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 선조, 요동 망명을 꾀하다.
- 작성일
- 2022.10.01 16: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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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북선을 만든 과학자 나대용 장군-26회 선조, 요동 망명을 꾀하다.
김세곤(호남역사연구원장,‘임진왜란과 호남사람들’저자)
(이 저작물의 저작권은 저자와 사단법인 체암나대용장군기념사업회에 있습니다. 무단전제 및 복제를 금합니다.)
1592년 6월 중순, 2차 출전에서 돌아온 이순신과 나대용은 사천 전투에서 부상 당한 치료를 하면서 전황을 예의주시했다. 그러면 임진왜란 전황(戰況)을 살펴보자.
# 왜군의 서울 입성
5월 3일에 고니시 유키나가가 서울에 무혈입성했다. 4일에 가토 기요마사도 서울에 들어왔다. 가토는 즉시 도요토미 히데요시에게 서울 함락 보고를 하였다. 5월 16일에 가토로부터 서울 함락과 조선 국왕의 도망소식을 접한 히데요시는 9개조에 걸친 지시를 내렸다. 여기에는 조선 국왕을 수색하여 찾아낼 것, 조선 농민에게 군량을 징발하여 명나라 원정 준비를 든든하게 할 것, 서울에 히데요시의 거처를 준비할 것 등이 포함되어 있었다.
이에 따라 왜장들은 조선 전역을 재배치하고 징발한 군량을 정하였다.
제1군 평안도 고니시 유키나가 179만석
제2군 함경도 가토 기요마사 207만석
제3군 황해도 구로다 나가마사 73만석
제4군 강원도 모리 요시나리 40만석
제5군 충청도 후쿠시마 마사노리등 99만석
제6군 전라도 고바야카와 다카카게 227만석
제7군 경상도 모리 데루모토 288만석
제8군 서울과 경기 우키다 히데이에 78만석
총계 8,191만석
(기타지마 만지, p 58)
# 왜군, 평양 점령
5월 10일에 고니시와 가토의 군대는 임진강 변에 이르렀다. 임진강에는 김명원과 이양원 그리고 한응인의 군대 1만 3천 명이 대치중이었다. 그런데 가토의 군대는 짐짓 철수하는 척 했다. 이러자 5월 17일에 한응인과 김명원의 군대가 가토의 군대를 공격하다가 크게 패했다. 임진강 방어선이 무너진 것이다. 5월 27일에 왜군은 임진강을 건넜고 29일에 개성이 함락되었다.
평양에서 선조는 전전긍긍했다. 6월 2일에 선조는 대신들과 대책을 논의했다. 피난 가자는 의견과 평양 사수론이 대립했다. 6월 8일에 고니시와 나가마사의 부대가 대동강변에 이르렀다. 9일에 고니시와 이덕형은 대동강 선상에서 회담을 가졌지만 곧 결렬되었다. 6월 10일에 중전(中殿)이 평양성을 나가자, 평양 백성들이 난을 일으켜 몽둥이로 궁비(宮婢)를 쳐서 말 아래로 떨어뜨렸으며, 호조 판서 홍여순은 길에서 난병(亂兵)에게 맞아 등을 다쳐 부축을 받고 돌아왔다. 6월 11일에 선조는 도망치듯 평양을 빠져나갔고, 6월 15일에 왜군은 평양성을 쉽게 점령했다.
# 삼도 근왕군, 용인전투에서 어이없게 패하다.
6월 6일에 전라도 관찰사 이광, 충청도 관찰사 윤국형, 경상도 관찰사 김수가 이끄는 5만 명의 조선군이 경기도 용인 광교산 전투에서 와키자카 야스하루가 이끄는 1,600명의 왜군에게 어이 없게 패했다.
5월 초에 전라도 관찰사 이광은 8천 명을 이끌고 공주까지 올라갔다가 선조가 파천했다는 소식에 전주로 돌아와 버렸다. 이광의 처사에 격분하여 김천일, 정운룡 등이 이광을 비판하자 이광은 다시 군사를 모집하여 한양을 탈환하기 위해 북상했다. 군사는 전라도 4만 명 이상, 충청도 8천 명, 경상도 100여 명으로 모두 5만 명이 넘었다.
삼도근왕군은 행군할 때 무기와 수송을 맡은 우마차가 들판을 뒤덮어 장관을 이루었다. 하지만 관군은 숫자만 많았지 오합지졸이어서 행군도 제대로 할 줄 몰랐다.
그런데 준비없이 급조된 부대에다가 지휘관들조차 대부분이 지휘 역량이 너무 떨어졌다. 특히 작전 회의에서부터 문제가 생겼는데 광주목사 권율은 사기를 축적하면서 조정의 명을 들어야 한다고 의견을 내자, 다른 장수들은 수원의 독성산성에서 진을 쳐야 한다고 반박하는등 의견도 일치하지 않았다.
이때 일본 수군 6백여 명이 와기사카 사헤이의 지휘 아래 용인 언저리 북쪽 두문산과 무소산에 주둔하고 있었다. 이광은 선봉장 이지시로 하여금, 백광언의 군사와 함께 이들을 공격하도록 명령했다. 이러자 일본군은 조선군의 숫자가 워낙 많아 구원병을 요청하고 서울로 후퇴하려 했다.
6월 5일에 백광언 등은 문소산에 있는 왜적에게 총공세를 퍼부어 왜적 10여 명을 베었지만 왜군은 전혀 대응하지 않았다. 이 날 서울에서 내려온 일본의 구원병 1천 명이 용인 부근에 나타났다. 와키자카 야스하루의 수군이었다.
밤이 되자 왜적은 백광언의 군사가 차츰 해이해졌음을 알고 불시에 숲속에서 나와 일시에 칼을 휘두르니 백광언과 이지시가 달아나면서 죽었다. 이어서 고부 군수 이윤인, 함열 현감 정연 등도 피살되자 나머지 군사들은 기세가 크게 꺾였다.
6월 6일 아침 광교산에 진을 친 조선군의 밥 짓는 연기가 올라갈 때 왜군이 갑자기 산골짜기를 따라 기습했다. 흰 말을 타고 쇠가면을 쓴 장수가 수십 명을 데리고 칼날을 번뜩이며 앞장서서 들어오자, 충청 병사 신익은 선봉으로 앞에 있다가 왜적의 위세에 놀라 먼저 도망갔다. 이러자 5만명의 군사가 일시에 다 흩어졌는데, 그 형세가 마치 산이 무너지는듯하였다.
이광·김수·윤국형은 30리 밖에 있었지만 역시 진을 정돈하지 못하고 군량과 군수품을 모두 버린 채 도주했고, 왜적은 횃불 하나로 그것들을 모두 불태워버렸다.
‘와키자카기(脇坂記)’에는 용인전투 때 거둔 조선군의 수급이 1천 여급, 생포가 2백여 명이라고 적혀있다.
류성룡은 ‘징비록’에서 이렇게 썼다.
“당시 순찰사 세 사람은 모두 문인 출신으로 다 같이 병무(兵務)에 익숙하지 않았다. 군사의 수는 비록 많았지만 명령이 제대로 서지 않았으며, 또 험준한 지형만 믿고 제대로 방어 하지 않았으니, 이야말로 옛사람이 ‘군사일을 마치 봄나들이 하듯 하니 어찌 패하지 않을 수 있으랴?’라고 말한 그대로이다.” (유성룡 지음·이민수 옮김, 징비록, p 102)
이 패전책임으로 이광은 파직당했고 7월 8일에 이치전투에서 승리한 광주목사 권율이 전라관찰사가 되었다.
# 선조, 요동으로 망명을 계획하다.
6월 13일 영변에 도착한 선조는 국정 권한을 세자 광해군에게 넘기고 자신은 요동 망명을 결심했다. 14일에 선조는 망명 의사를 밝히는 외교문서를 명나라 요동 도사에게 보냈다.
그런데 6월 18일에 요동 도사는 선조가 진짜 임금인지를 확인했다. 왜냐하면 왜군이 가짜 왕을 세워서 요동에 진입한다는 소문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명나라 병부도 선조가 왜적을 만나자마자 도주한 것은 이상한 일이라면서 조선이 일본의 길잡이가 아닌지 하는 의구심을 계속 표명했다. 결국 선조는 진짜 조선 왕인지 아닌지를 확인당하는 수모를 겪어야 했다.
6월 22일에 의주에 도착한 선조는 신하들에게 요동행을 독촉했다. 이러자 류성룡과 윤근수가 극력 말렸다. 6월 24일에도 선조는 요동행을 재촉했다. 그런데 명나라가 선조가 망명하면 관전보(寬奠堡)의 빈 관아에 안치한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관전보는 압록강 건너편 지금의 단동에 여진족을 막기위해 명이 쌓은 작은 성이었다. 이러자 선조의 망명 소동은 잠잠해졌다.
“명나라가 장차 상을 관전보의 빈 관아에 거처시키려고 한다는 소식을 듣고는, 상이 드디어 의주에 오래 머물 계획을 하였다.”(1592년 6월 26일 선조실록)
의주에서 선조는 다음 시를 지었다.
관산에 뜬 달 보며 통곡하노라
압록강 바람에 마음 쓰리도다
조정 신하들은 이 날 이후에도
서인이니 동인이니 나뉘어 싸움을 계속할 것인가
선조는 당쟁 탓, 신하 탓이다. 참 한심한 임금이었다.
한편 평양성을 점령한 고니시는 선조에게 비아냥 거리는 편지를 보냈다.
“수군 10만여명이 서해로부터 오고 있는데 대왕의 행차는 장차 어디로 갈 것이요?”(유성룡 지음·이민수 옮김,징비록, p161)
이 당시 이순신이 일본 수군을 무찔러 일본 수군의 서해 진출은 무산되었고, 고니시는 더 이상 진군하지 못하고 있었다.
7월 중순에 가토는 회령에서 임해군과 순화군을 사로잡았다. 전주에서 유배되어 말단 관리로 일하던 국세필과 조카 국경인이 두 왕자를 붙잡아 가토에게 인계한 것이다. 가토는 반대급부로 국경인 등에게 함경도 통치를 인정해주었다.
# 각도에서 의병이 일어나다.
선조가 요동 망명을 시도한 가운데 각 도에서 의병(義兵)이 일어났다. 영남에선 곽재우가 의령, 정인홍이 합천, 김면은 고령, 권응수가 영천에서 창의하였다. 호남은 김천일이 나주, 고경명이 광주, 유팽로가 곡성에서 창의하였고, 충청도에선 조헌이 의병을 일으켰다.
가장 먼저 의병을 일으킨 홍의장군 곽재우이다. 4월 22일에 거의한 곽재우는 의령 거름강(岐江) 등에서 지형지물을 이용한 유격전을 주로 펼쳤다. 곽재우의 가장 빛나는 승전은 정암진(鼎岩津) 전투였다. 안코쿠지(安国寺恵瓊)가 이끄는 제6군 고바야카와 휘하의 별동부대 2천명이 삼가, 남원을 거쳐 전주로 들어가기 위해 의령에 도착했다.
안코쿠지는 정찰대를 보내 정암진 도하 지점에 나무 푯말을 꽂아두었다. 이러자 곽재우는 밤중에 나무 푯말을 늪지대로 옮겨 놓고 군사들을 매복시켰다. 날이 밝자 도하를 시작한 왜군 선봉대는 늪지대로 잘못 들어가서 허둥댔고, 매복한 의병이 기습공격을 하자 왜군 주력군도 패하고 말았다.
이후 곽재우는 왜군을 현풍과 창녕 사이에서 잇따라 물리치니 왜적이 주둔지에서 도망하였다.
전라도에서도 의병이 일어났다. 5월 16일에 김천일은 송제민, 양산룡·양산숙 형제, 임환(백호 임제의 동생), 서정후·이광익·이광주 등과 함께 창의하여, 6월 3일에 나주 의병 3백 명을 이끌고 북상했다. 6월 23일에 수원에 이르자 김천일 의병은 2천 명으로 늘어났다.
5월 23일에 옥과 출신 성균관 학유 유팽로는 이종사촌 양대박과 함께 고경명을 만나서 창의를 권유했다. 5월 29일에 광주, 담양, 옥과, 남원, 순창 등 21개 고을 선비들이 담양 추성관에서 모였고, 6월 11일에 고경명은 6천 명을 이끌고 북상했다. 유팽로가 좌부장, 양대박이 우부장, 안영이 종사관이었다.
# 한편 일본 수군이 연거푸 패전했다는 소식이 히데요시에게 알려졌다. 히데요시는 와키자카 야스하루에게 편지를 보내 용인 전투의 승리를 칭찬함과 동시에 조선 수군을 무찔러 주길 기대했다. 6월 14일에 와키자카는 구키 요시타카, 가토 요시야키와 함께 부산포에 도착했다.
7월 들어 왜군이 수륙합동으로 전라도를 침공하려 한다는 정보가 입수되었다. 일본 제6군은 금산까지 진출했고, 일본 수군도 전라도 해역을 넘보고 있었다. 이러자 이순신은 3차 출전을 계획한다.
(참고문헌)
o 기타지마 만지,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조선침략, 경인문화사, 2008
o 김영진, 임진왜란 2년 전쟁 12년 논쟁, 성균관대학교 출판부, 2021
o 유성룡 지음·이민수 옮김, 징비록, 을유문화사, 20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