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 동래부사 송상현의 순절
- 작성일
- 2022.08.09 17: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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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북선을 만든과학자 나대용 장군-13회 동래부사 송상현의 순절
김세곤(호남역사연구원장,‘임진왜란과 호남사람들’저자)
(이 저작물의 저작권은 저자와 사단법인 체암나대용장군기념사업회에 있습니다. 무단전제 및 복제를 금합니다.)
1592년 4월 13일에 왜군이 부산에 쳐들어 오자 동래부사 송상현(1551∼1592)은 지역의 군민(軍民)과 이웃 고을의 군사를 불러 모아 동래성을 지켰다. 양산군수 조영규(1535∼1592)도 50명의 군사를 이끌고 합류하였다. 전라도 장성 출신인 조영규는 1554년에 무과에 합격하여 낙안부사, 영해도호부사를 거쳐 임진왜란 직전에 양산군수로 발령받았다.
4월 14일에 왜적이 침입해 왔다는 소식을 듣고 경상좌병사 이각이 동래성에 도착했다. 그런데 부산진이 쉽게 함락되었다는 소식을 들은 이각은 겁을 먹고 어쩔 줄 몰랐다. 그는 “나는 대장이니 외부에 있으면서 협공하는 것이 마땅하다. 즉시 나가서 동래 소산역(蘇山驛)에 진을 치겠다”고 핑계대고 달아나 버렸다. 송상현이 동래성을 같이 지키자고 여러번 간청하였으나 이각은 줄행랑쳤다. 정말 비겁하다.
이때 왜군은 동래성 남쪽에 있는 취병장에 모여 있었는데 군사 100여 명을 보내 목판(木板) 하나를 남문 밖에 세워놓고 갔다.
싸우고 싶으면 싸우고 戰則戰矣
싸우지 않으려면 길을 빌려 달라 不戰則假道
그러자 송상현도 목판을 왜적에게 던졌다.
“싸워 죽기는 쉬어도 戰死易
길을 빌려주는 것은 어렵다 假道難
곧 왜군은 군대를 세 진영으로 나누어 하나는 망령산 기슭에서 다른 하나는 서대로 쪽에서 출발하고, 나머지 하나는 취병장에서 곧바로 남문을 향하여 진격하여 날이 저물기도 전에 동래성을 세 겹으로 포위했다.
14일 밤, 둥근 달이 밝아 오기 시작했다. 송상현은 내내 착잡했다.
경상좌병사는 싸울 생각이 없어 도망가고 성에는 지킬 군사가 없으니 무엇으로 왜적을 맞아 싸울 수 있겠는가.
성안을 순시한 뒤에 송상현은 부친 송복흥에게 편지를 쓰려고 붓을 들었다. 그런데 막상 쓰려고 하니 마음이 착잡하고 사연도 구차하였다. 그는 종이를 물리고 달을 바라보다가 옆에 있는 부채를 펼쳐 부채에 몇 자 적었다.
무리진 달 아래 외로운 성 孤城月暈
진을 구할 구원병은 오지 않네 大鎭不救
군신의 의는 무겁고 君臣義重
부자의 은혜는 가볍네 父子恩輕
그는 부채를 접어 가노(家奴)에게 주면서 이 길로 즉시 성을 빠져나가 청주로 가서 부친에게 전해 주라고 하였다.
이윽고 송상현은 군사를 다시 배치했다. 남문은 송상현, 동문은 울산군수 이언함, 북문은 홍윤관, 서문은 양산군수 조영규가 맡았다.
4월 15일 동이 트자마자 고니사 유키나가와 소 요시토시의 왜군 18,000명은 동래성으로 진격해 왔다.
성안 사람들은 놀라고 울부짖었다. 송상현은 남문에 올라가 전투를 독려했으나 반일(半日) 만에 성이 함락되었다.
송상현은 갑옷 위에 조복(朝服)을 입고 꿋꿋이 자리를 지켰다. 일찍이 동래에 왕래하면서 송상현에게 대접을 후하게 받은 대마도 출신 평조익(平調益 다이라 시게마스)이 송상현의 옷을 끌며 피신할 곳을 알려주었지만 송상현은 따르지 아니하였다. 그는 의자에 내려와 북쪽을 향해 네 번 절을 올렸다.
이윽고 왜적들이 송상현을 생포하려고 하자, 그는 항거하다가 죽었다. 나이 41세였다.
한편 송상현이 죽자 1591년 1월에 조선통신사 황윤길 등과 함께 부산에 도착했던 왜의 사신 평조신(平調信 야나가와 시게노부)이 탄식하며 그의 시체를 관에 넣어 성 밖에 묻어주고 푯말을 세워주었다.
‘조선충신송공상현지묘(朝鮮忠臣宋公象賢之墓)’
송상현의 함흥기생 출신 첩 금섬은 송상현이 조복을 가져갔다는 말을 듣고 그의 결심을 알아차리고 담을 넘어 도망치다가 적에게 잡혔다. 금섬은 사흘동안 왜적을 꾸짖다가 끝내 살해되었다. 이러자 왜군은 그녀의 절개를 기특하게 여겨 관을 마련하여 송상현과 함께 묻어주었다.
또 양인(良人) 출신 첩 이씨도 잡혔으나 끝까지 굴하지 않자 왜인들이 별실에 가두었다. 나중에 그녀는 일본에 끌려가서도 절개를 굽히지 않아 일본인들의 존경을 받았는데, 1605년에 사명대사가 데리고 온 포로 3천 명과 함께 조선에 돌아왔다.(1607년 조선통신사 경섬의‘해사록’)
송상현은 문과에 급제하여 1590년에 간관(諫官)이 되었고, 1591년 4월에 파직된 고경명(나중에 전라도 의병장) 후임으로 동래부사로 왔다. 1594년에 병사 김응서가 울산에서 가토 기요마사를 만났을 때 가토는 송상현의 시체를 거두어 고향인 정읍으로 옮겨 장사(葬事)지내도록 허락하고 경내를 벗어날 때까지 호위하여 주었다. (선조수정실록 1592년 4월 14일)
부산시 송상현 광장과 전북 정읍시 정충사는 송상현 유적지이다. 또한 부산 충렬사엔 송상현과 양산군수 조영규 등의 위패가 모셔져 있다.
# 밀양부사 박진의 용맹
4월 15일에 동래성에서 도망친 이각은 동래 소산역에서 밀양부사 박진(1560~1597)을 만났다. 박진은 급히 동래로 가다가, 동래성이 함락되자 소산에 머물고 있었다. 이 때 박진은 이각에게 “소산을 지키지 못하면 영남이 위태하니 내가 앞을 막거든, 공은 그 뒤를 지키라” 하면서 5백명을 거느리고 왜군 앞에 진을 쳤다. 그러나 이각이 도망쳐 후방이 없어지자 박진도 후퇴하여 밀양으로 돌아왔다. (박동량 ‘기재사초’)
16일에 고니시는 길을 나누어 한패는 언양을 침범하고 다른 한패는 밀양을 침범했다. 이때 박진이 군관 이대수와 김효우 등 5백 명과 함께 작원강(鵲院江)의 좁은 잔교(棧橋)를 점거하여 활을 쏘면서 버티자 왜군이 감히 진격할 수 없었다.
작원강 잔교는 밀양시 삼량진읍 검세리 작원마을과 양산시 원동면 용당리 사이에 있는 험한 벼랑길인데 지금은 사라지고 없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작원으로부터 남으로 5·6리 가면 낭떠러지를 따라 잔도(棧道)가 있어 매우 위험한데, 그 한 구비는 돌을 깨고 길을 만들었으므로 내려다보면 천 길 연못으로 물빛이 짙은 푸른 빛이라, 사람들이 모두 마음을 졸이고 두려운 걸음으로 지나간다”라고 적혀 있다.
하지만 얼마 뒤에 왜군이 양산을 함락시키고 우회하여 후면으로 쳐들어왔다. 이러자 잔교를 지키던 병사들이 모두 흩어졌다. 박진도 성으로 돌아와 무기고와 창고를 불사르고 성을 나섰는데, 왜적은 이미 성 밖에 가득 하였다. 박진은 단기(單騎)로 왜적의 목 2급(級)을 벤 다음에 달아나니 이로 말미암아 박진의 이름이 널리 알려졌다. (이긍익 ‘연려실기술’)
# 도망치기 바쁜 경상감사와 수령들
한편 소산역에서 도망친 경상좌병사 이각은 다시 경상좌병영(울산)으로 돌아왔다. 그런데 그는 좌병영을 지킬 생각은 않고 밤에 첩을 내보내면서 창고에 간직해 둔 무명 1천 필을 함께 싣고 가게 하고, 그 역시 새벽을 틈타 도망쳤다. (선조수정실록 1592년 4월 14일)
5월에 이각이 임진강 진중에 나타나자, 도원수 김명원이 그를 참수했다. 이각은 적을 보기도 전에 수차례 도망친 겁쟁이였고, 탐욕은 나라가 어수선할 때도 나타나 극형에 처해졌다.
한편 이각 후임으로 경상좌병사가 된 박진은 경주성 탈환의 공을 세웠다. 9월 2일에 선조는 그에게 양피(羊皮) 옷 한 벌을 특별히 하사했다.
이윽고 4월 18일에 구로다 나가마사가 이끄는 왜군 1만 1천 명이 김해를 공격했다. 김해부사 서예원은 남문을, 초계 군수 이유검은 서문을 지켰다. 그런데 이유검은 야경(夜警) 한다고 핑계 대고 달아났고, 서예원은 이유검을 쫓아간다며 도망가서 성이 함락되었다. 나중에 이유검은 참형 당했다. (선조실록 1592년 5월 10일)
이렇게 수령들은 도망치기에 바빴다. 경상좌수사 박홍, 방어사 성응길, 조방장 박종남·변응성, 안동 부사 정희적, 안동 판관 윤안성, 풍기 군수 윤극임, 예천 군수 변양우 등이 모두 근왕(勤王)을 핑계 삼아 영남을 버리고 죽령(竹嶺)을 넘어 도망갔다. (조경남 ‘난중잡록’)
경상감사 김수도 변고를 듣고 진주에서 동래로 달려가다가 왜적에 놀라 다시 진주로 갔다가 거창으로 피신했다. 그는 어쩔 줄 모르고 우왕좌왕하다가 다먼 여러 고을에 격문을 보내 백성들에게 피난하라고만 했는데, 이 때문에 경상도가 텅비어 더욱 손 쓸 수 없게 되었다.
임진왜란의 재앙은 어찌 보면 나라를 지켜야 할 경상감사와 경상도 수령들의 무능과 무책임에서 비롯됐다.
# 아군을 죽이고 표창을 받다니
류성룡의 ‘징비록’에는 아군을 죽이고도 영전한 우복룡 일화가 나온다. (류성룡 지음·오세진 외2인 역해, 징비록, 2015, p 56-57)
용궁 현감(경북 예천군) 우복룡은 고을 군사들을 이끌고 병영으로 가는 길이었다. 도중에 영천 길가에서 밥을 지어 먹고 있었는데 때마침 하양(경북 경산군) 군사 수백 명을 만났다. 이들은 방어사에 속한 군사들로 상도(경북 안동 인근)로 가고 있었는데 마침 우복룡의 군사 앞을 지나게 된 것이다.
우복룡은 군사들이 말에서 내리지 않는 것에 화가 나서 그들을 붙잡아 반역을 일으키려 한다며 트집을 잡았다. 하양의 군사들은 병마절도사가 발행한 공문서를 보여주며 해명하였지만 우복룡은 자신의 군사들에게 눈짓으로 신호를 보내 하양 군사들을 죽여버렸다. 그런데 순찰사가 이에 대해 우복룡이 공을 세웠다고 보고하니 조정은 우복룡을 통정대부로 승진시키고 안동부사에 임명하였다.
훗날 아버지와 남편을 잃은 하양 사람들이 조정에서 사신이 올 때마다 억울함을 호소하였지만, 우복룡은 당시에 명망이 자자하였기 때문에 그들의 억울함을 풀어주는 사람이 없었다고 한다.
(참고문헌)
o 국립진주박물관, 싸워 죽기는 쉬어도 길을 빌려주기는 어렵다, 혜안,1999
o 김성한, 7년 전쟁 2권 전쟁의 설계도, 산천재, 2012
o 류성룡 지음·오세진 외2인 역해, 징비록, 홍익출판사, 2015
o 유성룡 저·김문수 엮음, 징비록, 돋을새김, 2009
o 유성룡 지음·이민수 옮김, 징비록, 을유문화사, 2014
o 장성군, 우리가 본받아야 할 장성 사람들, 제이애드, 20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