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 이치와 웅치 그리고 금산 전투
- 작성일
- 2022.10.12 10: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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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북선을 만든 과학자 나대용 장군- 31회 이치와 웅치 그리고 금산 전투
김세곤(호남역사연구원장,‘임진왜란과 호남사람들’저자)
(이 저작물의 저작권은 저자와 사단법인 체암나대용장군기념사업회에 있습니다. 무단전제 및 복제를 금합니다.)
# 이치전투
1592년 7월 초에 고바야카와의 제6군 1만 6천 명은 전라도 점령을 시도했다. 왜군은 군대를 둘로 나누어 남군은 진안의 웅치(熊峙)를 넘고, 북군은 금산의 이치(梨峙)를 넘어 전주에서 합류키로 했다. 한편 조선군은 김제군수 정담, 나주판관 이복남, 의병장 황박이 웅치를 지키고, 광주목사 권율과 동복현감 황진이 이치에 버티고 있었다.
한산해전이 일어난 7월 8일에 이치와 웅치에서 전투가 동시에 일어났다. 권율과 황진이 지휘하는 1천 5백 명의 군대는 고바야카와가 이끄는 수천 명의 왜군을 이치 전투에서 물리쳤다.
6월 6일에 전라·경상·충청 3도 근왕군 5만 명이 경기도 용인 전투에서 와키자카 야스하루가 이끄는 1,600명의 왜군에게 어이없이 패배했다. 중위장으로 참전했다가 광주로 돌아온 광주목사 권율은 의병 모집 격문을 발표하여 1천 5백 명의 의병을 모았다.
이후 권율은 이치에서 동복 현감 황진의 부대와 합세했다. 7월 8일 새벽에 고바야카와가 이끄는 왜군 수천 명이 공격을 개시했다. 왜적은 조총을 쏘아대고 칼과 창을 번쩍이며 산 정상으로 기어 올라왔다. 아군은 적을 철저히 막았다. 특히 선봉장 황진의 활 솜씨는 백발백중이었다. 이러자 왜적은 패하여 물러났다. 그런데 황진이 물러나는 왜적의 탄환에 맞아 쓰러졌고, 왜적이 다시 정상으로 기어올랐다.
총사령관 권율은 군사들을 직접 독려해 싸웠다. 밀고 밀리는 일이 여러 번 있었으나 왜적은 조선군의 사기를 꺾지는 못하였고, 금산 쪽으로 후퇴하고 말았다. 왜적이 버리고 간 무기와 시체는 이치 골짜기에 가득했다. 조선군의 승리였다. 완패한 일본은 이치전투를 임진왜란 3대 전투 중 첫째로 쳤다. (선조수정실록 1592년 7월 1일).
한편 17세의 의병 정충신은 승전보를 의주 행재소에 알렸다. 권율의 사위 이항복은 선조에게 낭보를 전했고 권율은 나주목사로, 황진은 익산군수로 승진했다. 이항복 밑에서 일한 정충신은 무과에 급제해 1624년에는 금남군(錦南君)에 봉해졌다. 광주 금남로는 정충신을 기리는 도로명이다.
# 웅치 전투
이치 전투가 일어난 같은 날(7월 8일)에 김제군수 정담, 나주판관 이복남의 관군과 의병장 황박이 이끄는 혼성군 1천 명이 웅치에서 안코쿠지 에케이의 왜군 수천 명과 싸웠다. 이들은 목책을 세워 산길을 막고 군사들을 격려하여 종일 싸웠다. 이 싸움에서 정담 ·이복남 ·황박 등은 적병을 수없이 활로 쏘아 죽이지 적들이 물러섰다. 그런데 날이 저물고 화살마저 떨어졌을 때 왜군들이 다시 쳐들어왔다. 이러자 이복남과 황박의 군사는 퇴각하였고, 김제군수 정담은 끝까지 싸우다가 전사했다.
(웅치 전투는 영화 ‘ 한산- 용의 출현’에 나온다.)
다음 날인 7월 9일에 안코쿠지는 전주 안덕원까지 진출했다. 하지만 퇴각한 이복남이 포진하고 있었고, 전주성에는 전 전적(前 典籍) 이정란이 낮에는 깃발을 잔뜩 세우고 밤에는 봉화를 올려 군사가 많은 것처럼 위장했다. 더구나 합류키로 한 고바야카와 부대가 나타나지 않아 왜군은 철수하고 말았다.
그런데 왜군은 물러나면서 웅치에서 죽은 조선군 시체를 모아 길가에 묻고, 큰 무덤을 몇 개 만들었다. 그리고 ‘조선국의 충성스럽고 의로운 자들에게 조의를 표한다(吊朝鮮國忠肝義膽)’라고 쓴 팻말을 세웠다. 적군이지만 치열하게 싸운 정신을 가상히 여긴 것이다.(유성룡 지음·이민수 옮김, 징비록, p 165-166)
# 금산전투
6월 14일에 전주에 도착한 고경명은 관군이 임진강에서 패했다는 소식을 접했다. 이러자 양대박은 추가 모병을 위해 향리 남원으로 떠나고, 본진은 전주에서 군사훈련을 한다.
양대박(1543∼1592)은 남원·임실·순창 등에서 1천명의 의병을 모았다. 남원부사 윤안성도 지원해 주었다. 6월 25일 새벽에 양대박 의병은 임실에서 전주로 향했다. 그런데 척후병으로부터 왜군 수천명이 운암 계곡에 진을 치고 있다는 급보를 받았다. 왜군은 전주로 향하는 6군 고바야까와 부대였다. 양대박은 운암 계곡에서 아침 식사 준비 중인 왜군을 급습했다. 왜군은 큰 사상자를 내고 도망치고 말았다. 고경명 의병 최초의 승리였다. 안타깝게도 양대박은 7월 초에 병사(病死)했다.
6월 22일에 고경명 의병은 전주에서 북으로 전진했다. 6월 24일에 고경명은 말을 타고 가면서 격문을 썼다. 소위 마상격문(馬上檄文)이다.
“옷소매를 떨치고 단상에 올라 눈물을 뿌리고 군중과 맹세하니, 곰을 잡고 범을 넘어뜨릴 장사는 천둥 울리듯 바람 치듯 달려오고, 수레를 뛰어오르고 관문을 넘어가는 무리는 구름 모이듯 비 쏟듯 한다”는 내용의 격문은 선비들의 심금을 울렸다.
6월 27일에 의병은 충청도 은진까지 진군했다. 이때 황간·영동의 왜적들이 금산으로 넘어 들어왔다는 소문이 들렸다. 막하의 장수들이 되돌아가서 전라도부터 구하자고 청하자 고경명은 군사를 돌려 진산으로 들어갔다.
7월 9일에 6천 명의 고경명 의병은 방어사 곽영의 관군 1천 명과 함께 금산 성문 밖 10리 지점에 나가 진을 치고 작전을 개시했다. 고경명은 정예기병 수백 명을 내보내어 적을 공격했는데, 군관 김정욱이 말에서 떨어져 달아나자 우리 군사가 일시 후퇴했다.
석양 무렵에 왜군이 성안으로 들어가므로 고경명은 재인(才人) 30여명을 시켜 성문을 부수게 하는 한편 진천뢰를 쏘아 성안의 창고를 불태웠다.
날이 저물자, 양쪽은 각기 군사를 거두었고, 의병과 관군은 내일 같이 싸우기로 약속했다. 이때 고경명의 장남 고종후가 “오늘 우리 군사가 승리했으니 이 승리한 형세를 가지고 군사를 온전히 보전해 돌아갔다가 기회를 봐서 다시 나오는 것이 좋겠습니다. 만약 왜군과 진지를 마주 대하여 들판에서 잔다면 밤중에 습격을 당할 우려가 있습니다”라고 했다. 이에 고경명은 “네가 부자간의 정으로 내가 죽을까 걱정하느냐? 나는 나라를 위해 한번 죽을 따름이다”라고 말하므로, 고종후는 다시 말하지 못했다.
7월 10일 동틀 녘에 관군은 북문을, 의병은 서문을 공격했다. 그런데 왜장 고바야카와는 관군이 약한 것을 미리 알고 관군을 총공격했다. 선봉장인 영암군수 김성헌이 말을 채찍질해 도망치자 관군이 일시에 무너졌다.
고경명은 의병만이라도 적과 대항코자 하였으나 몇 사람이 ‘방어사의 군사가 무너졌다’고 부르짖자 의병도 동요해 도망가 버렸다.
이때 고경명은 말이 달아나서 말에서 떨어졌고, 종사관 안영이 그의 말을 주어 다시 타게 하고 안영은 걸어서 호위하며 후퇴했다. 유팽로는 먼저 탈출했는데 종에게 ‘대장은 모면하였는가?’라고 물으니 아직 못 나왔다고 하자, 급히 말을 채찍질해 어지러운 군사들 속으로 들어갔다.
고경명이 돌아보며 ‘나는 죽음을 면하지 못할 것이니 그대는 말을 달려 빠져나가라’고 했지만 유팽로는 ‘어떻게 차마 대장을 버리고 살기를 구하겠는가?’라고 말하고 안영과 함께 고경명의 몸을 감싼 채 전사했다. 고경명의 차남 고인후도 싸우다가 죽었다(선조수정 실록 1592년 7월 1일).
# 선조, 김천일의 장계를 가져온 곽현과 양산숙을 인견하다.
7월 24일에 의주에 머물고 있는 선조는 창의사 김천일의 장계를 가져온 양산숙과 곽현을 인견하여 전라도 의병 상황을 물었다.
창의사(倡義使) 김천일은 그의 막하(幕下) 군사 양산숙·곽현(郭賢) 등에게 장계를 주어 행재소로 보냈다. 선조는 곽현·양산숙 등을 인견하였다.
선조 : "그대들은 어느 곳으로 왔는가?"
곽현 : "풍천(豊川)에서 삼화(三和) 큰 나루를 건너서 왔습니다."
선조 : "그대들은 험한 도로를 애써서 왔는데 앞으로 어떻게 돌아가겠는가?"
양산숙과 곽현(울면서) : "소신들이 어려서부터 문(文)을 업으로 삼았으나 어느 한 과거에도 합격하지 못하여 평소에는 용안(龍顔)을 뵙지 못하였는데, 이제 난리 가운데에서 모시게 되었으니 신들은 만 번 죽어도 아깝지 않습니다.“
선조 :"그대들의 의병이 1천 명이라 하니 어찌 그렇게 적은가?"
곽현 : "신들이 여기에 온 뒤에 많은 군사가 모였을 것입니다. 또 방어사(防禦使)·조방장(助肪將) 등 정령(政令)이 여러 곳에서 나오는 까닭에 수령들이 따를 바를 모르고 있고, 장수된 자는 재물을 빼앗고 못살게 하는 것으로 일을 삼기 때문에 군정(軍情)이 이반되어 있습니다. 이광(李洸)은 죽어도 남은 죄가 있고, 권율은 수령의 재주는 있으나 방백(方伯)의 지략은 없습니다."
선조: "이런 때에 사람을 얻기가 어려운 까닭에 임명한 것이다. 왜적이 전라도는 침범하지 않았는데 무엇을 두려워하여 그러는 것인가?"
곽현 : "이는 천행입니다. 그러나 왜적이 힘을 합하여 공격할까 두렵습니다. 또 곽재우는 선비로서 군사를 일으켰는데, 근왕(勤王)하려는 뜻은 있으나 반드시 공(功)을 바란다는 혐의를 피하기 위하여 감히 오지 않는 것입니다. 재우의 공이 적지 않으니 글을 내려 권장하소서."
선조 : "그대의 장수에게 말하여 경성을 수복하고 나를 맞이하여 돌아가도록 하게 하라."
이러자 곽현, 양산숙이 그칠줄 모르고 눈물을 흘렸다. 상이 술을 내리고 또 약봉(藥封)도 하사하였다. (선조실록 1592년 7월 24일 4번째 기사)
한편 고경명 순절 이후 전라도 곳곳에서 의병이 일어났다. 화순에서 최경회의 전라우의병, 보성에서 박광전·임계영의 전라좌의병, 장성에서 김경수의 장성남문 의병, 영광 심우신, 남원 변사정, 태인 민여운 등이 일어났고, 고종후는 복수의병장이 됐다.
# 조헌의 청주성 수복과 금산 전투 순절
조헌은 옥천에서 의병 1,600명을 모았다. 8월 1일에 그는 서산대사의 제자인 의승(義僧) 영규(靈圭)의 1천명, 방어사 이옥의 관군 5백명과 함께 청주성을 공격했다.
그런데 공격 중에 갑자기 소나기가 쏟아져 천지가 캄캄해졌다. 의병들이 추워서 떨었다. 조헌은 ‘옛말에 성공하고 실패하는 것은 하늘에 달렸다고 했는데 정말 그런 것인가?’라고 탄식하면서 진(陣)을 퇴각시켰다. 그런데 폭우로 왜군도 조총이 무력해졌다. 이날 밤 왜군은 슬그머니 달아났다.
조헌은 왜적이 전라도를 침범한다는 소식을 듣고 금산으로 향했다. 그런데 관군의 방해로 의병이 흩어지고 7백 명만 남게 됐다. 그는 전라감사 권율에게 8월 18일에 금산성을 협공하자고 알린 후, 의승 영규가 이끄는 의승 6백명과 합세했다.
8월 17일 저녁에 조헌은 왜적이 점거하고 있는 금산성 동쪽 10리 밖까지 진출했다. 하지만 기다리던 전라도 관군은 오지 않았다. 권율이 공격을 연기하자고 편지를 보냈으나, 조헌은 미처 받지 못했다. 이때 조헌의 부하들은 왜적과 대결하는 것은 승산이 없으니 관군을 기다리자고 주장했고, 영규 대사도 단독으로 싸우면 질 것이 뻔하다고 반대했다. 조헌은 ‘임금이 변을 당하면 신하는 죽는 것이 당연하니 나는 한번 죽는다는 것밖엔 생각할 수 없다’고 호소했다. 이러자 이들은 단독으로라도 싸우기로 결의했다.
8월 18일 새벽, 고바야카와가 이끄는 왜적은 3대로 나누어 번갈아 가면서 공격해 왔다. 조헌은 들판에서 왜군의 세 번 공격을 세 번 다 무찔렀다. 의병들은 상처를 입고도 다시 일어나 화살이 다하면 칼과 창을 잡고, 칼과 창이 부러지면 돌로 치는 처참한 육박전을 전개했다.
하지만 해 질 무렵에 의병은 왜적의 총공격에 무너졌다. 부하들이 조헌에게 탈출을 권유하였으나, ‘이곳이 내가 죽을 곳이요. 의(義)라는 글자에 부끄럽지 않아야 한다’고 하면서 싸우다가 죽었다. 영규 대사도 ‘생사(生死)의 명(命)은 재천(在天)이다. 다만 의를 좇아 죽을 뿐이다’라고 외치면서 왜적과 싸우다 죽었다.
의병과 승병 1,300명은 마지막 순간까지 싸우다가 모두 순절했다. 참봉 이광륜, 한응성, 길안수, 김형진, 조헌의 아들 조완기도 전사했다.
왜적은 조헌 등의 군사를 패배시키기는 하였지만 죽거나 다친 군사가 많았고 관군이 잇따라 공격할 것을 우려해 밤에 도망했다. 그리하여 전라도가 다시 온전하게 됐다(선조수정실록 1592년 8월 1일 15번째 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