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전리
- 날짜
- 2020.04.17
- 조회수
- 895
- 등록자
- 관리자
면소재지인 신석에서 북쪽으로 농로길을 따라 4㎞쯤 걸어가면 봉황면의 북쪽 끝마을인 용전리에 이른다. 용전리는 서쪽으로 장성리와 접해 있고, 동쪽으로 죽석리와 접해 있으며, 서북쪽으로 영산포, 금천면과 경계하고 있다. 용전리는 본래 남평읍 죽곡면에 속해 있었는데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에 따라 용두리, 관전리, 신기리, 효롱리, 지동을 병합하여 용두와 관전의 이름을 따서 용전리라 하여 나주군 봉황면에 편입된 마을이다.
용두(龍頭) 마을
용두마을은 면소재지에서 북쪽으로 좁다란 농로를 따라 3㎞정도 가면 나오는데 마을 서쪽으로는 지동마을이 있고, 서북쪽으로는 관전마을이 위치하며, 동쪽으로는 장성리와 접해 있다. 지동마을 앞에서 농로를 따라 200m 쯤 들어오면 철천에서 영산포로 흐르는 봉황천이 있고, 이 봉황천에 걸려있는 세면들 다리로 불리는 다리를 건너 100m 쯤 들어오면 50여호가 모여사는 큰 마을이다. 이 마을은 원래 남평읍 죽곡면 지역으로 1914년 행정구역개편 당시 나주군 봉황면에 편입되었다.
이 마을은 함평이씨(咸平李氏) 17세손인 수성이 나주군 죽포면 두만리(現.신석리)에서 약 340년전 봉황면 와우리로 정착하였다가 아들인 원자(元字)가 금천면 죽촌리 화기마을로 이주하였으며, 그곳에서 살다가 원자의 손자인 성지(盛枝)가 약 200년전인 1704년 본 용두마을에 정착 현재에 이르고 있으며, 해방 후 마을이 최고로 번성하였을 때는 60여호에 인구 약 400여명이 살았다. 마을 뒷산 지형이 미처 용이 되지 못한 용머리 형상이라고 하여 용(龍), 머리두(頭)자를 써 용두(龍頭)라고 불렀다 하며, 다른 설로는 덕룡산과 북십리 전설에 의하면, 영평에서 북쪽으로 십리 안에 목마른 용이 구슬을 가지고 노는 지형이라 하여 용두마을을 옛부터 명당자리라고 불렀다고도 한다.
이 마을의 특색있는 민속으로는 공동우물에 대한 제사를 들 수 있는데, 마을의 한 가운데 있는 공동우물에 매년 칠월 칠석이면 제사를 지낸다. 언제부터 제사를 드렸는지는 알려진 바 없으나 예전에는 민어와 술을 제사상에 올렸는데, 민어의 수효가 달리자, 지금은 명태로도 대신하고 있다. 이 마을의 역사적인 인물로는 이상민과 이원범이 있다. 이상민은 마을 발전의 유공자로 지금으로부터 약 55년전 마을회관을 지어 야학을 실시하여 문맹퇴치에 힘쓰고 농로를 신설하는 등 마을의 발전을 위하여 크게 기여했다.
이원범은(1928~1949)은 당시 광주서중을 나와 3개 국어에 능통하였던 사람으로 1948년에 약관 20세의 나이로 봉황북초등하교 교사로 재직하였다. 재직시 자기 소유의 논을 팔아 화공약품을 사서 폭탄을 제조하여 북초등학교 숙직실에 보관하였는데, 동료교사의 실수로 폭탄을 건드려 숙직실이 반파되고 동료교사 한 명이 즉사하고, 용원 한 사람이 어깨를 잘리는 부상을 입었다. 이 일로 인해서 이창신을 따라 나주군 노안면으로 피신해 있던 중 봉황지서가 습격당하는 사건이 발생하였다. 이 사건으로 인해 봉황지서로 끌려온 이원범, 이창신 두 사람은 봉황지서를 습격했다는 누명을 쓰고 마을앞 들에서 총살당하였다. 이것이 이원범의 20년 생애의 이야기인데 그때의 일을 알고있는 마을 사람들은 이원범이란 사람의 뛰어난 재능과 실력을 지금도 안타까워하고 있다.
용두마을은 화합이 잘되며 자립심이 대단한 마을로서 1989년에 마을에서 구석장까지 농로 860m를 마을의 자비로 포장하고 마을의 공동자금도 항상 비축되어 있으며, 효자와 열녀도 많이 배출한 마을이다. 마을의 자생체적 조직으로는, 1880년 창설되어 지금도 계속되고 있는 마을의 총회이다. 목적은 친목을 도모하는 것이고, 매년 음력 12월 20일에 총회를 갖는다. 이 총회는 3명의 유사제로 이들 유사가 동계의 회의를 주관하고 그 해의 결산과 다음 해의 제반사항에 대해 토의의결한다. 이 날 결정된 사항은 그 해 법으로 남게된다.
또한 위친계에는, 선계와 후계가 있는데, 전자는 60여년전 부모님의 사후 봉양을 위하여 장남을 위주로 조직된 계로 음력 동짓날 초 닷새 모임을 가지며, 부모님이 돌아가셨을 때, 상여나르는 일 등 모든 일을 도맡아 한다. 후자인 후계는 50여년전에 작은 아들들도 부모님 봉양을 해야한다고 하여 작은 아들들을 위주로 조직된 계로 음력 동짓달 초 이레 모임을 가지며, 목적은 선계와 같다.
한편, 청년회는 마을의 청년들이 조직한 모임으로 그 목적은 친목을 도모하는 데 있다. 예전에 이와 비슷한 조직으로는 일제 때 진흥회가 있었으나 해방이후 없어지고, 청년회로 부활한 것이며, 마을의 부인들이 창설한 부녀회가 있다. 마을의 총인구는 243명이며, 남자 129명, 여자 114명이 있다. 마을의 총 면적은 0.66㎢이며, 전 0.07㎢, 답 0.25㎢, 임야 0.12㎢, 기타 0.12㎢가 해당되고, 총 50가구수 중 모두가 농사를 짓고 있다. 마을 사람들은 쌀, 보리, 콩 등을 재배하고 있으며, 주소득원은 쌀농사이다. 특작물로는 수박, 무 등을 재배하고 있으며, 성씨로는 함평이씨(咸平李氏) 30호, 기타 20호가 있다.
지동(池洞) 마을
지동마을은 면소재지 신석에서 북쪽으로 약 4㎞ 정도 농로를 따라 들어가는 곳에 있는데 마을의 정면에는 용두마을이 자리잡고 있고, 서쪽으로는 황용리와 접해있는 마을이다. 마을을 들어서면 봉황면장을 지낸 홍우책 면장의 공적비가 노송에 둘러싸여 이 마을을 찾는 손님들을 맞고 있으며, 마을의 좌측에는 논이 펼쳐져 있고, 우측에는 가옥들이 자리잡고 있는 전형적인 안산형태의 마을이다. 이 마을은 본래 남평읍 죽곡면의 지역으로 1914년 행정구역 개편당시 나주군 봉황면에 편입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으며, 그 이전의 기록은 찾아 볼 수 없다.
지금으로부터 250여년 전인 1700년대초 홍하서(1673~1722)가 정착함으로써 마을이 형성되었는데 홍하서가 이 마을에 들어오게 된 확실한 입향동기는 알 수 없으나, 하서의 조부인 이자(伊字)가 생원시에 합격하여 남평현령을 지낸 후에 하서의 부친인 득일(得一)이 마을터가 좋아서 그의 아들인 하서를 보냈다는 이야기가 전해질 뿐이다. 홍하서의 부친인 득일이 터를 잡아 아들을 보내매 당시 마을의 지형이 연화도수형(蓮花倒水形)이며, 마을의 중간쯤에 못샘이 있음을 발견하고 못골이라 칭하여 현재와 같이 못골 또는 지동이라고 부르고 있다. 또한 연화도수형에는 비석을 세우지 못한다는 풍수지리설 때문에 입항조인 홍하서의 묘에는 비석을 세우지 못하고 상석만이 놓여 있다.
마을에는 친목도모를 위해 동계가 조직되어 있으며, 총 인구 215명 중 남자 108명, 여자 107명이 살고 있으며, 마을의 총 면적은 0.71㎢이며, 이 중 전 0.18㎢, 답 0.47㎢, 임야 0.04㎢, 기타 0.02㎢가 해당된다. 총 가구수 52호 모두가 농사를 짓고 있으며, 마을 사람들의 주소득원 역시 쌀농사에 의지하고 있다. 특작물로는 수박과 무를 재배하고 있으며. 성씨는 풍산홍씨 37호, 나주임씨 3호, 진주정씨 2호, 기타 10호가 거주하고 있다.
마을의 민속
동계
100여년전에 결성되었으며 친목도모를 목적으로 한다. 동계 모임시 마을의 전반적인 사항에 대해서 결의하고, 이 해 만 20세가 되는 남자가 있으면 성년이 된다하여 술을 한말씩 내어 마을 사람들이 잔치를 벌이고, 또한 다른 마을에서 이사오는 사람이 있으면 벼 한 말 정도의 가입금을 동계 때 납부하여 마을의 경비로 충당했다고 한다.
공동우물
이 마을이 ‘지동(池洞)'이라 불리우게 된 가장 큰 이유인 마을 중앙에 위치한 샘은 수도시설이 도기 전까지 지동마을 전체의 식수원으로서 예전에는 연꽃이 많이 피어 있었다고 전해진다. 지금은 콘크리트로 모두 정비되었고 논으로도 침식당해 그 형태만 남아있다.
관전(官田) 마을
관전마을은 면소재지 신석에서 용두마을과 지동마을을 지나 서북쪽으로 약 6㎞의 거리에 있다. 마을의 동쪽으로는 장성리의 장성과 경계하며, 마을의 북쪽으로는 옥산리와 접해있다. 용두마을에서 올라오는 길을 따라 마을을 들어서면, 좌측에는 논이 펼쳐져 있고, 우측으로는 가옥들이 자리잡고 있으며, 가옥들 뒤편의 산에는 노송이 우거져 있어 고풍스런 분위기를 한층 자아내고 있다. 남평군 죽곡면에 속해 있었는데 1914년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봉황면에 편입된 마을로서 그 이전의 기록은 찾아 볼 수 없다.
이 마을의 입향 성씨와 입향년대는 확실히 전해 내려오지 않으나 약 400년전에 남평문씨(南平文氏)가 터를 잡았다고 전하여 오는데, 남평문씨(南平文氏)가 터를 잡은 후에 순천박씨(順天朴氏)가 입촌하여 마을을 형성하였다고 전해진다. 그러나 현재는 이 마을에 최초로 입향하였다고 전하여지는 남평문씨는 한 가구도 살고 있지 않다. 마을 형성 당시 마을의 앞에 있는 평야가 모두 바다였다고 한다. 마을 앞에 자리잡고 있는 사창등에는 선박을 정박시킨 흔적이 있었다고 전하여지고 있다. 마을 뒷산에 숲이 울창하여 황새가 많이 서식하였다고 하여 황새관을 써서 관전 이라고 불러오다가 백여년 전에 마을에서 관직에 오른 분을 배출하여 벼슬관자를 써서 관전(官田)이라고 개칭하였다고 한다.
관전마을도 다른 마을과 마찬가지로 젊은 사람들이 도시로 빠져나가고 이농현상이 심각하여 마을 사람 대부분은 노년층이다. 1970년대 초반 전기가 들어 왔으며, 버스는 지금도 마을까지 들어오지 않아 장성리 장성마을 앞 도로까지 걸어나가서 버스를 탄다. 마을에는 1890년대 조직된 동계가 있으며 참여인원은 26명이다. 마을의 기본현황을 살펴보면, 총인구는 94명으로 남자 47명, 여자 47명이며. 총 면적은 0.71㎢로, 전 0.15㎢, 답 0.47㎢, 임야 0.09㎢가 해당된다. 마을 사람들의 주소득원은 쌀농사이며, 특작물로는 담배와 수박을 재배하고 있다. 성씨로는 순천박씨 6호, 청주한씨 5호, 김해김씨 7호, 기타 8호가 거주하고 있다. 마을의 민속으로는 샘굿과 줄다리기, 불싸움놀이, 고싸움 등이 있었고, 노인계가 있다. 1890년대에 창립된 동계가 있었으나, 동약의 소실로 이 동계는 없어지고, 새로운 동계가 창립되었다. 이 노인계의 창립목적은 마을의 젊은이들이 선도해보자는 목적으로 마을 어른들을 중심으로 창립되었는데 마을에서 총회의 성격을 갖고 있는 단 하나의 조직이다.
효롱(孝弄) 마을
효롱마을은 면소재지 신석에서 북쪽으로 6㎞ 정도 들어가는 곳에 있는 마을로서 작은 농로를 따라 지동마을을 거쳐가는 길과, 용두마을과 관전마을을 거쳐가는 두 갈래 길이 있다. 마을의 서쪽으로는 태봉산이 위치하고 마을의 남쪽으로는 지동마을이 위치하며, 마을의 동남쪽으로 관전마을이 서북쪽으로는 영산포와 동북쪽으로는 금천면의 2개 면과 접해 있는 마을이기도 한다. 효롱마을은 1789년 발행된 호구총수에 남평현 효롱동이란 지명이 기록된 것으로 보아 이미 200여년 전부터 마을이 형성되어 있었고, 1912년 간행된 지방행정구역일람에는 남평군 죽곡면으로 되었다가 1914년 행정구역 개편 당시 나주군 봉황면에 편입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 최초 입향성씨와 입향년대는 알려지지 않고 있으나 정씨가 마을의 터를 잡고 이씨 등이 거주하였다고 하며, 1800년 중반 김해김씨(金海金氏) 김철후(金哲厚)가 금천면 죽촌리 상촌에서 살다가 태풍의 재난을 당하여 살림을 탕진하고 효롱마을로 이주하여 먼저 거주하던 정씨, 이씨 등과 어울려 큰 마을을 이루었다고 전하여지고 있다.
효롱이라는 지명의 유래에 대한 특별한 전래 사항은 없으나, 예부터 효자들이 끊이지 않고 계속적으로 나와서 마을이름을 효롱으로 지었을 것이라고 전하여진다. 또한 예전에 마을 앞 평야가 모두 강이었다고 하나 이에 대한 지명이나 이야기는 전해지지 않는다. 단지 마을 뒷산을 예전부터 황장이 있어서 황장밭이라고 불렀다고 하나, 왜 황장이라고 불리우는지는 알 수 없다. 이 마을의 역사유물로는 사지와 지리지가 있는데, 사지는 마을의 정면에 위치하고 있으며, 재봉산이라는 야산 아래에 고려 중엽의 것으로 추정되는 도백사라는 절이 있었다고 전하나 기록은 찾아볼 수 없고, 절터로 추정되는 곳에는 지금도 기왓장이 출토되고 있다.
마을에 살고 있는 김두익의 집에 일제시대의 것으로 추정되는 ‘조선호 남지'라는 지리지가 있는데, 당시의 전라남북도의 생활상과 풍물을 한눈에 알아볼 수 있는 책이다. 마을에는 친목을 위한 동계가 있으며, 총인구는 98명으로 이 중 남자는 47명, 여자는 51명이 있다. 총 면적은 0.46㎢로, 전 0.16㎢, 답 0.15㎢, 임야 0.18㎢. 기타 0.07㎢이며, 마을의 주요산업은 쌀, 보리 재배이며 주소득원은 쌀농사, 특작물은 수박, 채소, 참깨가 있다. 마을 사람들의 성씨는 김해김씨가 15호, 여산송씨 1호, 전주이씨 1호, 기타 3호가 있다. 김해김씨 문중의 유평례와 강양님이 남평향교에서 열녀 표창을 받았다.
마을의 민속과 신앙
마을 친목계
마을의 단결과 화합을 위해 40여년전에 창설되었다. 모임은 매년 12월 중순경으로 날짜는 정해져 있지 않고 해마다 변경된다. 또한 이 날은 3명의 유사제를 택하여 유사가 회의를 주관한다. 유사로 채택된 3명은 한 가구당 2만원 정도의 경비를 추렴하여 술과 음식을 장만하여 잔치를 벌인다.
민속신앙
마을에서 민속신앙으로 조앙단지를 모시고 있는 가구가 있는데 한 가구의 예를 들면 조앙단지는 방 안에다 모시며 단지에는 매년 햅쌀이 나올 때 쌀을 바꾸어서 집어 넣는다. 단지에서 나온 묵은쌀은 손이 없는 날 밥을 지어 먹었다고 하나 지금은 예전과 같이 행하지 않고 2~3년에 한 번씩 쌀을 갈아넣는다고 한다.
민속놀이
마을의 민속놀이로는 지신밟기, 들놀이 등 농악놀이가 있었으나 호구수의 감소와 함께 차차 없어져 지금은 행해지지 않고 있다. 마을 사람들의 공동체적 삶의 장소인 동각은 1956년에 지어졌으나, 동각의 명칭이나 현판은 존재하지 않는다.
용두(龍頭) 마을
용두마을은 면소재지에서 북쪽으로 좁다란 농로를 따라 3㎞정도 가면 나오는데 마을 서쪽으로는 지동마을이 있고, 서북쪽으로는 관전마을이 위치하며, 동쪽으로는 장성리와 접해 있다. 지동마을 앞에서 농로를 따라 200m 쯤 들어오면 철천에서 영산포로 흐르는 봉황천이 있고, 이 봉황천에 걸려있는 세면들 다리로 불리는 다리를 건너 100m 쯤 들어오면 50여호가 모여사는 큰 마을이다. 이 마을은 원래 남평읍 죽곡면 지역으로 1914년 행정구역개편 당시 나주군 봉황면에 편입되었다.
이 마을은 함평이씨(咸平李氏) 17세손인 수성이 나주군 죽포면 두만리(現.신석리)에서 약 340년전 봉황면 와우리로 정착하였다가 아들인 원자(元字)가 금천면 죽촌리 화기마을로 이주하였으며, 그곳에서 살다가 원자의 손자인 성지(盛枝)가 약 200년전인 1704년 본 용두마을에 정착 현재에 이르고 있으며, 해방 후 마을이 최고로 번성하였을 때는 60여호에 인구 약 400여명이 살았다. 마을 뒷산 지형이 미처 용이 되지 못한 용머리 형상이라고 하여 용(龍), 머리두(頭)자를 써 용두(龍頭)라고 불렀다 하며, 다른 설로는 덕룡산과 북십리 전설에 의하면, 영평에서 북쪽으로 십리 안에 목마른 용이 구슬을 가지고 노는 지형이라 하여 용두마을을 옛부터 명당자리라고 불렀다고도 한다.
이 마을의 특색있는 민속으로는 공동우물에 대한 제사를 들 수 있는데, 마을의 한 가운데 있는 공동우물에 매년 칠월 칠석이면 제사를 지낸다. 언제부터 제사를 드렸는지는 알려진 바 없으나 예전에는 민어와 술을 제사상에 올렸는데, 민어의 수효가 달리자, 지금은 명태로도 대신하고 있다. 이 마을의 역사적인 인물로는 이상민과 이원범이 있다. 이상민은 마을 발전의 유공자로 지금으로부터 약 55년전 마을회관을 지어 야학을 실시하여 문맹퇴치에 힘쓰고 농로를 신설하는 등 마을의 발전을 위하여 크게 기여했다.
이원범은(1928~1949)은 당시 광주서중을 나와 3개 국어에 능통하였던 사람으로 1948년에 약관 20세의 나이로 봉황북초등하교 교사로 재직하였다. 재직시 자기 소유의 논을 팔아 화공약품을 사서 폭탄을 제조하여 북초등학교 숙직실에 보관하였는데, 동료교사의 실수로 폭탄을 건드려 숙직실이 반파되고 동료교사 한 명이 즉사하고, 용원 한 사람이 어깨를 잘리는 부상을 입었다. 이 일로 인해서 이창신을 따라 나주군 노안면으로 피신해 있던 중 봉황지서가 습격당하는 사건이 발생하였다. 이 사건으로 인해 봉황지서로 끌려온 이원범, 이창신 두 사람은 봉황지서를 습격했다는 누명을 쓰고 마을앞 들에서 총살당하였다. 이것이 이원범의 20년 생애의 이야기인데 그때의 일을 알고있는 마을 사람들은 이원범이란 사람의 뛰어난 재능과 실력을 지금도 안타까워하고 있다.
용두마을은 화합이 잘되며 자립심이 대단한 마을로서 1989년에 마을에서 구석장까지 농로 860m를 마을의 자비로 포장하고 마을의 공동자금도 항상 비축되어 있으며, 효자와 열녀도 많이 배출한 마을이다. 마을의 자생체적 조직으로는, 1880년 창설되어 지금도 계속되고 있는 마을의 총회이다. 목적은 친목을 도모하는 것이고, 매년 음력 12월 20일에 총회를 갖는다. 이 총회는 3명의 유사제로 이들 유사가 동계의 회의를 주관하고 그 해의 결산과 다음 해의 제반사항에 대해 토의의결한다. 이 날 결정된 사항은 그 해 법으로 남게된다.
또한 위친계에는, 선계와 후계가 있는데, 전자는 60여년전 부모님의 사후 봉양을 위하여 장남을 위주로 조직된 계로 음력 동짓날 초 닷새 모임을 가지며, 부모님이 돌아가셨을 때, 상여나르는 일 등 모든 일을 도맡아 한다. 후자인 후계는 50여년전에 작은 아들들도 부모님 봉양을 해야한다고 하여 작은 아들들을 위주로 조직된 계로 음력 동짓달 초 이레 모임을 가지며, 목적은 선계와 같다.
한편, 청년회는 마을의 청년들이 조직한 모임으로 그 목적은 친목을 도모하는 데 있다. 예전에 이와 비슷한 조직으로는 일제 때 진흥회가 있었으나 해방이후 없어지고, 청년회로 부활한 것이며, 마을의 부인들이 창설한 부녀회가 있다. 마을의 총인구는 243명이며, 남자 129명, 여자 114명이 있다. 마을의 총 면적은 0.66㎢이며, 전 0.07㎢, 답 0.25㎢, 임야 0.12㎢, 기타 0.12㎢가 해당되고, 총 50가구수 중 모두가 농사를 짓고 있다. 마을 사람들은 쌀, 보리, 콩 등을 재배하고 있으며, 주소득원은 쌀농사이다. 특작물로는 수박, 무 등을 재배하고 있으며, 성씨로는 함평이씨(咸平李氏) 30호, 기타 20호가 있다.
지동(池洞) 마을
지동마을은 면소재지 신석에서 북쪽으로 약 4㎞ 정도 농로를 따라 들어가는 곳에 있는데 마을의 정면에는 용두마을이 자리잡고 있고, 서쪽으로는 황용리와 접해있는 마을이다. 마을을 들어서면 봉황면장을 지낸 홍우책 면장의 공적비가 노송에 둘러싸여 이 마을을 찾는 손님들을 맞고 있으며, 마을의 좌측에는 논이 펼쳐져 있고, 우측에는 가옥들이 자리잡고 있는 전형적인 안산형태의 마을이다. 이 마을은 본래 남평읍 죽곡면의 지역으로 1914년 행정구역 개편당시 나주군 봉황면에 편입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으며, 그 이전의 기록은 찾아 볼 수 없다.
지금으로부터 250여년 전인 1700년대초 홍하서(1673~1722)가 정착함으로써 마을이 형성되었는데 홍하서가 이 마을에 들어오게 된 확실한 입향동기는 알 수 없으나, 하서의 조부인 이자(伊字)가 생원시에 합격하여 남평현령을 지낸 후에 하서의 부친인 득일(得一)이 마을터가 좋아서 그의 아들인 하서를 보냈다는 이야기가 전해질 뿐이다. 홍하서의 부친인 득일이 터를 잡아 아들을 보내매 당시 마을의 지형이 연화도수형(蓮花倒水形)이며, 마을의 중간쯤에 못샘이 있음을 발견하고 못골이라 칭하여 현재와 같이 못골 또는 지동이라고 부르고 있다. 또한 연화도수형에는 비석을 세우지 못한다는 풍수지리설 때문에 입항조인 홍하서의 묘에는 비석을 세우지 못하고 상석만이 놓여 있다.
마을에는 친목도모를 위해 동계가 조직되어 있으며, 총 인구 215명 중 남자 108명, 여자 107명이 살고 있으며, 마을의 총 면적은 0.71㎢이며, 이 중 전 0.18㎢, 답 0.47㎢, 임야 0.04㎢, 기타 0.02㎢가 해당된다. 총 가구수 52호 모두가 농사를 짓고 있으며, 마을 사람들의 주소득원 역시 쌀농사에 의지하고 있다. 특작물로는 수박과 무를 재배하고 있으며. 성씨는 풍산홍씨 37호, 나주임씨 3호, 진주정씨 2호, 기타 10호가 거주하고 있다.
마을의 민속
동계
100여년전에 결성되었으며 친목도모를 목적으로 한다. 동계 모임시 마을의 전반적인 사항에 대해서 결의하고, 이 해 만 20세가 되는 남자가 있으면 성년이 된다하여 술을 한말씩 내어 마을 사람들이 잔치를 벌이고, 또한 다른 마을에서 이사오는 사람이 있으면 벼 한 말 정도의 가입금을 동계 때 납부하여 마을의 경비로 충당했다고 한다.
공동우물
이 마을이 ‘지동(池洞)'이라 불리우게 된 가장 큰 이유인 마을 중앙에 위치한 샘은 수도시설이 도기 전까지 지동마을 전체의 식수원으로서 예전에는 연꽃이 많이 피어 있었다고 전해진다. 지금은 콘크리트로 모두 정비되었고 논으로도 침식당해 그 형태만 남아있다.
관전(官田) 마을
관전마을은 면소재지 신석에서 용두마을과 지동마을을 지나 서북쪽으로 약 6㎞의 거리에 있다. 마을의 동쪽으로는 장성리의 장성과 경계하며, 마을의 북쪽으로는 옥산리와 접해있다. 용두마을에서 올라오는 길을 따라 마을을 들어서면, 좌측에는 논이 펼쳐져 있고, 우측으로는 가옥들이 자리잡고 있으며, 가옥들 뒤편의 산에는 노송이 우거져 있어 고풍스런 분위기를 한층 자아내고 있다. 남평군 죽곡면에 속해 있었는데 1914년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봉황면에 편입된 마을로서 그 이전의 기록은 찾아 볼 수 없다.
이 마을의 입향 성씨와 입향년대는 확실히 전해 내려오지 않으나 약 400년전에 남평문씨(南平文氏)가 터를 잡았다고 전하여 오는데, 남평문씨(南平文氏)가 터를 잡은 후에 순천박씨(順天朴氏)가 입촌하여 마을을 형성하였다고 전해진다. 그러나 현재는 이 마을에 최초로 입향하였다고 전하여지는 남평문씨는 한 가구도 살고 있지 않다. 마을 형성 당시 마을의 앞에 있는 평야가 모두 바다였다고 한다. 마을 앞에 자리잡고 있는 사창등에는 선박을 정박시킨 흔적이 있었다고 전하여지고 있다. 마을 뒷산에 숲이 울창하여 황새가 많이 서식하였다고 하여 황새관을 써서 관전 이라고 불러오다가 백여년 전에 마을에서 관직에 오른 분을 배출하여 벼슬관자를 써서 관전(官田)이라고 개칭하였다고 한다.
관전마을도 다른 마을과 마찬가지로 젊은 사람들이 도시로 빠져나가고 이농현상이 심각하여 마을 사람 대부분은 노년층이다. 1970년대 초반 전기가 들어 왔으며, 버스는 지금도 마을까지 들어오지 않아 장성리 장성마을 앞 도로까지 걸어나가서 버스를 탄다. 마을에는 1890년대 조직된 동계가 있으며 참여인원은 26명이다. 마을의 기본현황을 살펴보면, 총인구는 94명으로 남자 47명, 여자 47명이며. 총 면적은 0.71㎢로, 전 0.15㎢, 답 0.47㎢, 임야 0.09㎢가 해당된다. 마을 사람들의 주소득원은 쌀농사이며, 특작물로는 담배와 수박을 재배하고 있다. 성씨로는 순천박씨 6호, 청주한씨 5호, 김해김씨 7호, 기타 8호가 거주하고 있다. 마을의 민속으로는 샘굿과 줄다리기, 불싸움놀이, 고싸움 등이 있었고, 노인계가 있다. 1890년대에 창립된 동계가 있었으나, 동약의 소실로 이 동계는 없어지고, 새로운 동계가 창립되었다. 이 노인계의 창립목적은 마을의 젊은이들이 선도해보자는 목적으로 마을 어른들을 중심으로 창립되었는데 마을에서 총회의 성격을 갖고 있는 단 하나의 조직이다.
효롱(孝弄) 마을
효롱마을은 면소재지 신석에서 북쪽으로 6㎞ 정도 들어가는 곳에 있는 마을로서 작은 농로를 따라 지동마을을 거쳐가는 길과, 용두마을과 관전마을을 거쳐가는 두 갈래 길이 있다. 마을의 서쪽으로는 태봉산이 위치하고 마을의 남쪽으로는 지동마을이 위치하며, 마을의 동남쪽으로 관전마을이 서북쪽으로는 영산포와 동북쪽으로는 금천면의 2개 면과 접해 있는 마을이기도 한다. 효롱마을은 1789년 발행된 호구총수에 남평현 효롱동이란 지명이 기록된 것으로 보아 이미 200여년 전부터 마을이 형성되어 있었고, 1912년 간행된 지방행정구역일람에는 남평군 죽곡면으로 되었다가 1914년 행정구역 개편 당시 나주군 봉황면에 편입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 최초 입향성씨와 입향년대는 알려지지 않고 있으나 정씨가 마을의 터를 잡고 이씨 등이 거주하였다고 하며, 1800년 중반 김해김씨(金海金氏) 김철후(金哲厚)가 금천면 죽촌리 상촌에서 살다가 태풍의 재난을 당하여 살림을 탕진하고 효롱마을로 이주하여 먼저 거주하던 정씨, 이씨 등과 어울려 큰 마을을 이루었다고 전하여지고 있다.
효롱이라는 지명의 유래에 대한 특별한 전래 사항은 없으나, 예부터 효자들이 끊이지 않고 계속적으로 나와서 마을이름을 효롱으로 지었을 것이라고 전하여진다. 또한 예전에 마을 앞 평야가 모두 강이었다고 하나 이에 대한 지명이나 이야기는 전해지지 않는다. 단지 마을 뒷산을 예전부터 황장이 있어서 황장밭이라고 불렀다고 하나, 왜 황장이라고 불리우는지는 알 수 없다. 이 마을의 역사유물로는 사지와 지리지가 있는데, 사지는 마을의 정면에 위치하고 있으며, 재봉산이라는 야산 아래에 고려 중엽의 것으로 추정되는 도백사라는 절이 있었다고 전하나 기록은 찾아볼 수 없고, 절터로 추정되는 곳에는 지금도 기왓장이 출토되고 있다.
마을에 살고 있는 김두익의 집에 일제시대의 것으로 추정되는 ‘조선호 남지'라는 지리지가 있는데, 당시의 전라남북도의 생활상과 풍물을 한눈에 알아볼 수 있는 책이다. 마을에는 친목을 위한 동계가 있으며, 총인구는 98명으로 이 중 남자는 47명, 여자는 51명이 있다. 총 면적은 0.46㎢로, 전 0.16㎢, 답 0.15㎢, 임야 0.18㎢. 기타 0.07㎢이며, 마을의 주요산업은 쌀, 보리 재배이며 주소득원은 쌀농사, 특작물은 수박, 채소, 참깨가 있다. 마을 사람들의 성씨는 김해김씨가 15호, 여산송씨 1호, 전주이씨 1호, 기타 3호가 있다. 김해김씨 문중의 유평례와 강양님이 남평향교에서 열녀 표창을 받았다.
마을의 민속과 신앙
마을 친목계
마을의 단결과 화합을 위해 40여년전에 창설되었다. 모임은 매년 12월 중순경으로 날짜는 정해져 있지 않고 해마다 변경된다. 또한 이 날은 3명의 유사제를 택하여 유사가 회의를 주관한다. 유사로 채택된 3명은 한 가구당 2만원 정도의 경비를 추렴하여 술과 음식을 장만하여 잔치를 벌인다.
민속신앙
마을에서 민속신앙으로 조앙단지를 모시고 있는 가구가 있는데 한 가구의 예를 들면 조앙단지는 방 안에다 모시며 단지에는 매년 햅쌀이 나올 때 쌀을 바꾸어서 집어 넣는다. 단지에서 나온 묵은쌀은 손이 없는 날 밥을 지어 먹었다고 하나 지금은 예전과 같이 행하지 않고 2~3년에 한 번씩 쌀을 갈아넣는다고 한다.
민속놀이
마을의 민속놀이로는 지신밟기, 들놀이 등 농악놀이가 있었으나 호구수의 감소와 함께 차차 없어져 지금은 행해지지 않고 있다. 마을 사람들의 공동체적 삶의 장소인 동각은 1956년에 지어졌으나, 동각의 명칭이나 현판은 존재하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