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 임진왜란 일어나다
- 작성일
- 2022.08.05 15: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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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북선을 만든 과학자 나대용 장군 -12회 임진왜란 일어나다.
김세곤(호남역사연구원장,‘임진왜란과 호남사람들’저자)
(이 저작물의 저작권은 저자와 사단법인 체암나대용장군기념사업회에 있습니다. 무단전제 및 복제를 금합니다.)
# 임진왜란 전야
1592년 임진년이 밝았다. 용(龍)의 해인 임진(壬辰)년 4월 13일에 임진왜란(壬辰倭亂)이 일어났다.
그러면 임진왜란 전야를 살펴보자. 먼저 일본이다.
1592년 1월 6일에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신년 하례를 위해 교토에 올라온 다이묘들에게 예정대로 3월 1일에 조선을 침략하겠다고 못 박았다.히데요시는 군대를 14개 군으로 편성하고 총 10만 6,700명의 출정을 명령했다.
이보다 앞서 1589년에 측실 요도기미가 낳은 아들 도요토미 쓰루마쓰(鶴松) 1591년 8월 5일에 갑자기 죽었다. 8월 21일에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관백 자리를 양자인 조카(누나의 아들) 도요토미 히데쓰쿠(1568~1595)에게 넘기겠다는 의향을 보였다. 주1)
이어서 8월 28일에 히데요시는 조선 침공의 날짜를 1592년 3월 1일로 정하면서, 구로다 나가마사, 고니시 유키나가, 가토 기요마사 등에게 규수의 히젠 나고야(肥前 名護屋 지금의 사가현 가라쓰)에 조선 침략 전진기지를 만들 것을 지시했다. 히젠 나고야는 일본 본토에서 조선에 가장 가까운 곳으로 부산까지 150km였다. 나고야 성은 1592년 2월에 완성되었다.
그런데 출정이 연기되었다. 고니시 유키나가가 도요토미 히데요시에게 조선의 향도(嚮導)여부를 다시 한번 확인하자고 청했기 때문이다. 히데요시는 이를 허락하면서 시간을 끌지 말라고 명령했다. 2월 하순에 대마도주 소 요시토시의 사신이 부산에 도착했다. 이들은 조선 관리와 교섭하려 했지만 거절당하여 대마도로 다시 돌아가고 말았다.
3월 13일에 히데요시는 군대를 9개군, 158,700명으로 재편했다.
제1군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 1558~1600)) 18,700명 (직할 7천명, 대마도주 소 요시토시 5천명, 마쓰라 시게노부 3천 명, 아리마 하루노부 2천 명, 오무라 요시아키 1천 명, 우쿠 스미하루 700명)
제2군 가토 기요마사(加藤淸正 1562~1611)) 22,800명(직할 1만 명, 나베시마 나오시게 12,000명, 사가라 요리후사 800명)
제3군 구로다 나가마사(黑田長政 1568~1623) 11,000명 (직할 5천명, 요토모 요시무네 6천명)
제4군 모리 요시나리 14,000명 (직할 2천명, 시마즈 요시히로 1만명, 다카하시 모토타네 2천명)
제5군 후쿠시마 마사노리 25,000명
제6군 고바야카와 타카카게(小早川隆景 1533~1597) 15,700명 (직할 1만 명, 다찌바나 무네토라 2,500명, 모리 히데카네 1,500명, 치쿠시 히로카도 900명, 타카하시 나오쯔쿠 800명)
제7군 모리 데루모토 (毛利輝元)외 5명 30,000명
제8군 우키타 히데이에 (宇喜多秀家 1572~1655) 10,000명
제9군 하시바 히데카쓰 11,500명(직할 8천명,호소카와 다다오키 3,500명)
(기타지마 만지,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조선침략, 2008, p 41-42)
수군은 장수 9명과 9,450명으로 편성되었다. 또한 히데요시는 구키 요시타카에게 명령하여 수백 척의 병선을 급히 건조하도록 했다.
구키 요시타카 (九鬼嘉隆 1542~1600) 1,500 명
도도 다카토라 (藤堂高虎 1556~1630) 2,000 명
와키자카 야스하루(脇坂安治 1554~1626) 주2) 1,500 명
가토 요시아키 (加藤嘉明) 1,000명
구루지마 야스치카 700명
간 마사카게 250명
구와야마 시게카쓰 1,000 명
호리우치 우지요시 850명
스기와카 덴자부로 650명
계 9명 9,450 명
(사토 데스타로 외 지음·김해경 옮김, 이순신 홀로 조선을 구하다, 가가날, 2019, p 118-123)
이에야스 휘하의 73,000명과 히데요시 휘하의 27,000명 등 10만 명은 후방군이었다.
조선 침략 총사령관은 19세의 우키다 히데이에였다. 주3) 선봉은 34세의 고니시 유키나가와 30세의 가토 기요마사였고, 수군장은 구키 요시타카와 도도 다카토라였다.
특히 고니시 유키나가는 55명의 통역을 각 군에 배치시키고 자신은 10명의 통역을 거느렸다. (김성한, 7년 전쟁 2권 전쟁의 설계도, 산천재, 2012, p 187-188)
다음은 조선의 상황이다.
1592년 2월에 조선 조정은 대장 신립(申砬)과 이일(李鎰)을 보내어 병비(兵備)를 순시하도록 하였다. 이일은 충청도와 전라도로 가고, 신립은 경기도와 황해도로 갔다가 한 달 뒤에 돌아왔다.
그러나 순시하며 점검한 것은 점검(點檢)한 것이 활과 화살과 창과 칼뿐이었고, 각 고을들도 모두 형식적으로 법을 피하기만 하였다.
신립은 본래 잔인하고 포악하다고 일컬어졌으므로 수령들이 두려워하여 주민들을 동원하여 길을 닦고 공장(供帳)하는 비용도 대신의 행차와 같이하였다. 당시 조야(朝野)에서는 모두 신립의 용력과 무예를 믿을 만하다고 하였고 신립 자신도 왜노(倭奴)들을 가볍게 여겨 근심할 것이 못된다고 생각했는데, 조정에서는 그것을 믿었다. (선조수정실록 1592년 2월1일 1번째 기사)
이 사실은 류성룡의 〈징비록 〉에도 적혀 있다. 이를 읽어보자.
“임진년 봄의 일이다. 신립과 이일을 각각 보내어 지방의 군비를 점검하게 했다. 이때 이일은 충청도와 전라도로 가고, 신립은 경기도와 황해도로 갔다. 그들은 한 달 뒤에 돌아왔으나 조사한 것이라고는 겨우 활 화살 창 칼 같은 것 뿐이었다. 군이나 읍에서는 문서상으로만 법에 저촉되지 않게 갖췄고, 달리 방비하는 좋은 방책은 없었다.
신립은 평소부터 성질이 잔인하고 사납다는 소문이 있었다. 가는 곳마다 사람을 죽여 자기의 위엄만 세우려 하였다. 수령들은 그가 두려워 백성들을 동원하여 길을 닦고, 또 매우 융숭하게 대접하는 것이 대신의 행차보다 더욱 극진했다.
이들은 4월 1일에 서울로 돌아와 임금에게 복명하였다. 이 날 신립이 나의 집을 방문했다.
내가 신립에게 물었다.
“멀지 않아 변고가 생기면 공이 마땅히 그 일을 맡아야 할 텐데 공이 생각으로는 오늘날 적의 형세로 보아 그 방비가 충분하나요?”
내 물음에 신립은 간단하게 대답했다.
“그건 걱정할 필요가 없습니다.”
내가 말했다.
“그렇지 않소. 예전에는 왜적이 창·칼만 믿고 있었지만, 지금은 조총과 같은 우수한 병기가 있으니 가볍게 생각할 일이 아니요”
신립은 황급히 말했다.
“비록 조총이 있다고는 하나 그 조총이라는 게 쏠 때마다 사람을 맞힐 수 있겠습니까?”
내가 다시 말했다.
“태평세월이 너무 길었소. 그래서 병사들은 겁이 많고 나약해졌으니 급변이 일어날 때 그에 항거하기가 매우 어려울 것이외다. 내 생각으로는 몇 해 뒤 사람들이 군사 일에 익숙해진다면 난리를 수습할 수 있겠으나 지금 같아서는 매우 걱정스럽소.”
그래도 신립은 전혀 반성하거나 깨달은 기미 없이 돌아가고 말았다.
(유성룡 지음 · 김문수 엮음, 징비록, 2009, p 48-49)
신립은 선조가 가장 사랑하는 인빈(仁嬪) 김씨가 낳은 아들 신성군(?~1592)의 장인이었다. 신성군은 장차 세자가 되리라는 것이 당시의 중론이어서 신립은 매우 오만불손했다.
한편 3월 3일에 선조는 김성일(金誠一)을 경상우병사로 삼았다. 당시 조대곤이 노병(老病)으로 체직되자 특지(特旨)로 김성일을 대신하게 한 것이다. 대체로 성일은 항상 말하기를 ‘왜노는 틀림없이 침략해 오지 않을 것이며 온다 해도 걱정할 것이 못된다.’고 하였으며, 또 차자(箚子)를 올려 영남에서 성을 쌓고 군사를 훈련시키는 폐단을 논하였다. 그런데 경상 감사 김수(金睟)가 장계하기를 ‘성을 쌓는 역사에 대해 도내(道內)의 사대부들이 번거로운 폐단을 싫어한 나머지 이의(異議)를 제기하는 바람에 저지되고 있다.’ 하였으므로, 선조가 이 때문에 김성일이 논한 것을 곧지 못하다고 하여 마침내 이런 임명이 있게 된 것이다.
비변사가 ‘김성일은 유신(儒臣)이라서 이러한 때에 변방 장수의 직임에는 적합하지 않다.’고 아뢰었으나 선조는 윤허하지 않았다.
(선조수정실록 1592년 3월 3일 2번째 기사)
# 임진왜란 일어나다.
1592년 4월 13일 오전 8시, 고니시 유키나가의 제1군 1만 8,700명을 태운 왜선 7백여 척이 대마도를 출발했다. 여기엔 5천 명의 군사를 거느린 대마도주 소 요시토시도 포함되어 있었다. 소 요시토시는 고니시의 사위로서 일본 사신으로 조선을 여러 번 다닌 바 있다.
왜군은 오후 5시경 부산포에 상륙했다. 왜선을 맨 먼저 발견한 곳은 가덕도의 응봉 봉수대였다. 봉수대는 즉시 보고했다.
“13일 오후 5시경, 대략 90여 척의 왜선이 가덕도 남쪽에서 부산포를 향하여 항해 중인데 그 뒤를 계속 따라오고 있습니다.”
이 보고는 곧바로 경상도 군영에 알려졌다. 그런데 부산 앞바다에서 왜선을 막아야 할 경상좌수군(좌수사 박홍)은 아예 출동하지 않았다.
부산 첨사 정발은 13일 오후에 왜선이 바다를 덮어올 때 절영도(부산시 영도구)에서 사냥을 하다가 조공하러 오는 배라 여기고 대비하지 않았다. 박동량은 〈기재잡기 〉에서 “정발이 어제 취한 술이 깨지 않아 조공선(朝貢船)이라 여기고 염려하지 않았다가 왜선이 가까이 오면서 총을 연달아 쏘니 당황하여 진영으로 돌아왔다”고 적고 있다.
급히 성에 들어온 정발은 방어할 태세를 갖추고, 군민(軍民)들이 동요하지 않도록 하였다.
조선군의 저지가 전혀 없자 왜군은 의아했다. 배에서 하룻밤을 잘 자고 나서
고니시 유키나가는 14일 이른 새벽에 부산진 첨사 정발에게 길을 빌려달라고 요구했다. 당시 6백 명으로 부산진을 지키고 있던 정발은 서울의 임금에게 물어보겠다고 답했다. 이러자 고니시는 곧장 부산진성을 공격했다.
왜군은 삽시간에 성을 에워싸고 성 밖 높은 곳에 올라가 ‘하늘을 나는 새도 맞힌다’는 조총(鳥銃 일본은 철포라 부름)을 비오듯 쏘아댔다. 정발은 서문(西門)을 지키면서 싸웠지만 조총 앞엔 무력했다. 부산성은 한나절 만에 함락되었고, 정발은 적의 탄환에 맞아 전사했다.
이러자 경상 좌수사 박홍은 아예 성을 버리고 언양으로 달아났다. 이어서 왜군은 군대를 나누어 서생포와 다대포(부산시 사하구)를 함락시켰는데, 다대포 첨사 윤흥신이 대항하여 싸우다가 죽으니 바닷가 군현(郡縣)의 군사들은 모두 소문을 듣고 도망쳤다.
부임한 지 2개월 된 경상우수사 원균도 왜적이 거제도로 온다는 풍문만으로 전함을 모두 침몰시키고 남해에서 육지로 올라가려 했다.
(선조수정실록 1592년 5월 1일)
주1) 1591년 12월 4일에 히데요시는 관백 자리를 히데쓰구에게 넘기고 자기는 태합(太閤)이 되어 조선과 명나라 정벌에만 전념했다.
주2) 와카자카 야스하루는 1592년 7월 8일 한산해전에서 이순신에게 패한 왜장이다.
주3) 우키타 히데이에는 히데요시가 대권을 잡기 전에 좋아 지낸 과부의 아들이었다. 히데요시는 대단한 미인인 어미에 반하여 10세의 우키다를 오카야마(岡山)에 봉하여 57만 4천 섬의 큰 제후로 삼았다. (김성한, 7년 전쟁 2권 전쟁의 설계도, p 168-169)
(참고문헌)
o 기타지마 만지,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조선침략, 경인문화사, 2008
o 김성한, 7년 전쟁 2권 전쟁의 설계도, 산천재, 2012
o 김영진, 임진왜란 2년 전쟁 12년 논쟁, 성균관대학교 출판부, 2021
o 사토 데스타로 외 지음·김해경 옮김, 이순신 홀로 조선을 구하다, 가가날, 2019
o 유성룡 지음·이민수 옮김, 징비록, 을유문화사, 20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