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 한산대첩
- 작성일
- 2022.10.05 11: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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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북선을 만든 과학자 나대용 장군- 27회 한산대첩
김세곤 (호남역사연구원장,‘임진왜란과 호남사람들’저자)
(이 저작물의 저작권은 저자와 사단법인 체암나대용장군기념사업회에 있습니다. 무단전제 및 복제를 금합니다.)
1592년 7월 8일의 한산대첩은 세계 해전사에 길이 남은 해전이다. 이 해전은 일본 측 연구자의 표현대로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조선정벌에 대한 사망 선고가 내려진 해전”이었다.
그러면 한산대첩에 대하여 살펴보자. 1)
6월 10일에 이순신이 전라좌수영 본영에 도착했을 때 그에게는 전라관찰사 이광의 서장이 기다리고 있었다. 이 서장은 6월 3일에 수원에서 발송되어 10일 접수하였는데 그 내용은 이렇다.
“ 5월 22일 작성된 좌부승지의 서장 안에 ‘경상우수사와 함께 상의하여 왜선을 남김없이 격파하라. 전라우수사에게는 병선을 정비하여 계속 지원하라고 명령하였다’는 조정의 지시가 있으니 서장의 내용을 상고하여 경상우수사 및 전라우수사와 함께 약속하고 전례에 따라 시행함이 좋을 것이다.”
이 시점에 조정은 원균에게도 선전관 원전을 보내서 이순신과 함께 왜선을 공격할 것을 명령했다. (김영진, p 127)
6월 11일에 선조가 평양을 빠져나가 의주로 향하고 14일에 고니시가 평양성을 점령했다. 이 때 고니시는 선조를 위협하는 편지를 보냈다.
“수군 10만여명이 또 서해로부터 오고 있는데 대왕의 행차는 장차 어디로 갈 것이요?”(유성룡 지음·이민수 옮김,징비록, p161)
6월 14일에 이순신은 조정에 보낼 장계 2통을 썼다. 하나는 조정에 보낼 장계, 또 하나는 군관에게 길에 던져 놓도록 한 거짓 장계로 일본군이 주워서 보게 하기 위함이었다. 거짓 장계는 조카 이분이 지은 ‘이순신 행록 1592년 6월 14일’에 나온다.(박기봉 편역, 충무공 이순신 전서 4권, 비봉출판사, 2006, p 329-330)
“신은 이제 전선 수만 척을 이끌고 비장군(飛將軍) 모(某)를 선봉으로 삼아 곧바로 일본을 치기 위해 모월모일에 출발하려 하나이다.”
7번의 해전에서 연승한 이순신도 일본 본토를 공격하겠다고 위협한 것이다.
이후 이순신은 전쟁 상황을 예의 주시하면서 재출전 준비를 철저히 하고 있었다. 감조전선출납군병군관(監造戰船出納軍兵軍官 전선 건조와 수리를 감독하고, 군병 출납을 담당하는 군관)인 나대용도 다리 부상에도 불구하고 전선 정비과 병력 확충에 매진했다.
한편 옥포·합포 ·적진포 ·사천·당포·당항포·율포의 일곱 번 해전에서 일본 수군이 연거푸 패하였다는 소식을 들은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크게 노했다. 그는 긴급 작전회의를 소집했다. 이 회의에서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참모들에게 승전한 조선 장수가 누구인지 물었으나, 그가 누구인지 자세히 아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6월 23일에 히데요시는 와키자카 야스하루(脇坂安治)에게 편지를 보내 용인 전투의 승리를 칭찬함과 동시에 조선 수군을 무찔러 주길 기대했다.
“지난 7일과 19일의 편지는 오늘(23일) 오후 6시에 받아보았다. 김해 강구의 적 함대를 치기 위해서 서울로부터 내려왔다니 잘한 일이다. 구키, 가토 두 사람을 합쳐 세 사람이 의논하여 실수 없이 행동하되 시급히 적을 섬멸하라 ... ”(김성한, 7년 전쟁 3, p 189)
이를 보면 외키자카는 6월 6일 용인전투에 승리한 즉시 히데요시에게 편지를 보냈고, 6월 14일에 부산포에 도착하여 또 편지를 보낸 것으로 보인다.
7월 들어 이순신은 왜군이 수륙합동으로 전라도를 공격한다는 정보를 입수했다. 일본 육군이 전라도 금산(지금은 충남 금산군)까지 진출했고, 바다에서도 가덕도와 거제도 부근에서 적선이 10여 척에서 30여 척까지 떼를 지어 출몰한다는 소식이 들어왔다.
이에 이순신은 전라도 해역을 넘보는 일본 수군을 치려고 3차 출전을 결심한다. 7월 4일에 이억기의 전라우수군이 전라좌수영에 도착했다. 5일에는 전라좌우수군 합동작전을 논의하고, 6일 새벽에 전라좌우도 연합함대는 출전하여 남해의 노량에서 경상우수사 원균과 합류했다. 원균은 파손된 배를 수리하여 전선 7척을 거느리고 왔다. 2)
당시에 조선 수군 연합함대는 총 58척이었는데 여기에 거북선도 두 척 있었다. (전라좌수군 판옥선 24척 거북선 2척, 전라우수군 25척, 경상우수군 7척)
조선 연합 함대는 진주땅 창신도(昌新島 남해군 창선면 창선도)에 정박하여 하룻밤을 지내고, 7일에는 강풍으로 항해가 어려운 가운데 고성땅 당포에 이르렀다. 날이 저물어 야영준비를 하며 나무하고 물긷는 일을 하고 있을 때, 파난하여 산으로 올랐던 그 섬(미륵도)의 목동(왕실 목장에서 말을 기르는 사람) 김천손이 조선 함대를 바라보고 급히 달려와 말했다.
"왜선 70여척이 오늘 오후 2시쯤 영등포 앞바다를 지나 거제와 고성의 경계인 견내량(見乃梁)에 이르러 머물고 있습니다.”
이순신은 여러 장수들에게 다시금 지시하고 7월 8일 이른 아침에 적선이 머물고 있는 곳으로 배를 띄웠다. 한 바다에 이르러 바라보니, 일본의 척후선으로 보이는 대선 1척과 중선 1척이 조선함대를 발견하고 일본 진치고 있는 곳으로 들어갔다. 조선함대가 추격하니 과연 김천손의 제보대로 일본 함대 73척(대선 36척, 중선 24척, 소선 13척)이 대열을 벌여서 머무르고 있었다. 이 함대는 와키자카 야스하루가 단독 출전한 함대였다. 용인전투에서 전공을 세운 와키자카는 수전에서도 공로를 독차지하려는 공명심에 빠져, 쿠기와 가토를 놔두고 홀로 김해를 출발하여 거제도 북단으로 이동한 것이다.
그런데 견내량은 지형이 매우 좁고 암초가 많아 판옥선이 서로 부딪치게 될 것 같아 싸움하기가 곤란한 곳이었다. (경남 거제시 사등면 덕호리와 통영시 용남면 장평리를 잇는 거제대교 아래에 위치한 견내량은 길이가 약 3km, 폭은 약 180m에서 400m까지, 수심은 2.8 미터 정도 된다.) 그래서 이순신은 한산도 바다 한가운데로 끌어내어 섬멸할 계책을 세웠다.
1592년 7월 1일의 ‘선조수정실록’에는 이순신과 원균의 견해 차이가 실려 있다.
“원균이 앞서의 승리에 자신하여 곧장 대적하여 격파하려 하자 이순신이 말하기를 ‘이곳은 항구가 좁고 얕아 작전할 수가 없으니 넓은 바다로 유인해 내어 격파해야 한다.’ 하였다. 그러나 원균이 듣지 않자, 이순신이 말하기를 ‘공은 병법(兵法)을 이처럼 모른단 말인가.’ 하고 여러 장수들에게 영(令)을 내려 거짓 패하여 물러나는 척하니, 적이 과연 기세를 몰아 추격하였다.”
한산도는 사방으로 헤엄쳐 나갈 길이 없고, 적이 비록 뭍으로 오르더라도 틀림없이 굶어 죽게 될 것이므로 먼저 판옥선 대여섯 척으로 선봉으로 나온 적선을 뒤쫓아서 엄격(엄격)할 기세를 보이게 하니, 여러 배의 적선들이 일시에 돛을 올려 쫓아 나왔다. 조선 배가 거짓으로 물러나면서 돌아 나오자, 왜적들은 줄곧 뒤쫓아 나왔다.
일본 수군이 바다 한 가운데로 나오자, 이순신은 여러 장수들에게 명령하여 '학익진(鶴翼陣 학의 날개가 깃을 펴는 모양의 진법)'을 펼쳐 일시에 진격하여 각각 지자 ·현자·승자 등의 총통들을 쏘아서 먼저 두세 척을 깨뜨렸다. 이러자 왜군들은 사기가 꺾이어 도망치려 하였다.
여러 장수와 군사들이 승리한 기세로 흥분하며 앞다투어 돌진하면서, 화살과
화전을 잇달아 쏘아대니, 그 형세가 마치 바람 같고 우레 같아, 적의 배를 불태우고 적을 사살하기를 일시에 다 해치워 버렸다.
순천부사 권준이 제 몸을 잊고 돌진하여 먼저 왜의 층각대선 1척을 쳐부수어 바다 가운데서 온전히 사로잡아 왜장을 비롯하여 머리 10급을 베고 우리나라 남자 1명을 산 채로 빼앗았다.
광양현감 어영담도 먼저 돌진하여 왜의 층각대선 1척을 쳐부수어 바다 가운데서 온전히 잡아 왜장을 쏘아 맞혀서 이순신의 배로 묶어 왔는데, 문초하기 전에 화살을 맞은 것이 중상이고 말이 통하지 않으므로 즉시 목을 베었으며, 다른 왜적을 비롯하여 머리 12급을 베고, 우리나라 사람 1명을 산 채로 빼앗았다.
사도첨사 김완은 왜 대선 1척을 쳐부수어 바다 가운데서 온전히 잡아 왜장을 비롯하여 16급을 베었다. 흥양현감 배흥립이 왜 대선 1척을 쳐부수어 바다 가운데서 온전히 사로잡아 머리 8급을 베고 또 많이 익사시켰다.
방답첨사 이순신은 왜 대선 1척을 쳐부수어 바다 가운데서 온전히 잡아 머리 4급을 베었는데, 다만 사살하기에만 힘쓰고 머리를 베는 일에는 힘쓰지 않았을 뿐 아니라 또 두 척을 쫓아가서 깨뜨리고 일시에 불태웠다.
좌(귀선)돌격장 급제 이기남은 왜 대선 1척을 쳐부수어 바다 가운데서 잡아 머리 급을 베었다. 좌별도장이며 본영 군관인 전 만호 윤사공과 가안책 등은 층각선 두 척을 바다 가운데서 온전히 사로잡아 머리 6급을 베었다.
낙안군수 신호는 왜 대선 한 척을 바다 가운데서 온전히 사로잡아 머리 7 급을 베었다. 녹도만호 정운은 층각대선 두 척을 총통으로 뚫자 여러 전선이 협공하여 불태우고 머리 3급을 베고 우리나라 사람 2명을 산 채로 빼앗았다.
여도권관 김인영은 왜 대선 1척을 쳐부수어 바다 가운데서 온전히 사로잡아 머리 3급을 베었다. 발포만호 황정록은 층각선 1척을 여러 전선과 협공하여 힘을 모아 깨트리고 머리 2급을 베었다.
우별도장 전 만호 송응민은 머리 2급을 베었고, 흥양통장 전 현감 최천보는 머리 3급을 베었으며, 참퇴장 전 첨사 이응화는 머리 1급을 베었다.
우(귀선)돌격장 급제 박이량은 머리 1급을 베었고, 이순신의 타고 있는 대장선 배에서는 머리 5급을 베었다. 유군일령장(遊軍一領將) 손윤문은 왜 소선 두 척에 총을 쏘고 산 위에까지 추격하였고, 오령장(五領將) 전 봉사 최도전은 우리나라 소년 3명을 산 채로 빼앗았다.
그 나머지 왜 대선 20척, 중선 17척, 소선 5척 등은 좌·우도의 여러 장수들이 힘을 모아 불살라 깨뜨렸으며, 화살을 맞고 물에 빠져 죽은 자는 그 수를 헤아릴 수가 없었다. 3)
그리고 왜인 400여 명은 형세가 아주 불리하고 힘이 다 되어 스스로 도망가기 어려운 줄 알고, 한산도에서 배를 버리고 육지로 올라갔다. 4)
그 나머지 대선 1척·중선 7척·소선 6척, 총 14척은 접전할 때 뒤처져 있다가 멀리서 배를 불태우며 목베어 죽이는 꼴을 바라보고는 노를 재촉하여 도망해 버렸으나, 종일 접전한 탓으로 장수와 군사들이 피곤하였고 날도 황혼이 짙어 둑어둑하여 끝까지 추격할 수 없어서 조선 수군은 견내량 내항에서 진을 치고 밤을 지냈다.
주1) 한산대첩 상황은 이순신이 1592년 7월 15일에 조정에 올린‘견내량파왜병장’에 의존하였다. (이순신 지음·조성도 역,임진장초, p 65-78)
주2) 원균의 경상우수군은 1차 출전 판옥선 4척, 2차출전 3척, 3차 출전 7척이었다.
주3) 좌귀선 돌격장 이기남, 우귀선 돌격장 박이량을 보건대, 한산 해전에 출전한 거북선은 2척이었다. 그런데 일본 측은 고려선전기(高麗船 戰記)에 “맹선(메구라부네) 3척은 철포로 공격하기 어렵다”고 기록했다. (기타지마 만지, p 115) 즉 거북선을 맹선(눈먼 배)이라 칭하면서 3척이 한산해전에 투입되었다고 보았다. 한편 ‘한산-용의 출현’영화에는 거북선 3척이 갑자기 등장한다.
주4) 승리를 장담하던 왜장 와키자카 야스하루(1554~1626)는 한산도에 고립되었던 패잔병 중 하나로 수일간 미역으로 연명하다가 겨우 달아났다. 그러나 그의 부장인 해적 출신 와키자카 사베에와 와타나베 시치에몬은 전사했고, 부관 마나베 사마노조는 한산도에 상륙하였다가 할복자살하였다.
(신호영, p 129-130)
(참고문헌 )
o 기타지마 만지,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조선침략, 경인문화사, 2008
o 김성한, 7년 전쟁 3권, 산천재, 2012
o 김영진, 임진왜란 2년 전쟁 12년 논쟁, 성균관대학교 출판부, 2021
o 사토 데스타로 외 지음 ·김해경 옮김, 이순신 홀로 조선을 구하다, 가가날, 2019
o 신호영, 이순신의 전쟁, 돋을새김, 2012
o 유성룡 지음·이민수 옮김, 징비록, 을유문화사, 2014
o 이순신 지음·조성도 역, 임진장초, 연경문화사, 199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