촌곡리
- 날짜
- 2020.04.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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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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촌곡1리 : 본촌(本村)
자연환경과 인문환경
본촌은 면소재지에서 북쪽으로 약 1㎞ 지점에 위치한다. 동쪽으로는 신추마을이 있고, 서쪽으로는 원곡리 원촌이 있다. 남쪽으로는 원곡리 광탄마을이 있고, 북쪽으로는 살챙이마을이 있다. 인근에는 우대미ㆍ아래대미ㆍ가장골ㆍ소동골ㆍ중모실ㆍ말쟁이 등의 지명이 있는데 우대미는 마을 뒤편에 위치하고 있고, 아래대미는 마을 앞에 있다. 가장골은 마을 옆에 있고, 소동골은 우대미 뒤편에 위치하고 있으며 중모실은 마을 앞에 있고, 말쟁이는 금천 삼거리(사거리)에서 마을로 들어오는 입구에 위치하고 있는데 과거에 말을 사육하고 관리한 곳이다.
마을에는 90가구, 240여명이 거주하고 있으며 대부분 농업에 종사하고 있는데, 주산물은 쌀과 배이다. 농경지는 마을 인근인 속칭 ‘맹이들’과 ‘시피들’ 그리고 ‘소동들’에 펼쳐져 있으며, 소동골 방죽과 나주호의 물을 농업용수로 이용하고 있다. 35가구가 배를 재배하고 있는데 일제강점기 때 일본인이 마을에 들어와 시작하였다. 그후 1960년대 초 정부에서 무상으로 배 묘목을 나누어 주어 마을사람들은 이때부터 본격적으로 배를 재배하기 시작하였다. 포도는 8가구가 재배하고 있는데 40여년 전부터 시작하였고 복숭아도 3가구가 일제강점기 때부터 시작하여 그 뒤 많은 가구가 재배하였으나 약 15년 전부터 배 재배로 전환하였다. 이밖에 2가구가 하우스에서 채소를 재배하고 있으며, 1가구가 한우를 5두 정도 사육하고 있다.
교통은 1일 2회(아침과 저녁) 학생들을 위한 통학버스가 마을 앞을 지나고, 마을사람들은 자가용을 이용하거나 금천면 삼거리(사거리)로 걸어 나가 버스를 이용하고 있다. 생필품 구입은 나주장ㆍ남평장ㆍ영산포장ㆍ마트를 이용한다. 마을에 있는 문화유적으로는 유물산포지가 송씨 선산 옆 배과수원에 있는데 이곳에서는 다량의 회청색경질토기편이 수습되었다. 이밖에 1972년부터 (주)동화산업에서 인초를 재료로 돗자리를 생산하였는데 중국 제품에 밀려 약 13년 전에 생산을 중단하였다. 그리고 윤흥근(남, 80세)의 집에는 안방과 작은방 입구에 엄두름나무가 얹어 있다. 집안에 잡귀ㆍ잡신의 범접을 막기 위한 부녀자들의 예방행위이다
지명유래와 마을연혁
주변 마을의 가운데에 자리를 잡았다 하여 본촌(本村)이라 하였다. 문헌상 마을의 이름이 처음 나온 곳은 1789년 발행한《호구총수》로 금마산면(金馬山面)의 4개 마을 중 한 마을로 ‘본촌(本村)’이라는 지명이 보인다. 그후 1912년 『지방행정구역명칭일람』에는 금마산면 12개 마을 중 본촌리(本村里)라는 지명이 있고 1914년에 행해진 행정구역개편으로 금마산면의 연곡리(蓮谷里)ㆍ추동(楸洞)ㆍ본촌(本村)ㆍ신촌리(新村里) 각 일부와 병합하여 촌곡리(村谷里)가 되고, 금천면(金川面) 소속으로 바뀐다. 광복 이후 본 마을은 촌곡1 리로 편제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촌로들의 말에 의하면 파평윤씨 충경공파가 입향하여 마을을 형성하였다 하며 과거에 파평윤씨 열녀비가 있었다고 한다. 마을에는 파평윤씨 5, 김씨 33, 박씨 18, 이씨 8, 조씨 7, 송씨 4, 유씨 3, 성씨 2, 기타 10호 등 총 90가구가 거주하고있다.하고있다.
마을조직과 근ㆍ현대적 변화
마을총회는 매년 1월 5일에 개최한다. 총회에서는 마을 자금 결산과 마을사업 토론 그리고 2년을 주기로 임원선출 등을 한다. 마을의 모든 조직은 살챙이마을과 함께 조직ㆍ운영되고 있다. 향진계는 1960년대에 조직되어, 30명의 계원이 친목과 상례 때 상부상조를 목적으로 활동하고 있다. 향촌계는 1980년대에 조직되어, 30명의 계원이 친목과 상례 때 상부상조를 목적으로 활동하고 있다. 부녀회는 1970년대에 조직되었는데, 20여명의 회원이 친목과 마을 일 돕기 그리고 청년회와 함께 어버이날 행사ㆍ면 체육대회ㆍ명절 때 노래자랑 등을 개최하는 활동을 하고 있다. 청년회는 1980년대에 재조직되었으며 15명의 회원이 친목과 봉사활동 그리고 부녀회와 함께 어버이날 행사ㆍ면 체육대회ㆍ명절 때 노래자랑 등을 개최하고 있다.
전기는 1960년대에 가설되었고 전화는 행정전화가 1970년대, 일반전화가 1980년대에 들어왔다. 그리고 마을 안길 넓히기도 하였다. 연료는 연탄보일러 7가구, 기름보일러 79가구, 심야전기보일러 4가구이며, 1970년대 새마을사업으로 취사연료는 대부분의 가구에서 LPG를 사용하고 있다.
상업활동으로는 구멍가게 1, 쓰레기 재활용 공장 1, 개 사육장 1, (주)동화산업 등이 있으며 과거에는 마을에 정미소가 있었다. 이중 (주)동화산업은 촌곡리 365번지에 소재하고 있는데, 1972년 4월 동화산업주식회사로 출발하였다. 과거에는 돗자리를 생산하였으나 중국제품에 밀려 중단하고 단무지를 주력 상품으로 하고 있다. 회사는 현재 30여명의 생산직 근로자와 몇 명의 사무관리직이 근무하고 있다. 마을회관은 1동 83㎡으로 10년 전에 건립하였으며 노인정과 사무실로 이용하고 있고 동각은 1동 33㎡으로 20년 전에 건립하였다. 이밖에 1999년 태풍 올가와 2002년 태풍 루사의 영향으로 과수원의 낙과 피해가 심하였다. 그리고 6.25 때에는 좌우 대립으로 많은 인명 피해가 있었다.
촌곡1리 : 살챙이
자연환경과 인문환경
살챙이마을은 면소재지에서 북쪽으로 약 1.1㎞ 지점에 위치한다. 동쪽으로는 신추마을이 있고, 서쪽으로는 원곡리 원촌이 있으며, 남쪽으로는 본촌이 있고, 북쪽으로는 신가리 1구 신촌이 있다. 25가구, 70여명이 거주하고 있는데 대부분 농업에 종사하고 있으며, 주산물은 쌀과 배이다.
농경지는 마을 인근인 속칭 ‘맹이들’과 ‘시피들’ 그리고 ‘소동들’에 펼쳐져 있으며, 소동골 방죽과 나주호의 물을 농업용수로 이용하고 있다. 15가구가 배를 재배하고 있는데 일제강점기 때부터 시작하였다. 그후 1960년대 초 정부에서 무상으로 배 묘목을 나누어주어 마을사람들은 이때부터 본격적으로 배를 재배하기 시작하였다. 포도는 2가구가 재배하고 있고, 복숭아도 2가구가 재배하고 있다. 그런데 복숭아의 경우 과거에는 많은 가구가 재배하였으나 약 15년 전에 소득을 이유로 배 재배로 전환하였다.
교통은 1일 2회(아침과 저녁) 통학버스가 마을 앞을 지나고 마을사람들은 대부분 자가용을 이용하거나 금천면 삼거리(사거리)로 걸어 나가 버스를 이용하고 있다. 주민들의 생필품 구입은 교통이 비교적 편리한 나주장ㆍ남평장ㆍ영산포장ㆍ마트를 이용한다.
이밖에 이곳은 과거에 지석천(드들강)의 배(船)터로 추정되는지역이다.(김경수, 『영산강 삼백오십리』, 향지사, 249쪽)
지명유래와 마을연혁
마을을 살챙이라 부르고 있는데 과거 이곳 주위에 배를 띄우는 선창이 형성되었으며, 배 삿챙이를 맨 나무도 있었다 하여 살챙이라 칭하고 있다.
《호구총수》(1789년) 등 과거에 발행되었던 문헌에는 이 마을의 이름이 나타나지 않는다. 따라서 규모가 크지 않아 이웃하고 있는 본촌마을에 속한 자연마을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광복 이후 촌곡리 1구로 편제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
마을에는 김씨 7, 윤씨 5, 박씨 2, 이씨 2, 최씨 2, 유씨 2, 성씨 1, 조씨 1, 임씨 1, 정씨 1, 문씨 1호 등 총 25가구가 거주하고 있다.
마을조직과 근ㆍ현대적 변화
마을총회ㆍ향진계ㆍ향촌계ㆍ부녀회ㆍ청년회는 본촌마을과 함께 운영되고 있다.
전기는 1960년대에 가설되었고 전화는 일반전화가 1980년대에 들어왔다. 1970년대 새마을사업으로 마을 안길 넓히기도 하였다. 연료는 연탄보일러 3가구, 기름보일러 21가구, 심야전기보일러 1가구이고 취사연료는 대부분의 가구에서 LPG를 사용하고 있다.
상업 활동으로는 과일소매 1, 냉동창고 1개소가 있다.
촌곡2리 : 연곡(蓮谷)
자연환경과 인문환경
연곡마을은 면소재지에서 동북쪽으로 약 1㎞ 지점에 위치하는데, 마을 앞으로 광주-목포간 국도 1호선이 지나고 있다. 마을의 동쪽으로는 검복마을이 있고, 서쪽으로는 원곡리 광탄마을이 있으며 남쪽으로는 석전리가 있고, 북쪽으로는 추동마을이 있다. 21가구, 60여명이 거주하고 있는데 논 20㏊와 밭(과수원) 15㏊가 있어 대부분 농업에 종사하며, 주산물은 쌀과 배이다. 농경지는 논이 수렁땅이고 밭과 과수원은 황토로 농사짓기에 조금 불편한 편이다. 그리고 마을사람들 중에는 다른 면(봉황ㆍ왕곡ㆍ시종면)에 토지를 매입하여 배를 재배하고 있는 가구가 많다. 농경지는 신추제와 나주호의 물을 농업용수로 이용하고 있다. 17가구가 배를 재배하고 있는데 일제강점기 때부터 시작하였다. 그리고 6~7년 전부터 논을 과수원으로 전환하여 배를 재배하고 있는데, 소득은 물론 추곡수매와 관련한 영향 때문이다.
교통은 마을 앞 버스승강장을 이용하고 있고 생필품 구입은 나주장ㆍ남평장ㆍ영산포장ㆍ마트를 이용한다. 마을 안 문화유적으로는 유물산포지가 신추제로부터 20여미터 떨어진 야산과 배과수원 등지에 있는데, 이곳에서는 병형토기 구연부편, 토기 손잡이 등 다량의 회청색경질토기편이 수습되었다. 이밖에 마을 입구 우산각 앞에 「효자면재박공성룡지비 孝子勉齋朴公成龍之碑」가 있고, 밀양박씨 제각인 영모재(永慕齋)가 있다.
지명유래와 마을연혁
방죽에 연꽃이 곱게 피어났다고 하여 연곡(蓮谷)이라 하였다. 그리고 마을에 연화도수형(蓮花倒水形)의 명당이 있다고 한다. 문헌상 마을의 지명이 처음 나온 곳은 1912년 『지방행정구역명칭일람』이다. 이 기록에 금마산면(金馬山面) 12개 마을 중 연곡리(蓮谷里)라는 지명이 보인다. 1914년에 행해진 행정구역개편으로 금마산면의 연곡리(蓮谷里)ㆍ추동(楸洞)ㆍ본촌(本村)ㆍ신촌리(新村里) 각 일부와 병합하여 촌곡리(村谷里)가 되고, 금천면(金川面) 소속으로 바뀐다. 광복 이후 본 마을은 촌곡리 2구로 편제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
전언에 의하면 김씨, 백씨, 남씨가 들어와 마을을 형성하였다고 한다. 마을에는 김씨 6, 박씨 3, 최씨 2, 전씨 2, 이씨 1, 신씨 1, 고씨 1, 곽씨 1, 백씨 1, 서씨 1, 정씨 1, 양씨 1호 총 21가구가 거주하고 있다.
마을조직과 근ㆍ현대적 변화
마을총회는 매년 1월 10일에 개최한다. 총회에서는 마을 자금 결산과 마을사업 토론 그리고 2년을 주기로 임원선출 등을 한다. 안친계는 2리와 3리 전체적으로 1940년에 조직하였으며 마을 어른들을 중심으로 35명의 계원이 애경사 때 상부상조를 목적으로 하고 있다. 동친계는 2리와 3리가 같이 1985년에 조직하여 마을의 젊은이들을 중심으로 33명의 계원이 애경사 때 상부상조를 목적으로 하고 있다. 그리고 각 반별로 반계가 있는데 여기에는 각 반의 모든 가구가 가입하여 친목과 마을사업 등의 활동을 하고 있다. 부녀회는 2리 전체적으로 1970년대에 조직하여 28명의 회원이 친목과 마을 일 돕기 그리고 5월 8일 어버이날 경로잔치 등을 하고 있고 청년회는 2리 전체적으로 1970년대에 조직되었으며 30명의 회원이 친목과 봉사활동 그리고 5월 8일 어버이날 경로잔치 등을 하고 있다.
전기는 1970년대 초에 가설되었고 전화는 일반전화가 1980년대에 들어왔다. 연료는 기름보일러 21가구이고, 취사연료는 대부분의 가구에서 LPG를 사용하고 있다. 상업 활동으로는 주류판매소가 1개소 있다. 동각(우산각)은 1동으로 1990년에 건립하였다.
촌곡2리 : 추동(楸洞)
자연환경과 인문환경
추동마을은 면소재지에서 동북쪽으로 약 1.5㎞ 지점에 위치하고 있으며, 촌곡2리의 중심마을로 자리하고 있다. 마을의 동쪽으로는 검복마을이 있고, 서쪽으로는 본촌이 있으며 남쪽으로는 연곡마을이 있고, 북쪽으로는 신가리가, 동북쪽으로 신추마을이 위치하고 있다. 마을에는 18가구, 50여명이 거주하고 있는데 논 5㏊와 밭(과수원) 7㏊가 있어 대부분 농업에 종사하고 있으며, 주산물은 쌀과 배이다. 농경지는 논이 수렁땅이고 밭과 과수원은 황토로 농사짓기에 조금 불편한 편이다. 그리고 마을사람들 중 다른 면(봉황ㆍ왕곡ㆍ시종면)에 토지를 매입하여 배를 재배하고 있는 가구가 많다. 농경지는 마을 인근에 펼쳐져 있으며, 신추제와 나주호의 물을 농업용수로 사용하고 있다. 13가구가 배를 재배하고 있고, 포도는 1가구가 재배하고 있다. 6~7년 전부터 논을 밭(과수원)으로 전환하는 농가가 늘어나 과수면적이 확대되는 경향을 보인다. 한편 오래된 배나무를 17~18년 전에 모두 베어내고 새로 심었다.
교통은 마을에서 광주-목포간 국도 1호선까지 걸어나가거나 자가용을 이용하여야 하기 때문에 불편한 편이다. 주민들의 생필품 구입은 교통이 비교적 편리한 나주장ㆍ남평장ㆍ영산포장ㆍ마트를 이용한다. 마을 안에는 오래된 공동우물과 금천사가 있는데 금천사는 대한생활불교회 소속이다. 그리고 과거에는 마을의 비석거리에 비석이 있었으나 모두 없어졌다
지명유래와 마을연혁
문헌상 마을의 지명이 처음 나온 곳은 1912년 『지방행정구역명칭일람』이다. 이 기록에 금마산면(金馬山面) 12개 마을 중 추동리(楸洞里)라는 지명이 보인다. 1914년 일제강점기 때 행해진 행정구역개편으로 금마산면의 연곡리(蓮谷里)ㆍ추동(楸洞)ㆍ본촌(本村)ㆍ신촌리(新村里) 각 일부와 병합하여 촌곡리(村谷里)가 되고, 금천면(金川面) 소속으로 바뀐다. 광복 이후 본 마을은 촌곡2리로 편제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전언에 의하면 박씨, 송씨가 들어와 마을을 형성하였다고 한다. 마을에는 김씨 3, 이씨 3, 노씨 3, 박씨 2, 남씨 1, 송씨 1, 최씨 1, 고씨 1, 천씨 1, 주씨 1, 조씨 1호 등 총 18가구가 거주하고 있다.
마을조직과 근ㆍ현대적 변화
마을총회ㆍ부녀회ㆍ청년회는 2리 전체적으로 조직ㆍ운영되고 있다. 안친계ㆍ동친계는 2리와 3리가 함께 조직ㆍ운영되고 있다. 이는 1988년에 3리가 2리에서 분구되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각 반별로 반계가 있는데 여기에는 각 반의 모든 가구가 가입하여 친목과 마을사업 등의 활동을 하고 있다. 전기는 1970년대 초에 가설되었고 전화는 일반전화가 1980년대에 들어왔다. 연료는 연탄보일러 2가구, 기름보일러 15가구, 심야전기보일러 1가구 등이고, 취사연료는 대부분 가구에서 LPG를 사용하고 있다.
마을회관은 1동 66㎡으로 1999년 건립하였다. 그리고 옥상에 동각(우산각)을 건립하여 사용하고 있고 마을회관은 노인정과 사무실로 이용하고 있다.
촌곡2리 : 신추(新楸)
자연환경과 인문환경
신추마을은 면소재지에서 동북쪽으로 약 1.5㎞ 지점에 위치한다. 동쪽으로는 신가리 송촌이 있고, 서남쪽으로는 추동이 있으며, 북쪽으로는 신가리 유촌과 당가마을이 있다. 마을에는 18가구, 50여명이 거주하고 있는데 논 20㏊와 밭(과수원) 10㏊가 있어 대부분 농업에 종사하고 있으며, 주산물은 쌀과 배이다. 농경지는 논이 수렁땅이고 밭과 과수원은 황토로 농사짓기에 조금 불편한 편이다. 마을사람들 중에는 과수재배를 목적으로 다른 면(봉황ㆍ왕곡ㆍ시종면)에 토지를 매입하는 가구도 많다. 농경지는 마을 인근에 펼쳐져 있는데, 신추제와 나주호의 물을 농업용수로 사용하고 있다. 16가구가 배를 재배하고 있고, 6~7년 전부터 논을 밭(과수원)으로 전환하여 배를 재배하는 농가가 늘어났다.
교통은 마을에서 광주-목포간 국도 1호선까지 걸어나가거나 자가용을 이용하여야 하기 때문에 불편한 편이다. 주민들의 생필품 구입은 나주장ㆍ남평장ㆍ영산포장ㆍ마트를 이용한다.
지명유래와 마을연혁
문헌상 마을의 지명이 처음 나온 곳은 1912년 『지방행정구역명칭일람』이다. 이 기록에 의하면 금마산면(金馬山面) 12개 마을 중 신추리(申楸里)라는 지명이 보인다. 그러나 1914년 강점기 때 행해진 행정구역개편에서는 본 마을의 이름이 나타나지 않는다. 광복 이후 본 마을은 촌곡리 2구로 편제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
전언에 의하면 정씨가 들어와 마을을 형성하였다고 하는데, 현재 박씨 4, 정씨 4, 한씨 2, 강씨 2, 윤씨 1, 조씨 1, 오씨 1, 전씨 1, 이씨 1, 최씨 1호 총 18가구가 거주하고 있다.
마을조직과 근ㆍ현대적 변화
마을총회ㆍ부녀회ㆍ청년회는 2리 전체적으로 조직하여 운영하고 있고 안친계ㆍ동친계는 2리와 3리가 함께 조직하여 운영하고 있다. 그리고 각 반별로 반계가 있는데 여기에는 각 반의 모든 가구가 가입하여 친목과 마을사업 등의 활동을 하고 있다. 전기는 1970년대 초에 가설되었고 전화는 일반전화가 1980년대에 들어왔다. 연료는 연탄보일러 1가구, 기름보일러 17가구이며, 취사연료는 대부분 가구에서 LPG를 사용하고 있다.
촌곡3리 : 검복(劍伏)
자연환경과 인문환경
검복마을은 면소재지에서 동북쪽으로 약 3.5㎞ 지점에 위치하고 있는데 마을 인근으로는 과수원이 펼쳐져 있어 마을은 2~3가구별로 흩어져 있는 산촌(散村)이다. 또한 마을 중심부로는 금천-시계간 도로 개설이 공사 중이다. 동쪽으로는 산포면이 있고, 서쪽으로는 촌곡2리가 있다. 남쪽으로는 국도 1호선이 있고 그 너머로 석전2리가 있고, 북쪽으로는 신가2리가 있다. 마을은 38가구, 100여명이 거주하고 있는데, 논 4㏊와 밭(과수원) 25㏊가 있어 대부분 농업에 종사하고 있으며, 주산물은 벼와 배이다. 농경지는 논이 점질토이고 밭과 과수원은 황토로 농사짓기에 좋다. 그리고 대부분의 농가가 일모작을 하고 있는데 농경지는 마을 앞에 펼쳐져 있으며, 나주호의 물을 농업용수로 이용하고 있다. 26가구가 배를, 복숭아는 1가구가 재배하고 있다. 이밖에 1가구가 한우를 25두 사육하고 있고, 3가구가 돼지를 500마리 사육하고 있다.
교통은 마을에서 광주-목포간 국도 1호선까지 걸어나가거나 자가용을 이용하여야 하기 때문에 불편한 편이다. 주민들의 생필품 구입은 나주장ㆍ남평장ㆍ영산포장ㆍ마트를 이용한다. 이밖에 금천-시계간 도로 개설 공사 중 문화재 발굴조사(2001~2002년 목포대학교박물관ㆍ동신대학교박물관 공동실시)에서 구석기시대 유물인 석기가 다량 출토되었으며, 수혈주거지 14기(청동기시대), 수혈유구 6기(청동기시대, 철기시대), 주구토광묘 1기(철기시대), 도랑 2기(철기시대)가 발굴되었다.
지명유래와 마을연혁
마을은 칼이 엎어져 있는 형국이며 여기에서 유래하여 검복(劍伏)이라 하였다. 《호구총수》(1789년) 등 옛 기록에는 이 마을의 이름이 보이지 않는다. 마을 규모가 크지 않았기 때문일 것이다. 과거에 촌곡2리로 편제되어 있다가 1988년 3리로 분리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
마을사람들의 제보에 따르면, 과거 산이었는데 과수 재배를 목적으로 개간하여 일제강점기 때 마을이 형성되었다고 한다. 마을에는 김씨 9, 은진송씨 7, 박씨 4, 정씨 2, 이씨 2, 장씨 2, 반씨 1, 나씨 1, 마씨 1, 문씨 1, 구씨 1, 강씨 1, 유씨 1, 주씨 1, 최씨 1, 임씨 1, 서씨 1, 한씨 1호 등 총 38가구가 거주하고 있다.
마을조직과 근ㆍ현대적 변화
마을총회는 매년 1월 10일에 개최한다. 총회에서는 마을 자금 결산과 마을사업 토론 그리고 2년을 주기로 임원선출 등을 한다. 안친계는 2리와 3리 전체적으로 1940년에 조직되었으며 마을 어른들을 중심으로 35명의 계원이 애경사 때 상부상조를 목적으로 하고 있다. 동친계는 2리와 3리 전체적으로 1985년에 조직되었는데 마을의 젊은이를 중심으로 33명의 계원이 애경사 때 상부상조를 목적으로 하고 있다. 부녀회는 1988년에 재조직되었으며 20명의 회원이 친목과 마을 일 돕기 등의 활동을 하고 있다. 청년회는 1988년에 재조직되었으며 16명의 회원이 친목과 봉사활동 등을 하고 있다.
전기는 1970년대 초에 가설되었고 전화는 일반전화가 1980년대에 들어왔다. 연료는 연탄보일러 5가구, 기름보일러 33가구이다. 취사연료는 대부분 가구에서 LPG를 사용하고 있다. 마을회관은 73㎡ 규모이며 2002년 11월 준공 예정으로 공사중에 있다. 동각(우산각)은 20㎡으로 마을회관 옥상에 건립할 예정이다. 마을 안에 건강원 1, (주)삼진 지ㆍ에프, 금성물산, 남양유업 나주공장 등이 있다. 이중 (주)삼진 지ㆍ에프는 금천면 영산로 5911에 소재하고 있으며, 1974년 9월 삼진종합식품으로 출발하였는데 2002년 4월 회사 상호를 (주)삼진 지ㆍ에프로 변경하였고 현재는 김치 등 농수산물 통조림, 병조림 식품, 냉동식품 등 다양한 가공품을 일본, 미국 등으로 수출하고 있다. 2008년 6월 22일 가동을 시작한 남양유업 나주공장은 금천면 영산로 5785에 소재하며 유제품과 커피믹스, 동결건조커피 등을 생산하는 아시아 최대규모 커피공장이다
자연환경과 인문환경
본촌은 면소재지에서 북쪽으로 약 1㎞ 지점에 위치한다. 동쪽으로는 신추마을이 있고, 서쪽으로는 원곡리 원촌이 있다. 남쪽으로는 원곡리 광탄마을이 있고, 북쪽으로는 살챙이마을이 있다. 인근에는 우대미ㆍ아래대미ㆍ가장골ㆍ소동골ㆍ중모실ㆍ말쟁이 등의 지명이 있는데 우대미는 마을 뒤편에 위치하고 있고, 아래대미는 마을 앞에 있다. 가장골은 마을 옆에 있고, 소동골은 우대미 뒤편에 위치하고 있으며 중모실은 마을 앞에 있고, 말쟁이는 금천 삼거리(사거리)에서 마을로 들어오는 입구에 위치하고 있는데 과거에 말을 사육하고 관리한 곳이다.
마을에는 90가구, 240여명이 거주하고 있으며 대부분 농업에 종사하고 있는데, 주산물은 쌀과 배이다. 농경지는 마을 인근인 속칭 ‘맹이들’과 ‘시피들’ 그리고 ‘소동들’에 펼쳐져 있으며, 소동골 방죽과 나주호의 물을 농업용수로 이용하고 있다. 35가구가 배를 재배하고 있는데 일제강점기 때 일본인이 마을에 들어와 시작하였다. 그후 1960년대 초 정부에서 무상으로 배 묘목을 나누어 주어 마을사람들은 이때부터 본격적으로 배를 재배하기 시작하였다. 포도는 8가구가 재배하고 있는데 40여년 전부터 시작하였고 복숭아도 3가구가 일제강점기 때부터 시작하여 그 뒤 많은 가구가 재배하였으나 약 15년 전부터 배 재배로 전환하였다. 이밖에 2가구가 하우스에서 채소를 재배하고 있으며, 1가구가 한우를 5두 정도 사육하고 있다.
교통은 1일 2회(아침과 저녁) 학생들을 위한 통학버스가 마을 앞을 지나고, 마을사람들은 자가용을 이용하거나 금천면 삼거리(사거리)로 걸어 나가 버스를 이용하고 있다. 생필품 구입은 나주장ㆍ남평장ㆍ영산포장ㆍ마트를 이용한다. 마을에 있는 문화유적으로는 유물산포지가 송씨 선산 옆 배과수원에 있는데 이곳에서는 다량의 회청색경질토기편이 수습되었다. 이밖에 1972년부터 (주)동화산업에서 인초를 재료로 돗자리를 생산하였는데 중국 제품에 밀려 약 13년 전에 생산을 중단하였다. 그리고 윤흥근(남, 80세)의 집에는 안방과 작은방 입구에 엄두름나무가 얹어 있다. 집안에 잡귀ㆍ잡신의 범접을 막기 위한 부녀자들의 예방행위이다
지명유래와 마을연혁
주변 마을의 가운데에 자리를 잡았다 하여 본촌(本村)이라 하였다. 문헌상 마을의 이름이 처음 나온 곳은 1789년 발행한《호구총수》로 금마산면(金馬山面)의 4개 마을 중 한 마을로 ‘본촌(本村)’이라는 지명이 보인다. 그후 1912년 『지방행정구역명칭일람』에는 금마산면 12개 마을 중 본촌리(本村里)라는 지명이 있고 1914년에 행해진 행정구역개편으로 금마산면의 연곡리(蓮谷里)ㆍ추동(楸洞)ㆍ본촌(本村)ㆍ신촌리(新村里) 각 일부와 병합하여 촌곡리(村谷里)가 되고, 금천면(金川面) 소속으로 바뀐다. 광복 이후 본 마을은 촌곡1 리로 편제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촌로들의 말에 의하면 파평윤씨 충경공파가 입향하여 마을을 형성하였다 하며 과거에 파평윤씨 열녀비가 있었다고 한다. 마을에는 파평윤씨 5, 김씨 33, 박씨 18, 이씨 8, 조씨 7, 송씨 4, 유씨 3, 성씨 2, 기타 10호 등 총 90가구가 거주하고있다.하고있다.
마을조직과 근ㆍ현대적 변화
마을총회는 매년 1월 5일에 개최한다. 총회에서는 마을 자금 결산과 마을사업 토론 그리고 2년을 주기로 임원선출 등을 한다. 마을의 모든 조직은 살챙이마을과 함께 조직ㆍ운영되고 있다. 향진계는 1960년대에 조직되어, 30명의 계원이 친목과 상례 때 상부상조를 목적으로 활동하고 있다. 향촌계는 1980년대에 조직되어, 30명의 계원이 친목과 상례 때 상부상조를 목적으로 활동하고 있다. 부녀회는 1970년대에 조직되었는데, 20여명의 회원이 친목과 마을 일 돕기 그리고 청년회와 함께 어버이날 행사ㆍ면 체육대회ㆍ명절 때 노래자랑 등을 개최하는 활동을 하고 있다. 청년회는 1980년대에 재조직되었으며 15명의 회원이 친목과 봉사활동 그리고 부녀회와 함께 어버이날 행사ㆍ면 체육대회ㆍ명절 때 노래자랑 등을 개최하고 있다.
전기는 1960년대에 가설되었고 전화는 행정전화가 1970년대, 일반전화가 1980년대에 들어왔다. 그리고 마을 안길 넓히기도 하였다. 연료는 연탄보일러 7가구, 기름보일러 79가구, 심야전기보일러 4가구이며, 1970년대 새마을사업으로 취사연료는 대부분의 가구에서 LPG를 사용하고 있다.
상업활동으로는 구멍가게 1, 쓰레기 재활용 공장 1, 개 사육장 1, (주)동화산업 등이 있으며 과거에는 마을에 정미소가 있었다. 이중 (주)동화산업은 촌곡리 365번지에 소재하고 있는데, 1972년 4월 동화산업주식회사로 출발하였다. 과거에는 돗자리를 생산하였으나 중국제품에 밀려 중단하고 단무지를 주력 상품으로 하고 있다. 회사는 현재 30여명의 생산직 근로자와 몇 명의 사무관리직이 근무하고 있다. 마을회관은 1동 83㎡으로 10년 전에 건립하였으며 노인정과 사무실로 이용하고 있고 동각은 1동 33㎡으로 20년 전에 건립하였다. 이밖에 1999년 태풍 올가와 2002년 태풍 루사의 영향으로 과수원의 낙과 피해가 심하였다. 그리고 6.25 때에는 좌우 대립으로 많은 인명 피해가 있었다.
촌곡1리 : 살챙이
자연환경과 인문환경
살챙이마을은 면소재지에서 북쪽으로 약 1.1㎞ 지점에 위치한다. 동쪽으로는 신추마을이 있고, 서쪽으로는 원곡리 원촌이 있으며, 남쪽으로는 본촌이 있고, 북쪽으로는 신가리 1구 신촌이 있다. 25가구, 70여명이 거주하고 있는데 대부분 농업에 종사하고 있으며, 주산물은 쌀과 배이다.
농경지는 마을 인근인 속칭 ‘맹이들’과 ‘시피들’ 그리고 ‘소동들’에 펼쳐져 있으며, 소동골 방죽과 나주호의 물을 농업용수로 이용하고 있다. 15가구가 배를 재배하고 있는데 일제강점기 때부터 시작하였다. 그후 1960년대 초 정부에서 무상으로 배 묘목을 나누어주어 마을사람들은 이때부터 본격적으로 배를 재배하기 시작하였다. 포도는 2가구가 재배하고 있고, 복숭아도 2가구가 재배하고 있다. 그런데 복숭아의 경우 과거에는 많은 가구가 재배하였으나 약 15년 전에 소득을 이유로 배 재배로 전환하였다.
교통은 1일 2회(아침과 저녁) 통학버스가 마을 앞을 지나고 마을사람들은 대부분 자가용을 이용하거나 금천면 삼거리(사거리)로 걸어 나가 버스를 이용하고 있다. 주민들의 생필품 구입은 교통이 비교적 편리한 나주장ㆍ남평장ㆍ영산포장ㆍ마트를 이용한다.
이밖에 이곳은 과거에 지석천(드들강)의 배(船)터로 추정되는지역이다.(김경수, 『영산강 삼백오십리』, 향지사, 249쪽)
지명유래와 마을연혁
마을을 살챙이라 부르고 있는데 과거 이곳 주위에 배를 띄우는 선창이 형성되었으며, 배 삿챙이를 맨 나무도 있었다 하여 살챙이라 칭하고 있다.
《호구총수》(1789년) 등 과거에 발행되었던 문헌에는 이 마을의 이름이 나타나지 않는다. 따라서 규모가 크지 않아 이웃하고 있는 본촌마을에 속한 자연마을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광복 이후 촌곡리 1구로 편제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
마을에는 김씨 7, 윤씨 5, 박씨 2, 이씨 2, 최씨 2, 유씨 2, 성씨 1, 조씨 1, 임씨 1, 정씨 1, 문씨 1호 등 총 25가구가 거주하고 있다.
마을조직과 근ㆍ현대적 변화
마을총회ㆍ향진계ㆍ향촌계ㆍ부녀회ㆍ청년회는 본촌마을과 함께 운영되고 있다.
전기는 1960년대에 가설되었고 전화는 일반전화가 1980년대에 들어왔다. 1970년대 새마을사업으로 마을 안길 넓히기도 하였다. 연료는 연탄보일러 3가구, 기름보일러 21가구, 심야전기보일러 1가구이고 취사연료는 대부분의 가구에서 LPG를 사용하고 있다.
상업 활동으로는 과일소매 1, 냉동창고 1개소가 있다.
촌곡2리 : 연곡(蓮谷)
자연환경과 인문환경
연곡마을은 면소재지에서 동북쪽으로 약 1㎞ 지점에 위치하는데, 마을 앞으로 광주-목포간 국도 1호선이 지나고 있다. 마을의 동쪽으로는 검복마을이 있고, 서쪽으로는 원곡리 광탄마을이 있으며 남쪽으로는 석전리가 있고, 북쪽으로는 추동마을이 있다. 21가구, 60여명이 거주하고 있는데 논 20㏊와 밭(과수원) 15㏊가 있어 대부분 농업에 종사하며, 주산물은 쌀과 배이다. 농경지는 논이 수렁땅이고 밭과 과수원은 황토로 농사짓기에 조금 불편한 편이다. 그리고 마을사람들 중에는 다른 면(봉황ㆍ왕곡ㆍ시종면)에 토지를 매입하여 배를 재배하고 있는 가구가 많다. 농경지는 신추제와 나주호의 물을 농업용수로 이용하고 있다. 17가구가 배를 재배하고 있는데 일제강점기 때부터 시작하였다. 그리고 6~7년 전부터 논을 과수원으로 전환하여 배를 재배하고 있는데, 소득은 물론 추곡수매와 관련한 영향 때문이다.
교통은 마을 앞 버스승강장을 이용하고 있고 생필품 구입은 나주장ㆍ남평장ㆍ영산포장ㆍ마트를 이용한다. 마을 안 문화유적으로는 유물산포지가 신추제로부터 20여미터 떨어진 야산과 배과수원 등지에 있는데, 이곳에서는 병형토기 구연부편, 토기 손잡이 등 다량의 회청색경질토기편이 수습되었다. 이밖에 마을 입구 우산각 앞에 「효자면재박공성룡지비 孝子勉齋朴公成龍之碑」가 있고, 밀양박씨 제각인 영모재(永慕齋)가 있다.
지명유래와 마을연혁
방죽에 연꽃이 곱게 피어났다고 하여 연곡(蓮谷)이라 하였다. 그리고 마을에 연화도수형(蓮花倒水形)의 명당이 있다고 한다. 문헌상 마을의 지명이 처음 나온 곳은 1912년 『지방행정구역명칭일람』이다. 이 기록에 금마산면(金馬山面) 12개 마을 중 연곡리(蓮谷里)라는 지명이 보인다. 1914년에 행해진 행정구역개편으로 금마산면의 연곡리(蓮谷里)ㆍ추동(楸洞)ㆍ본촌(本村)ㆍ신촌리(新村里) 각 일부와 병합하여 촌곡리(村谷里)가 되고, 금천면(金川面) 소속으로 바뀐다. 광복 이후 본 마을은 촌곡리 2구로 편제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
전언에 의하면 김씨, 백씨, 남씨가 들어와 마을을 형성하였다고 한다. 마을에는 김씨 6, 박씨 3, 최씨 2, 전씨 2, 이씨 1, 신씨 1, 고씨 1, 곽씨 1, 백씨 1, 서씨 1, 정씨 1, 양씨 1호 총 21가구가 거주하고 있다.
마을조직과 근ㆍ현대적 변화
마을총회는 매년 1월 10일에 개최한다. 총회에서는 마을 자금 결산과 마을사업 토론 그리고 2년을 주기로 임원선출 등을 한다. 안친계는 2리와 3리 전체적으로 1940년에 조직하였으며 마을 어른들을 중심으로 35명의 계원이 애경사 때 상부상조를 목적으로 하고 있다. 동친계는 2리와 3리가 같이 1985년에 조직하여 마을의 젊은이들을 중심으로 33명의 계원이 애경사 때 상부상조를 목적으로 하고 있다. 그리고 각 반별로 반계가 있는데 여기에는 각 반의 모든 가구가 가입하여 친목과 마을사업 등의 활동을 하고 있다. 부녀회는 2리 전체적으로 1970년대에 조직하여 28명의 회원이 친목과 마을 일 돕기 그리고 5월 8일 어버이날 경로잔치 등을 하고 있고 청년회는 2리 전체적으로 1970년대에 조직되었으며 30명의 회원이 친목과 봉사활동 그리고 5월 8일 어버이날 경로잔치 등을 하고 있다.
전기는 1970년대 초에 가설되었고 전화는 일반전화가 1980년대에 들어왔다. 연료는 기름보일러 21가구이고, 취사연료는 대부분의 가구에서 LPG를 사용하고 있다. 상업 활동으로는 주류판매소가 1개소 있다. 동각(우산각)은 1동으로 1990년에 건립하였다.
촌곡2리 : 추동(楸洞)
자연환경과 인문환경
추동마을은 면소재지에서 동북쪽으로 약 1.5㎞ 지점에 위치하고 있으며, 촌곡2리의 중심마을로 자리하고 있다. 마을의 동쪽으로는 검복마을이 있고, 서쪽으로는 본촌이 있으며 남쪽으로는 연곡마을이 있고, 북쪽으로는 신가리가, 동북쪽으로 신추마을이 위치하고 있다. 마을에는 18가구, 50여명이 거주하고 있는데 논 5㏊와 밭(과수원) 7㏊가 있어 대부분 농업에 종사하고 있으며, 주산물은 쌀과 배이다. 농경지는 논이 수렁땅이고 밭과 과수원은 황토로 농사짓기에 조금 불편한 편이다. 그리고 마을사람들 중 다른 면(봉황ㆍ왕곡ㆍ시종면)에 토지를 매입하여 배를 재배하고 있는 가구가 많다. 농경지는 마을 인근에 펼쳐져 있으며, 신추제와 나주호의 물을 농업용수로 사용하고 있다. 13가구가 배를 재배하고 있고, 포도는 1가구가 재배하고 있다. 6~7년 전부터 논을 밭(과수원)으로 전환하는 농가가 늘어나 과수면적이 확대되는 경향을 보인다. 한편 오래된 배나무를 17~18년 전에 모두 베어내고 새로 심었다.
교통은 마을에서 광주-목포간 국도 1호선까지 걸어나가거나 자가용을 이용하여야 하기 때문에 불편한 편이다. 주민들의 생필품 구입은 교통이 비교적 편리한 나주장ㆍ남평장ㆍ영산포장ㆍ마트를 이용한다. 마을 안에는 오래된 공동우물과 금천사가 있는데 금천사는 대한생활불교회 소속이다. 그리고 과거에는 마을의 비석거리에 비석이 있었으나 모두 없어졌다
지명유래와 마을연혁
문헌상 마을의 지명이 처음 나온 곳은 1912년 『지방행정구역명칭일람』이다. 이 기록에 금마산면(金馬山面) 12개 마을 중 추동리(楸洞里)라는 지명이 보인다. 1914년 일제강점기 때 행해진 행정구역개편으로 금마산면의 연곡리(蓮谷里)ㆍ추동(楸洞)ㆍ본촌(本村)ㆍ신촌리(新村里) 각 일부와 병합하여 촌곡리(村谷里)가 되고, 금천면(金川面) 소속으로 바뀐다. 광복 이후 본 마을은 촌곡2리로 편제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전언에 의하면 박씨, 송씨가 들어와 마을을 형성하였다고 한다. 마을에는 김씨 3, 이씨 3, 노씨 3, 박씨 2, 남씨 1, 송씨 1, 최씨 1, 고씨 1, 천씨 1, 주씨 1, 조씨 1호 등 총 18가구가 거주하고 있다.
마을조직과 근ㆍ현대적 변화
마을총회ㆍ부녀회ㆍ청년회는 2리 전체적으로 조직ㆍ운영되고 있다. 안친계ㆍ동친계는 2리와 3리가 함께 조직ㆍ운영되고 있다. 이는 1988년에 3리가 2리에서 분구되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각 반별로 반계가 있는데 여기에는 각 반의 모든 가구가 가입하여 친목과 마을사업 등의 활동을 하고 있다. 전기는 1970년대 초에 가설되었고 전화는 일반전화가 1980년대에 들어왔다. 연료는 연탄보일러 2가구, 기름보일러 15가구, 심야전기보일러 1가구 등이고, 취사연료는 대부분 가구에서 LPG를 사용하고 있다.
마을회관은 1동 66㎡으로 1999년 건립하였다. 그리고 옥상에 동각(우산각)을 건립하여 사용하고 있고 마을회관은 노인정과 사무실로 이용하고 있다.
촌곡2리 : 신추(新楸)
자연환경과 인문환경
신추마을은 면소재지에서 동북쪽으로 약 1.5㎞ 지점에 위치한다. 동쪽으로는 신가리 송촌이 있고, 서남쪽으로는 추동이 있으며, 북쪽으로는 신가리 유촌과 당가마을이 있다. 마을에는 18가구, 50여명이 거주하고 있는데 논 20㏊와 밭(과수원) 10㏊가 있어 대부분 농업에 종사하고 있으며, 주산물은 쌀과 배이다. 농경지는 논이 수렁땅이고 밭과 과수원은 황토로 농사짓기에 조금 불편한 편이다. 마을사람들 중에는 과수재배를 목적으로 다른 면(봉황ㆍ왕곡ㆍ시종면)에 토지를 매입하는 가구도 많다. 농경지는 마을 인근에 펼쳐져 있는데, 신추제와 나주호의 물을 농업용수로 사용하고 있다. 16가구가 배를 재배하고 있고, 6~7년 전부터 논을 밭(과수원)으로 전환하여 배를 재배하는 농가가 늘어났다.
교통은 마을에서 광주-목포간 국도 1호선까지 걸어나가거나 자가용을 이용하여야 하기 때문에 불편한 편이다. 주민들의 생필품 구입은 나주장ㆍ남평장ㆍ영산포장ㆍ마트를 이용한다.
지명유래와 마을연혁
문헌상 마을의 지명이 처음 나온 곳은 1912년 『지방행정구역명칭일람』이다. 이 기록에 의하면 금마산면(金馬山面) 12개 마을 중 신추리(申楸里)라는 지명이 보인다. 그러나 1914년 강점기 때 행해진 행정구역개편에서는 본 마을의 이름이 나타나지 않는다. 광복 이후 본 마을은 촌곡리 2구로 편제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
전언에 의하면 정씨가 들어와 마을을 형성하였다고 하는데, 현재 박씨 4, 정씨 4, 한씨 2, 강씨 2, 윤씨 1, 조씨 1, 오씨 1, 전씨 1, 이씨 1, 최씨 1호 총 18가구가 거주하고 있다.
마을조직과 근ㆍ현대적 변화
마을총회ㆍ부녀회ㆍ청년회는 2리 전체적으로 조직하여 운영하고 있고 안친계ㆍ동친계는 2리와 3리가 함께 조직하여 운영하고 있다. 그리고 각 반별로 반계가 있는데 여기에는 각 반의 모든 가구가 가입하여 친목과 마을사업 등의 활동을 하고 있다. 전기는 1970년대 초에 가설되었고 전화는 일반전화가 1980년대에 들어왔다. 연료는 연탄보일러 1가구, 기름보일러 17가구이며, 취사연료는 대부분 가구에서 LPG를 사용하고 있다.
촌곡3리 : 검복(劍伏)
자연환경과 인문환경
검복마을은 면소재지에서 동북쪽으로 약 3.5㎞ 지점에 위치하고 있는데 마을 인근으로는 과수원이 펼쳐져 있어 마을은 2~3가구별로 흩어져 있는 산촌(散村)이다. 또한 마을 중심부로는 금천-시계간 도로 개설이 공사 중이다. 동쪽으로는 산포면이 있고, 서쪽으로는 촌곡2리가 있다. 남쪽으로는 국도 1호선이 있고 그 너머로 석전2리가 있고, 북쪽으로는 신가2리가 있다. 마을은 38가구, 100여명이 거주하고 있는데, 논 4㏊와 밭(과수원) 25㏊가 있어 대부분 농업에 종사하고 있으며, 주산물은 벼와 배이다. 농경지는 논이 점질토이고 밭과 과수원은 황토로 농사짓기에 좋다. 그리고 대부분의 농가가 일모작을 하고 있는데 농경지는 마을 앞에 펼쳐져 있으며, 나주호의 물을 농업용수로 이용하고 있다. 26가구가 배를, 복숭아는 1가구가 재배하고 있다. 이밖에 1가구가 한우를 25두 사육하고 있고, 3가구가 돼지를 500마리 사육하고 있다.
교통은 마을에서 광주-목포간 국도 1호선까지 걸어나가거나 자가용을 이용하여야 하기 때문에 불편한 편이다. 주민들의 생필품 구입은 나주장ㆍ남평장ㆍ영산포장ㆍ마트를 이용한다. 이밖에 금천-시계간 도로 개설 공사 중 문화재 발굴조사(2001~2002년 목포대학교박물관ㆍ동신대학교박물관 공동실시)에서 구석기시대 유물인 석기가 다량 출토되었으며, 수혈주거지 14기(청동기시대), 수혈유구 6기(청동기시대, 철기시대), 주구토광묘 1기(철기시대), 도랑 2기(철기시대)가 발굴되었다.
지명유래와 마을연혁
마을은 칼이 엎어져 있는 형국이며 여기에서 유래하여 검복(劍伏)이라 하였다. 《호구총수》(1789년) 등 옛 기록에는 이 마을의 이름이 보이지 않는다. 마을 규모가 크지 않았기 때문일 것이다. 과거에 촌곡2리로 편제되어 있다가 1988년 3리로 분리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
마을사람들의 제보에 따르면, 과거 산이었는데 과수 재배를 목적으로 개간하여 일제강점기 때 마을이 형성되었다고 한다. 마을에는 김씨 9, 은진송씨 7, 박씨 4, 정씨 2, 이씨 2, 장씨 2, 반씨 1, 나씨 1, 마씨 1, 문씨 1, 구씨 1, 강씨 1, 유씨 1, 주씨 1, 최씨 1, 임씨 1, 서씨 1, 한씨 1호 등 총 38가구가 거주하고 있다.
마을조직과 근ㆍ현대적 변화
마을총회는 매년 1월 10일에 개최한다. 총회에서는 마을 자금 결산과 마을사업 토론 그리고 2년을 주기로 임원선출 등을 한다. 안친계는 2리와 3리 전체적으로 1940년에 조직되었으며 마을 어른들을 중심으로 35명의 계원이 애경사 때 상부상조를 목적으로 하고 있다. 동친계는 2리와 3리 전체적으로 1985년에 조직되었는데 마을의 젊은이를 중심으로 33명의 계원이 애경사 때 상부상조를 목적으로 하고 있다. 부녀회는 1988년에 재조직되었으며 20명의 회원이 친목과 마을 일 돕기 등의 활동을 하고 있다. 청년회는 1988년에 재조직되었으며 16명의 회원이 친목과 봉사활동 등을 하고 있다.
전기는 1970년대 초에 가설되었고 전화는 일반전화가 1980년대에 들어왔다. 연료는 연탄보일러 5가구, 기름보일러 33가구이다. 취사연료는 대부분 가구에서 LPG를 사용하고 있다. 마을회관은 73㎡ 규모이며 2002년 11월 준공 예정으로 공사중에 있다. 동각(우산각)은 20㎡으로 마을회관 옥상에 건립할 예정이다. 마을 안에 건강원 1, (주)삼진 지ㆍ에프, 금성물산, 남양유업 나주공장 등이 있다. 이중 (주)삼진 지ㆍ에프는 금천면 영산로 5911에 소재하고 있으며, 1974년 9월 삼진종합식품으로 출발하였는데 2002년 4월 회사 상호를 (주)삼진 지ㆍ에프로 변경하였고 현재는 김치 등 농수산물 통조림, 병조림 식품, 냉동식품 등 다양한 가공품을 일본, 미국 등으로 수출하고 있다. 2008년 6월 22일 가동을 시작한 남양유업 나주공장은 금천면 영산로 5785에 소재하며 유제품과 커피믹스, 동결건조커피 등을 생산하는 아시아 최대규모 커피공장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