 남쪽으로 약 2.2㎞ 지점에 위치한다. 동쪽으로 광암리 안석마을이 있고, 서쪽으로 영산포가 있다. 남쪽으로 신천리 1구 구내마을이 있고, 북쪽으로 자모마을이 있다.
마을에는 42가구, 120여명이 거주하고 있는데 대부분 농업에 종사하고 있으며, 주산물은 쌀과 배이다.
농경지는 마을 앞 방목들과 영산강 안 하천부지에 펼쳐져 있으며, 영산강의 물과 관정을 이용하여 농업용수를 공급한다.
마을에는 논 25㏊, 밭 15㏊가 있으며 농경지 토양은 점질토와 황토로 농사짓기에 적당한 편이다. 그리고 많은 농가가 일모작과 이모작을 하고 있다. 이밖에 마을 앞 방목들은 1965년ㆍ1977년ㆍ1995년 등 세차례 경지정리를 하였다.
밭과 과수원에서는 배ㆍ배추ㆍ고추ㆍ참깨 등을 주로 재배하고 있는데 밭은 10여년 전부터 과수원으로 용도 변경되어 사용하고 있다. 마을에서는 18가구가 배를 재배하고 있는데 김금두가 1965년경에 시작하였다. 그리고 과거에는 복숭아를 많이 재배하였으나 10여년 전부터 모두 배 재배로 전환하였다.
교통은 광주-봉황간, 광주-영산포간 버스가 운행되고 있다. 따라서 주민들의 생필품 구입은 나주장ㆍ남평장ㆍ영산포장ㆍ마트를 이용한다.
지명유래와 마을연혁
마을 인근에 큰 바위가 있어 석동(石洞)이라 하였다. 문헌상 마을의 이름이 처음 나온 곳은 1912년 『지방행정구역명칭일람』이다. 이에 의하면 어천면(魚川面) 31개 마을 중 석동리(石洞里)라는 지명이 보인다. 1914년에 행해진 행정구역개편으로 어촌면 고안리ㆍ자모리(自毛里)ㆍ석동(石洞)ㆍ벽류리(碧柳里)일부와 병합하여 고동리(古洞里)가 되고, 금천면(金川面) 소속으로 바뀐다. 광복 이후 본 마을은 고동3리로 편제되어 현재에 이른다.
마을에 처음 입향한 성씨는 김해김씨(金海金氏) 해사공파(海史公派)이고 이 마을의 입향조는 김해김씨 나주입향조 치서(致瑞)의 3세손인 예수(禮洙, 1652~?)이다. 그의 자는 선장(善長)이고 부인은 광산김씨이며, 묘는 금천면 광암리에 있다. 예수는 인근 광암리 광석마을에서 이거하였다고 한다. 후손이 번창하여 현재 치서의 10세손인 김금두(남, 76세, 제보자)와 일가(一家)들이 마을에 살고 있다. 문중관련 유적으로는 마을 입구에 있는 「효부보성선씨기행비 孝婦寶城宣氏紀行碑」와 「효열부탐진최씨행적비 孝烈婦耽津崔氏行蹟碑」가 있다.
마을에는 김해김씨 20, 광산김씨 3, 경주김씨 2, 박씨 2, 한씨 1, 황씨 1, 조씨 1, 최씨 1, 송씨 1, 유씨 1, 강씨 1, 기타 8호 등 총 42가구가 거주하고 있다.
마을조직과 근ㆍ현대적 변화
마을총회는 매년 양력 12월 20일에 개최한다. 총회에서는 마을 자금의 결산과 마을 사업 토론 그리고 마을 임원을 선출한다.
모청계와 상신계는 고동리 2구와 3구 마을사람들로 구성되어 있으며, 50여년 전에 조직되었다. 30가구가 가입되어 애경사 때 상부상조를 한다. 또한 본 마을과 석동마을 입구에는 1979년에 세운 와 가 있다.
부녀회는 1970년께 조직되었으며 32명의 회원이 봉사활동과 친목을 목적으로 하고 있다. 청년회는 1995년 새로 조직되었으며 8명의 회원이 마을발전과 경로행사를 주관하고 있다.
전기는 1960년대에 가설되었고 전화는 행정전화가 1970년대, 일반전화가 1980년대에 들어왔다. 연료는 연탄보일러 3가구, 기름보일러 31가구, 심야전기보일러 1가구이며 취사연료는 대부분의 가구에서 LPG를 사용하고 있다.
마을회관은 1동 86㎡으로 2002년 건립하여 경로당과 사무실로 사용하고 있다. 마을공동창고는 1동 20㎡으로 1970년대에 건립하였다. 이밖에 동각(우산각) 2동이 있다.
본 마을은 1970년대 모범마을로 선정되기도 하였으며, 매년 5월 8일 어버이날에는 청년회 주관으로 경로잔치를 행하고 있다.
고동4리 : 서고안(西古岸)
자연환경과 인문환경
서고안 마을은 면소재지에서 남쪽으로 약 1.5㎞ 지점에 위치한다. 마을 앞으로 방목들(고동들)이 펼쳐져 있으며, 마을 옆으로는 금천-봉황간ㆍ금천-영산포간 지방도로와 (주)화인코리아 공장이 있다. 그리고 마을 앞에 펼쳐져 있는 넓은 들녘은 ‘방목들’로 불려진다.
마을의 동쪽으로는 동고안마을이 있고, 서쪽으로 방목들(고동들)이 있으며 남쪽으로 자모마을이 있고, 북쪽으로는 오강리가 있다. 마을에는 65가구, 150여명이 거주하고 있는데 대부분 농업에 종사하고 있으며, 주산물은 쌀과 배이다. 농경지는 방목들과 영산강 안 하천부지에 펼쳐져 있으며, 토양은 점질토와 황토이고 농업용수는 영산강 물을 한 곳의 양수장을 통해 공급하고 있다. 이밖에 과수원과 밭은 개인 관정을 이용하고 있다.
밭과 과수원에서는 배ㆍ콩ㆍ고추ㆍ배추ㆍ참깨 등을 재배하고 있는데 8년 전부터 밭을 과수원으로 바꾸었다. 마을에서는 20여가구가 배를 재배하고 있는데 박병호가 30여년 전에 시작하였다. 교통은 좋은 편이다. 마을 입구에서 광주-봉황간, 광주-영산포간 버스를 이용하며 주민들의 생필품 구입은 나주장ㆍ남평장ㆍ영산포장ㆍ마트를 이용하고 있다. 마을에 소재하고 있는 공공기관으로는 나주배연구소가 있고 이밖에 살롬교회가 위치하고 있다.
지명유래와 마을연혁
1992년 고동리 4구로 분구되어 나오면서 고안의 서쪽에 위치하고 있어 서고안(西古岸)이라 하였다. 문헌상 마을 이름이 처음 나온 곳은 1912년 『지방행정구역명칭일람』이다. 이 기록에 의하면 어천면(魚川面) 31개 마을 중 고안리(古岸里)라는 지명이 보인다. 1914년 행해진 행정구역개편으로 어촌면 고안리ㆍ자모리(自毛里)ㆍ석동(石洞)ㆍ벽류리(碧柳里)일부와 병합하여 고동리(古洞里)가 되고, 금천면(金川面) 소속으로 바뀐다. 광복 이후 본 마을은 고동1리로 편제되어 있다가 1992년 고동4리로 분구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
마을사람들의 전언에 의하면 마을을 처음 형성한 성씨는 신안주씨라고 한다. 그러나 현재 마을에 신안주씨는 거주하고 있지 않아 자세한 입향 내력은 알 수 없다. 신안주씨 이후 김해김씨ㆍ전주이씨ㆍ장흥마씨ㆍ나주나씨 등 여러 성씨들이 입향하여 마을을 형성하였다. 현재 마을에는 김씨 20, 이씨 15, 박씨 6, 최씨 5, 손씨ㆍ윤씨ㆍ안씨ㆍ유씨ㆍ마씨 등 각 2호, 신씨ㆍ심씨ㆍ백씨ㆍ서씨ㆍ문씨ㆍ고씨ㆍ장씨ㆍ조씨ㆍ황씨 등 각 1호 총 65가구가 거주하고 있다.
마을조직과 근ㆍ현대적 변화
마을총회는 매년 양력 12월 30일에 개최하는데 마을자금의 결산과 마을사업 토론 그리고 2년을 주기로 마을 임원을 선출한다. 위친계와 상포계는 동고안과 서고안이 함께 조직하여 운영하고 있다. 부녀회는 1992년 분리가 되면서 새로 조직되었으며 50여명의 회원이 친목과 봉사활동을 하고 있다. 청년회는 1992년 분리되면서 조직되었으며 30명의 회원이 친목과 봉사활동 그리고 마을 일 돕기 등을 하고 있다.
전기는 1960년대 초에 가설되었고 전화는 행정전화가 1970년대에, 일반전화가 1980년대에 들어왔다. 연료는 연탄보일러 2가구, 기름보일러 66가구, 심야전기보일러 2가구 등이고 취사연료는 대부분의 가구에서 LPG를 사용하고 있다. 상업 활동으로는 이발소 1개소, 슈퍼 1개소, 건강원 1개소, 미진식품공장(과자류 생산), (주)화인코리아 공장 등이 있다. 동각(우산각)은 1동이 있는데 동고안과 서고안이 공동으로 사용하고 있다.
마을은 1933년에 홍수가 나서 마을 안까지 범람하였으며 1967년과 1968년의 가뭄, 1999년과 2002년에는 태풍으로 많은 피해를 입었다. 이밖에 음력 2월 1일을 리민의 날로 정하여 동고안과 서고안 주민들이 함께 음식을 장만하고 풍물을 치면서 마을잔치를 행하고 있다.
자연환경과 인문환경
동고안과 고안마을은 면소재지에서 남쪽으로 약 1.5㎞ 지점에 위치하고 있다. 마을 앞으로는 금천-봉황간, 금천-영산포간 지방도로가 개설되어 있으며, 마을 옆으로는 (주)화인코리아 공장이 들어서 있다. 이밖에 마을 뒤로는 ‘무제등’이 있어 과거 가뭄이 들면 이곳에서 기우제를 지내기도 하였다. 동쪽으로 석전리가 있고, 서쪽으로 서고안마을이 있으며 남쪽으로 광암리가 있고, 북쪽으로 오강리가 있다. 마을에는 81가구, 250여명이 거주하고 있는데 대부분 농업에 종사하고 있으며, 주산물은 쌀과 배이다. 그러나 마을에 (주)화인코리아 공장이 있기 때문에 외지인들이 많은 편이고 유동인구도 많다.
농경지는 방목들과 영산강 안 하천부지에 펼쳐져 있으며, 영산강물을 한 곳의 양수장을 통해 농업용수로 사용하고 있다. 이밖에 과수원과 밭은 개인 관정을 이용하고 있다. 밭과 과수원에서는 배ㆍ복숭아ㆍ포도ㆍ콩ㆍ고추ㆍ배추ㆍ참깨 등을 재배하고 있는데 8년 전부터 밭을 과수원으로 용도를 변경하는 추세이다.
농경지 토양은 점질토와 황토로 농사짓기에 적당하며, 대부분의 농가가 이모작을 하고 있다. 마을에서는 20여가구가 배를 재배하고 있는데 주민 박동준이 30여년 전에 시작하였으며 7가구는 복숭아를 재배하고 있고, 김양규가 10여년 전에 시작하였다. 이밖에 2가구가 포도 재배를 2001년부터 시작하였고 5가구가 한우와 젖소를 300여두 사육하고 있다. 교통은 좋은 편으로 마을 입구에서 광주-봉황간, 광주-영산포간 버스를 이용하고 생필품 구입은 나주장ㆍ남평장ㆍ영산포장ㆍ마트를 이용하고 있다.
이밖에 속칭 ‘뒷깽이’란 곳에 상여집이 있고 상여틀이 보관되어 있는데 상여는 개인이 구입하여 사용한다. 그리고 음력 1월 15일에 마을에서는 풍물을 치고 흥겹게 논다. 이외 마을에는 고동교회가 있으며, (주)화인코리아 건물이 있는 곳이 과거에는 정부 곡식창고인 창등이 있었던 곳이다.
지명유래와 마을연혁
고려시대 때 신안주씨ㆍ김해김씨ㆍ전주이씨ㆍ장흥마씨ㆍ나주나씨 등 여러 성씨가 궁 형국인 여기에 터를 잡았다고 전해온다. 마을은 영산강의 범람으로 자주 물에 잠겼고, 이때 마을과 농작물 피해를 막기 위하여 온 주민이 합심 단결하여 둑을 쌓고 수해를 막았다고 한다. 그로 인하여 마을 이름을 옛고ㆍ언덕안자를 써서 고안(古岸)이라 칭하였다. 그러나 1992년 고동4리가 분리되어 나가면서 고안마을은 동고안(東古岸)ㆍ서고안(西古岸)ㆍ고안(古岸)으로 마을 이름이 새롭게 바뀌었다.
문헌상 마을의 이름이 처음 나온 곳은 1912년 『지방행정구역명칭일람』이다. 이 기록에 어천면(魚川面) 31개 마을 중 고안리(古岸里)라는 지명이 보인다. 1914년에 행해진 행정구역개편으로 어천면 고안리ㆍ자모리(自毛里)ㆍ석동(石洞)ㆍ벽류리(碧柳里)일부와 병합하여 고동리(古洞里)가 되고, 금천면(金川面)에 속하게 된다. 광복 이후 본 마을은 고동1리로 편제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주민들의 말에 의하면 마을에 처음 정착한 성씨는 신안주씨라고 한다. 그러나 현재 마을에 신안주씨가 살고 있지 않아 자세한 입향 내력은 알 수 없다. 신안주씨 이후 김해김씨ㆍ전주이씨ㆍ장흥마씨ㆍ나주나씨 등 여러 성씨가 입향하여 마을을 형성하였다. 마을에는 김씨 22, 최씨 6, 박씨 6, 송씨 5, 이씨 5, 나씨 5, 조씨 4, 황씨 3, 안씨 3, 변씨 3, 서씨 3, 임씨 2, 문씨 2, 강씨ㆍ곽씨ㆍ노씨ㆍ마씨ㆍ배씨ㆍ성씨ㆍ유씨ㆍ장씨ㆍ정씨ㆍ주씨ㆍ한씨ㆍ홍씨 등 12호 총 81가구가 거주하고 있다.
마을조직과 근ㆍ현대적 변화
마을총회는 매년 양력 12월 30일에 개최한다. 총회에서는 마을자금의 결산과 마을사업 토론 그리고 2년을 주기로 마을 임원을 선출한다. 위친계(상포계)는 동고안과 서고안이 함께 1930년대에 조직하였으며 55명의 회원이 초상이 났을 때 상부상조를 목적으로 하고 있다. 상신계는 동고안과 서고안 주민이 함께 1988년 조직하였으며 72명의 회원이 상례 때 상부상조를 목적으로 하고 있다. 부녀회는 1992년 분구가 되면서 새롭게 조직되었으며 40여명의 회원이 친목과 봉사활동 등을 하고 있다. 청년회는 2년 전에 소멸되었으며 현재 자금만 관리하고 있다.
전기는 1960년대 초에 가설되었고 전화는 행정전화가 1970년대에, 일반전화가 1980년대에 들어왔다. 연료는 연탄보일러 5가구, 기름보일러 75가구이며 취사연료는 대부분의 가구에서 LPG를 사용하고 있다. 상업활동으로는 정미소 1개소, 식육점과 슈퍼 1개소, 구판장 1개소, 떡방앗간 1개소, (주)화인코리아 공장 등이 있다. 이중 (주)화인코리아는 전신인 금성축산이 1965년 3월에 설립되었으며, 1974년 12월 (주)나주식품공업을 설립하였다. 이후 1994년 (주)나주식품공업에서 (주)화인코리아로 상호를 변경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다.
마을회관은 1동 66㎡으로 1960년대 건립되었고 119㎡ 규모의 새로운 마을회관을 건립 중에 있다. 동각(우산각)은 1동이 있는데 동고안과 서고안이 공동으로 사용하고 있다. 마을은 1933년 큰 홍수가 나서 마을 안까지 범람하였던 일과 1967년과 1968년 가뭄, 그리고 1999년과 2002년 태풍으로 많은 피해를 입기도 하였다. 이밖에 마을에서는 음력 2월 1일을 ‘리민의 날’로 정하여 동고안과 서고안 주민들이 함께 음식을 장만하고 풍물을 치면서 마을잔치를 행하고 있다.
고동2리 : 자모(自毛)
자연환경과 인문환경
자모마을은 면소재지에서 남쪽으로 약 2㎞ 지점에 위치하고 있다. 마을 앞으로는 넓게 하우스가 펼쳐져 있는데 마을의 8농가가 4만㎡의 땅에서 토마토ㆍ호박ㆍ고추ㆍ오이 등의 시설원예를 하고 있다. 이 하우스 시설은 1995년 시 지원사업으로 시행되었으며 21세기 영농조합법인이 운영하고 있다.
마을 동쪽으로는 석전리와 동악리가 있고, 서쪽으로는 영산포가 있다. 남쪽으로 석동마을이 있고, 북쪽으로 동고안과 서고안마을이 있다.
마을에는 39가구, 100여명이 거주하고 있는데 대부분 농업에 종사하고 있으며, 주산물은 쌀과 배 그리고 채소류이다. 농경지는 방목들과 영산강 안 하천부지에 펼쳐져 있으며, 영산강의 물과 8개의 관정을 이용하여 농업용수가 공급되고 있다. 마을에는 논 23㏊, 밭 10㏊가 있는데 토양은 점질토와 황토로 농사짓기에 적당한 편이다. 그리고 많은 농가가 일모작과 이모작을 하고 있다.
밭과 과수원에서는 배ㆍ복숭아ㆍ포도ㆍ고추ㆍ참깨 등을 주로 재배하고 있는데 많은 논과 밭이 1995년경부터 하우스와 과수원으로 용도 변경되어 운영되고 있다.
21가구가 배를 재배하고 있는데 김영선(작고)이 일제강점기에 처음 시작하였고 복숭아는 4가구가 재배하고 있으며, 임일순이 40여년 전에 시작하였다. 그리고 포도를 3가구가 재배하고 있는데 김영선(작고)이 일제강점기 때부터 시작하였다. 교통은 광주-봉황간, 광주-영산포간 시내버스를 이용하며, 주민들의 생필품 구입은 나주장ㆍ남평장ㆍ영산포장ㆍ마트를 이용하고 있다.
지명유래와 마을연혁
마을은 과거 삼체오룡(三替五龍)이라는 이름으로 불리웠는데 세봉산(洗鳳山)의 다섯 마리 용이 마을 주위에 잠겨있다는 데서 유래되었다. 그리고 이후 현재의 명칭인 자모(自毛)로 개칭되었다.
문헌을 통해 마을의 이름이 처음 나온 곳은 1789년 《호구총수》로 어천면(魚川面)의 13개 마을 중 한 마을로 ‘자모롱리(自毛弄里)’라는 지명이 보인다. 그후 1912년 『지방행정구역명칭일람』는 어천면 31개 마을 중 자모리(自毛里)라는 지명이 보인다. 1914년에 행해진 행정구역개편으로 어촌면 고안리(古岸里)ㆍ자모리ㆍ석동(石洞)ㆍ벽류리(碧柳里) 일부와 병합하여 고동리(古洞里)가 되고, 금천면(金川面) 소속으로 바뀐다. 광복 이후 본 마을은 고동2리로 편제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
마을에 처음으로 입향한 성씨는 김해김씨(金海金氏) 해사공파(海史公派)이다. 파조(派祖)는 시조인 수로왕(首露王) 58세손인 치서(致瑞, 1572~?)인데 호는 해사(海史)이고 부인은 밀양박씨이다. 남원에서 금천으로 입향한 나주입향조이다. 이 마을 입향조는 치서의 5세손인 옥필(玉弼)이다. 옥필(1696~?)의 자는 사진(士珍)이고 부인은 천안김씨이며, 묘는 금천면 광암리에 있다. 옥필은 인근 광암리 광석마을에서 이곳 자모로 이거하였다. 인근에서는 이곳 자모에 살고 있는 김해김씨를 가리켜 ‘너바위김씨’라고 부른다.
마을에는 김씨 14, 이씨 4, 임씨 3, 강씨 3, 윤씨 3, 조씨 2, 박씨 2, 배씨 2, 송씨 2, 유씨 2, 최씨 1, 정씨 1호 등 총 39가구가 거주하고 있다.
마을조직과 근ㆍ현대적 변화
마을총회는 매년 양력 12월 20일에 개최한다. 총회에서는 마을 자금의 결산과 마을 사업 토론 그리고 마을 임원을 선출한다. 모청계와 상신계는 고동리 2구와 3구 마을사람들로 구성되어 있으며, 50여년 전에 조직되었다. 30가구가 가입되어 애경사 때 상부상조를 한다. 또한 본 마을과 석동마을 입구에는 1979년에 세운 와 가 있다.
부녀회는 1970년께 조직되었으며 32명의 회원이 봉사활동과 친목을 목적으로 하고 있다. 청년회는 1995년 새로 조직되었으며 8명의 회원이 마을발전과 경로행사를 주관하고 있다.
전기는 1960년대에 가설되었고 전화는 행정전화가 1970년대, 일반전화가 1980년대에 들어왔다. 연료는 연탄보일러 3가구, 기름보일러 31가구, 심야전기보일러 1가구이며 취사연료는 대부분의 가구에서 LPG를 사용하고 있다.
마을회관은 1동 86㎡으로 2002년 건립하여 경로당과 사무실로 사용하고 있다. 마을공동창고는 1동 20㎡으로 1970년대에 건립하였다. 이밖에 동각(우산각) 2동이 있다.
본 마을은 1970년대 모범마을로 선정되기도 하였으며, 매년 5월 8일 어버이날에는 청년회 주관으로 경로잔치를 행하고 있다.
고동3리 : 석동(石洞)
자연환경과 인문환경
석동은 면소재지에서 남쪽으로 약 2.2㎞ 지점에 위치한다. 동쪽으로 광암리 안석마을이 있고, 서쪽으로 영산포가 있다. 남쪽으로 신천리 1구 구내마을이 있고, 북쪽으로 자모마을이 있다.
마을에는 42가구, 120여명이 거주하고 있는데 대부분 농업에 종사하고 있으며, 주산물은 쌀과 배이다.
농경지는 마을 앞 방목들과 영산강 안 하천부지에 펼쳐져 있으며, 영산강의 물과 관정을 이용하여 농업용수를 공급한다.
마을에는 논 25㏊, 밭 15㏊가 있으며 농경지 토양은 점질토와 황토로 농사짓기에 적당한 편이다. 그리고 많은 농가가 일모작과 이모작을 하고 있다. 이밖에 마을 앞 방목들은 1965년ㆍ1977년ㆍ1995년 등 세차례 경지정리를 하였다.
밭과 과수원에서는 배ㆍ배추ㆍ고추ㆍ참깨 등을 주로 재배하고 있는데 밭은 10여년 전부터 과수원으로 용도 변경되어 사용하고 있다. 마을에서는 18가구가 배를 재배하고 있는데 김금두가 1965년경에 시작하였다. 그리고 과거에는 복숭아를 많이 재배하였으나 10여년 전부터 모두 배 재배로 전환하였다.
교통은 광주-봉황간, 광주-영산포간 버스가 운행되고 있다. 따라서 주민들의 생필품 구입은 나주장ㆍ남평장ㆍ영산포장ㆍ마트를 이용한다.
지명유래와 마을연혁
마을 인근에 큰 바위가 있어 석동(石洞)이라 하였다. 문헌상 마을의 이름이 처음 나온 곳은 1912년 『지방행정구역명칭일람』이다. 이에 의하면 어천면(魚川面) 31개 마을 중 석동리(石洞里)라는 지명이 보인다. 1914년에 행해진 행정구역개편으로 어촌면 고안리ㆍ자모리(自毛里)ㆍ석동(石洞)ㆍ벽류리(碧柳里)일부와 병합하여 고동리(古洞里)가 되고, 금천면(金川面) 소속으로 바뀐다. 광복 이후 본 마을은 고동3리로 편제되어 현재에 이른다.
마을에 처음 입향한 성씨는 김해김씨(金海金氏) 해사공파(海史公派)이고 이 마을의 입향조는 김해김씨 나주입향조 치서(致瑞)의 3세손인 예수(禮洙, 1652~?)이다. 그의 자는 선장(善長)이고 부인은 광산김씨이며, 묘는 금천면 광암리에 있다. 예수는 인근 광암리 광석마을에서 이거하였다고 한다. 후손이 번창하여 현재 치서의 10세손인 김금두(남, 76세, 제보자)와 일가(一家)들이 마을에 살고 있다. 문중관련 유적으로는 마을 입구에 있는 「효부보성선씨기행비 孝婦寶城宣氏紀行碑」와 「효열부탐진최씨행적비 孝烈婦耽津崔氏行蹟碑」가 있다.
마을에는 김해김씨 20, 광산김씨 3, 경주김씨 2, 박씨 2, 한씨 1, 황씨 1, 조씨 1, 최씨 1, 송씨 1, 유씨 1, 강씨 1, 기타 8호 등 총 42가구가 거주하고 있다.
마을조직과 근ㆍ현대적 변화
마을총회는 매년 양력 12월 20일에 개최한다. 총회에서는 마을 자금의 결산과 마을 사업 토론 그리고 마을 임원을 선출한다.
모청계와 상신계는 고동리 2구와 3구 마을사람들로 구성되어 있으며, 50여년 전에 조직되었다. 30가구가 가입되어 애경사 때 상부상조를 한다. 또한 본 마을과 석동마을 입구에는 1979년에 세운 와 가 있다.
부녀회는 1970년께 조직되었으며 32명의 회원이 봉사활동과 친목을 목적으로 하고 있다. 청년회는 1995년 새로 조직되었으며 8명의 회원이 마을발전과 경로행사를 주관하고 있다.
전기는 1960년대에 가설되었고 전화는 행정전화가 1970년대, 일반전화가 1980년대에 들어왔다. 연료는 연탄보일러 3가구, 기름보일러 31가구, 심야전기보일러 1가구이며 취사연료는 대부분의 가구에서 LPG를 사용하고 있다.
마을회관은 1동 86㎡으로 2002년 건립하여 경로당과 사무실로 사용하고 있다. 마을공동창고는 1동 20㎡으로 1970년대에 건립하였다. 이밖에 동각(우산각) 2동이 있다.
본 마을은 1970년대 모범마을로 선정되기도 하였으며, 매년 5월 8일 어버이날에는 청년회 주관으로 경로잔치를 행하고 있다.
고동4리 : 서고안(西古岸)
자연환경과 인문환경
서고안 마을은 면소재지에서 남쪽으로 약 1.5㎞ 지점에 위치한다. 마을 앞으로 방목들(고동들)이 펼쳐져 있으며, 마을 옆으로는 금천-봉황간ㆍ금천-영산포간 지방도로와 (주)화인코리아 공장이 있다. 그리고 마을 앞에 펼쳐져 있는 넓은 들녘은 ‘방목들’로 불려진다.
마을의 동쪽으로는 동고안마을이 있고, 서쪽으로 방목들(고동들)이 있으며 남쪽으로 자모마을이 있고, 북쪽으로는 오강리가 있다. 마을에는 65가구, 150여명이 거주하고 있는데 대부분 농업에 종사하고 있으며, 주산물은 쌀과 배이다. 농경지는 방목들과 영산강 안 하천부지에 펼쳐져 있으며, 토양은 점질토와 황토이고 농업용수는 영산강 물을 한 곳의 양수장을 통해 공급하고 있다. 이밖에 과수원과 밭은 개인 관정을 이용하고 있다.
밭과 과수원에서는 배ㆍ콩ㆍ고추ㆍ배추ㆍ참깨 등을 재배하고 있는데 8년 전부터 밭을 과수원으로 바꾸었다. 마을에서는 20여가구가 배를 재배하고 있는데 박병호가 30여년 전에 시작하였다. 교통은 좋은 편이다. 마을 입구에서 광주-봉황간, 광주-영산포간 버스를 이용하며 주민들의 생필품 구입은 나주장ㆍ남평장ㆍ영산포장ㆍ마트를 이용하고 있다. 마을에 소재하고 있는 공공기관으로는 나주배연구소가 있고 이밖에 살롬교회가 위치하고 있다.
지명유래와 마을연혁
1992년 고동리 4구로 분구되어 나오면서 고안의 서쪽에 위치하고 있어 서고안(西古岸)이라 하였다. 문헌상 마을 이름이 처음 나온 곳은 1912년 『지방행정구역명칭일람』이다. 이 기록에 의하면 어천면(魚川面) 31개 마을 중 고안리(古岸里)라는 지명이 보인다. 1914년 행해진 행정구역개편으로 어촌면 고안리ㆍ자모리(自毛里)ㆍ석동(石洞)ㆍ벽류리(碧柳里)일부와 병합하여 고동리(古洞里)가 되고, 금천면(金川面) 소속으로 바뀐다. 광복 이후 본 마을은 고동1리로 편제되어 있다가 1992년 고동4리로 분구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
마을사람들의 전언에 의하면 마을을 처음 형성한 성씨는 신안주씨라고 한다. 그러나 현재 마을에 신안주씨는 거주하고 있지 않아 자세한 입향 내력은 알 수 없다. 신안주씨 이후 김해김씨ㆍ전주이씨ㆍ장흥마씨ㆍ나주나씨 등 여러 성씨들이 입향하여 마을을 형성하였다. 현재 마을에는 김씨 20, 이씨 15, 박씨 6, 최씨 5, 손씨ㆍ윤씨ㆍ안씨ㆍ유씨ㆍ마씨 등 각 2호, 신씨ㆍ심씨ㆍ백씨ㆍ서씨ㆍ문씨ㆍ고씨ㆍ장씨ㆍ조씨ㆍ황씨 등 각 1호 총 65가구가 거주하고 있다.
마을조직과 근ㆍ현대적 변화
마을총회는 매년 양력 12월 30일에 개최하는데 마을자금의 결산과 마을사업 토론 그리고 2년을 주기로 마을 임원을 선출한다. 위친계와 상포계는 동고안과 서고안이 함께 조직하여 운영하고 있다. 부녀회는 1992년 분리가 되면서 새로 조직되었으며 50여명의 회원이 친목과 봉사활동을 하고 있다. 청년회는 1992년 분리되면서 조직되었으며 30명의 회원이 친목과 봉사활동 그리고 마을 일 돕기 등을 하고 있다.
전기는 1960년대 초에 가설되었고 전화는 행정전화가 1970년대에, 일반전화가 1980년대에 들어왔다. 연료는 연탄보일러 2가구, 기름보일러 66가구, 심야전기보일러 2가구 등이고 취사연료는 대부분의 가구에서 LPG를 사용하고 있다. 상업 활동으로는 이발소 1개소, 슈퍼 1개소, 건강원 1개소, 미진식품공장(과자류 생산), (주)화인코리아 공장 등이 있다. 동각(우산각)은 1동이 있는데 동고안과 서고안이 공동으로 사용하고 있다.
마을은 1933년에 홍수가 나서 마을 안까지 범람하였으며 1967년과 1968년의 가뭄, 1999년과 2002년에는 태풍으로 많은 피해를 입었다. 이밖에 음력 2월 1일을 리민의 날로 정하여 동고안과 서고안 주민들이 함께 음식을 장만하고 풍물을 치면서 마을잔치를 행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