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 이순신, 경상도로 출전하다.(제1차 출전)
- 작성일
- 2022.08.30 1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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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북선을 만든 과학자 나대용 장군 – 18회 이순신, 경상도로 출전하다.(제1차 출전)
김세곤(호남역사연구원장,‘임진왜란과 호남사람들’저자)
(이 저작물의 저작권은 저자와 사단법인 체암나대용장군기념사업회에 있습니다. 무단전제 및 복제를 금합니다.)
1592년 4월 30일에 경상도로 출전을 연기한다는 장계를 조정에 보낸 이순신은 전라우수군을 기다렸다. 하지만 전라우수사 이억기는 오지 않았다.
5월 1일에 수군들이 모두 여수 앞바다에 모였다. 이날은 흐렸지만 비는 오지 않고 남풍이 세게 불었다. 이순신은 진해루(진남관 앞에 있는 누각)에 앉아서 방답첨사 이순신(李純信), 흥양현감 배흥립, 녹도만호 정운 등을 불러들였다. 이들은 모두 격분하여 제 한 몸을 생각지 않으니 실로 의사(義士)라 할만하다. (5월 1일 난중일기)
5월 2일에 송한련이 남해에서 돌아와서 “남해현령 기효근 1), 미조항 첨사김승룡, 상주포(남해군 상주면 상주리)·곡포(남해군 이동면 화계리)·평산포(남해군 남면) 만호 김축등이 왜적의 소식을 한 번 듣고는 벌써 달아났고, 군기(軍器)등의 물자가 모두 흩어져 남은 것이 없습니다.”라고 보고하였다. 이순신은 놀라울 뿐이었다.
2일 정오에 이순신은 배를 타고 바다에 나가 진을 치고 여러 장수들과 의논하였다.
“모두 기꺼이 나가 싸울 뜻을 가졌으나 낙안군수 신호만은 피하려는 뜻을 가진 것 같아 한탄스럽다. 그러나 군법이 있으니 비록 물러나 피하려 한들 어디 될 일인가.”(5월 2일 난중일기)
이를 보면 이순신은 선상(船上)에서 5관 5포 지휘관들에게 지금까지의 전황을 설명하고 경상도로 싸우러 가는 문제에 대하여 각자 의견을 말하도록 한 것이다. 허심탄회한 난상토론이었다.
이 회의에서 낙안군수 신호 2)가 출전에 반대의견을 폈다. 관할 구역인 전라도만 지키면 되지, 관할 구역도 아닌 물길도 잘 모르는 경상도까지 전투하는 것은 위험부담이 너무 크다는 것이었다.
그런데 경상도 출전에 반대한 장수가 낙안군수 신호만 아니고 여러 장수였다. 1592년 5월 1일 자 ‘선조수정실록’을 읽어보자.
“이순신은 여러 포(浦)의 수군을 앞바다에 모으고 적이 이르면 싸울 준비를 하고 있었다. 여러 장수들은 대부분 말하기를 ‘우리가 우리 지역을 지키기에도 부족한데 어느 겨를에 다른 도에 가겠는가.’하였다.
그런데 녹도만호 정운과 군관 송희립만은 강개하여 눈물을 흘리며 이순신에게 진격하기를 권하여 말하기를 ‘적을 토벌하는 데는 우리 도(道)와 남의 도가 따로 없다. 적의 예봉을 먼저 꺾어놓으면 본도도 보전할 수 있다.’ 하니 이순신이 크게 기뻐하였다.”
그러면 군관 송희립 3)의 경상도 출전 의견을 살펴보자
“대적이 침범하여 그 형세가 마구 뻗치었는데 앉아서 외로운 성을 지킨 다하여 그 성이 보존될 수 없으니 마땅히 출전하여야 합니다. 출전하여 다행히 이기면 적의 기세를 꺾을 수 있는 것이고 만약 죽는다 하더라도 신하된 도리로써 부끄러운 일이 아닙니다.”
녹도만호 정운 4)도 경상도 출전에 찬성했다.
“왜적을 치는 데 전라도, 경상도가 어디 있습니까? 적이 울타리 밖에 있을 때는 막기가 쉽지만 울타리 안에 들어오고 나면 막기가 어려운 법입니다. 영남은 호남의 울타리인데 울타리가 무너지면 호남도 보전하기 어렵습니다. 군병을 이끌고 나가 쳐서 영남을 돕고 한편으론 호남을 지킬 생각은 안 하고, 그저 바라만 보면서 눈앞의 편안함만 찾으려 한다면 그야말로 적을 울타리 안으로 끌어들이는 격입니다.”
이 날 밤 이순신은 경계 태세에 들어갔다. 군호(軍號 : 암구호)는 용호(龍虎), 복병은 수산(水山)이었다.
5월 3일에는 가랑비가 아침 내내 왔다. 새벽에 경상우수사 원균의 답장이 왔다. 오후에 이순신은 광양현감 어영담과 흥양현감 배흥립을 불러 함께 이야기를 하였다. 두 현감은 모두 분노를 터뜨렸다.
전라우수사 이억기가 해남에서 수군을 끌고 오기로 함께 약속을 정했는데, 방답진의 판옥선이 첩입군(疊入軍)을 싣고 오는 것을 보고 전라우수사가 오는 줄 알고 좋아하였다.
조금 뒤에 녹도만호 정운이 뵙겠다고 하였다. 이순신은 정운을 만났다. 정운은 “전라우수사는 오지 않고 왜적은 점점 서울에 가까이 다가가니 분한 마음 이길 길이 없습니다. 만약 기회를 잃는다면 뒤늦게 후회해도 소용이 없을 것입니다.”라고 말했다.
이순신은 곧 중위장 (방답첨사 이순신 李純信)을 불러 내일 새벽에 떠날 것을 지시했다. 이순신은 마침내 전라좌수군 단독 출전에 결단을 내린 것이다. (이 날 고니시 유키나가의 왜군은 서울에 입성했다. 선조는 4월 30일에 서울을 떠나 개성으로 피난 갔다.)
그런데 여도 수군 황옥천이 왜적의 소식을 듣고는 집으로 도망가는 사건이 발생했다. 이순신은 곧장 체포 명령을 내렸다. 붙잡혀 온 황옥천은 노모를 뵙고자 집에 갔을 뿐 도망친 것은 아니라고 변명하며 선처를 요청했다. 하지만 이순신은 목을 베어 군중(軍中)에 내다 걸었다. 엄정한 군율을 확립하기 위함이었다. 더구나 출전을 하루 앞둔 상황에서 군율이 흐트러지면 싸움은 하나마나였다.
5월 4일 새벽 두 시 경에 이순신 함대는 여수에서 출발했다. 함선은 판옥선 24척, 협선(挾船) 15척, 포작선(鮑作船) 46척 모두 85척이었다. 실제로 전투함은 판옥선 24척이었다. 협선은 판옥선의 부속된 비무장 연락선이고, 포작선은 고기잡이 배다. 이순신이 포작선까지 동원한 것은 조선 수군이 일본 수군과 대응하게 보이게 하기 위한 고육책이었다. (이순신은 명량해전 때도 300여 척의 일본 전함에 대응하기 위해 포작선을 조선 전함 후방에 배치하였다.)
이순신은 4월 12일에 건조된 본영 거북선은 이번 출전에서 뺐다. 훈련이 더 필요했기 때문이다.
이순신 함대는 병력을 둘로 나누어 남해안을 수색한 뒤에 미조항에서 만나기로 했다. 대장선을 포함한 본대는 돌산도 북쪽을 지나 남해안 연안을 따라 평산포 · 곡포 · 상주포를 거쳐 미조항으로 향했고, 우척후(사도첨사 김완), 우부장(보성군수 김득광), 중부장(광양현감 어영담), 후부장(녹도만호 정운)등은 돌산도 남쪽의 개이도(여천군 화정면 개도)를 수색한 후 남해안 연안을 따라 미조항에 이르도록 했다.
이는 일본 수군이 혹시라도 전라도 해역에 진출했을 가능성을 살피기 위한 것으로 그만큼 이순신은 신중했다.
다행히도 일본 수군은 없었다. 이순신 함대는 오후에 미조항(경남 남해군 미조면)에서 합류한 후에 소비포(고성군 하일면 동화리)에서 하룻밤을 지냈다.
5일 새벽에 이순신 함대는 출항하여 경상우수사 원균과 만나기로 한 당포(통영시 산양읍 삼덕리)로 급히 달려갔다. 그런데 원균은 약속 장소에 나오지 않았다. 몇 번이나 구원을 요청한 원균이 이처럼 약속을 안 지켰으니 이순신 이하 전라좌수군은 너무 실망했으리라. 이순신은 경쾌선(輕快船 가볍고 빠른 배)을 보내 빨리 당포로 나오라고 공문을 보냈다. 이 날 이순신 함대는 당포에서 정박했다.
6일 아침 8시경에 경상우수사 원균이 한산도에서 단지 1척의 배를 타고 당포에 왔다. 수하의 장수들은 나타나지 않은 것이다. 이순신과 원균은 적선의 수, 적선이 머물고 있는 곳, 전투를 어떻게 해야 할 지를 상세히 상의했다.
조금 있다가 남해현령 기효근·미조항 첨사 김승용·평산포 권관 김축 등이 판옥선 1척에 같이 타고, 사량 만호 이여염·소비포 권관 이영남 등이 각각 협선을 타고, 영등포 만호 우치적·지세포 만호 한백록·옥포만호 이운룡등은 판옥선 2척에 같이 타고 뒤따라왔다. 경상우수군 전함은 고작 4척이었다.
두 도의 장수들은 연합 회의를 하여 두세 번 명확하게 약속한 뒤에, 거제도 남단 송미포 앞바다에 이르자 날이 저물어 하룻밤을 지냈다.
주1) 기효근(奇孝謹 1542~1597)은 1579년에 무과에 급제하고 선전관이 되었다. 1590년에 남해현령으로 부임하여 경상우수사 원균 휘하에서 여러 차례 해전에 참가하였다. 그때마다 선봉이 되어 큰 공을 세웠으므로 통정대부가 되었다. 1597년 정유재란 때 병으로 현령을 사직하고 고향으로 돌아가는 길에 왜군을 만나 어머니와 함께 바다에 몸을 던져 자살하였다. 1604년 선무공신(宣武功臣) 3등에 책록되고 개백군(皆伯君)에 추봉되고 병조판서에 추증되었다.
주2) 신호(申浩 1539~1597)는 1567년에 무과에 급제하여 내외직을 역임하다가 무용이 뛰어나다 하여 조산보만호(造山堡萬戶)에 임명되었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이순신을 도와 견내량·안골포 등의 해전에서 큰 공을 세워 통정대부로 승진되었다. 1597년 정유재란 때에 남원 교룡산성 수어사(蛟龍山城守禦使)로 있다가 남원성이 왜군에게 포위되자, 구원하러 갔다가 전사하였다. 원종공신(原從功臣)에 책록되고 형조판서에 추증되었다.
주3) 송희립(宋希立 1553년~1623)은 고흥 출신으로 1583년에 무과에 급제하였다. 이순신으로 군관으로 형 송대립과 함께 이순신 휘하에서 활약하였다. 1598년 노량해전에서 적에게 포위된 명나라 제독 진린을 구출하였으며, 1601년 양산군수·다대포첨절제사(多大浦僉節制使)를 거쳐 전라좌수사가 되었다.
주4) 정운(鄭運 1543~1592)은 영암 출신으로 1570년에 무과에 급제한 뒤 훈련원봉사·금갑도수군권관(金甲島水軍權管)·거산찰방(居山察訪)을 거쳐 웅천현감 등을 지냈다. 1591년에 녹도만호가 되었고 옥포·당포·한산 등의 여러 해전에서 큰 공을 세우고, 9월의 부산포해전에서 선봉에서 싸우다가 전사하였다.
(참고문헌)
o 김세곤, 임진왜란과 호남사람들, 온새미로, 2011
o 이봉수, 이순신이 지킨 바다, 가디언, 2021
o 이순신 지음 ·조성욱 역, 임진장초, 연경문화사, 1997
o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