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곡리
- 등록일 2020.04.17 10: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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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등록자 관리자
면소재지인 신석마을에서 북동쪽으로 약 4㎞쯤 떨어진 최북단에 위치한다. 유곡리의 동쪽으로는 다도면과 경계를 이루고, 서쪽으로 옥산리와 접해 있으며, 남쪽에는 장성리와 건지산이 자리하고, 북쪽으로는 산포면과 경계하고 있다. 유곡리는 현재 박곡, 낙동, 유정의 3개 마을로 이루어져 있는데, 본래는 덕산면 박곡마을, 죽곡면 낙동마을, 욱곡면면 유정마을로 각각 소속을 달리하고 있었는데 1914년 행정구역개편으로 이 세 마을을 합쳐 봉황면 유곡리로 하였다. 박곡과 유정 사이에는 국도가 지나가고 있는데 이 길은 옛날 영암, 해남 등지에서 광주, 서울로 올라가는 사람들이 동창, 철야등을 거쳐 지나갔던 한길이었다. 박곡 뒤의 건지산에서 발원하는 유곡천은 유정, 낙동 앞을 관류하여 옥산리 앞에서 덕룡산에서 발원하여 죽석, 용전을 거쳐 흘러온 하천과 합류하여 금천을 거쳐 영산포 구다리목에서 영산강으로 유입해 들어간다.
박곡마을(朴谷)-박실마을
면소재지인 신석마을에서 북동쪽으로 약 5㎞ 떨어진 곳에 위치한 박실마을은 동쪽으로 다도면과 경계하고 서쪽으로는 유정마을, 북쪽으로는 산포면과 경계를 이루고 있으며, 남쪽은 건지산과 마주하고 있다. 이 마을은 1300년대 초부터 사람이 살았다고 전하며, 그 후 제주도에서 남원으로 이거하던 남원양씨(南原梁氏)가 이곳으로 들어와 마을을 일구어 살았다고 한다. 이와 같은 사실은 마을 주변 야산에 남원양씨(南原梁氏)의 묘소가 많이 분포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짐작할 수 있다.
이 마을은 화순최씨(和順崔氏)의 동족마을로서 입향시기는 400년 전이다. 정암 조광조 선생의 문인인 화순최씨(和順崔氏) 운(澐)이 경상북도 금천에서 살다가 기묘사화를 당하여 온 가족이 강계로 이주하였는데 그 곳에서 운이 세상을 뜨자, 그의 아들 경행(慶行)이 3년상을 치르고는 가족을 이끌고 남평현으로 이주하였다고 하나 그 확실한 위치는 알 수가 없다. 그 후 광해군때, 경행의 후손인 괘서(掛鋤亭) 최운정(崔雲挺)이 폐비의 의론을 듣고 부당함을 고하기 위하여 대궐앞에 나아가 일일상소를 올렸으나 끝내 뜻이 관철되지 않자 귀향하여 이곳에 괘서정을 짓고 정착하였다고 한다.
박곡(朴谷)이라는 이름은 호구총서에 남평현 덕곡면 박곡리로 처음 나타난다. 그후 1914년 행정구역 개편으로 나주군 봉황면 유곡리에 편입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박곡의 또 다른 명칭은 박실인데 구전에 의하면 박넝쿨이 뻗어 내려오는 산맥에 박열매가 맺은 형국이라 해서 박실이라 했다고 하며, 현재는 주민들로부터 박실마을로 불리운다. 이 마을의 지형에 대한 유래가 있는 곳으로 유명한 곳은 ‘옥녀탄금'이라는 곳인데, 이 곳은 마을 남쪽 분토동에 위치하는 명당으로서 그 형태가 마치 옥녀가 거문고를 타는 형상과 흡사하다 하여 옥녀탄금이라 불리운다. 현재 이곳은 이천서씨(李川徐氏)들의 선산으로 이 명당에 묘를 쓴 후 벼슬길에 오른 사람이 많았다고 한다.
또한 이 마을에는 전설을 가지고 있는 입석이 두 개가 있는데, 그중 하나는 사람바위이고, 다른 하나는 개바위이다. 현재는 세월의 흐름과 함께 바위들이 삭아 형태는 사라지고, 겨우 바위의 형체만이 남아있다. 본래 이 마을이 게 형국(기굴)인데 이 입석 2기가 서 있는 곳은 게의 양뿔에 해당한다는 것이다. 마을에서는 두 입석을 게눈(뿔)이라고 말한다. 게들은 여럿이 모여서 사는 습성이 있다고 해서, 이 마을 사람들 역시도 게처럼 모여서, 오래도록 잘 살아 가려는 생각이 오래 전부터 깃들어져 내려온 것 같다. 입석은 이 마을의 시작과 함께 세워져서 약 3~4백 년은 되었을 것으로 추정한다.
한편 마을 사람들의 말에 의하면 사람바위가 무너지면 사람이 다치거나 죽고, 개바위가 넘어지면 개가 죽는다고 한다. 그 예로 과거에 최영춘의 집 마당에 있는 입석이 넘어진 일이 있었는데 그 해에 개가 떼죽음을 당한 일이 일어났다고 한다. 이에 놀란 주민들이 넘어진 입석을 다시 세워 놓았더니 더 이상의 피해는 없었다고 한다. 이 마을의 자생조직으로는 괘서정공파의 문중계와 상부계, 부녀회 등이 있는데, 괘서정공파는 약 300년 전에 문중의 친목을 다지기 위해서 만들어졌고, 상부계는 30년 전 친목 도모를 위해서, 부녀회는 1973년 마을 부녀자들의 친목을 위해서 만들어졌으며, 현재 58명이 참여하고 있다. 마을의 민속으로는 기우제가 있었다.
마을의 기본현황은 총인구수 266명으로, 남자 127명, 여자 139명이 살고 있으며, 총면적은 1.20㎢이며 전 0.35㎢, 답 0.45㎢, 임야 0.37㎢, 기타 0.03㎢가 해당된다. 총 가구수는 67호이며, 농가는 58호, 비농가는 9호이며, 마을 사람들의 주요산업은 쌀농사이며, 수박, 무를 특작물로 재배하고 있다. 마을에는 화순최씨 61호, 파평윤씨 2호, 남양홍씨 2호, 풍산홍씨 2호가 살고 있다.
유정마을(柳亭)
면소재지인 신석마을에서 북동쪽으로 약 4㎞ 떨어진 곳에 위치한 유정마을은 동쪽으로 박곡마을과 서쪽으로는 옥산리 옥산마을과 접하고, 동남쪽으로는 낙동마을과 인접해 있으며, 북쪽으로는 산포면과 경계를 이루고 있다. 약 300년 전부터 사람이 살기 시작했다고도 하나 정확한 내력은 알 수가 없고, 현재 살고 있는 경주정씨(慶州鄭氏)가 150년전에 이 마을로 들어와 정착하였다고 한다. 그후 여러 성씨가 차례로 들어와 살았으나 그들의 입향시기와 동기 등은 알 수가 없다.
지난날에는 그릇을 굽는 곳이라 하여 ‘점' 또는 ‘점등'이라 불리웠으나 마을 주변에 버드나무가 많다고 하여, 유정(柳亭)으로 개칭했다고 하나 그 확실한 시기는 알 수가 없다. 1912년 조선총독부에서 간행한 지방행정구역일람에는 유정이라는 지명이 나타나지 않는다. 1914년 행정구역 개편 당시 욱곡면 유정리가 봉황면 유곡리로 편입 개편되면서 비로소 문헌에 나타난다. 이로 미루어보아 유정이라는 이름은 1912년~1914년 사이에 생겨났음을 알 수 있다.
한편 마을의 특색있는 지명유래로는 가매등과 구승굴이 있다. 가매등은 마을 한 가운데 위치하는데 옛날 옹기를 굽던 자리라 하여 가매등이라 불렀다. 지난 날에는 둥그런 형태를 지니고 있었으나 지금은 모두 파손되어 잡목이 우거져 그 자취를 찾아볼 수 없다. 다른 하나는 구승굴인데, 마을 동쪽에 위치한 노씨들의 선산으로 옛날 이곳에 스님 9명이 앉았다 지나간 곳이라 하여 구승굴이라 불렀다고 한다. 또 다른 이야기로는 옹기를 굽는데 필요한 나무를 패서 장작을 만드는 소리가 마치 스님이 목탁을 두드리는 소리와 같다하여 구승동이라 불렀다고 한다.
한편 지금은 모두 그 흔적마저 없어졌지만 옛날 이 마을에 조직되어 있던 동계와 가뭄이 들면 지냈던 기우제, 그리고 이곳 주민들의 주소득원이었던 옹기의 만드는 과정에 따른 금기 등이 있다. 마을의 인구는 259명으로 이 중 남자가 129명, 여자가 130명이며, 총면적은 0.66㎢으로 전0.20㎢, 답 0.26㎢, 임야 0.20㎢이며, 총40가구 모두가 농사를 짓고 있다. 마을 사람들의 주요 산업은 쌀농사이며, 무와 수박을 특작물로 재배하고 있으며. 마을의 주요 성씨로는 경주정씨 18호, 이씨 14호, 원씨 4호, 기타 4호가 있다.마을의 민속
동계 확실한 연대는 알 수 없으나 마을사람의 말에 의하면 150년전에 문석주라는 사람이 조직한 것으로 마을 사람들과의 단합과 그릇을 굽기 위해 필요한 나무들을 마련하는 재원을 마련하는 것을 목적으로 조직하였다. 현재는 소멸되어 버렸다. 기우제: 낙동, 박곡 마을과 같이 지냈는데 이 마을에서는 주로 제기(祭器)를 많이 희사하였다고 한다.
낙동마을(樂洞)
면소재지인 신석에서 북쪽으로 약 5㎞ 위치에 있는 낙동마을은 동쪽으로는 유정마을, 서북쪽으로는 잉읍마을, 옥산마을, 남쪽으로는 유곡천을 지나 장성리 장성 마을과 경계를 이룬다. 서쪽에는 금천 삼거리에서 국도 1호선과 갈라진 금봉선이 지나가고 있고, 서쪽 끝에 해방과 더불어 설립된 봉황북초등학교가 위치하고 있다. 약 500년 전부터 지금은 알려지지 않은 어떤 성씨가 터를 잡고 살았다는 설이 있으나 현재 확인할 수는 없고, 문헌상에 나타나기로는 지금부터 약 300년 전인 조선조 숙종때, 영광의 무장에 본향을 둔 전주이씨 이천석이 봉황면 황용리 장서마을 최진사의 손자 사위가 된 후 처가의 도움으로 농토를 따라 이곳에 정착하게 되었다.
그후 김해김씨(金海金氏) 김해일(金海鎰)이 화순 쌍봉에 살다가 이천석(李天錫)의 둘째 딸과 결혼하여 1725년경 이 마을에 들어와 살게 되었다. 1800년경 이천서씨(李川徐氏)가 들어와 삼사대에 걸쳐 살았으나 1970년대에 서연수(徐連洙)가 이 마을을 떠남으로써 지금은 한 집도 남지 않게 되었다. 또한 밀양박씨(密陽朴氏)인 박문규(朴文奎)가 화순 도암면 신기리에서 이 마을 김씨가의 딸과 혼인하여 1895년경 이 마을로 들어와 지금은 3호가 살고 있다. 낙동마을은 마을의 지형이 반월형국이라 하여 달락국(月樂洞)이라 불리웠다고 하나 문헌상으로는 기록이 없고, 지방행정구역명칭일람에 남평군 죽곡면 다락리로 처음 나타난다. 그 후, 1935년경에 당시의 소설가이던 이창신(李昌信)의 건의에 따라 마을 이름을 다락동으로 고쳐 불렀으나, 1968년 5월 1일자 행정구역개편으로 유곡리 3구로 분구되고, 이름을 낙동으로 하였다.
낙동마을의 유래가 있는 지형으로는 ‘뱀명당'이 있는데, 이곳은 장성리 뒷등의 황새명당과 연관이 있다. 황새는 항상 뱀을 잡아먹고 살기 때문에 뱀명당에 사는 사람들은 번창할 수 없다고 하나 마을 앞으로 흐르는 유곡천이 이를 막아주기 때문에 뱀명당에 사는 낙동마을은 번영을 꾀할 수 있다고 한다. 이는 김해김씨(金海金氏) 자손들을 비유한 것으로, 이 자손들을 보존하기 위하여 마을 앞에다 소나무 숲을 만들어 뱀이 황새에게 잡아먹히는 것을 방지하였다고 한다.
이 마을의 특색있는 유물로는 현재 이명한(李明翰)이 간직하고 있는 가훈이 있다. 이 가훈은 이 마을의 입향조인 전주이씨 이천석이 자손들을 훈계하기 위하여 지은 글이다. 학문과 예술에 앞서 먼저 효도하고 우애하라는 내용이 담겨있고, 겸하여 진사 나두휘가 쓴 이천석의 아버지인 이지해의 행장이 실려있다. 또한 권학계안이 있는데, 이 글은 당시 명필로 이름을 날렸던 이언하의 글씨로 되어 있다.
동각 앞에는 수백년 된 감나무가 여러 그루 늘어서 있었고, 엄나무가 높이 솟아 있었다고 전하나 삼사십년 전에 고사해 버렸고, 동각앞에 있었던 둥근 돌(들독) 역시 어디론가 자취를 감추어 버렸다. 동구 앞에 있는 전주이씨 제실인 영락재는 1985년에 지은 것이다. 마을에는 1870년대에 상부상조를 목적으로 조직된 상포계와 1966년 마을 사람들의 친목도모를 위해 조직된 친목계가 있다.
마을의 총 인구는 213명으로 남자 111명, 여자 102명이 해당되며, 마을의 총 면적은, 1.20㎢이며, 이 중 전 0.20㎢, 답 0.50㎢, 임야 0.20㎢, 기타 0.30㎢가 해당된다. 마을 사람들 대다수인 40호가 농사를 짓고 있으며. 비농가는 4호에 해당하고. 주소득원 역시 쌀농사에 의존하고 있으며, 특작물로 수박을 재배하고 있다. 성씨로는 전주이씨 19호, 김해김시 10호, 밀양박씨 4호, 기타 11호가 거주하고 있다.
마을의 민속과 인물
이 마을이 배출한 인물은 이창신(李昌信)(1914~1948)이 있다. 그는 광주학생운동 당시 나주농업실습학교 2년생으로 시위를 주도하였다. 유찬옥과 함께 학생운동의 대표적 인물이었으나 미성년자라 형을 면제받았다. 그 뒤 1935년 신동아 장편소설 모집에 ‘제방공사'(提防工事)가 당선되어 문단에 등단하였으나, 사회주의문학의 경향을 띄었기 때문에 작품활동의 무대를 얻지 못하고 말았다. 그의 작품은 신동아에 연재되다가 중단되었고, 일문(日文)의 육필원고로 시(詩) 한 수가 남아있다. 또한 소설가 이명한(李明翰)이 있다. 이명한은 1975년 ‘월간문학'에 ‘진혼제'가 당선되면서 문단에 등단했다. 민족예술인총연합 광주지회장, 민족문학작가회의 광주·전남지부장 등을 지냈고, 1986년에 전라남도 문화상을 받았다
박곡마을(朴谷)-박실마을
면소재지인 신석마을에서 북동쪽으로 약 5㎞ 떨어진 곳에 위치한 박실마을은 동쪽으로 다도면과 경계하고 서쪽으로는 유정마을, 북쪽으로는 산포면과 경계를 이루고 있으며, 남쪽은 건지산과 마주하고 있다. 이 마을은 1300년대 초부터 사람이 살았다고 전하며, 그 후 제주도에서 남원으로 이거하던 남원양씨(南原梁氏)가 이곳으로 들어와 마을을 일구어 살았다고 한다. 이와 같은 사실은 마을 주변 야산에 남원양씨(南原梁氏)의 묘소가 많이 분포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짐작할 수 있다.
이 마을은 화순최씨(和順崔氏)의 동족마을로서 입향시기는 400년 전이다. 정암 조광조 선생의 문인인 화순최씨(和順崔氏) 운(澐)이 경상북도 금천에서 살다가 기묘사화를 당하여 온 가족이 강계로 이주하였는데 그 곳에서 운이 세상을 뜨자, 그의 아들 경행(慶行)이 3년상을 치르고는 가족을 이끌고 남평현으로 이주하였다고 하나 그 확실한 위치는 알 수가 없다. 그 후 광해군때, 경행의 후손인 괘서(掛鋤亭) 최운정(崔雲挺)이 폐비의 의론을 듣고 부당함을 고하기 위하여 대궐앞에 나아가 일일상소를 올렸으나 끝내 뜻이 관철되지 않자 귀향하여 이곳에 괘서정을 짓고 정착하였다고 한다.
박곡(朴谷)이라는 이름은 호구총서에 남평현 덕곡면 박곡리로 처음 나타난다. 그후 1914년 행정구역 개편으로 나주군 봉황면 유곡리에 편입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박곡의 또 다른 명칭은 박실인데 구전에 의하면 박넝쿨이 뻗어 내려오는 산맥에 박열매가 맺은 형국이라 해서 박실이라 했다고 하며, 현재는 주민들로부터 박실마을로 불리운다. 이 마을의 지형에 대한 유래가 있는 곳으로 유명한 곳은 ‘옥녀탄금'이라는 곳인데, 이 곳은 마을 남쪽 분토동에 위치하는 명당으로서 그 형태가 마치 옥녀가 거문고를 타는 형상과 흡사하다 하여 옥녀탄금이라 불리운다. 현재 이곳은 이천서씨(李川徐氏)들의 선산으로 이 명당에 묘를 쓴 후 벼슬길에 오른 사람이 많았다고 한다.
또한 이 마을에는 전설을 가지고 있는 입석이 두 개가 있는데, 그중 하나는 사람바위이고, 다른 하나는 개바위이다. 현재는 세월의 흐름과 함께 바위들이 삭아 형태는 사라지고, 겨우 바위의 형체만이 남아있다. 본래 이 마을이 게 형국(기굴)인데 이 입석 2기가 서 있는 곳은 게의 양뿔에 해당한다는 것이다. 마을에서는 두 입석을 게눈(뿔)이라고 말한다. 게들은 여럿이 모여서 사는 습성이 있다고 해서, 이 마을 사람들 역시도 게처럼 모여서, 오래도록 잘 살아 가려는 생각이 오래 전부터 깃들어져 내려온 것 같다. 입석은 이 마을의 시작과 함께 세워져서 약 3~4백 년은 되었을 것으로 추정한다.
한편 마을 사람들의 말에 의하면 사람바위가 무너지면 사람이 다치거나 죽고, 개바위가 넘어지면 개가 죽는다고 한다. 그 예로 과거에 최영춘의 집 마당에 있는 입석이 넘어진 일이 있었는데 그 해에 개가 떼죽음을 당한 일이 일어났다고 한다. 이에 놀란 주민들이 넘어진 입석을 다시 세워 놓았더니 더 이상의 피해는 없었다고 한다. 이 마을의 자생조직으로는 괘서정공파의 문중계와 상부계, 부녀회 등이 있는데, 괘서정공파는 약 300년 전에 문중의 친목을 다지기 위해서 만들어졌고, 상부계는 30년 전 친목 도모를 위해서, 부녀회는 1973년 마을 부녀자들의 친목을 위해서 만들어졌으며, 현재 58명이 참여하고 있다. 마을의 민속으로는 기우제가 있었다.
마을의 기본현황은 총인구수 266명으로, 남자 127명, 여자 139명이 살고 있으며, 총면적은 1.20㎢이며 전 0.35㎢, 답 0.45㎢, 임야 0.37㎢, 기타 0.03㎢가 해당된다. 총 가구수는 67호이며, 농가는 58호, 비농가는 9호이며, 마을 사람들의 주요산업은 쌀농사이며, 수박, 무를 특작물로 재배하고 있다. 마을에는 화순최씨 61호, 파평윤씨 2호, 남양홍씨 2호, 풍산홍씨 2호가 살고 있다.
유정마을(柳亭)
면소재지인 신석마을에서 북동쪽으로 약 4㎞ 떨어진 곳에 위치한 유정마을은 동쪽으로 박곡마을과 서쪽으로는 옥산리 옥산마을과 접하고, 동남쪽으로는 낙동마을과 인접해 있으며, 북쪽으로는 산포면과 경계를 이루고 있다. 약 300년 전부터 사람이 살기 시작했다고도 하나 정확한 내력은 알 수가 없고, 현재 살고 있는 경주정씨(慶州鄭氏)가 150년전에 이 마을로 들어와 정착하였다고 한다. 그후 여러 성씨가 차례로 들어와 살았으나 그들의 입향시기와 동기 등은 알 수가 없다.
지난날에는 그릇을 굽는 곳이라 하여 ‘점' 또는 ‘점등'이라 불리웠으나 마을 주변에 버드나무가 많다고 하여, 유정(柳亭)으로 개칭했다고 하나 그 확실한 시기는 알 수가 없다. 1912년 조선총독부에서 간행한 지방행정구역일람에는 유정이라는 지명이 나타나지 않는다. 1914년 행정구역 개편 당시 욱곡면 유정리가 봉황면 유곡리로 편입 개편되면서 비로소 문헌에 나타난다. 이로 미루어보아 유정이라는 이름은 1912년~1914년 사이에 생겨났음을 알 수 있다.
한편 마을의 특색있는 지명유래로는 가매등과 구승굴이 있다. 가매등은 마을 한 가운데 위치하는데 옛날 옹기를 굽던 자리라 하여 가매등이라 불렀다. 지난 날에는 둥그런 형태를 지니고 있었으나 지금은 모두 파손되어 잡목이 우거져 그 자취를 찾아볼 수 없다. 다른 하나는 구승굴인데, 마을 동쪽에 위치한 노씨들의 선산으로 옛날 이곳에 스님 9명이 앉았다 지나간 곳이라 하여 구승굴이라 불렀다고 한다. 또 다른 이야기로는 옹기를 굽는데 필요한 나무를 패서 장작을 만드는 소리가 마치 스님이 목탁을 두드리는 소리와 같다하여 구승동이라 불렀다고 한다.
한편 지금은 모두 그 흔적마저 없어졌지만 옛날 이 마을에 조직되어 있던 동계와 가뭄이 들면 지냈던 기우제, 그리고 이곳 주민들의 주소득원이었던 옹기의 만드는 과정에 따른 금기 등이 있다. 마을의 인구는 259명으로 이 중 남자가 129명, 여자가 130명이며, 총면적은 0.66㎢으로 전0.20㎢, 답 0.26㎢, 임야 0.20㎢이며, 총40가구 모두가 농사를 짓고 있다. 마을 사람들의 주요 산업은 쌀농사이며, 무와 수박을 특작물로 재배하고 있으며. 마을의 주요 성씨로는 경주정씨 18호, 이씨 14호, 원씨 4호, 기타 4호가 있다.마을의 민속
동계 확실한 연대는 알 수 없으나 마을사람의 말에 의하면 150년전에 문석주라는 사람이 조직한 것으로 마을 사람들과의 단합과 그릇을 굽기 위해 필요한 나무들을 마련하는 재원을 마련하는 것을 목적으로 조직하였다. 현재는 소멸되어 버렸다. 기우제: 낙동, 박곡 마을과 같이 지냈는데 이 마을에서는 주로 제기(祭器)를 많이 희사하였다고 한다.
낙동마을(樂洞)
면소재지인 신석에서 북쪽으로 약 5㎞ 위치에 있는 낙동마을은 동쪽으로는 유정마을, 서북쪽으로는 잉읍마을, 옥산마을, 남쪽으로는 유곡천을 지나 장성리 장성 마을과 경계를 이룬다. 서쪽에는 금천 삼거리에서 국도 1호선과 갈라진 금봉선이 지나가고 있고, 서쪽 끝에 해방과 더불어 설립된 봉황북초등학교가 위치하고 있다. 약 500년 전부터 지금은 알려지지 않은 어떤 성씨가 터를 잡고 살았다는 설이 있으나 현재 확인할 수는 없고, 문헌상에 나타나기로는 지금부터 약 300년 전인 조선조 숙종때, 영광의 무장에 본향을 둔 전주이씨 이천석이 봉황면 황용리 장서마을 최진사의 손자 사위가 된 후 처가의 도움으로 농토를 따라 이곳에 정착하게 되었다.
그후 김해김씨(金海金氏) 김해일(金海鎰)이 화순 쌍봉에 살다가 이천석(李天錫)의 둘째 딸과 결혼하여 1725년경 이 마을에 들어와 살게 되었다. 1800년경 이천서씨(李川徐氏)가 들어와 삼사대에 걸쳐 살았으나 1970년대에 서연수(徐連洙)가 이 마을을 떠남으로써 지금은 한 집도 남지 않게 되었다. 또한 밀양박씨(密陽朴氏)인 박문규(朴文奎)가 화순 도암면 신기리에서 이 마을 김씨가의 딸과 혼인하여 1895년경 이 마을로 들어와 지금은 3호가 살고 있다. 낙동마을은 마을의 지형이 반월형국이라 하여 달락국(月樂洞)이라 불리웠다고 하나 문헌상으로는 기록이 없고, 지방행정구역명칭일람에 남평군 죽곡면 다락리로 처음 나타난다. 그 후, 1935년경에 당시의 소설가이던 이창신(李昌信)의 건의에 따라 마을 이름을 다락동으로 고쳐 불렀으나, 1968년 5월 1일자 행정구역개편으로 유곡리 3구로 분구되고, 이름을 낙동으로 하였다.
낙동마을의 유래가 있는 지형으로는 ‘뱀명당'이 있는데, 이곳은 장성리 뒷등의 황새명당과 연관이 있다. 황새는 항상 뱀을 잡아먹고 살기 때문에 뱀명당에 사는 사람들은 번창할 수 없다고 하나 마을 앞으로 흐르는 유곡천이 이를 막아주기 때문에 뱀명당에 사는 낙동마을은 번영을 꾀할 수 있다고 한다. 이는 김해김씨(金海金氏) 자손들을 비유한 것으로, 이 자손들을 보존하기 위하여 마을 앞에다 소나무 숲을 만들어 뱀이 황새에게 잡아먹히는 것을 방지하였다고 한다.
이 마을의 특색있는 유물로는 현재 이명한(李明翰)이 간직하고 있는 가훈이 있다. 이 가훈은 이 마을의 입향조인 전주이씨 이천석이 자손들을 훈계하기 위하여 지은 글이다. 학문과 예술에 앞서 먼저 효도하고 우애하라는 내용이 담겨있고, 겸하여 진사 나두휘가 쓴 이천석의 아버지인 이지해의 행장이 실려있다. 또한 권학계안이 있는데, 이 글은 당시 명필로 이름을 날렸던 이언하의 글씨로 되어 있다.
동각 앞에는 수백년 된 감나무가 여러 그루 늘어서 있었고, 엄나무가 높이 솟아 있었다고 전하나 삼사십년 전에 고사해 버렸고, 동각앞에 있었던 둥근 돌(들독) 역시 어디론가 자취를 감추어 버렸다. 동구 앞에 있는 전주이씨 제실인 영락재는 1985년에 지은 것이다. 마을에는 1870년대에 상부상조를 목적으로 조직된 상포계와 1966년 마을 사람들의 친목도모를 위해 조직된 친목계가 있다.
마을의 총 인구는 213명으로 남자 111명, 여자 102명이 해당되며, 마을의 총 면적은, 1.20㎢이며, 이 중 전 0.20㎢, 답 0.50㎢, 임야 0.20㎢, 기타 0.30㎢가 해당된다. 마을 사람들 대다수인 40호가 농사를 짓고 있으며. 비농가는 4호에 해당하고. 주소득원 역시 쌀농사에 의존하고 있으며, 특작물로 수박을 재배하고 있다. 성씨로는 전주이씨 19호, 김해김시 10호, 밀양박씨 4호, 기타 11호가 거주하고 있다.
마을의 민속과 인물
이 마을이 배출한 인물은 이창신(李昌信)(1914~1948)이 있다. 그는 광주학생운동 당시 나주농업실습학교 2년생으로 시위를 주도하였다. 유찬옥과 함께 학생운동의 대표적 인물이었으나 미성년자라 형을 면제받았다. 그 뒤 1935년 신동아 장편소설 모집에 ‘제방공사'(提防工事)가 당선되어 문단에 등단하였으나, 사회주의문학의 경향을 띄었기 때문에 작품활동의 무대를 얻지 못하고 말았다. 그의 작품은 신동아에 연재되다가 중단되었고, 일문(日文)의 육필원고로 시(詩) 한 수가 남아있다. 또한 소설가 이명한(李明翰)이 있다. 이명한은 1975년 ‘월간문학'에 ‘진혼제'가 당선되면서 문단에 등단했다. 민족예술인총연합 광주지회장, 민족문학작가회의 광주·전남지부장 등을 지냈고, 1986년에 전라남도 문화상을 받았다
- 담당부서 봉황면 총무
- 전화 061-339-38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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