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8) 조선 수군, 칠천량 해전에서 전몰하다
- 작성일
- 2022.11.04 13: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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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북선을 만든 과학자 나대용 장군- 48회 조선 수군, 칠천량 해전에서 전몰하다.
김세곤(호남역사연구원장,‘임진왜란과 호남사람들’저자)
(이 저작물의 저작권은 저자와 사단법인 체암나대용장군기념사업회에 있습니다. 무단 전제 및 복제를 금합니다.)
1597년 2월에 원균은 부임하자마자 이순신이 쓰던 전법을 모두 바꾸고, 이순신에게 신임을 받던 부하들을 모두 내쫓았다. 특히 원균의 소행을 잘 알고 있는 이영남을 미워했다. 더구나 원균은 한산도 운주당에 들어박혀 애첩과 놀면서 부하들과 전혀 소통하지 않았다. (유성룡 지음 김민수 올김, 징비록, p 269-260 )
4월에 원균은 조정에 장계를 올려 수륙 양군의 동시 출병을 청했다.
"정병(精兵)을 추리더라도 30여만 명은 될 수 있습니다. 반드시 4∼5월 사이에 수륙 양군을 대대적으로 출동시켜 한 번 승부를 겨루어야 합니다. (...) 조정에서 속히 선처하소서.”
비변사는 원균의 장계에 대한 의견을 선조에게 아뢰었다.
“우리나라가 30만의 정병(精兵)을 얻을 수 있으니 4∼5월 안에 수륙으로 대거 출동하여 한번 승부를 결단하자고 하였습니다. 그가 적을 치려고 하는 뜻이 매우 결연합니다. (...)하지만 상량(商量)이 부족한 듯합니다. 그리고 30만의 정병은 4∼5월 내에 소집하기가 용이하지 않습니다.
(...) 이 일은 도체찰사(이원익)와 도원수(권율)가 형세의 편부를 자세히 참작하고 사기(事機)의 득실을 잘 요리하여 좋을 대로 처치할 일이지, 멀리 조정에서 통제할 수는 없습니다. " (선조실록 1597년 4월 22일)
30만의 정병을 한두 달 동안에 모집할 수 있다는 원균의 주장은 너무 황당했다.
하지만 원균은 6월 11일에 또다시 조정에 장계를 올려 수륙병진책을 건의했다. 이러자 비변사는 즉시 원균의 의견에 반박하였다.
"원균의 뜻은 육군이 먼저 안골포와 가덕도의 적을 공격해야 한다는 것이고, 도원수와 체찰사의 뜻은 그렇지 않아 수군을 나누어 다대포 등을 왕래시키면서 해양에서 요격하려는 계획입니다. (중략) 대저 군중(軍中)의 일을 제어하는 권한이 체찰사와 도원수에게 있으니, 제장(諸將)으로서는 지휘를 받아서 진퇴하는 것이 마땅한데도 근일 남쪽의 장수들이 조정에 처치해 달라고 자청하는 일이 다반사여서 체통을 유지시키는 뜻이 도무지 없습니다. 위의 사연을 도체찰사와 도원수에게 하유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이에 선조는 비변사가 아뢴 대로 윤허하였다.
(선조실록 1597년 6월 11일)
6월 중순에 도체찰사 이원익은 종사관 남이공을 한산도에 파견시켜 원균에게 출전 명령을 내렸다. 원균은 마지못하여 6월 18일에 안골포(安骨浦)와 가덕도 앞바다로 출전한다.
안골포와 가덕도 전투 경과를 살펴보자. 6월 18일에 원균은 대소 군선 90여 척을 이끌고 한산도를 출발하여 거제도 장문포에서 하룻밤을 보냈다. 다음날인 19일에 조선 수군은 안골포로 진격하였다. 그때 왜군들은 해안에 잠복해 있으면서 암석 사이에 기계를 설치하고 있었다. 여러 장수들이 군사를 거느리고 북을 울리면서 전진했더니 적들도 배를 타고 싸움을 걸어와 서로 응전하였는데, 포탄과 화살이 함께 쏟아져 해안이 진동하였는데도 군사들은 조금도 물러날 뜻이 없었다.
마침내 조선 수군이 적선에 육박하여 많은 왜적을 살상하니, 왜적은 버티지 못하고 간신히 해안 위로 도망하였고 조선 수군은 왜선 2척을 빼앗았다.
이어서 원균은 가덕도로 향하였는데 그곳의 왜군은 이미 섬으로 피신한 후였다. 조선 수군들이 추격하였지만 종적을 찾을 수 없었다. 아군은 별수 없이 추적을 그만두고 돌아오려 할 즈음에 안골포의 왜군들이 또 다시 배를 타고 역습해 왔다. 아군은 다시 돌아서 접전하였다. 왜군들은 조금도 두려워하지 않고 배의 좌우를 협공하며 비처럼 탄환을 쏘아대었다. 아군 역시 방패에 의지하여 화살을 다발로 쏘아대며 응전하였다.
이 전투로 보성군수 안홍국(1555∼1597)이 이마에 철환을 맞아 뇌를 관통하여 그 자리에서 죽었고, 평산 만호 김축이 눈 아래에 탄환을 맞았는데 즉시 뽑아냈다. 1) 결국 원균은 부산까지 진출하지도 못한 채 한산도로 돌아왔다.
이후 원균은 다시 출전하기 싫은 듯 주저하는 모습을 보였다. 그러나 이원익은 6월 29일에 안골포 전투를 조정에 장계하면서 조선 수군이 해로를 계속 왕래하면서 왜군을 교란시켜야 함을 강조하였다.
이후 조정에서는 안골포에 주둔한 왜적의 전투력이 그리 강하지 않으니 계속 공격할 것을 주문하였지만, 원균은 조정의 지시를 묵살한 채 출전을 기피하였다.
7월 초에 새로 건조한 일본전선 600여 척이 부산 앞바다에 정박하였다. 이 전선 가운데 일부가 웅천으로 들어가자 도원수 권율은 원균에게 왜군을 공격하도록 명령했다.
7월 4일에 조선 수군은 다시 출전을 단행하였다. 이 때 통제사 원균은 한산도 본영에 머무르면서 직접 출전하지 않고 경상우수사 배설이 주축이 되어 휘하 수사들이 연합하여 출전하였다. 이 출전엔 전체 수군의 절반 정도인 100여 척이 전투에 나선 듯하다.
조선 수군은 7월 4일 한산도에서 출발하여 5일에 칠천도에 정박하고 6일에 옥포에 들어갔다가 7일 밤에 다대포에 도착하였다. 이 때 다대포에는 적선 8척이 정박하고 있었는데 왜군들이 모두 육지로 도주하여 빈 배만 남아 있었다.
8일에 조선 수군은 왜선 8척을 부수고 군량미 2백여 섬을 빼앗는 전과를 올렸다. 도체찰사 이원익은 매우 고무되어 이런 전과를 조정에 보고하였다.
하지만 조선 수군도 적지 않은 피해를 입었다. 7월 14일자 '난중일기'에는 왜군에게 달라붙은 김해사람 김억의 보고서가 소개되어 있다.
여기에는 ‘초 7일에 왜선 5백여 척이 부산으로 나오고 9일에는 왜선 1천 척이 합세하여 절영도 앞바다에서 우리 수군과 싸웠는데, 우리 전선 5척이 표류하다가 동래 땅 두모포에 도착하였고 또 7척은 간 곳이 없다’고 적혀있다.
7월 15일의 ‘난중일기’에는 ‘중군 이덕필로 부터 조선 수군 20척이 적에게 패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참으로 통탄할 노릇이다. 통제하고 방어할 길이 없으니 지극히 한스럽다’고 적혀 있다.
한편 일본 수군은 7월 9일의 절영도 바깥 바다에서의 전투에서 짐짓 싸우지 않고 시간만 질질 끈 것으로 보인다. 그렇다 보니 조선 수군은 지쳤고 먼바다에서 풍랑마저 세차서 배가 표류하고 만 것이다.
절영도 외양 해전은 7월 22일의 어전회의에서 상호군 노직이 “7월 9일의 전투에서는 군졸들이 겁을 먹고 화살 하나를 제대로 못 쏘았다고 합니다.”라고 표현했을 정도로 사실상 패전과 다름없는 무기력한 해전이었다.
이러자 선조는 원균이 직접 나가서 싸우지 않은 것을 크게 질책했다.
선조는 원균에게 ‘전일과 같이 후퇴하여 적을 놓아준다면 나라에는 법이 있고 나 역시 사사로이 용서하지 않을 것이다.’라고 하유하였다. (선조실록 1597년 7월 10일)
선조는 원균에게 전에 없이 강경한 어조이었다. 그의 질책에는 ‘원균의 실패는 이순신을 끌어내린 선조 자신의 실패를 의미한다’는 속내도 작용했다.
7월 11일에 도원수 권율은 통제사 원균을 사천으로 불러 원균이 직접 출정하지 않은 점 등을 질책했다. 그는 즉시 출전하라면서 원균에게 곤장을 쳤다.
7월 12일 새벽에 원균은 출항하여 칠천량을 거쳐 13일에 옥포에 도착하였고, 14일에 부산에 이르렀다. 부산 앞바다에서 조선 함대는 왜선들과 마주쳤다. 원균은 왜선을 좇았다. 그런데 왜군은 접전을 회피한 채 도주하였다. 원균은 이들을 추격하다가 전함이 사방으로 흩어졌다. 전라우수사 이억기의 함대 7척은 물길을 제어할 수가 없어 표류하였다. 원균은 함대를 겨우 수습하여 15일 아침에 가덕도에 도착했다.
지친 수군들은 물을 구하려고 섬에 상륙하였다. 하지만 매복한 일본 육군에 의해 조선 수군 400여 명이 살해당했다. 원균은 급히 배를 끌고 거제도 북단 영등포로 물러났다. 그런데 이곳에도 왜군이 매복하고 있었다. 15일 오후에 원균은 풍랑을 무릅쓰고 함대를 칠천도(당시 이름은 온라도)로 이동시켜 밤 9시경에 칠천도에 도착했다.
조선 함대의 움직임을 정확히 파악한 왜군은 함선 500여 척을 칠천도에 배치시켰다. 왜군은 도도 다카도라, 가토 요시야키, 와키사카 야스나루가 이끄는 정예 수군이었다.
원균은 밤늦게 작전회의를 열었다. 원균은 왜군을 당해낼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음을 한탄하면서 죽기를 각오하고 싸울 것을 강조하였다.
이에 대해 경상우수사 배설이 팔을 걷어붙이며 싸움을 회피하는 전략이 타당하다고 말했다. 원균은 노하여 “죽고 나면 그만이니 너는 많은 말을 말라”고 고함쳤다. 이에 배설은 자기 배로 돌아가서 은밀히 소속 장수와 더불어 퇴각을 도모했다.
이날 밤은 보름날이었는데 큰 비가 내렸다. 원균은 전선 4척으로 왜군을 경계하도록 하였다. 일본 수군은 가만히 왜선 10여 척으로 우리 배 사이를 뚫고 형세를 정탐하였다. 밤 10시를 넘어서 왜선 5∼6척이 불시에 내습하여 우리 배에 불을 질렀다. 우리 배 4척이 모두 불타고 침몰되었다.
원균은 크게 놀라 북을 치고 바라를 울리고 화전(火箭)을 쏘아 왜군의 내침을 알리었고 조선 수군들은 겨우 진을 칠 수 있었다.
한마디로 원균은 전투에서 가장 중요한 ‘경계(警戒)’에 실패한 것이다. ‘작전에 실패한 지휘관은 용서할 수 있어도 경계에 실패한 지휘관은 용서할 수 없다’는 말이 다시금 생각난다.
야간 기습에 성공한 왜군은 7월 16일 새벽이 되자 500여 척의 왜선으로 조선 수군을 서너 겹으로 에워싸고 총공격을 하였다. 조선 수군도 닻을 내린 가운데 응전하였으나 중과부적이었다. 이어서 왜군은 일본 배 5-6대로 조선 배 1대를 포위하고 조선 배에 올라와 백병전을 벌였다. 백병전이 벌어지자 원균은 후퇴하지 못하도록 수군을 독려하였으나 조선 수군은 계속 밀렸다.
마침내 조선 수군은 지탱하지 못하고 흩어져 달아나기 시작하였다. 맨 먼저 배설이 자기 휘하의 전선 12척을 이끌고 도망쳤고, 전라우수사 이억기와 충청수사 최호는 고성 방면으로, 원균의 전라좌수군은 추원포 쪽으로 퇴각하였다. 전라우수사 이억기와 충청수사 최호는 끝까지 싸우다가 적진에 고립되자 스스로 물에 빠져 죽었다.
한편 원균이 도망친 추원포는 서쪽으로의 뱃길이 막힌 육지였다. 이러자 원균은 배를 버리고 육지로 도망갔다. 휘하의 전라좌수군들도 판옥선을 버려둔 채 도망쳤다. 육지로 도망친 조선 수군은 미리 기다리고 있던 시마즈 요시히로 군사에게 무참히 살육 당했다. 원균도 왜군 칼날에 전사했다.
조경남은 '난중잡록'에서 원균의 죽음에 대하여 기록했다.
“원균은 체구가 비대하고 건장하여 한 끼에 밥 한 말, 생선 50마리, 닭과 꿩 3∼4마리를 먹었다. 평상시에도 배가 무거워 행보를 잘하지 못하였는데, 이때에 이르러 싸움에 패하고는 앉은 채 죽음을 당하였다.”
(난중잡록 1597년 7월 16일)
이렇게 조선 수군은 궤멸되었다. 조선 전선 160여척이 분멸되었고, 거북선도 바다에 수장되었다. 한산도도 일본 수군에게 넘어갔다.
주1) 6월 25일에 이순신은 보성군수 안홍국의 전사 소식을 듣고 일기에 적었다.
“저녁에 종 경이 한산도에서 돌아왔는데, 보성군수 안홍국이 탄환에 맞아 죽었다는 소식을 전해 주었다. 놀랍고도 슬프기 짝이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