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현리
- 날짜
- 2020.04.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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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현리는 면소재지에서 북동쪽으로 2.6㎞ 떨어진 곳에 위치한 비교적 큰 마을이다. 본래 남평군 덕곡면에 속했으나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원봉리, 송촌리, 문현리, 철천리의 각 일부를 병합하여 송촌과 문현의 이름을 따서 송현리라 하였다. 송현리는 본촌인 송길과 송하동, 진목, 신기, 문현, 원봉의 6개 자연마을로 구성되어 있으나 지형적으로 떨어져 있어 실상은 2개의 생활권으로 나누어진다. 송길, 송하동, 진목, 신기가 그 하나이고, 문현과 원봉이 그것이다. 옛날에는 송길, 문현, 원봉으로 크게 나누었는데 지금은 문현과 원봉이 호수가 적어져서 하나로 본다. 북동쪽에 건지산이 자리해 있고, 마을 앞에는 봉황저수지가 있으며, 재너머에는 나주댐이 있다. 그래서 이곳은 다도와의 경계지역이기도 하다. 송현은 총 가구가 177호이고, 총 인구수가 896명이다. 주요 성씨 분포를 보면 풍산홍씨 (豊山洪氏)가 81호로 가장 많으며, 그밖에 이천서씨(利川徐氏) 24호, 경주이씨(慶州李氏), 진주강씨(晉州江氏) 하동정씨(河東鄭氏), 서흥김씨(瑞興金氏), 김해김씨(金海金氏), 밀양박씨 (密陽朴氏) 등 기타 성씨들로 이루어져 있다. 송현에서 송길은 풍산홍씨(豊山洪氏)가 주를 이루고 있으며, 그 밖의 마을은 고른 성씨분포를 보이고 있다. 특산물로 수박과 무를 재배한다
송길마을
송길마을은 면소재지에서 구석마을을 거쳐 북동쪽으로 2.6㎞ 떨어진 곳에 위치한다. 이 마을의 북동쪽은 건지산이, 남동쪽으로는 비암봉이 우뚝 서 있고, 마을 앞에는 봉황 평야의 관개수로를 이용하기 위해 1944년에 준공한 봉황저수지가 있다. 마을 사람들은 참냉기(진목), 어사등(송하동), 새터(신기), 장담원(장대리)을 모두 합쳐서 송길이라 부른다. 송길은 옛날 한 선비가 국난을 피해 이곳에 들어왔는데 소나무가 우거지고 기름진 농경지가 있어 송자와 토자 아래 구자를 합한 길자를 취해 불리워진 이름이라고 하며, 조선조말의 행정구역 명칭으로는 송촌이라고도 불리워졌다.
마을의 입향조는 호조참의 홍징(洪澄)의 셋째 아들인 홍민위(洪民緯, 1562~1618), 문장대유(文章大儒)로 칭송받았던 인물이다. 다도면 도천에서 살았는데 이천이씨 (利川利氏)인 서정후의 무남독녀와 결혼하였고, 서정후는 죽석리에 있는 서자평이라는 땅을 사위에게 주니 홍민위는 1950년에 이곳으로 분가하여 외손봉사를 하게 되었다. 이런 사실로 보아, 마을 형성은 400여년 전이었다고 볼 수 있는데, 그 이전 성씨로 문씨(文氏), 서씨(徐氏), 곽씨(郭氏)가 살았었다고 구전되나 확실한 자료가 없어서 확인할 수는 없다.
마을 사람들의 조직으로는 마을 대동계가 있는데, 1780년에 송길, 진목 사람들이 모여서 조직하였고, 마을의 대소사의 운영과 친목을 그 목적으로 하고 있다. 마을의 자생조직으로는 1780년에 창립된 동계로 친목과 마을운영을 목적으로 운영되었으며, 1730년에 창립된 취옹공파계와 1806년에 창립된 갈담공파계의 문계를 목적으로 한 조직이 있다. 한편 마을의 부녀들의 친목을 위한 부녀회가 1965년에 조직되어 운영되고 있다. 송길마을의 유적으로는, 건지산성, 장춘재, 열녀비각이 있다.
건지산성(乾芝山城)
1590년(선조 23)에 한순이 제42대 남평현감으로 부임하여 미신타파와 풍속순화정책을 펴면서 성산고성(現 남평면 월정대 산상)과 건지산성을 축성하였다 하며,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여기에 군량미를 비축하고, 건지산성은 남평현의 서남쪽을 방위하면서 연병장으로 사용했다 한다. 성의 길이는 500m, 용천과 신틀바위가 있고, 성안나무 90%가 보리수나무이다. 해발 109m의 건지산의 면적은 총10, 314㎡이며, 봉황면 송현리 산3에 위치한다.
장춘재(長春齋)
마을의 중심지에 있는 이 제각은 1637년(인조 35)에 홍종운(洪鍾韻)(1613~1658)이 병자호란에 참가하려다 화친의 소리를 전해듣고 통곡하며 파병 귀가하여 도를 강론하며, 후손을 양성하기 위하여 지었다 한다. 홍종운은 인이란 사덕을 포함한 것으로 때에 비추어 말한다면 봄이 되어 태화한 원기가 사시에 널리 퍼진다는 뜻에서 제각명을 춘재라 칭하였다. 그러나 세월이 흐르는 동안 이 건물을 자연히 퇴각하여 모습을 감추게 되었고, 그 위치가 어디인지 조차 후손들은 확인하지 못하고 있다. 그후 마을 사람들 사이에서 선인의 귀덕을 되살리기 위하여 이 건물을 다시 세우자는 의론이 일어나 1918년에 동각으로 사용할 현재의 건물을 지어 장춘재라 현판하고 홍종운의 학행과 유훈에 따라 서당으로 활용하며, 후진교육에 힘서 많은 인재를 양성하였고, 전통 문화와 윤리를 수호하고, 퇴폐풍조를 바로잡는데 중심적인 역할을 해왔다. 지금은 마을 노인들이 모여 노인당으로 활용하고 있으며, 시에 있었던 많은 서적은 왜정때 없어져버렸다고 한다. 홍종운의 문집인 덕곡집이 있다.
열녀비각(烈女碑閣)
홍장희(1909~1931)의 부인인 남평문씨(南平文氏)의 비각으로 남편이 중병으로 위독하자, 지성으로 병구완에 힘썼으나,회생하지 못하고 죽었다. 부인 문씨는 남편의 장례를 정성으로 치른 후 밤마다 삼경이 되면 남편의 묘소에 가서 소리없이 울기를 3년 동안 거르지 않았다. 3년 상을 마친 뒤에는 야음을 타서 아무도 모르게 목을 메어 순절하였다. 이에 사림에서 천양하여 1960년 이 비각을 세우게 되었다.
한편 송길마을에는 의병활동을 한 분들이 많은데, 홍승용, 정순일, 김제종, 홍윤희 등이 그들이다. 이 마을의 문화적 발달사를 보면 동창에서 남평가는 도로는 오랜 옛날부터 있었고, 다도로 가는 도로는 왜정 때 닦았다. 마을 사람들의 주요 소득원은 벼농사이며, 주산물은 쌀이고, 특산물은 수박이다. 수자원은 해방후에 만들어진 송천제가 있는데 마을 사람들은 이곳을 가리켜 도적굴 방죽이라 부른다. 하지만 왜 그리 부르는지는 전해지고 있지 않다. 송길마을은 신기, 송하등, 진목등과 생활권은 나누어져 있으나 같은 공동체적 생활을 하고 있다. 이 마을은 전통이 오랜 마을로서 아직까지 유교적 습관을 엿볼 수는 있으나 새로운 시대의 흐름에도 잘 적응하여 주민 모두가 마을 발전을 위해 열심히 살아가고 있다.
마을을 빛낸 인물로는 광산김씨 김순옥이 2000년에 성균관장으로부터 효부포양문을 받았다. 김순옥은 그 시아버지의 심한 병환에도 지극한 정성으로 대하였고, 시어머니의 노환에도 지극한 효성을 다했다고 한다. 또한 송길 마을의 윤태순은 스물 세 살에 청상과부가 되었으나 시부모님을 지극한 정성으로 봉양하였고, 친척간에도 화목을 도모하고 정절을 지켜서 2000년에 성균관장으로부터 찬양문을 받았으며, 정영애는 시부모님께 예와 지극한 정성을 바쳐서 2000년에 성균관장으로부터 찬양문을 받았다. 마을의 기본현황으로는 총 인구 306명으로 남자 136명, 여자 170명이 살고 있으며. 총 면적은 1.40㎢로 전 0.10㎢, 답0.57㎢, 임야 0.62㎢, 기타 0.11㎢이며, 총 64가구가 모두 농사를 짓고 있다. 주요 산업과 주소득원은 쌀농사이며, 마을의 특작물로는 수박 재배를 하고 있다. 성씨는 풍산홍씨(豊山洪氏)가 56호, 이천서씨(利川徐氏) 2호, 경주이씨(慶州李氏) 3호, 기타 성씨로 3호가 살고 있다.
신기마을
신기마을은 원래 밭이었는데, 이곳에 홍경식(洪庚植)의 논이 많았다고 한다. 홍경식은 아들을 못 낳고 딸만 낳았는데, 새터를 잡아 살림을 하면 아들을 낳는다고 하여, 서흥김씨인 김정현과 더불어 1947년 본촌인 송길에서 이곳에 집을 지어 분가하였다. 당시는 두 집만이 살았는데 이곳이 으슥하여 한국전쟁때 피난처의 요지가 되었고, 그로부터 이 마을에 이거해 온 사람들이 많아 오늘의 마을을 형성하게 되었다. 한편 신기마을은 까마귀가 알을 품고 있는 형국으로서 풍수지리학적으로 아주 좋은 땅이라 한다. 이곳이 신기라고 불리운 것은 새로 터를 잡았다하여 새터였는데, 이것을 한자어로 표현한 것이다. 전하는 말에 의하면 마을이 들어서기 훨씬 전부터, 그곳을 ‘새터굴'이라고 불렀다 한다.
마을의 공동체적 삶의 모습은 동계, 품앗이, 마을의 공유재산에서 볼 수 있다. 동계는 1950년에 창립되었고, 현재 참여인원은 15명이며, 1965년에 조직된 부녀회도 15명이 활동하고 있다. 특히 마을 동계에서 마련한 것으로 병풍이 있는데, 마을에 큰잔치나 혼례가 있을 때마다, 송길에서 빌려다 썼는데, 그 번거로움을 피하기 위하여 장만한 것이다. 이밖에 200개 정도의 그릇과 풍로, 저울, 돗자리 등이 있다. 마을의 기본현황은 총 인구 66명중 남자 32명, 여자 34명이 있으며, 총 면적 0.23㎢ 중 전0.02㎢, 답0.09㎢, 임야0.10㎢, 기타 0.02㎢가 해당되며, 총 16가구 모두 농사를 짓고 있다. 마을의 주요산업과 주소득원은 쌀농사이며, 특작물로 수박과 무를 재배하고 있으며, 성씨로는 풍산홍씨 6호, 하동정씨 4호, 서흥김씨 2호, 기타 4호가 살고 있다.
문현마을
문현마을은 면소재지에서 동쪽으로 약 2㎞ 떨어진 지점에 위치한다. 동으로 원봉마을과 이웃하며, 다도면과의 경계를 이루고 서쪽으로 죽석리가 있으며, 남쪽으로 덕룡산이 북으로 송길 마을과 접하고 있고, 마을 앞으로 강진, 해남과 광주를 연결하는 지방도로가 통과하고 있다. 문현은 북쪽에 문고개라 불리우는 데가 있었는데 그것을 한자로 표기하여 부른 것이다. 영평고을의 관문에 걸맞은 지명이라고 마을 사람들은 입을 모은다. 마을 왼쪽 전답에서 옛날 기와 파편이 나온 것으로 보아 이전에 마을이 있었던 흔적이 있으나 확실하지 않다.
마을 입향조는 홍득경, 득은형제, 셋째 아들인 종서(1616~1682)로 1640년경에 송길마을에서 이곳 문현으로 집터를 잡아 분가하였다. 그 뒤로 파평윤씨(破平尹氏) 형제가 입촌하였고, 뒤이어 이천서씨(利川徐氏), 강화최씨(江華崔氏)가 차례로 들어와 혼성촌을 이뤘다. 문현마을의 생활과 민속으로는 입석, 문현제, 마을샘, 당산나무, 단골, 우제, 동고지기, 이밖에 농악, 풍장을 들 수 있다. 입석 마을 어귀에 위치하는 이 입석은 문현터가 서쪽이 백호가닥이고, 남쪽이 청룡가닥인데 서쪽의 백호가닥 약해서 수맥이로 해놓은 것이라 전하는데 자세히는 알 수 없다. 한때 이 입석이 보기 싫다고 없애려고 했는데 그곳을 파보니 땅속에서 ‘알 뚝배기'가 나와 그대로 다시 묻었다고 한다.
진목마을
진목마을은 면사무소에서 동북쪽으로 2.7㎞ 떨어진 곳에 위치한다. 이 마을은 건지산의 줄기인 작은 산들에 에워싸여 있으며, 마을 가운데로 나주댐 물이 지나간다. 마을 동쪽에 비안봉이, 남쪽에 덕룡산이 자리한다. 진목은 윗참냉과 아랫참냉으로 나누어 부르는데, 이는 야산을 사이에 두고 아랫참냉은 송현제 아래쪽을, 윗참냉은 지금 진목동을 가리킨다. 옛날에 바닷물이 여기까지 들어왔다고 하는데 지형이 높아 아랫참냉까지 물이 들어와도 해변처럼 마을은 괜찮았다고 한다. 그래서인지 아랫참냉은 자래등 형국이고, 윗참냉은 비안봉에서 느낄 수 있듯이 아랫참냉이 보이는 송현제쪽으로 기러기가 날아가는 형국이라 한다.
마을의 형성을 살펴보면, 300여년 전에 폐촌이 되었었다는 말이 전해오기도 하는데, 호구총수에 진목은 1789년 남평현 덕곡면에 속했었다가 1914년에 행정구역개편시 봉황면 송현리에 속하여 지금에 이르고 있다. 이것으로 보아 확실히는 추정할 수 없으나 마을형성이 적어도 200여년 전이었던 것을 알 수 있다. 원래 이 마을은 밀양박씨(密陽朴氏)와 파평윤씨(坡平尹氏)들의 터였다고 전하는데 당시 100여호가 넘는 큰 마을을 형성했다고 한다. 그런데 어느 해인가 괴질이 유행하게 되어 이 성씨들은 하나 둘 마을을 떠나갔고, 결국 이곳은 아무도 살지 않는 폐촌이 되었다고 하는데 확실히는 알 수 없다.
마을 입향조는 송길에서 살던 홍우갑의 셋째 아들인 홍종량(洪鍾亮) (1618~1681)으로 진목에 분가하여 정착하였다 한다. 홍종량은 이곳에 전답이 많아, 이곳으로 분가하였는데 그가 터를 정한 곳이 아랫참냉이었고, 그의 형인 홍종운이 벼슬을 하여 형 덕택에 진목에서 아주 부유한 생활을 하였다. 전하는 말에 의하면 그는 말을 타고 다녔으며 호남의 거부로 딸이 하나 있었는데, 호남 아래쪽으로는 사돈을 맺을 사람이 없어, 혼인을 못시키고 끝내 그 딸은 혼자 살다가 죽었다고 한다.
원래 지명에 물결 랑(浪)자가 들어가면 반드시 그 마을에는 물이 있어야 하는데 이곳에도 옛날에는 푸를 창자, 물결 랑자를 써서 ‘창랑'이라 불리웠다. 이것으로 보아 이곳까지 물이 들어왔다는 말에는 일리가 있는 듯하다. 그러다가 이곳에 참나무가 많아 숯을 구워 팔게 되면서부터 ‘참냉기'로 불리웠고, 그 이후 참냉기의 한자명인 진목이 되었던 것이다. 진목마을 사람들의 생활상은 동계와 숯을 구웠던 흔적에서 찾아볼 수 있다. 마을의 자생조직으로는 1946년에 창립된 동계와 1970년에 창립된 부녀회가 운영되고 있다. 마을의 총 인구수는 37명이며, 남자18명, 여자19명이 살고 있고, 총 면적은0.13㎢에 해당된다. 전 0.01㎢, 답 0.05㎢, 임야 0.06㎢, 기타 0.01㎢로 이루어져 있다. 마을의 주요 산업과 주소득원은 쌀농사이며, 특작물로는 수박을 재배하고 있으며, 성씨는 풍산홍씨 2호, 이천서씨 2호, 강화최씨 2호, 기타 3호가 거주하고 있다.
송하동
송하동은 면사무소에서 동북쪽으로 2.6㎞ 떨어진 곳에 위치하며, 송길마을과 이웃한다. 송하동의 동북쪽은 완만한 곡선을 자랑하는 건지산이, 남쪽은 국도가, 북쪽에는 어사등이, 마을 남쪽에는 봉황평야의 관개수로를 이용하기 위해 1944년에 준공한 봉황저수지가 있다. 송하동은 원래 마을이 없었고 잡목이 우거져 있는 아사리등이었다. 그래서 봉황 지역 사람들은 송하동이라는 지명보다 아사리등, 이라는 지명을 더 많이 알고 있다. 1930년경에 일본인들이 이민을 와서 이곳에 정착하였다. 처음에 이곳 땅은 송길마을 홍순희의 소유였는데 돈이 아쉬워서 일본인에게 팔게 된 것이다. 당시 홍춘환의 아버지가 일본인에게 배나무를 재배하라고 일러줘서 과수원을 시작했다고 한다.
이들 일본인들에 대해 마을 사람들은 일본에서 제일 상놈들이 이민해 왔다고 했다. 그들이 과수원을 시작한데는 홍춘환의 아버지의 권유도 있었으나 생산성이 좋았고 금천면에서 나오는 나주배가 유명했기 때문에 당시 봉황면에 들어온 일본인들은 모두 과수원을 시작했다. 그러자 외지에서 곤란하게 살던 사람들이 이곳에 와서 왜인들 농장에서 노동을 해 벌어먹고 살았으며, 8호 정도가 담집을 짓고 정착했는데 8. 15 광복을 전후하여 하나 둘 떠나가 버리고, 이곳에 살던 일본인들도 떠나면서, 그후 정부는 이 과수원을 국유지로 하여 귀환동포에게 대여해 구호대책으로 삼았다.
이 무렵(1947년) 만주에서 돌아온 홍기환은 송하동에 집을 사서 분가하였는데 이곳에 살던 귀환동포들이 떠나가면서 땅을 팔자, 송길마을에서 사람들이 그곳 땅을 사서 이사해 옴으로써 지금의 마을이 되었다. 이 마을이 ‘아사리등'이라 불리우는 이유는, 전라도 사투리로 잡목이 우거지고 밀집되어 있어 찜찜한 데를 가리켜 그리 부르는데, 이곳이 당시 아사리밭이 있었기 때문이라 한다. 마을 사람들은 이 아사리등을 한자로 기록할 때 ‘어사등'이라고 했다. 어사등이라는 말은 송하동에 바위가 하나 있는데, 이 바위에서 어사가 쉬어갔다 하여 불리워진 이름으로 그리 크지는 않았는데 현재는 매몰되어 보이지 않는다.
그 곳에 묘지를 쓰고, 그 위치를 족보에 적어 넣었는데 그 문중의 족보를 보면 어사등이라 표기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아사리등이라 불렀던 것을 한자로 쓸 때 어사등이라고 썼던 것 같다. 1960년경 아사리등이란 발음이 안 좋고, 그것이 의미하는 것이 좋지 않아 송길 밑에 동네라 하여 ‘송하동'이라 부르게 되었다. 동네 친목계에서 나서서 마을 이름을 고쳤으나 그렇게 불러주지를 않아 앞에서 말했듯, 지금도 사람들은 송하동이라 하면 잘 모르는 이가 많다. 송하동 사람들은 송길마을에서 분가한 지 어언 40여년이 넘었으나 마을의 대동계는 신기, 진목과 더불어 송길마을에서 함께 지낸다. 그 이유는 마을 사람들의 대다수가 송길 본가에서 분가하여 살아오고 있고, 송길에서 하는 거의 모든 행사에 참가하였으며, 행정구역상으로도 마을이 구분되어지기 전에는 이 송하동까지 송길마을에 포함돼 있었기 때문이다. 지금도 송하동 주민들은 자신이 송길마을의 일원으로 생각하고 있다.
마을의 동계는 친목을 목적으로 1958년에 창립되었고, 현재 8명이 참여하고 있으며, 인구는 남자 16명, 여자 17명으로 총 33명이며, 총 면적은 0.12㎢로 전 0.01㎢, 답 0.05㎢, 임야 0.05㎢, 기타 0.01㎢가 있다. 총 가구수는 8호로 모두 농사를 짓고 있다. 주요산업과 주소득원은 쌀농사이며, 특작물로는 수박재배를 하고 있고, 성씨는 풍산홍씨가 6호, 기타 성씨가 2호 거주하고 있다.
원봉마을
원봉마을은 면사무소에서 동쪽으로 2㎞ 떨어진 곳에 위치한다. 마을 동쪽은 다도면과 경계하고, 서쪽은 면소재지가 위치하며, 남쪽은 덕룡산 줄기이고, 북쪽은 건지산 줄기가 있다. 옛날에는 이곳에 고씨들이 살았던 터로, 터가 좋기로 유명하였고, 고장자가 있었다고 하여 ‘고장자 터'라고 불리웠다. 또한 마을에 만호가 살았다고 하여 ‘만갈이'라고도 불린다. 이 만갈이는 서계열 집에서 동남간에 위치하는데 지금은 나무가 우거져 있으며, 이곳에 서당이 있었다고 한다. 마을이 없어진 이유는, 이 서당에서 살인이 났기 때문에 동네에 불을 질러 혁파되었다고 하는데 확실한 이야기는 전해져 오지 않는다. 또한 서계열집 옆에 큰 연못이 있었는데, 어떤 이의 말에 의하면 원래 이곳이 고장자의 집터였는데 서당에서 살인이 나자 그 곳을 파서 연못을 만들었다고 하며, 또 어떤 이는 부자집에서 불을 끄기 위해 항상 연못을 두었다고도 한다. 이 만갈이에 대한 기록은 남평향교 교지에 나와 있다.
마을 입향조는 서학순의 둘째 아들인 서유환(1850~1926)으로 마동에서 살다가 전답이 있는 이곳에 새터를 잡아 분가하였다. 서유환은 글을 잘했다. 호남삼강록을 살펴보면, 어머니가 돌아가시자 단지 수혈하여 3일간 연명케 하였다고 하는데 이로 인해 남평향교에서 상을 받았다. 서유환이 이곳에 집터를 잡게 된 것은 꿈에 산신령이 나타나 이곳에 집을 지으라 하여 목화밭인 그 곳에 가보니, 호랑이가 목화(다랫대)를 뽑아주어 집짓는 것을 도와주었다 한다. 후에 서유환의 5형제가 마을 안에서 분가하였고, 외지인이 땅을 사가지고 하나둘 이사를 오면서 마을이 형성되었다.
마을에 있는 산이름을 두레원(圓)자 봉우리 봉(峰)자를 써서 원봉산이라 불렀는데, 어느 곳에서 보나 둥글다하여 그렇게 불린다. 그 이전에는 옥녀봉이라 하였는데, 옥녀봉은 옥녀산발형이라 하는 명당자리가 있다고 전한다. 한손으로 머리채를 잡고 옥녀가 빗질을 한다하여 그렇게 불렀다 하는데 쑥썩재 밑에 비녀꼭지라 불리는 데가 있고, 소금쟁이 샘이 있는데 이곳은 작은 이불을 의미하며, 통샘은 큰 이불을 뜻한다. 그리고 마년방죽이 거울이라 하며, 소금쟁이 샘은 마년방죽 위쪽 버드나무 아래에 위치하고, 통샘은 마년방죽 바닥안에 있는 샘이다. 원봉이란 이름은 마을산인 원봉산의 이름을 따서 부른 것이다.
마을 동쪽에 류치제라 불리는 방죽이 있는데, 버들류(柳)자, 언덕치(峙)자를 쓰는 고개 이름을 따서 류치제라 불렀다. 류치고개는 덕룡산 줄기에 위치한다. 그 이전에는 하천물이 지나갔는데 이것을 막아 농업용수로 쓰기 위해 32년 전에 국유지 19800㎡에 저수지를 만들어 사용하였다. 마을에 들어서면 과수원과 넓게 펼쳐진 들판을 보고 굉장히 부유한 마을일 것이라 추측하나 마을의 동쪽에 있는 논은 다도면 사람들의 것이고, 남쪽 논만 이 마을 사람들이 경작하고 있다. 마을에 궂은 일이 생기면 다들 제일처럼 발벗고 나서서 도와주는 단결력이 강한 마을이다. 문순임은 시어머니를 잘 봉양하여 지방 유림들이 추천하여 나주 향교에서 주었다.
마을 사람들간의 친목 도모를 위해 동계가 조직되어 있으며, 인구는 남자 67명, 여자 65명으로 총 132명이 살고 있으며, 총 면적은 0.96㎢로, 전 0.12㎢, 답 0.14㎢, 임야 0.05㎢, 기타 0.20㎢이다. 마을의 38가구 중 농가는 36호, 비농가는 2호를 이루고 있으며, 마을 사람들의 주소득원은 쌀농사이며, 무와 수박을 특작물로 재배하고 있다. 마을에는 이천서씨 10호, 김해김씨 3호, 밀양박씨 3호가 거주하고 있다.
송길마을
송길마을은 면소재지에서 구석마을을 거쳐 북동쪽으로 2.6㎞ 떨어진 곳에 위치한다. 이 마을의 북동쪽은 건지산이, 남동쪽으로는 비암봉이 우뚝 서 있고, 마을 앞에는 봉황 평야의 관개수로를 이용하기 위해 1944년에 준공한 봉황저수지가 있다. 마을 사람들은 참냉기(진목), 어사등(송하동), 새터(신기), 장담원(장대리)을 모두 합쳐서 송길이라 부른다. 송길은 옛날 한 선비가 국난을 피해 이곳에 들어왔는데 소나무가 우거지고 기름진 농경지가 있어 송자와 토자 아래 구자를 합한 길자를 취해 불리워진 이름이라고 하며, 조선조말의 행정구역 명칭으로는 송촌이라고도 불리워졌다.
마을의 입향조는 호조참의 홍징(洪澄)의 셋째 아들인 홍민위(洪民緯, 1562~1618), 문장대유(文章大儒)로 칭송받았던 인물이다. 다도면 도천에서 살았는데 이천이씨 (利川利氏)인 서정후의 무남독녀와 결혼하였고, 서정후는 죽석리에 있는 서자평이라는 땅을 사위에게 주니 홍민위는 1950년에 이곳으로 분가하여 외손봉사를 하게 되었다. 이런 사실로 보아, 마을 형성은 400여년 전이었다고 볼 수 있는데, 그 이전 성씨로 문씨(文氏), 서씨(徐氏), 곽씨(郭氏)가 살았었다고 구전되나 확실한 자료가 없어서 확인할 수는 없다.
마을 사람들의 조직으로는 마을 대동계가 있는데, 1780년에 송길, 진목 사람들이 모여서 조직하였고, 마을의 대소사의 운영과 친목을 그 목적으로 하고 있다. 마을의 자생조직으로는 1780년에 창립된 동계로 친목과 마을운영을 목적으로 운영되었으며, 1730년에 창립된 취옹공파계와 1806년에 창립된 갈담공파계의 문계를 목적으로 한 조직이 있다. 한편 마을의 부녀들의 친목을 위한 부녀회가 1965년에 조직되어 운영되고 있다. 송길마을의 유적으로는, 건지산성, 장춘재, 열녀비각이 있다.
건지산성(乾芝山城)
1590년(선조 23)에 한순이 제42대 남평현감으로 부임하여 미신타파와 풍속순화정책을 펴면서 성산고성(現 남평면 월정대 산상)과 건지산성을 축성하였다 하며,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여기에 군량미를 비축하고, 건지산성은 남평현의 서남쪽을 방위하면서 연병장으로 사용했다 한다. 성의 길이는 500m, 용천과 신틀바위가 있고, 성안나무 90%가 보리수나무이다. 해발 109m의 건지산의 면적은 총10, 314㎡이며, 봉황면 송현리 산3에 위치한다.
장춘재(長春齋)
마을의 중심지에 있는 이 제각은 1637년(인조 35)에 홍종운(洪鍾韻)(1613~1658)이 병자호란에 참가하려다 화친의 소리를 전해듣고 통곡하며 파병 귀가하여 도를 강론하며, 후손을 양성하기 위하여 지었다 한다. 홍종운은 인이란 사덕을 포함한 것으로 때에 비추어 말한다면 봄이 되어 태화한 원기가 사시에 널리 퍼진다는 뜻에서 제각명을 춘재라 칭하였다. 그러나 세월이 흐르는 동안 이 건물을 자연히 퇴각하여 모습을 감추게 되었고, 그 위치가 어디인지 조차 후손들은 확인하지 못하고 있다. 그후 마을 사람들 사이에서 선인의 귀덕을 되살리기 위하여 이 건물을 다시 세우자는 의론이 일어나 1918년에 동각으로 사용할 현재의 건물을 지어 장춘재라 현판하고 홍종운의 학행과 유훈에 따라 서당으로 활용하며, 후진교육에 힘서 많은 인재를 양성하였고, 전통 문화와 윤리를 수호하고, 퇴폐풍조를 바로잡는데 중심적인 역할을 해왔다. 지금은 마을 노인들이 모여 노인당으로 활용하고 있으며, 시에 있었던 많은 서적은 왜정때 없어져버렸다고 한다. 홍종운의 문집인 덕곡집이 있다.
열녀비각(烈女碑閣)
홍장희(1909~1931)의 부인인 남평문씨(南平文氏)의 비각으로 남편이 중병으로 위독하자, 지성으로 병구완에 힘썼으나,회생하지 못하고 죽었다. 부인 문씨는 남편의 장례를 정성으로 치른 후 밤마다 삼경이 되면 남편의 묘소에 가서 소리없이 울기를 3년 동안 거르지 않았다. 3년 상을 마친 뒤에는 야음을 타서 아무도 모르게 목을 메어 순절하였다. 이에 사림에서 천양하여 1960년 이 비각을 세우게 되었다.
한편 송길마을에는 의병활동을 한 분들이 많은데, 홍승용, 정순일, 김제종, 홍윤희 등이 그들이다. 이 마을의 문화적 발달사를 보면 동창에서 남평가는 도로는 오랜 옛날부터 있었고, 다도로 가는 도로는 왜정 때 닦았다. 마을 사람들의 주요 소득원은 벼농사이며, 주산물은 쌀이고, 특산물은 수박이다. 수자원은 해방후에 만들어진 송천제가 있는데 마을 사람들은 이곳을 가리켜 도적굴 방죽이라 부른다. 하지만 왜 그리 부르는지는 전해지고 있지 않다. 송길마을은 신기, 송하등, 진목등과 생활권은 나누어져 있으나 같은 공동체적 생활을 하고 있다. 이 마을은 전통이 오랜 마을로서 아직까지 유교적 습관을 엿볼 수는 있으나 새로운 시대의 흐름에도 잘 적응하여 주민 모두가 마을 발전을 위해 열심히 살아가고 있다.
마을을 빛낸 인물로는 광산김씨 김순옥이 2000년에 성균관장으로부터 효부포양문을 받았다. 김순옥은 그 시아버지의 심한 병환에도 지극한 정성으로 대하였고, 시어머니의 노환에도 지극한 효성을 다했다고 한다. 또한 송길 마을의 윤태순은 스물 세 살에 청상과부가 되었으나 시부모님을 지극한 정성으로 봉양하였고, 친척간에도 화목을 도모하고 정절을 지켜서 2000년에 성균관장으로부터 찬양문을 받았으며, 정영애는 시부모님께 예와 지극한 정성을 바쳐서 2000년에 성균관장으로부터 찬양문을 받았다. 마을의 기본현황으로는 총 인구 306명으로 남자 136명, 여자 170명이 살고 있으며. 총 면적은 1.40㎢로 전 0.10㎢, 답0.57㎢, 임야 0.62㎢, 기타 0.11㎢이며, 총 64가구가 모두 농사를 짓고 있다. 주요 산업과 주소득원은 쌀농사이며, 마을의 특작물로는 수박 재배를 하고 있다. 성씨는 풍산홍씨(豊山洪氏)가 56호, 이천서씨(利川徐氏) 2호, 경주이씨(慶州李氏) 3호, 기타 성씨로 3호가 살고 있다.
신기마을
신기마을은 원래 밭이었는데, 이곳에 홍경식(洪庚植)의 논이 많았다고 한다. 홍경식은 아들을 못 낳고 딸만 낳았는데, 새터를 잡아 살림을 하면 아들을 낳는다고 하여, 서흥김씨인 김정현과 더불어 1947년 본촌인 송길에서 이곳에 집을 지어 분가하였다. 당시는 두 집만이 살았는데 이곳이 으슥하여 한국전쟁때 피난처의 요지가 되었고, 그로부터 이 마을에 이거해 온 사람들이 많아 오늘의 마을을 형성하게 되었다. 한편 신기마을은 까마귀가 알을 품고 있는 형국으로서 풍수지리학적으로 아주 좋은 땅이라 한다. 이곳이 신기라고 불리운 것은 새로 터를 잡았다하여 새터였는데, 이것을 한자어로 표현한 것이다. 전하는 말에 의하면 마을이 들어서기 훨씬 전부터, 그곳을 ‘새터굴'이라고 불렀다 한다.
마을의 공동체적 삶의 모습은 동계, 품앗이, 마을의 공유재산에서 볼 수 있다. 동계는 1950년에 창립되었고, 현재 참여인원은 15명이며, 1965년에 조직된 부녀회도 15명이 활동하고 있다. 특히 마을 동계에서 마련한 것으로 병풍이 있는데, 마을에 큰잔치나 혼례가 있을 때마다, 송길에서 빌려다 썼는데, 그 번거로움을 피하기 위하여 장만한 것이다. 이밖에 200개 정도의 그릇과 풍로, 저울, 돗자리 등이 있다. 마을의 기본현황은 총 인구 66명중 남자 32명, 여자 34명이 있으며, 총 면적 0.23㎢ 중 전0.02㎢, 답0.09㎢, 임야0.10㎢, 기타 0.02㎢가 해당되며, 총 16가구 모두 농사를 짓고 있다. 마을의 주요산업과 주소득원은 쌀농사이며, 특작물로 수박과 무를 재배하고 있으며, 성씨로는 풍산홍씨 6호, 하동정씨 4호, 서흥김씨 2호, 기타 4호가 살고 있다.
문현마을
문현마을은 면소재지에서 동쪽으로 약 2㎞ 떨어진 지점에 위치한다. 동으로 원봉마을과 이웃하며, 다도면과의 경계를 이루고 서쪽으로 죽석리가 있으며, 남쪽으로 덕룡산이 북으로 송길 마을과 접하고 있고, 마을 앞으로 강진, 해남과 광주를 연결하는 지방도로가 통과하고 있다. 문현은 북쪽에 문고개라 불리우는 데가 있었는데 그것을 한자로 표기하여 부른 것이다. 영평고을의 관문에 걸맞은 지명이라고 마을 사람들은 입을 모은다. 마을 왼쪽 전답에서 옛날 기와 파편이 나온 것으로 보아 이전에 마을이 있었던 흔적이 있으나 확실하지 않다.
마을 입향조는 홍득경, 득은형제, 셋째 아들인 종서(1616~1682)로 1640년경에 송길마을에서 이곳 문현으로 집터를 잡아 분가하였다. 그 뒤로 파평윤씨(破平尹氏) 형제가 입촌하였고, 뒤이어 이천서씨(利川徐氏), 강화최씨(江華崔氏)가 차례로 들어와 혼성촌을 이뤘다. 문현마을의 생활과 민속으로는 입석, 문현제, 마을샘, 당산나무, 단골, 우제, 동고지기, 이밖에 농악, 풍장을 들 수 있다. 입석 마을 어귀에 위치하는 이 입석은 문현터가 서쪽이 백호가닥이고, 남쪽이 청룡가닥인데 서쪽의 백호가닥 약해서 수맥이로 해놓은 것이라 전하는데 자세히는 알 수 없다. 한때 이 입석이 보기 싫다고 없애려고 했는데 그곳을 파보니 땅속에서 ‘알 뚝배기'가 나와 그대로 다시 묻었다고 한다.
진목마을
진목마을은 면사무소에서 동북쪽으로 2.7㎞ 떨어진 곳에 위치한다. 이 마을은 건지산의 줄기인 작은 산들에 에워싸여 있으며, 마을 가운데로 나주댐 물이 지나간다. 마을 동쪽에 비안봉이, 남쪽에 덕룡산이 자리한다. 진목은 윗참냉과 아랫참냉으로 나누어 부르는데, 이는 야산을 사이에 두고 아랫참냉은 송현제 아래쪽을, 윗참냉은 지금 진목동을 가리킨다. 옛날에 바닷물이 여기까지 들어왔다고 하는데 지형이 높아 아랫참냉까지 물이 들어와도 해변처럼 마을은 괜찮았다고 한다. 그래서인지 아랫참냉은 자래등 형국이고, 윗참냉은 비안봉에서 느낄 수 있듯이 아랫참냉이 보이는 송현제쪽으로 기러기가 날아가는 형국이라 한다.
마을의 형성을 살펴보면, 300여년 전에 폐촌이 되었었다는 말이 전해오기도 하는데, 호구총수에 진목은 1789년 남평현 덕곡면에 속했었다가 1914년에 행정구역개편시 봉황면 송현리에 속하여 지금에 이르고 있다. 이것으로 보아 확실히는 추정할 수 없으나 마을형성이 적어도 200여년 전이었던 것을 알 수 있다. 원래 이 마을은 밀양박씨(密陽朴氏)와 파평윤씨(坡平尹氏)들의 터였다고 전하는데 당시 100여호가 넘는 큰 마을을 형성했다고 한다. 그런데 어느 해인가 괴질이 유행하게 되어 이 성씨들은 하나 둘 마을을 떠나갔고, 결국 이곳은 아무도 살지 않는 폐촌이 되었다고 하는데 확실히는 알 수 없다.
마을 입향조는 송길에서 살던 홍우갑의 셋째 아들인 홍종량(洪鍾亮) (1618~1681)으로 진목에 분가하여 정착하였다 한다. 홍종량은 이곳에 전답이 많아, 이곳으로 분가하였는데 그가 터를 정한 곳이 아랫참냉이었고, 그의 형인 홍종운이 벼슬을 하여 형 덕택에 진목에서 아주 부유한 생활을 하였다. 전하는 말에 의하면 그는 말을 타고 다녔으며 호남의 거부로 딸이 하나 있었는데, 호남 아래쪽으로는 사돈을 맺을 사람이 없어, 혼인을 못시키고 끝내 그 딸은 혼자 살다가 죽었다고 한다.
원래 지명에 물결 랑(浪)자가 들어가면 반드시 그 마을에는 물이 있어야 하는데 이곳에도 옛날에는 푸를 창자, 물결 랑자를 써서 ‘창랑'이라 불리웠다. 이것으로 보아 이곳까지 물이 들어왔다는 말에는 일리가 있는 듯하다. 그러다가 이곳에 참나무가 많아 숯을 구워 팔게 되면서부터 ‘참냉기'로 불리웠고, 그 이후 참냉기의 한자명인 진목이 되었던 것이다. 진목마을 사람들의 생활상은 동계와 숯을 구웠던 흔적에서 찾아볼 수 있다. 마을의 자생조직으로는 1946년에 창립된 동계와 1970년에 창립된 부녀회가 운영되고 있다. 마을의 총 인구수는 37명이며, 남자18명, 여자19명이 살고 있고, 총 면적은0.13㎢에 해당된다. 전 0.01㎢, 답 0.05㎢, 임야 0.06㎢, 기타 0.01㎢로 이루어져 있다. 마을의 주요 산업과 주소득원은 쌀농사이며, 특작물로는 수박을 재배하고 있으며, 성씨는 풍산홍씨 2호, 이천서씨 2호, 강화최씨 2호, 기타 3호가 거주하고 있다.
송하동
송하동은 면사무소에서 동북쪽으로 2.6㎞ 떨어진 곳에 위치하며, 송길마을과 이웃한다. 송하동의 동북쪽은 완만한 곡선을 자랑하는 건지산이, 남쪽은 국도가, 북쪽에는 어사등이, 마을 남쪽에는 봉황평야의 관개수로를 이용하기 위해 1944년에 준공한 봉황저수지가 있다. 송하동은 원래 마을이 없었고 잡목이 우거져 있는 아사리등이었다. 그래서 봉황 지역 사람들은 송하동이라는 지명보다 아사리등, 이라는 지명을 더 많이 알고 있다. 1930년경에 일본인들이 이민을 와서 이곳에 정착하였다. 처음에 이곳 땅은 송길마을 홍순희의 소유였는데 돈이 아쉬워서 일본인에게 팔게 된 것이다. 당시 홍춘환의 아버지가 일본인에게 배나무를 재배하라고 일러줘서 과수원을 시작했다고 한다.
이들 일본인들에 대해 마을 사람들은 일본에서 제일 상놈들이 이민해 왔다고 했다. 그들이 과수원을 시작한데는 홍춘환의 아버지의 권유도 있었으나 생산성이 좋았고 금천면에서 나오는 나주배가 유명했기 때문에 당시 봉황면에 들어온 일본인들은 모두 과수원을 시작했다. 그러자 외지에서 곤란하게 살던 사람들이 이곳에 와서 왜인들 농장에서 노동을 해 벌어먹고 살았으며, 8호 정도가 담집을 짓고 정착했는데 8. 15 광복을 전후하여 하나 둘 떠나가 버리고, 이곳에 살던 일본인들도 떠나면서, 그후 정부는 이 과수원을 국유지로 하여 귀환동포에게 대여해 구호대책으로 삼았다.
이 무렵(1947년) 만주에서 돌아온 홍기환은 송하동에 집을 사서 분가하였는데 이곳에 살던 귀환동포들이 떠나가면서 땅을 팔자, 송길마을에서 사람들이 그곳 땅을 사서 이사해 옴으로써 지금의 마을이 되었다. 이 마을이 ‘아사리등'이라 불리우는 이유는, 전라도 사투리로 잡목이 우거지고 밀집되어 있어 찜찜한 데를 가리켜 그리 부르는데, 이곳이 당시 아사리밭이 있었기 때문이라 한다. 마을 사람들은 이 아사리등을 한자로 기록할 때 ‘어사등'이라고 했다. 어사등이라는 말은 송하동에 바위가 하나 있는데, 이 바위에서 어사가 쉬어갔다 하여 불리워진 이름으로 그리 크지는 않았는데 현재는 매몰되어 보이지 않는다.
그 곳에 묘지를 쓰고, 그 위치를 족보에 적어 넣었는데 그 문중의 족보를 보면 어사등이라 표기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아사리등이라 불렀던 것을 한자로 쓸 때 어사등이라고 썼던 것 같다. 1960년경 아사리등이란 발음이 안 좋고, 그것이 의미하는 것이 좋지 않아 송길 밑에 동네라 하여 ‘송하동'이라 부르게 되었다. 동네 친목계에서 나서서 마을 이름을 고쳤으나 그렇게 불러주지를 않아 앞에서 말했듯, 지금도 사람들은 송하동이라 하면 잘 모르는 이가 많다. 송하동 사람들은 송길마을에서 분가한 지 어언 40여년이 넘었으나 마을의 대동계는 신기, 진목과 더불어 송길마을에서 함께 지낸다. 그 이유는 마을 사람들의 대다수가 송길 본가에서 분가하여 살아오고 있고, 송길에서 하는 거의 모든 행사에 참가하였으며, 행정구역상으로도 마을이 구분되어지기 전에는 이 송하동까지 송길마을에 포함돼 있었기 때문이다. 지금도 송하동 주민들은 자신이 송길마을의 일원으로 생각하고 있다.
마을의 동계는 친목을 목적으로 1958년에 창립되었고, 현재 8명이 참여하고 있으며, 인구는 남자 16명, 여자 17명으로 총 33명이며, 총 면적은 0.12㎢로 전 0.01㎢, 답 0.05㎢, 임야 0.05㎢, 기타 0.01㎢가 있다. 총 가구수는 8호로 모두 농사를 짓고 있다. 주요산업과 주소득원은 쌀농사이며, 특작물로는 수박재배를 하고 있고, 성씨는 풍산홍씨가 6호, 기타 성씨가 2호 거주하고 있다.
원봉마을
원봉마을은 면사무소에서 동쪽으로 2㎞ 떨어진 곳에 위치한다. 마을 동쪽은 다도면과 경계하고, 서쪽은 면소재지가 위치하며, 남쪽은 덕룡산 줄기이고, 북쪽은 건지산 줄기가 있다. 옛날에는 이곳에 고씨들이 살았던 터로, 터가 좋기로 유명하였고, 고장자가 있었다고 하여 ‘고장자 터'라고 불리웠다. 또한 마을에 만호가 살았다고 하여 ‘만갈이'라고도 불린다. 이 만갈이는 서계열 집에서 동남간에 위치하는데 지금은 나무가 우거져 있으며, 이곳에 서당이 있었다고 한다. 마을이 없어진 이유는, 이 서당에서 살인이 났기 때문에 동네에 불을 질러 혁파되었다고 하는데 확실한 이야기는 전해져 오지 않는다. 또한 서계열집 옆에 큰 연못이 있었는데, 어떤 이의 말에 의하면 원래 이곳이 고장자의 집터였는데 서당에서 살인이 나자 그 곳을 파서 연못을 만들었다고 하며, 또 어떤 이는 부자집에서 불을 끄기 위해 항상 연못을 두었다고도 한다. 이 만갈이에 대한 기록은 남평향교 교지에 나와 있다.
마을 입향조는 서학순의 둘째 아들인 서유환(1850~1926)으로 마동에서 살다가 전답이 있는 이곳에 새터를 잡아 분가하였다. 서유환은 글을 잘했다. 호남삼강록을 살펴보면, 어머니가 돌아가시자 단지 수혈하여 3일간 연명케 하였다고 하는데 이로 인해 남평향교에서 상을 받았다. 서유환이 이곳에 집터를 잡게 된 것은 꿈에 산신령이 나타나 이곳에 집을 지으라 하여 목화밭인 그 곳에 가보니, 호랑이가 목화(다랫대)를 뽑아주어 집짓는 것을 도와주었다 한다. 후에 서유환의 5형제가 마을 안에서 분가하였고, 외지인이 땅을 사가지고 하나둘 이사를 오면서 마을이 형성되었다.
마을에 있는 산이름을 두레원(圓)자 봉우리 봉(峰)자를 써서 원봉산이라 불렀는데, 어느 곳에서 보나 둥글다하여 그렇게 불린다. 그 이전에는 옥녀봉이라 하였는데, 옥녀봉은 옥녀산발형이라 하는 명당자리가 있다고 전한다. 한손으로 머리채를 잡고 옥녀가 빗질을 한다하여 그렇게 불렀다 하는데 쑥썩재 밑에 비녀꼭지라 불리는 데가 있고, 소금쟁이 샘이 있는데 이곳은 작은 이불을 의미하며, 통샘은 큰 이불을 뜻한다. 그리고 마년방죽이 거울이라 하며, 소금쟁이 샘은 마년방죽 위쪽 버드나무 아래에 위치하고, 통샘은 마년방죽 바닥안에 있는 샘이다. 원봉이란 이름은 마을산인 원봉산의 이름을 따서 부른 것이다.
마을 동쪽에 류치제라 불리는 방죽이 있는데, 버들류(柳)자, 언덕치(峙)자를 쓰는 고개 이름을 따서 류치제라 불렀다. 류치고개는 덕룡산 줄기에 위치한다. 그 이전에는 하천물이 지나갔는데 이것을 막아 농업용수로 쓰기 위해 32년 전에 국유지 19800㎡에 저수지를 만들어 사용하였다. 마을에 들어서면 과수원과 넓게 펼쳐진 들판을 보고 굉장히 부유한 마을일 것이라 추측하나 마을의 동쪽에 있는 논은 다도면 사람들의 것이고, 남쪽 논만 이 마을 사람들이 경작하고 있다. 마을에 궂은 일이 생기면 다들 제일처럼 발벗고 나서서 도와주는 단결력이 강한 마을이다. 문순임은 시어머니를 잘 봉양하여 지방 유림들이 추천하여 나주 향교에서 주었다.
마을 사람들간의 친목 도모를 위해 동계가 조직되어 있으며, 인구는 남자 67명, 여자 65명으로 총 132명이 살고 있으며, 총 면적은 0.96㎢로, 전 0.12㎢, 답 0.14㎢, 임야 0.05㎢, 기타 0.20㎢이다. 마을의 38가구 중 농가는 36호, 비농가는 2호를 이루고 있으며, 마을 사람들의 주소득원은 쌀농사이며, 무와 수박을 특작물로 재배하고 있다. 마을에는 이천서씨 10호, 김해김씨 3호, 밀양박씨 3호가 거주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