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곡리
- 날짜
- 2020.04.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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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1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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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곡1리 : 산당(山堂)
자연환경과 인문환경
산당마을은 면소재지에서 북쪽으로 약 2㎞ 지점에 위치하고 있으며, 서북쪽으로는 영산강이 흐르고 그 너머로 나주시 노안면이 위치하고 있다. 또한 마을 앞으로는 과수원이 펼쳐져 있다. 동쪽으로는 신가리가 있고, 서쪽으로는 원촌이 있으며 남쪽으로는 광탄마을이 있고, 북쪽으로는 영산강 너머로 광주광역시 광산구가 위치하고 있다.
마을에는 46가구, 115명이 거주하고 있는데 대부분 농업에 종사하고 있으며, 주산물은 쌀과 배이다. 농경지는 마을 뒤 속칭 ‘신가들’과 영산강변에 펼쳐져 있어, 영산강 물과 1개의 방죽 그리고 관정을 이용하여 농업용수를 공급하고 있다. 논 20㏊, 과수원을 포함하여 밭 30㏊가 있는데 토양이 점질토로 농사짓기에 적당하며 대부분의 농가가 이모작을 하고 있다. 32가구가 배를 재배하고 있는데 일제강점기 때 일본인들이 처음으로 시작하였다. 그리고 한국인으로는 1927년 이재성이 6611㎡, 1939년 이영균이 8925㎡의 과수원을 조성하였다. 2가구가 포도를 10여년 전부터 재배해 오고 있고, 1가구가 복숭아를 1999년부터 재배해 오고 있다. 그런데 20~25년 전까지 마을에서는 주로 복숭아를 재배하였다. 그러나 배를 재배하여 얻는 수입이 더 높았기 때문에 이후 복숭아 재배를 중단하고 배 재배로 전환하였다. 교통은 불편한 편으로 1일 1회 아침에 버스가 마을을 경유한다. 때문에 대부분 오강 사거리까지 걸어 나가 버스를 이용하고 있고 생필품 구입은 나주장ㆍ남평장ㆍ영산포장ㆍ마트를 이용한다
지명유래와 마을연혁
옛날 산새들이 사는 조용한 곳에 초당을 짓고 살았던 이하순이 산당(山當)이라 칭한 것이 현재에 이르고 있다. 문헌상 마을의 이름이 처음 나온 곳은 1912년 『지방행정구역명칭일람』이다. 여기에 금마산면(金馬山面) 12개 마을 중 산당리(山堂里)라는 지명이 보인다. 1914년 일제강점기 때 행해진 행정구역개편으로 금마산면의 미곡리(尾谷里)ㆍ산당리(山堂里)ㆍ원촌(院村)ㆍ본촌(本村) 일부와 병합하여 원곡리(院谷里)가 되고, 금천면(金川面) 소속으로 바뀐다. 광복 이후 본 마을은 원곡1리로 편제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입향조는 전주이씨(全州李氏) 완창대군파(完昌大君派), 파조로부터 18세손인 태순(太淳)ㆍ하순(夏淳)ㆍ흥순(興淳) 형제이다. 이들 삼형제는 17세손인 정호(廷浩)의 다섯 아들 중 둘째와 넷째 그리고 다섯째이다. 이들 삼형제는 인근인 원촌마을에서 이곳으로 이거하였다. 태순(1852~1920)의 부인은 풍천임씨이고, 묘는 원촌 고사등에 있으며, 하순(1860~1937)의 부인은 광산김씨이고, 묘는 금천면 석전리에 있다. 흥순(1864~1950)의 부인은 경주최씨이고, 묘는 산포면에 있다. 삼형제 이후 후손이 번창하여 현재 마을에는 파조로부터 21세손인 이재덕(남, 68세, 제보자)과 일가(一家)들이 살고 있다. 마을에는 전주이씨 24, 하동정씨 7, 밀양박씨 5, 경주최씨 3, 김해김씨 3, 홍주송씨 1, 은진송씨 1, 양주편씨 1, 금성나씨 1호 등 총 46가구가 거주하고 있다.
마을조직과 근ㆍ현대적 변화
마을총회는 12월 30일에 개최한다. 총회에서는 마을 자금의 결산과 마을 사업 토론 그리고 2년을 주기로 임원을 선출한다. 위친계는 1940년대에 조직되었으며, 38명의 계원이 애경사 때 상부상조를 목적으로 하고 있다. 부녀회는 1970년대에 조직되었으며 40여명의 회원이 봉사활동과 친목, 마을 일 돕기, 경로잔치 등을 하고 있다. 그리고 과거에는 마을에서 구판장을 운영하기도 하였다.
전기는 1940년대 후반에 가설되었고, 전화는 행정전화가 1970년대, 일반전화가 1980년대에 들어왔다. 연료는 연탄보일러 2가구, 기름보일러 44가구이고, 취사연료는 대부분의 가구에서 LPG를 사용하고 있다. 마을공동창고는 1동 50㎡, 마을회관은 1동 50㎡으로 1970년대에 건립하였다. 그리고 마을에서는 매년 5월 8일 어버이날에 마을 부녀회 주관으로 경로잔치를 열고 있다.
원곡2리 : 원촌(院村)ㆍ따박골
자연환경과 인문환경
원촌은 면소재지에서 북쪽으로 약 2㎞ 지점에 위치하며, 5가구가 거주하고 있는 2반 따박골과는 한 마을로 인식하고 있다. 그리고 마을 서북쪽으로는 영산강이 흐르고 있다. 동쪽으로는 산당마을이 있고, 서쪽의 영산강 너머로 나주시 석현동이 있다. 남쪽으로는 남원촌이 있고, 북쪽으로는 영산강 너머로 광주광역시 광산구가 위치하고 있다. 이밖에 마을 인근 지명으로는 ‘몰미동’과 ‘고사리등’이 있다. 몰미동은 산당마을과 경계지점에 위치하고 있는 곳으로 옛날 이무기가 말을 물어 죽여 말머리를 사장한 곳이라 하며, 고사리등은 마을 동편 임야에 고사리가 많이 나왔기 때문이라고 한다.
마을에는 85가구, 250여명이 거주하고 있으며 대부분 농업에 종사하고 있고, 주산물은 쌀과 배이다. 농경지는 마을 뒤 속칭 ‘공쟁이들’과 ‘소란들’ 그리고 영산강 하천부지에 펼쳐져 있으며, 영산강 물과 1개의 방죽 그리고 관정을 이용하여 농업용수를 공급하고 있다. 논 60㏊, 과수원을 포함하여 밭 30㏊가 있고 농경지 토양은 점질토와 사질토로 농사짓기에 적당하며 대부분의 농가가 영산강 하천부지에서 이모작을, 마을 인근에서는 일모작을 하고 있다. 40가구가 배를 재배하고 있는데 일제강점기 때 일본인 고바야시(小林), 사와쿠찌(澤口) 등이 시작했다고 한다. 2가구가 복숭아를 재배하고 있는데, 10여년 전에 복숭아를 재배하던 많은 가구가 배 재배로 전환하였다. 이밖에 1가구가 한우를 10여두 사육하고 있다. 밭은 대부분 과수원으로 과거 이 마을에서 재배한 무는 수분함량이 김장용으로 알맞고 맛이 좋아 인근에서 최고의 상품으로 인정해 주었다. 따라서 1950년대 이전까지는 무를 많이 재배하였으나 현재는 5~6가구만이 영산강 하천부지에서 경작하고 있다.
교통은 불편한 편으로 남원촌 앞 승강장까지 걸어 나가 버스를 이용하고 있다. 생필품 구입은 나주장ㆍ남평장ㆍ영산포장ㆍ마트를 이용한다. 문화유적으로는 유물산포지와 효열비가 있다. 유물산포지는 이재휘의 배과수원 구릉 하단부에 위치하고 있는데 이곳에서 청동기시대의 것으로 추정되는 토제 어망추와 무문토기편, 삼국시대 회청색경질토기편 등이 수습되었다. 쌍전각(雙全閣)은 1955년 건립된 것으로 전각 내에는 「효열부천안전씨기적비 孝烈婦天安全氏紀蹟碑」가 있다.
지명유래와 마을연혁
마을은 배형국이다. 문헌상 마을의 지명이 처음 나온 곳은 1789년 《호구총수》로 금마산면(金馬山面)의 4개 마을 중 한 마을로 ‘원촌(院村)’이라는 지명이 보이고, 1912년 『지방행정구역명칭일람』에는 금마산면 12개 마을 중 원촌리(院村里)라는 지명이 보인다. 1914년 일제강점기 때 행해진 행정구역개편으로 금마산면의 미곡리(尾谷里)ㆍ산당리(山堂里)ㆍ원촌(院村)ㆍ본촌(本村) 일부와 병합하여 원곡리(院谷里)가 되고, 금천면(金川面) 소속으로 바뀐다. 광복 이후 본 마을은 원곡리 2구로 편제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전언에 의하면, 이 마을은 과거 원씨들이 거주하던 터였다고 전한다. 그러나 광탄나루와 인접한 마을로 지명에서 알 수 있듯, 강변 주막이 있었던 마을로 추정된다. 구체적인 입향 내력이 확인된 성씨는 전주이씨(全州李氏) 완창대군파(完昌大君派)이고, 입향조는 파조로부터 14세손인 만희(萬禧)ㆍ만징(萬徵)ㆍ만엽(萬葉) 형제이다. 이들 삼형제는 13세손인 춘영(春榮)의 네아들 중 둘째와 셋째 그리고 넷째이며, 이들은 금천면 동악리 상야마을에서 이곳으로 이거하였다.삼형제 중 만희(1695~?)의 자는 지여(祉汝), 호는 삼은(三隱)이고, 부인은 광산김씨이며, 묘는 다도면 신동리에 있다. 만징(1709~?)의 부인은 진주강씨이고, 묘는 다도면에 있고, 만엽(1712~?)의 자는 치장(致章), 호는 해파(海波)이고, 부인은 남평문씨이며, 묘는 세지면에 있다. 삼형제 이후 자손이 번창하여 현재 마을에는 파조로부터 22세손인 이종달(남, 74세, 제보자)과 그 일가(一家)들이 집성촌을 이루고 있다. 마을에는 전주이씨 61, 김씨 10, 청주한씨 3, 하동정씨 2, 최씨 2, 달성배씨 2, 강씨 2, 한양조씨 1, 차씨 1, 박씨 1호 등 총 85가구가 거주하고 있다
마을조직과 근ㆍ현대적 변화
마을총회는 12월 25일에 개최한다. 총회에서는 마을자금의 결산과 마을사업 토론 그리고 2년을 주기로 임원을 선출한다. 마을 노인들 위주로 1965년에 조직된 청우계는 20명의 계원이 애경사 때 상부상조를 하고 있다. 마을의 젊은이 위주로 1999년에 조직된 상포계는 30명의 계원이 애경사 때 상부상조를 목적으로 하고 있고, 부녀회는 1970년대에 조직되었으며 60여명의 회원이 봉사활동과 친목, 마을 일 돕기, 5월 8일 경로잔치 등을 하고 있다. 청년회는 1970년대에 조직되었으며 30여명의 회원이 봉사활동과 친목 그리고 명절 때 노래자랑 등의 행사를 주최하고 행사 주최로 얻어진 수익금으로 여름철에 마을어른들을 대접하는 잔치를 베푼다.
전기는 1946년에 가설되었고 전화는 행정전화가 1970년대, 일반전화가 1980년대에 들어왔다. 연료는 기름보일러 85가구이고 취사연료는 대부분의 가구에서 LPG를 사용하고 있다. 상업활동으로는 구판장 1, 가게 1개가 있으며, 마을 내에 유치원이 건설 중에 있다. 마을회관은 1동 99㎡으로 1996년에 건립하였으며 노인정과 사무실로 사용하고 있다. 그리고 마을에 농협창고가 1동 있는데 165㎡으로 8년 전에 건립되었다.
미곡(尾谷) 원곡리 3구
자연환경과 인문환경
미곡마을은 면소재지에서 서쪽으로 약 1.5㎞ 지점에 위치하고 있다. 동쪽으로는 광탄마을이 있고, 서쪽으로는 영산강 너머로 나주시 청동이 있다. 남쪽으로는 ‘방목들’이 있고, 북쪽으로는 남원촌이 있다. 마을에는 56가구, 150여명이 거주하고 있는데 대부분 농업에 종사하고 있으며, 주산물은 쌀과 배이다. 농경지는 마을 앞 방목들과 영산강 하천부지에 펼쳐져 있어, 영산강 물과 관정을 이용하여 농업용수를 공급한다. 논 8㏊, 과수원을 포함하여 밭 10㏊가 있고 농경지 토양은 점질토와 사질토로 농사짓기에 적당하며 대부분의 농가가 영산강 하천부지에서 이모작을, 마을 인근에서는 일모작을 하고 있다.
12가구가 배를 재배하고 있고, 1가구가 포도를 재배하고 있으며 3가구가 하우스를 이용하여 배추ㆍ상추ㆍ딸기 등을 재배하고 있다. 교통은 좋은 편으로 마을 앞이나 금천사거리에서 버스를 이용하고 있다. 생필품 구입은 나주장ㆍ남평장ㆍ영산포장ㆍ마트를 이용한다. 과거에 나종간이 마을에서 양잠을 하였다고 하며, 1946년 오강리 벽류마을에 호남원예중학교가 있을 당시 본 마을에 버스정류소가 있었다.
지명유래와 마을연혁
금천면은 용형국이고, 미곡은 용꼬리형국이라고 하여 마을 이름을 미곡(尾谷)이라 하였다. 문헌상 마을 이름이 처음 나온 곳은 1912년 『지방행정구역명칭일람』으로, 금마산면(金馬山面) 12개 마을 중 미곡리(尾谷里)라는 지명이 보인다. 1914년 일제강점기 때 행해진 행정구역개편으로 금마산면의 미곡리(尾谷里)ㆍ산당리(山堂里)ㆍ원촌(院村)ㆍ본촌(本村) 일부와 병합하여 원곡리(院谷里)가 되고, 금천면(金川面) 소속으로 바뀐다. 광복 이후 본 마을은 3구로 편제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전언에 의하면, 김해김씨 삼현파가 입향하여 마을을 형성하였고 그후 전주이씨가 들어와 살았다고 한다. 마을에는 김해김씨 16, 이씨 12, 박씨 7, 문씨 4, 최씨 4, 전씨 3, 한씨 2, 장씨ㆍ나씨ㆍ문씨ㆍ남씨ㆍ임씨ㆍ신씨ㆍ오씨ㆍ윤씨 각 1호 등 총 56가구가 거주하고 있다.
마을조직과 근ㆍ현대적 변화
마을총회는 12월 말일에 개최한다. 총회에서는 마을 자금의 결산과 마을 사업 토론 그리고 2년을 주기로 임원을 선출한다. 동계는 1936년 조직되었으며, 전 가구가 가입되어 애경사 때 상부상조를 하고 있다. 부녀회는 1970년대에 조직되었으며 50여명의 회원이 봉사활동과 친목, 마을 일 돕기, 경로잔치 등을 하고 있다. 마을회관은 1동으로 1999년에 건립되었으며 경로당과 사무실로 사용되고 있다. 마을은 매년 5월 8일 어버이날에 경로잔치를 베풀고 있다.
전기는 1960년대에 가설되었고 전화는 행정전화가 1970년대, 일반전화가 1980년대에 들어왔다. 연료는 연탄보일러 10가구, 기름보일러 43가구, 심야전기보일러 3가구이고 취사연료는 대부분의 가구에서 LPG를 사용하고 있다. 상업활동으로는 가게 1, 건강원 1, 건설회사 1, (주)삼성레미콘 1, (주)보원축산 1, 금천주류 1, 가구점 1, 나주배농산물직판장 1개소 등이 있다.
광탄(廣灘) 원곡리 4구
자연환경과 인문환경
광탄마을은 면소재지인 오강리와 국도 1호선을 사이에 두고 마주하고 있다. 동쪽으로는 촌곡리가 있고, 서쪽으로는 남원촌이 있으며 남쪽으로는 오강리가 있고, 북쪽으로는 촌곡리 1구 본촌이 있다. 109가구, 340여명이 거주하고 있는데 상가가 많아 유동인구가 많은 편이다. 대부분 농업과 상업에 종사하고 있으며, 주산물은 쌀과 배이다. 농경지는 대부분 마을 밖 인근지역에 펼쳐져 있으며, 영산강 물을 이용하여 농업용수로 사용하고 있다. 마을에서는 30여 가구가 배를 재배하고 있는데 일제강점기 때 일본인들이 처음으로 시작하였다. 당시 일본인으로 나주에서 배를 최초로 재배하였던 마쯔후지 덴로쿠(松藤傳六, 원곡리 221번지 거주), 마쯔모토(松本), 이타니(伊谷) 등이 기억난다고 마을사람들은 말하고 있다. 그리고 8가구가 포도를 20여년 전부터 재배해 오고 있다. 한편 마쯔후지 덴로쿠는 금천중학교 현 인근 250번지에서 배과수원을 시작하였는데 이곳이 나주 최초의 배 재배지이다.
교통은 편리하다. 마을 앞 버스승강장에서 광주와 나주를 오고 가는 버스를 이용하고 있다. 주민들의 생필품 구입은 나주장ㆍ남평장ㆍ영산포장ㆍ마트를 이용한다. 마을이 국도 1호선 금천면 사거리를 중심으로 형성되어 있어 상가가 많다. 부동산중개소 1, 낚시가게 1, 통닭집 1, 한약방 1, 주유소 2, 사진관 1, 미용실 2, 세탁소 1, 건강원 5, 슈퍼 3, 철물점 1, 비디오가게 2, 당구장 1, 식육점 2, 피아노학원 1, 이발소 1, 전업사 1, 꽃가게 1, 총포사 1, PㆍC방 1, 오락실 1, 공업사 2, 호프집 2, 양품점 1, 분식집 2, 오토바이 가게 1, 농약사 1, 식당 3, 의상실 1, 떡방앗간 1, 개인택시부 1, 카센터 1, 백제관광 1개소 등이 있다. 이밖에 금천주조장이 40~45년전에 문을연 이래로 정병림(여, 80세)이 운영하다가 5~6년 전에 폐쇄되었다. 공공기관으로는 호남원예고등학교ㆍ금천중학교ㆍ전라남도 교육과학원ㆍ첨단과학관 등이있고 금천천주교회와 금천선교회가 있다.
지명유래와 마을연혁
마을 인근은 조선후기 때 군대 훈련장으로 이용되었으며, 넓은 들판이라 하여 광탄(廣灘)이라 하였다고 한다. 본 마을은 과거 하천지대였으나 일제강점기에 일본인들이 과수를 재배하기 위해 들어와 터를 잡은 곳이다. 따라서 마을은 기존에 발행된 문헌에는 나타나지 않는다. 광복 이후 원곡리 4구로 편제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마을에는 김씨 26, 이씨 19, 박씨 11, 정씨 9, 최씨 5, 강씨 4, 조씨 4, 서씨 4, 임씨 3, 나씨 3, 문씨 3, 배씨 2, 송씨 2, 안씨 2, 윤씨 2, 한씨ㆍ형씨ㆍ양씨ㆍ신씨ㆍ주씨ㆍ선씨ㆍ백씨ㆍ구씨ㆍ장씨ㆍ기씨 각 1호 등 총 109가구가 거주하고 있다.
마을조직과 근ㆍ현대적 변화
마을총회는 1월 6일에 개최한다. 총회에서는 마을자금의 결산과 마을사업 토론 그리고 2년을 주기로 임원을 선출한다. 친목회는 1989년에 조직되었으며, 30명의 회원이 애경사 때 상부상조를 하고 있고 부녀회는 1970년대에 조직하며 33명의 회원이 봉사활동과 친목, 마을 일 돕기 등을 하고 있다.
전화는 행정전화가 1970년대, 일반전화가 1980년대에 들어왔고 연료는 기름보일러 149가구이고 취사연료는 대부분의 가구에서 LPG를 사용하고 있다. 마을회관은 1동 83㎡으로 1998년에 건립되었다. 이밖에 5월 8일 어버이날에는 부녀회 주관으로 마을에서 경로잔치를 베푼다.
남원촌(南院村)ㆍ금수동 원곡리 5구
자연환경과 인문환경
남원촌은 면소재지에서 북쪽으로 약 1.5㎞ 지점에 위치하며, 15가구가 거주하고 있는 2반 금수동과는 한 마을로 인식하고 있다. 금수동은 호남원예고등학교 뒤편에 위치한다. 동쪽으로는 광탄마을이 있고, 서쪽으로는 영산강 너머로 나주시 청동이 있다. 남쪽으로는 미곡마을이 있고, 북쪽으로는 원촌이 위치하고 있다. 마을에는 62가구, 160여명이 거주하고 있는데 주민의 3분의 1은 농업에 종사하고 있으며, 3분의 2는 출퇴근하는 회사원이다. 자녀가 부모를 모시고 살면서 나주와 광주에 있는 직장을 다니고 있다.
주산물은 쌀과 배이며, 농경지는 마을 인근과 영산강 하천부지에 펼쳐져 있어 영산강 물과 관정을 이용하여 농업용수를 공급하고 있다. 논 21㏊, 과수원을 포함하여 밭 25㏊가 있는데 농경지 토양은 점질토와 사질토로 농사짓기에 적당하며 대부분의 농가가 영산강 하천부지에서 이모작을, 마을 인근에서 일모작을 하고 있다. 42가구가 배를 재배하고 있는데 대부분 밭을 과수원으로 변경하여 재배하고 있다. 교통은 좋은 편으로 마을 앞이나 금천사거리에서 버스를 이용하고 있고, 주민들의 생필품 구입은 나주장ㆍ남평장ㆍ영산포장ㆍ마트를 이용한다.
지명유래와 마을연혁
마을은 배형국이다. 지명은 원촌의 남쪽에 위치하고 있다 하여 남원촌이라 하였다. 일제강점기 때에는 광탄마을에 속해 있었으며, 광복 이후에는 원촌에 포함되었다. 그리고 1988년 1월에 원곡리 2구 원촌에서 5구로 분구되었다. 입향조는 전주이씨 완창대군파 시조로부터 40세손인 이성기이다. 그는 원촌에서 이곳으로 1910년대에 이거하였는데 당시에는 소나무와 대나무가 우거진 곳이었다고 한다. 이성기가 마을에 거주할 때 2가구가 마주보고 살고 있었으며, 그 사이(마을회관 앞) 나주로 가는 길이 있어, 이 길을 통해 신가리나 촌곡리 사람들이 나주를 오고 갔다고 한다. 당시는 일본인들이 과수를 재배하기 위해 땅을 일구던 때라고 한다.
마을에는 전주이씨 16, 박씨 10, 김씨 10, 조씨 4, 최씨 4, 한씨 3, 주씨 2, 오씨 2, 양씨 2, 강씨 2, 나씨 2, 서씨 2, 정씨 2, 하씨 1호 등 총 62가구가 거주하고 있으며 이중 다도면 나주호 수몰지구 사람들로 김씨와 조씨 몇몇 가구가 이곳으로 이주 정착하였다.
마을조직과 근ㆍ현대적 변화
마을총회는 12월 25일에 개최하는데 마을자금의 결산과 마을사업 토론 그리고 2년을 주기로 임원을 선출한다. 일심회는 1940년대에 조직되었으며, 50가구가 가입되어 애경사 때 상부상조를 목적으로 하고 있다. 부녀회는 1988년 분구가 되면서 재조직되었으며 50여명의 회원이 봉사활동과 친목, 마을 일 돕기, 경로잔치 등을 하고 있다. 마을에서는 매년 일심회와 부녀회 주관으로 마을 어른들을 위한 경로잔치 또는 관광여행을 행한다. 마을회관은 1동 132㎡으로 2002년 12월 준공 하였고, 공동창고 1동(83㎡)이 있다.
전기는 1960년대에 가설되었고 전화는 일반전화가 1980년대에 들어왔다. 연료는 연탄보일러 5가구, 기름보일러 55가구, 심야전기보일러 2가구이고, 취사연료는 대부분의 가구에서 LPG를 사용하고 있다. 상업활동으로는 건강원 1, 건축회사 1개소가 있다.
자연환경과 인문환경
산당마을은 면소재지에서 북쪽으로 약 2㎞ 지점에 위치하고 있으며, 서북쪽으로는 영산강이 흐르고 그 너머로 나주시 노안면이 위치하고 있다. 또한 마을 앞으로는 과수원이 펼쳐져 있다. 동쪽으로는 신가리가 있고, 서쪽으로는 원촌이 있으며 남쪽으로는 광탄마을이 있고, 북쪽으로는 영산강 너머로 광주광역시 광산구가 위치하고 있다.
마을에는 46가구, 115명이 거주하고 있는데 대부분 농업에 종사하고 있으며, 주산물은 쌀과 배이다. 농경지는 마을 뒤 속칭 ‘신가들’과 영산강변에 펼쳐져 있어, 영산강 물과 1개의 방죽 그리고 관정을 이용하여 농업용수를 공급하고 있다. 논 20㏊, 과수원을 포함하여 밭 30㏊가 있는데 토양이 점질토로 농사짓기에 적당하며 대부분의 농가가 이모작을 하고 있다. 32가구가 배를 재배하고 있는데 일제강점기 때 일본인들이 처음으로 시작하였다. 그리고 한국인으로는 1927년 이재성이 6611㎡, 1939년 이영균이 8925㎡의 과수원을 조성하였다. 2가구가 포도를 10여년 전부터 재배해 오고 있고, 1가구가 복숭아를 1999년부터 재배해 오고 있다. 그런데 20~25년 전까지 마을에서는 주로 복숭아를 재배하였다. 그러나 배를 재배하여 얻는 수입이 더 높았기 때문에 이후 복숭아 재배를 중단하고 배 재배로 전환하였다. 교통은 불편한 편으로 1일 1회 아침에 버스가 마을을 경유한다. 때문에 대부분 오강 사거리까지 걸어 나가 버스를 이용하고 있고 생필품 구입은 나주장ㆍ남평장ㆍ영산포장ㆍ마트를 이용한다
지명유래와 마을연혁
옛날 산새들이 사는 조용한 곳에 초당을 짓고 살았던 이하순이 산당(山當)이라 칭한 것이 현재에 이르고 있다. 문헌상 마을의 이름이 처음 나온 곳은 1912년 『지방행정구역명칭일람』이다. 여기에 금마산면(金馬山面) 12개 마을 중 산당리(山堂里)라는 지명이 보인다. 1914년 일제강점기 때 행해진 행정구역개편으로 금마산면의 미곡리(尾谷里)ㆍ산당리(山堂里)ㆍ원촌(院村)ㆍ본촌(本村) 일부와 병합하여 원곡리(院谷里)가 되고, 금천면(金川面) 소속으로 바뀐다. 광복 이후 본 마을은 원곡1리로 편제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입향조는 전주이씨(全州李氏) 완창대군파(完昌大君派), 파조로부터 18세손인 태순(太淳)ㆍ하순(夏淳)ㆍ흥순(興淳) 형제이다. 이들 삼형제는 17세손인 정호(廷浩)의 다섯 아들 중 둘째와 넷째 그리고 다섯째이다. 이들 삼형제는 인근인 원촌마을에서 이곳으로 이거하였다. 태순(1852~1920)의 부인은 풍천임씨이고, 묘는 원촌 고사등에 있으며, 하순(1860~1937)의 부인은 광산김씨이고, 묘는 금천면 석전리에 있다. 흥순(1864~1950)의 부인은 경주최씨이고, 묘는 산포면에 있다. 삼형제 이후 후손이 번창하여 현재 마을에는 파조로부터 21세손인 이재덕(남, 68세, 제보자)과 일가(一家)들이 살고 있다. 마을에는 전주이씨 24, 하동정씨 7, 밀양박씨 5, 경주최씨 3, 김해김씨 3, 홍주송씨 1, 은진송씨 1, 양주편씨 1, 금성나씨 1호 등 총 46가구가 거주하고 있다.
마을조직과 근ㆍ현대적 변화
마을총회는 12월 30일에 개최한다. 총회에서는 마을 자금의 결산과 마을 사업 토론 그리고 2년을 주기로 임원을 선출한다. 위친계는 1940년대에 조직되었으며, 38명의 계원이 애경사 때 상부상조를 목적으로 하고 있다. 부녀회는 1970년대에 조직되었으며 40여명의 회원이 봉사활동과 친목, 마을 일 돕기, 경로잔치 등을 하고 있다. 그리고 과거에는 마을에서 구판장을 운영하기도 하였다.
전기는 1940년대 후반에 가설되었고, 전화는 행정전화가 1970년대, 일반전화가 1980년대에 들어왔다. 연료는 연탄보일러 2가구, 기름보일러 44가구이고, 취사연료는 대부분의 가구에서 LPG를 사용하고 있다. 마을공동창고는 1동 50㎡, 마을회관은 1동 50㎡으로 1970년대에 건립하였다. 그리고 마을에서는 매년 5월 8일 어버이날에 마을 부녀회 주관으로 경로잔치를 열고 있다.
원곡2리 : 원촌(院村)ㆍ따박골
자연환경과 인문환경
원촌은 면소재지에서 북쪽으로 약 2㎞ 지점에 위치하며, 5가구가 거주하고 있는 2반 따박골과는 한 마을로 인식하고 있다. 그리고 마을 서북쪽으로는 영산강이 흐르고 있다. 동쪽으로는 산당마을이 있고, 서쪽의 영산강 너머로 나주시 석현동이 있다. 남쪽으로는 남원촌이 있고, 북쪽으로는 영산강 너머로 광주광역시 광산구가 위치하고 있다. 이밖에 마을 인근 지명으로는 ‘몰미동’과 ‘고사리등’이 있다. 몰미동은 산당마을과 경계지점에 위치하고 있는 곳으로 옛날 이무기가 말을 물어 죽여 말머리를 사장한 곳이라 하며, 고사리등은 마을 동편 임야에 고사리가 많이 나왔기 때문이라고 한다.
마을에는 85가구, 250여명이 거주하고 있으며 대부분 농업에 종사하고 있고, 주산물은 쌀과 배이다. 농경지는 마을 뒤 속칭 ‘공쟁이들’과 ‘소란들’ 그리고 영산강 하천부지에 펼쳐져 있으며, 영산강 물과 1개의 방죽 그리고 관정을 이용하여 농업용수를 공급하고 있다. 논 60㏊, 과수원을 포함하여 밭 30㏊가 있고 농경지 토양은 점질토와 사질토로 농사짓기에 적당하며 대부분의 농가가 영산강 하천부지에서 이모작을, 마을 인근에서는 일모작을 하고 있다. 40가구가 배를 재배하고 있는데 일제강점기 때 일본인 고바야시(小林), 사와쿠찌(澤口) 등이 시작했다고 한다. 2가구가 복숭아를 재배하고 있는데, 10여년 전에 복숭아를 재배하던 많은 가구가 배 재배로 전환하였다. 이밖에 1가구가 한우를 10여두 사육하고 있다. 밭은 대부분 과수원으로 과거 이 마을에서 재배한 무는 수분함량이 김장용으로 알맞고 맛이 좋아 인근에서 최고의 상품으로 인정해 주었다. 따라서 1950년대 이전까지는 무를 많이 재배하였으나 현재는 5~6가구만이 영산강 하천부지에서 경작하고 있다.
교통은 불편한 편으로 남원촌 앞 승강장까지 걸어 나가 버스를 이용하고 있다. 생필품 구입은 나주장ㆍ남평장ㆍ영산포장ㆍ마트를 이용한다. 문화유적으로는 유물산포지와 효열비가 있다. 유물산포지는 이재휘의 배과수원 구릉 하단부에 위치하고 있는데 이곳에서 청동기시대의 것으로 추정되는 토제 어망추와 무문토기편, 삼국시대 회청색경질토기편 등이 수습되었다. 쌍전각(雙全閣)은 1955년 건립된 것으로 전각 내에는 「효열부천안전씨기적비 孝烈婦天安全氏紀蹟碑」가 있다.
지명유래와 마을연혁
마을은 배형국이다. 문헌상 마을의 지명이 처음 나온 곳은 1789년 《호구총수》로 금마산면(金馬山面)의 4개 마을 중 한 마을로 ‘원촌(院村)’이라는 지명이 보이고, 1912년 『지방행정구역명칭일람』에는 금마산면 12개 마을 중 원촌리(院村里)라는 지명이 보인다. 1914년 일제강점기 때 행해진 행정구역개편으로 금마산면의 미곡리(尾谷里)ㆍ산당리(山堂里)ㆍ원촌(院村)ㆍ본촌(本村) 일부와 병합하여 원곡리(院谷里)가 되고, 금천면(金川面) 소속으로 바뀐다. 광복 이후 본 마을은 원곡리 2구로 편제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전언에 의하면, 이 마을은 과거 원씨들이 거주하던 터였다고 전한다. 그러나 광탄나루와 인접한 마을로 지명에서 알 수 있듯, 강변 주막이 있었던 마을로 추정된다. 구체적인 입향 내력이 확인된 성씨는 전주이씨(全州李氏) 완창대군파(完昌大君派)이고, 입향조는 파조로부터 14세손인 만희(萬禧)ㆍ만징(萬徵)ㆍ만엽(萬葉) 형제이다. 이들 삼형제는 13세손인 춘영(春榮)의 네아들 중 둘째와 셋째 그리고 넷째이며, 이들은 금천면 동악리 상야마을에서 이곳으로 이거하였다.삼형제 중 만희(1695~?)의 자는 지여(祉汝), 호는 삼은(三隱)이고, 부인은 광산김씨이며, 묘는 다도면 신동리에 있다. 만징(1709~?)의 부인은 진주강씨이고, 묘는 다도면에 있고, 만엽(1712~?)의 자는 치장(致章), 호는 해파(海波)이고, 부인은 남평문씨이며, 묘는 세지면에 있다. 삼형제 이후 자손이 번창하여 현재 마을에는 파조로부터 22세손인 이종달(남, 74세, 제보자)과 그 일가(一家)들이 집성촌을 이루고 있다. 마을에는 전주이씨 61, 김씨 10, 청주한씨 3, 하동정씨 2, 최씨 2, 달성배씨 2, 강씨 2, 한양조씨 1, 차씨 1, 박씨 1호 등 총 85가구가 거주하고 있다
마을조직과 근ㆍ현대적 변화
마을총회는 12월 25일에 개최한다. 총회에서는 마을자금의 결산과 마을사업 토론 그리고 2년을 주기로 임원을 선출한다. 마을 노인들 위주로 1965년에 조직된 청우계는 20명의 계원이 애경사 때 상부상조를 하고 있다. 마을의 젊은이 위주로 1999년에 조직된 상포계는 30명의 계원이 애경사 때 상부상조를 목적으로 하고 있고, 부녀회는 1970년대에 조직되었으며 60여명의 회원이 봉사활동과 친목, 마을 일 돕기, 5월 8일 경로잔치 등을 하고 있다. 청년회는 1970년대에 조직되었으며 30여명의 회원이 봉사활동과 친목 그리고 명절 때 노래자랑 등의 행사를 주최하고 행사 주최로 얻어진 수익금으로 여름철에 마을어른들을 대접하는 잔치를 베푼다.
전기는 1946년에 가설되었고 전화는 행정전화가 1970년대, 일반전화가 1980년대에 들어왔다. 연료는 기름보일러 85가구이고 취사연료는 대부분의 가구에서 LPG를 사용하고 있다. 상업활동으로는 구판장 1, 가게 1개가 있으며, 마을 내에 유치원이 건설 중에 있다. 마을회관은 1동 99㎡으로 1996년에 건립하였으며 노인정과 사무실로 사용하고 있다. 그리고 마을에 농협창고가 1동 있는데 165㎡으로 8년 전에 건립되었다.
미곡(尾谷) 원곡리 3구
자연환경과 인문환경
미곡마을은 면소재지에서 서쪽으로 약 1.5㎞ 지점에 위치하고 있다. 동쪽으로는 광탄마을이 있고, 서쪽으로는 영산강 너머로 나주시 청동이 있다. 남쪽으로는 ‘방목들’이 있고, 북쪽으로는 남원촌이 있다. 마을에는 56가구, 150여명이 거주하고 있는데 대부분 농업에 종사하고 있으며, 주산물은 쌀과 배이다. 농경지는 마을 앞 방목들과 영산강 하천부지에 펼쳐져 있어, 영산강 물과 관정을 이용하여 농업용수를 공급한다. 논 8㏊, 과수원을 포함하여 밭 10㏊가 있고 농경지 토양은 점질토와 사질토로 농사짓기에 적당하며 대부분의 농가가 영산강 하천부지에서 이모작을, 마을 인근에서는 일모작을 하고 있다.
12가구가 배를 재배하고 있고, 1가구가 포도를 재배하고 있으며 3가구가 하우스를 이용하여 배추ㆍ상추ㆍ딸기 등을 재배하고 있다. 교통은 좋은 편으로 마을 앞이나 금천사거리에서 버스를 이용하고 있다. 생필품 구입은 나주장ㆍ남평장ㆍ영산포장ㆍ마트를 이용한다. 과거에 나종간이 마을에서 양잠을 하였다고 하며, 1946년 오강리 벽류마을에 호남원예중학교가 있을 당시 본 마을에 버스정류소가 있었다.
지명유래와 마을연혁
금천면은 용형국이고, 미곡은 용꼬리형국이라고 하여 마을 이름을 미곡(尾谷)이라 하였다. 문헌상 마을 이름이 처음 나온 곳은 1912년 『지방행정구역명칭일람』으로, 금마산면(金馬山面) 12개 마을 중 미곡리(尾谷里)라는 지명이 보인다. 1914년 일제강점기 때 행해진 행정구역개편으로 금마산면의 미곡리(尾谷里)ㆍ산당리(山堂里)ㆍ원촌(院村)ㆍ본촌(本村) 일부와 병합하여 원곡리(院谷里)가 되고, 금천면(金川面) 소속으로 바뀐다. 광복 이후 본 마을은 3구로 편제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전언에 의하면, 김해김씨 삼현파가 입향하여 마을을 형성하였고 그후 전주이씨가 들어와 살았다고 한다. 마을에는 김해김씨 16, 이씨 12, 박씨 7, 문씨 4, 최씨 4, 전씨 3, 한씨 2, 장씨ㆍ나씨ㆍ문씨ㆍ남씨ㆍ임씨ㆍ신씨ㆍ오씨ㆍ윤씨 각 1호 등 총 56가구가 거주하고 있다.
마을조직과 근ㆍ현대적 변화
마을총회는 12월 말일에 개최한다. 총회에서는 마을 자금의 결산과 마을 사업 토론 그리고 2년을 주기로 임원을 선출한다. 동계는 1936년 조직되었으며, 전 가구가 가입되어 애경사 때 상부상조를 하고 있다. 부녀회는 1970년대에 조직되었으며 50여명의 회원이 봉사활동과 친목, 마을 일 돕기, 경로잔치 등을 하고 있다. 마을회관은 1동으로 1999년에 건립되었으며 경로당과 사무실로 사용되고 있다. 마을은 매년 5월 8일 어버이날에 경로잔치를 베풀고 있다.
전기는 1960년대에 가설되었고 전화는 행정전화가 1970년대, 일반전화가 1980년대에 들어왔다. 연료는 연탄보일러 10가구, 기름보일러 43가구, 심야전기보일러 3가구이고 취사연료는 대부분의 가구에서 LPG를 사용하고 있다. 상업활동으로는 가게 1, 건강원 1, 건설회사 1, (주)삼성레미콘 1, (주)보원축산 1, 금천주류 1, 가구점 1, 나주배농산물직판장 1개소 등이 있다.
광탄(廣灘) 원곡리 4구
자연환경과 인문환경
광탄마을은 면소재지인 오강리와 국도 1호선을 사이에 두고 마주하고 있다. 동쪽으로는 촌곡리가 있고, 서쪽으로는 남원촌이 있으며 남쪽으로는 오강리가 있고, 북쪽으로는 촌곡리 1구 본촌이 있다. 109가구, 340여명이 거주하고 있는데 상가가 많아 유동인구가 많은 편이다. 대부분 농업과 상업에 종사하고 있으며, 주산물은 쌀과 배이다. 농경지는 대부분 마을 밖 인근지역에 펼쳐져 있으며, 영산강 물을 이용하여 농업용수로 사용하고 있다. 마을에서는 30여 가구가 배를 재배하고 있는데 일제강점기 때 일본인들이 처음으로 시작하였다. 당시 일본인으로 나주에서 배를 최초로 재배하였던 마쯔후지 덴로쿠(松藤傳六, 원곡리 221번지 거주), 마쯔모토(松本), 이타니(伊谷) 등이 기억난다고 마을사람들은 말하고 있다. 그리고 8가구가 포도를 20여년 전부터 재배해 오고 있다. 한편 마쯔후지 덴로쿠는 금천중학교 현 인근 250번지에서 배과수원을 시작하였는데 이곳이 나주 최초의 배 재배지이다.
교통은 편리하다. 마을 앞 버스승강장에서 광주와 나주를 오고 가는 버스를 이용하고 있다. 주민들의 생필품 구입은 나주장ㆍ남평장ㆍ영산포장ㆍ마트를 이용한다. 마을이 국도 1호선 금천면 사거리를 중심으로 형성되어 있어 상가가 많다. 부동산중개소 1, 낚시가게 1, 통닭집 1, 한약방 1, 주유소 2, 사진관 1, 미용실 2, 세탁소 1, 건강원 5, 슈퍼 3, 철물점 1, 비디오가게 2, 당구장 1, 식육점 2, 피아노학원 1, 이발소 1, 전업사 1, 꽃가게 1, 총포사 1, PㆍC방 1, 오락실 1, 공업사 2, 호프집 2, 양품점 1, 분식집 2, 오토바이 가게 1, 농약사 1, 식당 3, 의상실 1, 떡방앗간 1, 개인택시부 1, 카센터 1, 백제관광 1개소 등이 있다. 이밖에 금천주조장이 40~45년전에 문을연 이래로 정병림(여, 80세)이 운영하다가 5~6년 전에 폐쇄되었다. 공공기관으로는 호남원예고등학교ㆍ금천중학교ㆍ전라남도 교육과학원ㆍ첨단과학관 등이있고 금천천주교회와 금천선교회가 있다.
지명유래와 마을연혁
마을 인근은 조선후기 때 군대 훈련장으로 이용되었으며, 넓은 들판이라 하여 광탄(廣灘)이라 하였다고 한다. 본 마을은 과거 하천지대였으나 일제강점기에 일본인들이 과수를 재배하기 위해 들어와 터를 잡은 곳이다. 따라서 마을은 기존에 발행된 문헌에는 나타나지 않는다. 광복 이후 원곡리 4구로 편제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마을에는 김씨 26, 이씨 19, 박씨 11, 정씨 9, 최씨 5, 강씨 4, 조씨 4, 서씨 4, 임씨 3, 나씨 3, 문씨 3, 배씨 2, 송씨 2, 안씨 2, 윤씨 2, 한씨ㆍ형씨ㆍ양씨ㆍ신씨ㆍ주씨ㆍ선씨ㆍ백씨ㆍ구씨ㆍ장씨ㆍ기씨 각 1호 등 총 109가구가 거주하고 있다.
마을조직과 근ㆍ현대적 변화
마을총회는 1월 6일에 개최한다. 총회에서는 마을자금의 결산과 마을사업 토론 그리고 2년을 주기로 임원을 선출한다. 친목회는 1989년에 조직되었으며, 30명의 회원이 애경사 때 상부상조를 하고 있고 부녀회는 1970년대에 조직하며 33명의 회원이 봉사활동과 친목, 마을 일 돕기 등을 하고 있다.
전화는 행정전화가 1970년대, 일반전화가 1980년대에 들어왔고 연료는 기름보일러 149가구이고 취사연료는 대부분의 가구에서 LPG를 사용하고 있다. 마을회관은 1동 83㎡으로 1998년에 건립되었다. 이밖에 5월 8일 어버이날에는 부녀회 주관으로 마을에서 경로잔치를 베푼다.
남원촌(南院村)ㆍ금수동 원곡리 5구
자연환경과 인문환경
남원촌은 면소재지에서 북쪽으로 약 1.5㎞ 지점에 위치하며, 15가구가 거주하고 있는 2반 금수동과는 한 마을로 인식하고 있다. 금수동은 호남원예고등학교 뒤편에 위치한다. 동쪽으로는 광탄마을이 있고, 서쪽으로는 영산강 너머로 나주시 청동이 있다. 남쪽으로는 미곡마을이 있고, 북쪽으로는 원촌이 위치하고 있다. 마을에는 62가구, 160여명이 거주하고 있는데 주민의 3분의 1은 농업에 종사하고 있으며, 3분의 2는 출퇴근하는 회사원이다. 자녀가 부모를 모시고 살면서 나주와 광주에 있는 직장을 다니고 있다.
주산물은 쌀과 배이며, 농경지는 마을 인근과 영산강 하천부지에 펼쳐져 있어 영산강 물과 관정을 이용하여 농업용수를 공급하고 있다. 논 21㏊, 과수원을 포함하여 밭 25㏊가 있는데 농경지 토양은 점질토와 사질토로 농사짓기에 적당하며 대부분의 농가가 영산강 하천부지에서 이모작을, 마을 인근에서 일모작을 하고 있다. 42가구가 배를 재배하고 있는데 대부분 밭을 과수원으로 변경하여 재배하고 있다. 교통은 좋은 편으로 마을 앞이나 금천사거리에서 버스를 이용하고 있고, 주민들의 생필품 구입은 나주장ㆍ남평장ㆍ영산포장ㆍ마트를 이용한다.
지명유래와 마을연혁
마을은 배형국이다. 지명은 원촌의 남쪽에 위치하고 있다 하여 남원촌이라 하였다. 일제강점기 때에는 광탄마을에 속해 있었으며, 광복 이후에는 원촌에 포함되었다. 그리고 1988년 1월에 원곡리 2구 원촌에서 5구로 분구되었다. 입향조는 전주이씨 완창대군파 시조로부터 40세손인 이성기이다. 그는 원촌에서 이곳으로 1910년대에 이거하였는데 당시에는 소나무와 대나무가 우거진 곳이었다고 한다. 이성기가 마을에 거주할 때 2가구가 마주보고 살고 있었으며, 그 사이(마을회관 앞) 나주로 가는 길이 있어, 이 길을 통해 신가리나 촌곡리 사람들이 나주를 오고 갔다고 한다. 당시는 일본인들이 과수를 재배하기 위해 땅을 일구던 때라고 한다.
마을에는 전주이씨 16, 박씨 10, 김씨 10, 조씨 4, 최씨 4, 한씨 3, 주씨 2, 오씨 2, 양씨 2, 강씨 2, 나씨 2, 서씨 2, 정씨 2, 하씨 1호 등 총 62가구가 거주하고 있으며 이중 다도면 나주호 수몰지구 사람들로 김씨와 조씨 몇몇 가구가 이곳으로 이주 정착하였다.
마을조직과 근ㆍ현대적 변화
마을총회는 12월 25일에 개최하는데 마을자금의 결산과 마을사업 토론 그리고 2년을 주기로 임원을 선출한다. 일심회는 1940년대에 조직되었으며, 50가구가 가입되어 애경사 때 상부상조를 목적으로 하고 있다. 부녀회는 1988년 분구가 되면서 재조직되었으며 50여명의 회원이 봉사활동과 친목, 마을 일 돕기, 경로잔치 등을 하고 있다. 마을에서는 매년 일심회와 부녀회 주관으로 마을 어른들을 위한 경로잔치 또는 관광여행을 행한다. 마을회관은 1동 132㎡으로 2002년 12월 준공 하였고, 공동창고 1동(83㎡)이 있다.
전기는 1960년대에 가설되었고 전화는 일반전화가 1980년대에 들어왔다. 연료는 연탄보일러 5가구, 기름보일러 55가구, 심야전기보일러 2가구이고, 취사연료는 대부분의 가구에서 LPG를 사용하고 있다. 상업활동으로는 건강원 1, 건축회사 1개소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