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암리
- 날짜
- 2020.04.16
- 조회수
- 762
- 등록자
- 관리자
총 면적은 476만여㎡이며, 회진성터의 주봉인 거마산(159m) 서쪽 능선에 있는 해발 170m의 봉우리를 중심으로 남북으로 뻗친 멧발 서편에 마을들이 자리잡고 있다. 마을사람들은 마을의 배산인 거마산 자락을 풍수지리상 말 형국으로 풀이하기도 한다. 복암리는, 1구 중동(中洞), 2구, 랑동(郞洞), 3구 강암(江岩)마을로 구성되어 있다.
복암리 1구 중동(中洞)마을
마을형성은 1925년경에 파평윤씨 윤덕병씨가 영산강변에 버려진 땅을 가꾸기 시작하면서 점차 마을이 형성되었으며, 1974년에 수해 상습지구로 인하여 현재 마을로 집단 이주하였음. 지명유래는 원래 다시들 한복판 들 가운데 있다 해서 중몰이라 부른 것이 한자화 해 중동이라 표기했다. 영산강의 잦은 범람으로 자꾸 흙과 모래가 쌓여 높드리 땅이 마련되고 일제에 의해 양수시설과 인공제방이 설치되면서 현재의 위치로 집단 이주하여 형성된 마을이다. 마을내 주요 유물 및 시설물로는 고인돌(마을 남동편 김봉철씨 밭에 19기), 마을회관 등이 있다.
복암리 2구 랑동(郞洞)마을
마을형성은 고려 말엽 시량이라는 벼슬을 가진 양금성이 마을에 정착하면서 골씨도 함께 정착하였으나 고려가 망하자 양씨 골씨가 마을을 떠나고 나주임씨가 정착하였다. 지명유래는 원래 시랑골이라고 했다. 고려때 양동재와 김탁이 시랑(侍郞)을 맡은 뒤, 공민왕이 시해되고 정국이 혼탁하자 이곳에 들어와 살면서 시랑골이라 불렀다 한다.
마을내 주요 유물 및 시설물로는 복암리고분군(사적 404호), 고인돌(시랑골에서 가운리 가동으로 넘어가는 뚜개비재 남쪽 계곡을 따라 거의 일렬로 7기, 고개마루에 4기, 낭동저수지 안에 3기), 1974년 7월 시랑골 고인돌군 옆에서 유구석부가 표면채집된 바 있는데 길이 10.1cm, 최대폭 3.8m, 두께 3.3m의 소형 응회암으로 만들어 졌다, 임필상선덕비, 숭유재(제주양씨 재실), 임병원고가, 임병억고가, 임하규고가, 임종학고가, 느티나무(270년), 마을회관 등이 있다.
복암리 3구 강암(江岩)마을
마을형성은 이조초기부터 마을에 탐진최씨가 살았으며, 1750년경에 나주임씨가 광산군 삼도면에서 이 마을에 들어오면서 점차 마을이 형성되었다 함. 지명유래는 마을 주변에 바위가 많고 마을 앞으로 강이 흐른다해서 강암이라 했다고 전한다. 복암리 783번지 이승우씨집 문벽에 있는 둘래 20m, 높이 3.6m 쯤 되는 거대한 고인돌이 있어 넓을 광(廣)자를 써서 광암(廣岩)이라고도 하고 이 고인돌이 산 위에서 굴러 떨어졌다해서 내릴강(降)자를 써 강암(降岩)으로도 불려진다.
복암리 1구 중동(中洞)마을
마을형성은 1925년경에 파평윤씨 윤덕병씨가 영산강변에 버려진 땅을 가꾸기 시작하면서 점차 마을이 형성되었으며, 1974년에 수해 상습지구로 인하여 현재 마을로 집단 이주하였음. 지명유래는 원래 다시들 한복판 들 가운데 있다 해서 중몰이라 부른 것이 한자화 해 중동이라 표기했다. 영산강의 잦은 범람으로 자꾸 흙과 모래가 쌓여 높드리 땅이 마련되고 일제에 의해 양수시설과 인공제방이 설치되면서 현재의 위치로 집단 이주하여 형성된 마을이다. 마을내 주요 유물 및 시설물로는 고인돌(마을 남동편 김봉철씨 밭에 19기), 마을회관 등이 있다.
복암리 2구 랑동(郞洞)마을
마을형성은 고려 말엽 시량이라는 벼슬을 가진 양금성이 마을에 정착하면서 골씨도 함께 정착하였으나 고려가 망하자 양씨 골씨가 마을을 떠나고 나주임씨가 정착하였다. 지명유래는 원래 시랑골이라고 했다. 고려때 양동재와 김탁이 시랑(侍郞)을 맡은 뒤, 공민왕이 시해되고 정국이 혼탁하자 이곳에 들어와 살면서 시랑골이라 불렀다 한다.
마을내 주요 유물 및 시설물로는 복암리고분군(사적 404호), 고인돌(시랑골에서 가운리 가동으로 넘어가는 뚜개비재 남쪽 계곡을 따라 거의 일렬로 7기, 고개마루에 4기, 낭동저수지 안에 3기), 1974년 7월 시랑골 고인돌군 옆에서 유구석부가 표면채집된 바 있는데 길이 10.1cm, 최대폭 3.8m, 두께 3.3m의 소형 응회암으로 만들어 졌다, 임필상선덕비, 숭유재(제주양씨 재실), 임병원고가, 임병억고가, 임하규고가, 임종학고가, 느티나무(270년), 마을회관 등이 있다.
복암리 3구 강암(江岩)마을
마을형성은 이조초기부터 마을에 탐진최씨가 살았으며, 1750년경에 나주임씨가 광산군 삼도면에서 이 마을에 들어오면서 점차 마을이 형성되었다 함. 지명유래는 마을 주변에 바위가 많고 마을 앞으로 강이 흐른다해서 강암이라 했다고 전한다. 복암리 783번지 이승우씨집 문벽에 있는 둘래 20m, 높이 3.6m 쯤 되는 거대한 고인돌이 있어 넓을 광(廣)자를 써서 광암(廣岩)이라고도 하고 이 고인돌이 산 위에서 굴러 떨어졌다해서 내릴강(降)자를 써 강암(降岩)으로도 불려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