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촌리
- 날짜
- 2020.04.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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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075
- 등록자
- 관리자
죽촌1리 : 야죽(野竹)
자연환경과 인문환경
야죽마을은 면소재지에서 남쪽으로 약 5.5㎞ 지점에 위치한다. 마을 앞으로 들녘과 배과수원 그리고 ‘간백골’이라 불리우는 야산이 있고, 뒤로는 ‘단산봉’이라는 야산이 있다. 마을 인근 지명으로는 모래들ㆍ중보들ㆍ세자들ㆍ지게들ㆍ항아리바위 등이 있고 봉동(鳳洞)과 변죽(邊竹)마을이 있었으나 모두 폐촌이 되었다. 마을의 동쪽으로는 월산리 갈산마을이 있고, 서쪽으로는 신천리 신방마을이 있으며 남쪽으로는 상촌마을이 있고, 북쪽으로는 신천리 방축마을이 있다. 마을에는 37가구, 110여명이 거주하고 있는데 대부분 농업에 종사하고 있으며, 주산물은 쌀과 배이다.
마을 앞에 펼쳐진 농경지의 농업용수는 영산천에 있는 금정보와 야죽제 그리고 7~8개의 관정을 이용하고 나주호의 물을 끌어쓰고 있어 부족하지 않다. 마을에는 논 30㏊, 밭 15㏊가 있는데 밭은 과거에 무와 수박을 재배하였으나 10여년 전부터 배를 재배하기 위해 대부분 과수원으로 바뀌었다. 8가구가 배를 재배하고 있는데 조규학이 1988년부터 시작하였고 김용만이 15년 전부터 4960㎡의 과수원에서 복숭아를 재배하고 있다. 농경지 토양은 점질토와 사질토인데 논은 점질토, 과수원은 사질토이다. 대부분의 농가가 일모작을 하고 있다. 교통은 광주-세지면 동창간 버스가 매시간 운행하고 있어 이를 이용한다. 과거에는 금천면 소재지까지 걸어서 다녔다. 주민들의 생필품 구입은 버스 이용이 편리한 남평장(1일, 6일)과 동창장(2일, 7일)을 주로 이용한다. 이밖에 마을에서 신방마을로 넘어가는 오른쪽 길 건너편 배과수원에 유물산포지가 남아있다. 유물로 호(壺) 구연부편을 비롯하여 다량의 회청색경질토기편 등이 수습되었다. 또한 과거에는 음력 1월 15일에 이웃 신방마을과 줄다리기를 하였고, 가뭄이 들면 뒷산 당산봉에서 기우제를 지냈다.
지명유래와 마을연혁
마을은 소쿠리형국이며, 마을 이름이 과거에는 야죽(也竹)이었으나 언제부터인가 야죽(野竹)으로 바뀌었다. 그리고 야죽은 인근에 대나무가 많아 붙여진 이름이다. 문헌상 지명이 처음 나온 곳은 1789년 《호구총수》로 어천면(魚川面)의 13개 마을 중 한 마을로 ‘야죽리(野竹里)’라는 지명이 보인다. 그후 1912년 『지방행정구역명칭일람』에도 어천면 31개 마을 중 야죽리라 되어있고 1914년에 행해진 행정구역개편으로 어천면의 상촌(上村)ㆍ화기리(花基里)ㆍ변죽리(邊竹里)ㆍ야죽리(野竹里)와 병합하여 죽촌리(竹村里)가 되고, 금천면(金川面) 소속으로 바뀐다. 광복 이후 본 마을은 죽촌리 1구로 편제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
예전에는 의성김씨(義城金氏) 안국ㆍ정국 형제가 살았다고 전해지나 현재 그 후손들은 거주하고 있지 않다. 의성김씨 이후 창녕조씨(昌寧曺氏)와 김해김씨(金海金氏)가 비슷한 시기에 입향하였다. 창녕조씨는 부제학공파(副提學公派) 내 창산군파(昌山君派)로, 나주 입향조는 시조로부터 32세손인 대준(大俊)이며 그의 묘는 남평에 있다. 이 마을 입향조는 시조로부터 38세손인 맹신(孟信)이다. 맹신(1679~1744)의 부인은 김해김씨이고 묘는 금천면 야죽리에 있으며 남평에서 이거하였다고 한다. 맹신 이후 후손이 번창하여 현재 시조로부터 44세손인 일환(日煥, 남, 80세)과 그의 일가(一家) 14가구가 거주하고 있다. 마을에는 창녕조씨 14, 김해김씨 12, 밀양박씨 5, 이천서씨 3, 나주오씨 1, 제주고씨 1, 정씨 1호 등 총 37가구가 거주하고 있다.
마을조직과 근ㆍ현대적 변화
동계(마을총회)는 1940년대 후반에 결성되어 매년 음력 2월 1일에 총회를 개최하며 마을자금의 결산과 마을사업 토론 그리고 임원 등을 선출한다. 동계가 끝나면 단합대회를 하는데 미리 정해진 5~6명의 유사가 음식을 장만하여 잔치를 베푼다. 그리고 20여년 전에 구입한 논 2975㎡평이 있다. 부녀회는 1970년대 중반에 조직되었으며 37명의 회원이 봉사활동과 친목 그리고 마을일돕기 등을 하고 있다. 청년회는 1981년 조직되었으며 설립을 기념하기 위해 1981년 마을회관 앞에 설립기념비를 세우기도 하였다. 8명의 회원이 봉사활동과 친목 그리고 마을 일 돕기 등을 하고 있다.
전기는 1960년대 중반에 가설되었고 전화는 행정전화가 1970년대, 일반전화가 1980년대에 들어왔다. 연료는 연탄보일러 15가구, 기름보일러 32가구이고, 취사연료는 대부분의 가구에서 LPG를 사용하고 있다. 마을 공동창고는 1970년대 말에 건립한 1동(66㎡)이 있고, 마을회관은 2001년 99㎡ 규모로 건립하였다. 이외에 1985년 어린이놀이터를 마을회관 앞에 조성하였다
죽촌2리 : 상촌(上村)
자연환경과 인문환경
상촌마을은 면소재지에서 남쪽으로 약 6㎞ 지점에 위치하고 있다. 마을 앞으로 들녘과 과수원이 있고, 인근 지명으로는 큰배굴ㆍ적굴ㆍ장골ㆍ새쟁이ㆍ모산골ㆍ구슬곡 등이 있다. 이중 ‘구슬곡’은 속칭 ‘구실곡’이라고도 불리우는데 1리 야죽마을에서 상촌으로 오는 사거리를 말한다. 이곳은 과거에 주막이 있던 곳으로 영산포ㆍ봉황면 옥산으로 가는 길목이다. 상촌은 큰마을과 작은마을로 구성되어 있다. 동쪽으로는 봉황면 옥산이, 서쪽으로는 영산포가 있고 남쪽으로는 화기마을이, 북쪽으로는 야죽마을과 신천리 신방마을이 있다. 마을에는 50가구, 115명이 거주하고 있는데 대부분 농업에 종사하고 있으며, 주산물은 쌀과 배이다.
농경지는 마을 주변에 펼쳐져 있는데, 태신제와 태봉제 그리고 죽촌제가 인근에 있고 나주호의 물을 끌어쓰므로 농업용수는 부족하지 않다. 마을에는 논 30㏊, 과수원을 포함한 밭 20㏊가 있다. 밭에서는 수박과 밭벼 그리고 배를 주로 재배하고 있다. 농경지 토양은 논이 점질토, 밭이 사질토이다. 대부분의 농가가 일ㆍ이모작을 하고 있다. 30여 가구가 배를 재배하고 있는데 박선규가 20여년 전에 재배하기 시작하였고, 박재규가 15년 전부터 감을, 2가구가 2002년부터 인삼을 재배하고 있다. 이밖에 7~8년 전까지 3가구가 복숭아를 재배하였으나 현재는 중단된 상태이다. 교통은 광주-세지면 동창간 버스가 매시간 운행하고 있어 이를 이용하고 있다. 생필품 구입은 남평장과 동창장을 주로 이용하고 있다. 이밖에 황인하의 집 뒤편에 4기의 지석묘가 있으며, 매년 정월 대보름에는 농악놀이를 한다.
지명유래와 마을연혁
마을의 지형이 높이 있다하여 상촌(上村)이라 불렀다. 황인하의 집 뒤편에 있는 고인돌(4기)은 청동기시대의 묘제로 이미 이 지역에 선사시대부터 사람이 살아 왔음을 입증하는 중요한 유적이다. 문헌상 마을의 이름이 처음 나온 곳은 1789년 《호구총수》로 어천면(魚川面)의 13개 마을 중 한 마을로 ‘상촌리(上村里)’라는 지명이 보인다. 그후 1912년 『지방행정구역명칭일람』에도 어천면 31개 마을 중 상촌리라는 지명이 보이고. 1914년에 행해진 행정구역개편으로 어천면의 상촌(上村)ㆍ화기리(花基里)ㆍ변죽리(邊竹里)ㆍ야죽리(野竹里)와 병합하여 죽촌리(竹村里)가 되고, 금천면(金川面) 소속으로 바뀐다. 광복 이후 본 마을은 죽촌2리로 편제되어 오늘에 이른다.
마을사람들의 전언에 의하면 밀양박씨와 김해김씨가 비슷한 시기에 입향하여 마을을 형성하였다고 한다. 이 마을 밀양박씨는 주로 해백공파(海伯公派, 파조는 召榮)의 자손이다. 실제 이 마을 입향조는 파조인 해백공으로부터 8세손인 정학(正學, 1694~1765)이다. 정학의 자는 경습(敬習), 호는 남호(南湖)이며 부인은 동복오씨이고 묘는 금천면 죽촌리에 있다. 보첩에 의하면 정학은 충청도 공주에서 이곳으로 이거하였다고 쓰여있다. 정학 이후 자손이 번창하여 현재 마을에는 파조로부터 17세손인 박재규(朴在圭, 남, 72세)와 일가들이 살고 있다. 문중관련 유적으로는 1995년 건립한 「성암밀양박공기순효행기적비 星巖密陽朴公基順孝行紀蹟碑」가 있다. 한편 김해김씨와 관련된 집안 내력은 마을에 보첩이 없어 확인할 수 없고, 다만 마을에 거주하고 있는 김해김씨는 사군파로 시조로부터 71세손이다. 마을은 밀양박씨 18호, 김해김씨 18, 광산김씨 2, 전주이씨 3, 장수황씨 2, 창녕조씨 2, 나주정씨 2, 함평이씨 1, 경주최씨 1, 진주강씨 1호 등 총 50가구가 거주하고 있다.
마을조직과 근ㆍ현대적 변화
마을총회는 매년 음력 2월 1일 개최한다. 총회에서는 마을자금을 결산하고 사업을 토론하며 2년을 주기로 임원을 선출한다. 위친계는 과거에 조직되어 전해오고 있으며 화기마을과 함께 56명의 회원이 상부상조를 목적으로 하고 있다. 부녀회는 1970년대 조직되었으며 화기마을과 함께 20여명의 회원이 친목과 봉사활동 그리고 마을일 돕기 등을 하고 있다. 전기는 1960년대 중반에 가설되었고 전화는 행정전화가 1970년대에 1대 있었고, 일반전화가 1980년대에 들어왔다. 연료는 연탄보일러 5가구, 기름보일러 45가구이고 취사연료는 대부분의 가구에서 LPG를 사용하고 있다.
마을 공동창고는 1동 17㎡으로 1999년 건립하였다. 마을회관은 1동 66㎡으로 1999년 재건축하였으며 노인정과 사무실로 사용하고 있다. 동각(우산각)은 1980년대 중반에 건립한 1동이 있고 또 1동을 새로 짓고 있다. 이밖에 마을에는 오래된 공동우물이 1개소 있으며, 나주과수생산유통영농조합법인 냉동창고가 1개소 위치하고 있다.
죽촌2리 : 화기(花基)
자연환경과 인문환경
화기마을은 면소재지에서 남쪽으로 약 6.5㎞ 지점에 위치하고 있으며, 마을 주위로는 농토와 과수원이 자리하고 있다. 마을 동쪽과 남쪽으로는 봉황면이 있고, 서쪽으로는 영산포가 있으며, 북쪽으로는 산촌마을이 있다. 마을에는 6가구, 15명이 거주하고 있는데 1농가가 배를 재배하고 있고 나머지 5농가는 벼와 밭작물을 경작하고 있다. 농경지는 마을 인근에 펼쳐져 있고, 마을 앞에 있는 화기제를 이용하여 농업용수를 공급하고 있다. 마을에는 논 1㏊, 과수원을 포함한 밭 1㏊가 있는데 밭에서는 무와 수박 그리고 배를 재배하고 있다. 농경지 토양은 점질토와 사질토이며, 전 농가가 일모작을 하고 있다. 이밖에 황성연이 배 재배를 비롯하여 10여년 전부터 돼지와 오리를 사육하고 있으며, 김재봉은 5년 전부터 닭 5000수를 사육하고 있다.
교통은 광주-세지면 동창간 시내버스가 매시간 운행하고 있어 이를 이용하고 있다. 주민들의 생필품 구입은 영산포장을 주로 이용하는데 1km 정도 떨어져 있기 때문에 걸어다닌다. 마을에는 조한룡(曺漢龍)을 기리기 위해 창녕조씨 문중에서 건립한 충효사(忠孝祠)와 효자리비각(孝子里碑閣), 그리고 4기의 비석이 있다.
지명유래와 마을연혁
과거에는 효자리라 하였다. 그런데 어떤 연유에서 화기라 칭하게 되었는지 마을사람들은 알지 못한다. 문헌상 마을의 이름이 처음 나온 곳은 1912년 『지방행정구역명칭일람』이다. 여기에 어천면(魚川面) 31개 마을 중 ‘화기리(花基里)’라는 지명이 보인다. 1914년 행해진 행정구역개편으로 어천면의 상촌(上村)ㆍ화기리(花基里)ㆍ변죽리(邊竹里)ㆍ야죽리(野竹里)와 병합하여 죽촌리(竹村里)가 되고, 금천면(金川面) 소속으로 바뀐다. 광복 이후 본 마을은 죽촌2리로 편제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 전해오는 말에 의하면, 이 마을 입향조는 창녕조씨(昌寧曺氏) 시중공파(侍中公派) 정통(精通)이라고 한다. 정통은 고려 말기 개성에서 나주 금천면 죽촌리 효자동으로 이거하였으며, 이후 한룡(漢龍)을 비롯하여 그의 자손이 번창하였다고 한다. 조한룡은 불회사를 중창한 원진국사와 동일인물로 전한다. 창녕조씨 문중과 관련된 유적으로는 충효사와 비각 그리고 4기의 비석이 있다.
충효사는 단층의 맞배지붕 골기와 건물로 정면 1칸, 측면 1칸의 벽돌조 건물인데 기와는 옛것이다. 1971년 나말선초의 충신ㆍ효자였던 조한룡(曺漢龍)을 기리기 위해 창녕조씨문중에서 건립한 것이다. 효자리비각(孝子里碑閣)은 1404년(태종 4)에 건립하였다. 1963년 건립된 「보의장군조한룡지비 保義將軍曺漢龍之碑」와 1971년 건립된 「청간조한룡사적 淸簡曺漢龍事蹟」, 그리고 「려충선효보의장군조한룡지비 麗忠鮮孝保義將軍曺漢龍之碑」, 「고사과조공사적비 故司果曺公事蹟碑」가 있다. 마을에는 창녕조씨 3, 황씨 1, 박씨 1, 유씨 1호 등 총 6가구가 살고 있다.
마을조직과 근ㆍ현대적 변화
마을총회와 위친계 그리고 부녀회는 상촌마을과 함께 조직되어 운영하고 있다. 전기는 1980년대에 가설되었고 전화는 일반전화가 1980년대에 들어왔다. 연료는 연탄보일러 1가구, 기름보일러 4가구이고 취사연료는 대부분의 가구에서 LPG를 사용하고 있다.
자연환경과 인문환경
야죽마을은 면소재지에서 남쪽으로 약 5.5㎞ 지점에 위치한다. 마을 앞으로 들녘과 배과수원 그리고 ‘간백골’이라 불리우는 야산이 있고, 뒤로는 ‘단산봉’이라는 야산이 있다. 마을 인근 지명으로는 모래들ㆍ중보들ㆍ세자들ㆍ지게들ㆍ항아리바위 등이 있고 봉동(鳳洞)과 변죽(邊竹)마을이 있었으나 모두 폐촌이 되었다. 마을의 동쪽으로는 월산리 갈산마을이 있고, 서쪽으로는 신천리 신방마을이 있으며 남쪽으로는 상촌마을이 있고, 북쪽으로는 신천리 방축마을이 있다. 마을에는 37가구, 110여명이 거주하고 있는데 대부분 농업에 종사하고 있으며, 주산물은 쌀과 배이다.
마을 앞에 펼쳐진 농경지의 농업용수는 영산천에 있는 금정보와 야죽제 그리고 7~8개의 관정을 이용하고 나주호의 물을 끌어쓰고 있어 부족하지 않다. 마을에는 논 30㏊, 밭 15㏊가 있는데 밭은 과거에 무와 수박을 재배하였으나 10여년 전부터 배를 재배하기 위해 대부분 과수원으로 바뀌었다. 8가구가 배를 재배하고 있는데 조규학이 1988년부터 시작하였고 김용만이 15년 전부터 4960㎡의 과수원에서 복숭아를 재배하고 있다. 농경지 토양은 점질토와 사질토인데 논은 점질토, 과수원은 사질토이다. 대부분의 농가가 일모작을 하고 있다. 교통은 광주-세지면 동창간 버스가 매시간 운행하고 있어 이를 이용한다. 과거에는 금천면 소재지까지 걸어서 다녔다. 주민들의 생필품 구입은 버스 이용이 편리한 남평장(1일, 6일)과 동창장(2일, 7일)을 주로 이용한다. 이밖에 마을에서 신방마을로 넘어가는 오른쪽 길 건너편 배과수원에 유물산포지가 남아있다. 유물로 호(壺) 구연부편을 비롯하여 다량의 회청색경질토기편 등이 수습되었다. 또한 과거에는 음력 1월 15일에 이웃 신방마을과 줄다리기를 하였고, 가뭄이 들면 뒷산 당산봉에서 기우제를 지냈다.
지명유래와 마을연혁
마을은 소쿠리형국이며, 마을 이름이 과거에는 야죽(也竹)이었으나 언제부터인가 야죽(野竹)으로 바뀌었다. 그리고 야죽은 인근에 대나무가 많아 붙여진 이름이다. 문헌상 지명이 처음 나온 곳은 1789년 《호구총수》로 어천면(魚川面)의 13개 마을 중 한 마을로 ‘야죽리(野竹里)’라는 지명이 보인다. 그후 1912년 『지방행정구역명칭일람』에도 어천면 31개 마을 중 야죽리라 되어있고 1914년에 행해진 행정구역개편으로 어천면의 상촌(上村)ㆍ화기리(花基里)ㆍ변죽리(邊竹里)ㆍ야죽리(野竹里)와 병합하여 죽촌리(竹村里)가 되고, 금천면(金川面) 소속으로 바뀐다. 광복 이후 본 마을은 죽촌리 1구로 편제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
예전에는 의성김씨(義城金氏) 안국ㆍ정국 형제가 살았다고 전해지나 현재 그 후손들은 거주하고 있지 않다. 의성김씨 이후 창녕조씨(昌寧曺氏)와 김해김씨(金海金氏)가 비슷한 시기에 입향하였다. 창녕조씨는 부제학공파(副提學公派) 내 창산군파(昌山君派)로, 나주 입향조는 시조로부터 32세손인 대준(大俊)이며 그의 묘는 남평에 있다. 이 마을 입향조는 시조로부터 38세손인 맹신(孟信)이다. 맹신(1679~1744)의 부인은 김해김씨이고 묘는 금천면 야죽리에 있으며 남평에서 이거하였다고 한다. 맹신 이후 후손이 번창하여 현재 시조로부터 44세손인 일환(日煥, 남, 80세)과 그의 일가(一家) 14가구가 거주하고 있다. 마을에는 창녕조씨 14, 김해김씨 12, 밀양박씨 5, 이천서씨 3, 나주오씨 1, 제주고씨 1, 정씨 1호 등 총 37가구가 거주하고 있다.
마을조직과 근ㆍ현대적 변화
동계(마을총회)는 1940년대 후반에 결성되어 매년 음력 2월 1일에 총회를 개최하며 마을자금의 결산과 마을사업 토론 그리고 임원 등을 선출한다. 동계가 끝나면 단합대회를 하는데 미리 정해진 5~6명의 유사가 음식을 장만하여 잔치를 베푼다. 그리고 20여년 전에 구입한 논 2975㎡평이 있다. 부녀회는 1970년대 중반에 조직되었으며 37명의 회원이 봉사활동과 친목 그리고 마을일돕기 등을 하고 있다. 청년회는 1981년 조직되었으며 설립을 기념하기 위해 1981년 마을회관 앞에 설립기념비를 세우기도 하였다. 8명의 회원이 봉사활동과 친목 그리고 마을 일 돕기 등을 하고 있다.
전기는 1960년대 중반에 가설되었고 전화는 행정전화가 1970년대, 일반전화가 1980년대에 들어왔다. 연료는 연탄보일러 15가구, 기름보일러 32가구이고, 취사연료는 대부분의 가구에서 LPG를 사용하고 있다. 마을 공동창고는 1970년대 말에 건립한 1동(66㎡)이 있고, 마을회관은 2001년 99㎡ 규모로 건립하였다. 이외에 1985년 어린이놀이터를 마을회관 앞에 조성하였다
죽촌2리 : 상촌(上村)
자연환경과 인문환경
상촌마을은 면소재지에서 남쪽으로 약 6㎞ 지점에 위치하고 있다. 마을 앞으로 들녘과 과수원이 있고, 인근 지명으로는 큰배굴ㆍ적굴ㆍ장골ㆍ새쟁이ㆍ모산골ㆍ구슬곡 등이 있다. 이중 ‘구슬곡’은 속칭 ‘구실곡’이라고도 불리우는데 1리 야죽마을에서 상촌으로 오는 사거리를 말한다. 이곳은 과거에 주막이 있던 곳으로 영산포ㆍ봉황면 옥산으로 가는 길목이다. 상촌은 큰마을과 작은마을로 구성되어 있다. 동쪽으로는 봉황면 옥산이, 서쪽으로는 영산포가 있고 남쪽으로는 화기마을이, 북쪽으로는 야죽마을과 신천리 신방마을이 있다. 마을에는 50가구, 115명이 거주하고 있는데 대부분 농업에 종사하고 있으며, 주산물은 쌀과 배이다.
농경지는 마을 주변에 펼쳐져 있는데, 태신제와 태봉제 그리고 죽촌제가 인근에 있고 나주호의 물을 끌어쓰므로 농업용수는 부족하지 않다. 마을에는 논 30㏊, 과수원을 포함한 밭 20㏊가 있다. 밭에서는 수박과 밭벼 그리고 배를 주로 재배하고 있다. 농경지 토양은 논이 점질토, 밭이 사질토이다. 대부분의 농가가 일ㆍ이모작을 하고 있다. 30여 가구가 배를 재배하고 있는데 박선규가 20여년 전에 재배하기 시작하였고, 박재규가 15년 전부터 감을, 2가구가 2002년부터 인삼을 재배하고 있다. 이밖에 7~8년 전까지 3가구가 복숭아를 재배하였으나 현재는 중단된 상태이다. 교통은 광주-세지면 동창간 버스가 매시간 운행하고 있어 이를 이용하고 있다. 생필품 구입은 남평장과 동창장을 주로 이용하고 있다. 이밖에 황인하의 집 뒤편에 4기의 지석묘가 있으며, 매년 정월 대보름에는 농악놀이를 한다.
지명유래와 마을연혁
마을의 지형이 높이 있다하여 상촌(上村)이라 불렀다. 황인하의 집 뒤편에 있는 고인돌(4기)은 청동기시대의 묘제로 이미 이 지역에 선사시대부터 사람이 살아 왔음을 입증하는 중요한 유적이다. 문헌상 마을의 이름이 처음 나온 곳은 1789년 《호구총수》로 어천면(魚川面)의 13개 마을 중 한 마을로 ‘상촌리(上村里)’라는 지명이 보인다. 그후 1912년 『지방행정구역명칭일람』에도 어천면 31개 마을 중 상촌리라는 지명이 보이고. 1914년에 행해진 행정구역개편으로 어천면의 상촌(上村)ㆍ화기리(花基里)ㆍ변죽리(邊竹里)ㆍ야죽리(野竹里)와 병합하여 죽촌리(竹村里)가 되고, 금천면(金川面) 소속으로 바뀐다. 광복 이후 본 마을은 죽촌2리로 편제되어 오늘에 이른다.
마을사람들의 전언에 의하면 밀양박씨와 김해김씨가 비슷한 시기에 입향하여 마을을 형성하였다고 한다. 이 마을 밀양박씨는 주로 해백공파(海伯公派, 파조는 召榮)의 자손이다. 실제 이 마을 입향조는 파조인 해백공으로부터 8세손인 정학(正學, 1694~1765)이다. 정학의 자는 경습(敬習), 호는 남호(南湖)이며 부인은 동복오씨이고 묘는 금천면 죽촌리에 있다. 보첩에 의하면 정학은 충청도 공주에서 이곳으로 이거하였다고 쓰여있다. 정학 이후 자손이 번창하여 현재 마을에는 파조로부터 17세손인 박재규(朴在圭, 남, 72세)와 일가들이 살고 있다. 문중관련 유적으로는 1995년 건립한 「성암밀양박공기순효행기적비 星巖密陽朴公基順孝行紀蹟碑」가 있다. 한편 김해김씨와 관련된 집안 내력은 마을에 보첩이 없어 확인할 수 없고, 다만 마을에 거주하고 있는 김해김씨는 사군파로 시조로부터 71세손이다. 마을은 밀양박씨 18호, 김해김씨 18, 광산김씨 2, 전주이씨 3, 장수황씨 2, 창녕조씨 2, 나주정씨 2, 함평이씨 1, 경주최씨 1, 진주강씨 1호 등 총 50가구가 거주하고 있다.
마을조직과 근ㆍ현대적 변화
마을총회는 매년 음력 2월 1일 개최한다. 총회에서는 마을자금을 결산하고 사업을 토론하며 2년을 주기로 임원을 선출한다. 위친계는 과거에 조직되어 전해오고 있으며 화기마을과 함께 56명의 회원이 상부상조를 목적으로 하고 있다. 부녀회는 1970년대 조직되었으며 화기마을과 함께 20여명의 회원이 친목과 봉사활동 그리고 마을일 돕기 등을 하고 있다. 전기는 1960년대 중반에 가설되었고 전화는 행정전화가 1970년대에 1대 있었고, 일반전화가 1980년대에 들어왔다. 연료는 연탄보일러 5가구, 기름보일러 45가구이고 취사연료는 대부분의 가구에서 LPG를 사용하고 있다.
마을 공동창고는 1동 17㎡으로 1999년 건립하였다. 마을회관은 1동 66㎡으로 1999년 재건축하였으며 노인정과 사무실로 사용하고 있다. 동각(우산각)은 1980년대 중반에 건립한 1동이 있고 또 1동을 새로 짓고 있다. 이밖에 마을에는 오래된 공동우물이 1개소 있으며, 나주과수생산유통영농조합법인 냉동창고가 1개소 위치하고 있다.
죽촌2리 : 화기(花基)
자연환경과 인문환경
화기마을은 면소재지에서 남쪽으로 약 6.5㎞ 지점에 위치하고 있으며, 마을 주위로는 농토와 과수원이 자리하고 있다. 마을 동쪽과 남쪽으로는 봉황면이 있고, 서쪽으로는 영산포가 있으며, 북쪽으로는 산촌마을이 있다. 마을에는 6가구, 15명이 거주하고 있는데 1농가가 배를 재배하고 있고 나머지 5농가는 벼와 밭작물을 경작하고 있다. 농경지는 마을 인근에 펼쳐져 있고, 마을 앞에 있는 화기제를 이용하여 농업용수를 공급하고 있다. 마을에는 논 1㏊, 과수원을 포함한 밭 1㏊가 있는데 밭에서는 무와 수박 그리고 배를 재배하고 있다. 농경지 토양은 점질토와 사질토이며, 전 농가가 일모작을 하고 있다. 이밖에 황성연이 배 재배를 비롯하여 10여년 전부터 돼지와 오리를 사육하고 있으며, 김재봉은 5년 전부터 닭 5000수를 사육하고 있다.
교통은 광주-세지면 동창간 시내버스가 매시간 운행하고 있어 이를 이용하고 있다. 주민들의 생필품 구입은 영산포장을 주로 이용하는데 1km 정도 떨어져 있기 때문에 걸어다닌다. 마을에는 조한룡(曺漢龍)을 기리기 위해 창녕조씨 문중에서 건립한 충효사(忠孝祠)와 효자리비각(孝子里碑閣), 그리고 4기의 비석이 있다.
지명유래와 마을연혁
과거에는 효자리라 하였다. 그런데 어떤 연유에서 화기라 칭하게 되었는지 마을사람들은 알지 못한다. 문헌상 마을의 이름이 처음 나온 곳은 1912년 『지방행정구역명칭일람』이다. 여기에 어천면(魚川面) 31개 마을 중 ‘화기리(花基里)’라는 지명이 보인다. 1914년 행해진 행정구역개편으로 어천면의 상촌(上村)ㆍ화기리(花基里)ㆍ변죽리(邊竹里)ㆍ야죽리(野竹里)와 병합하여 죽촌리(竹村里)가 되고, 금천면(金川面) 소속으로 바뀐다. 광복 이후 본 마을은 죽촌2리로 편제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 전해오는 말에 의하면, 이 마을 입향조는 창녕조씨(昌寧曺氏) 시중공파(侍中公派) 정통(精通)이라고 한다. 정통은 고려 말기 개성에서 나주 금천면 죽촌리 효자동으로 이거하였으며, 이후 한룡(漢龍)을 비롯하여 그의 자손이 번창하였다고 한다. 조한룡은 불회사를 중창한 원진국사와 동일인물로 전한다. 창녕조씨 문중과 관련된 유적으로는 충효사와 비각 그리고 4기의 비석이 있다.
충효사는 단층의 맞배지붕 골기와 건물로 정면 1칸, 측면 1칸의 벽돌조 건물인데 기와는 옛것이다. 1971년 나말선초의 충신ㆍ효자였던 조한룡(曺漢龍)을 기리기 위해 창녕조씨문중에서 건립한 것이다. 효자리비각(孝子里碑閣)은 1404년(태종 4)에 건립하였다. 1963년 건립된 「보의장군조한룡지비 保義將軍曺漢龍之碑」와 1971년 건립된 「청간조한룡사적 淸簡曺漢龍事蹟」, 그리고 「려충선효보의장군조한룡지비 麗忠鮮孝保義將軍曺漢龍之碑」, 「고사과조공사적비 故司果曺公事蹟碑」가 있다. 마을에는 창녕조씨 3, 황씨 1, 박씨 1, 유씨 1호 등 총 6가구가 살고 있다.
마을조직과 근ㆍ현대적 변화
마을총회와 위친계 그리고 부녀회는 상촌마을과 함께 조직되어 운영하고 있다. 전기는 1980년대에 가설되었고 전화는 일반전화가 1980년대에 들어왔다. 연료는 연탄보일러 1가구, 기름보일러 4가구이고 취사연료는 대부분의 가구에서 LPG를 사용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