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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밭에 있는 작물에 손 대거나 밟지 말라. 우물물 한 바가지라도 함부로 손대지 말라. 함부로 남의 집에 들어가지 말라. 아녀자를 희롱하지 말라. 겁탈한 자는 효수에 처할 것이다. 굶어서 쓰러진 자를 발견하거든 보고하라." 나주 의병군들의 군기를 엄정하게 세우고 백성을 보호하는 임무를 명확히 한 김천일이다. 노환으로 누워만 지내던 참봉 이광익이선조의 행재소를 찾아 죽겠다고 나선다. 고령인 데다 몸도 성치 않은 노인이 나주 의병군에게 힘을 보태려는 의지와 충정이 대단하다. 행군 중에 가난한 외딴집 노파에게 곡식을 주고간 김천일의 의기, 이광익에게 잠자리를 제공하고 기어이 아침을 짓는 노파의 온정이 감격스럽다.
훌륭한 스승 밑에 훌륭한 제자, 문인이면서 무술을 연마한 이유가 스승의 가르침 때문이었군요. 병든 몸으로 죽음을 각오하고 임금의 거처 행재소까지 가겠다고 따라나선 이광익의 충심이 대단합니다. 당시 강직한 선비정신을 보는 듯 합니다. 또 낯선 사람이 찾아와 하루 밤 묵겠다고 청하니, 거절하지 않고 극진히 대접하고 아침밥까지 챙겨주는 시골집의 인심에 마음이 따뜻해집니다.
출정하는 길에 장성농악꾼들 고부군수의 죽창후원 정읍에 양민들이 함지에 곡식을 들고나와 의병들의 장도에 후원하는 모습에 가슴이 뭉클하다. 김천일의 도성을 향해 고을을 지날때마다 아녀자를 희롱하거나 민폐를 끼치지 않도록 세심한 지휘로 나주의병군의 명예를 손상치 않으려고 단속한 모습과 각 고을을 지날때마다 환호와 응원하는 모습들의 상상이 볼만하다. 태인에 도착하여 아버지처럼 의지했던 스승에게 거병을 고하기 위해 위패를 모셔 논 남고서원을 찾아가 절하는 모습과 일재 이항선생이 별세하자 벼슬을 버리고 태인으로 달려가 통곡을 하며 여러 제자들과 함께 장례를 치루고, 스승님을 기리기 위해 남고서원을 세웠다는 점에 김천일의 남다른 충효정신에 감탄하지 않을 수 없다. 나주목사 이경록 광주목사 권율 동복현감 황진 등이 항전을 제대로 한 번 해보지도 못하고 패장이 된 모습에 안타까운 생각이 든다. 김천일의 외숙인 이광익이 가족들의 만류에도 거동이 불편한 몸으로 김천일이 지휘한 의병들에 힘이 되어주어야 한다며 도성을 향해 뒤를 따라간 이광익의 충정심에 고개가 숙여진다. 본 소설을 실감있게 연재해가는 정찬주 작가님께 찬사를 보냅니다.
조선 참선비의 길 참으로 안타깝기 그지없다. 내전으로 다져진 일본이 전쟁을 준비하는 사이에 조선과 명나라는 정치혼란과 체제모순이 증폭되어 제대로 대처하지 못하였다. 조선은 조광조 이후 선조 때에는 수많은 인재들이 정승에서 언관까지 장악하였으나 제대로 된 정치를 펼치기는커녕 지식인 특유의 소심함으로 자잘한 문제도 심각한 갈등을 야기하였다. 거기에 주요 관직을 둘러싼 경쟁이 맞물리면서 당쟁이 심화되어 이이 등의 개혁정책이 제 때 추진되지 못하고 좌초되었다. 거기에 조선 건국 후 2백년이 지나면서 체제가 변형되고 해이해져 국방체제의 부실이 심화되었다. 거점 방어에 주력하는 진관체제가 을묘왜변과 니탕개의 난 등으로 일종의 지역 방어 개념인 제승방략 체제로 전환되었다. 전쟁초기의 희생을 감수하더라도 집중된 전력으로 승부한다는 것인데 임진왜란 초기 적의 진격 속도가 워낙 빠른데다 허술해진 체제의 틈을 파고들어 초기의 전황을 더욱 어렵게 만들었다. 대외적으로도 명나라에는 사대, 일본에는 교린이라는 안이한 자세로 성종 이후 통신사도 보내지 않고 15세기 신숙주가 지은 해동제국기가 지침서였으니 말해 무엇 하겠는가? 가장 기본적으로 일본의 상황은 물론 지도자인 토요토미 히데요시 조차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였고 일본의 군사력인 군인 수와 주력 무기인 조총조차 과소평가 하였으니 필패는 병가지상사였다. 정발, 송상현, 윤흥신의 분전은 물론이고 조선의 대표 장수인 이일, 신립조차 대패하였으니 긴급히 조직된 오합지졸에 불과한 이광의 군대가 모래성처럼 무너져 내린 것은 당연한 귀결인지도 모른다. 그나마 김천일 , 고경명, 조헌, 곽재우 등의 의병이 각지에서 왜군을 괴롭히고, 이순신이 제해권을 장악함으로써 명의 파병과 더불어 조선의 패망을 면할 수 있었다. 김천일의 물 한바가지를 얻어먹어도 백성들에게 폐를 끼치지 않으려는 행동은 민심이 천심임을 실행한 것이리라. 노구에도 불구하고 의병의 길을 따라나서는 이광익의 충정이 놀랍다.
삼도근왕군. 전라도 병력 사만 명에다 경상도 충청도 병력 일만 명을 더하여 오만의 대군.숫자로 봐서 전라도 근왕군이나 다름 없으니 전라도 순찰사 이광이 총지휘를 맡는 것이 당연하였으리라.그러나 오만 대군이 한양 근처에도 가보지 못하고 왜군 일천 명에게 대패하고 퇴각한다.이광의 삼도근왕군에 대하여는 논할 가치조차 없으므로 더 이상 언급하지 않겠다. 다만 귀에 익은 나주목사 이경록, 광주목사 권율, 동복현감 황진 등은 얼마나 억울하였을꼬.싸움다운 싸움 한번 못해보고 패장의 일원이 되었으니 기가 막혔으리라.또한 삼도근왕군의 희소식을 손꼽아 기다리던 김천일도 그 소식을 듣고 억장이 무너졌을 것이다.주민들에게 사소한 피해도 주어서는 안된다고 틈날 때마다 주의를 주며 삼도근왕군의 뒤를 따른 김천일.기가 막힐 사람이 또 한사람 있었으니,김천일의 외숙 이광익이다. 그는 나주의병이 출병한 삼일만에 집을 나서 의병군의 뒤를 따른다.거동조차 어려운 환자로서 가족들의 애닯은 만류에도 불구하고 의병들에게 힘을 보태고, 죽더라도 임금과 조금이라도 가까운 곳에서 죽기로 맹세한 이광익에게 절로 고개가 숙여진다.한가지 재미있는 것은 김천일이 먼저 가면서 외딴집 노파에게 식량을 주고 갔다는 것이다.외숙 이광익이 뒤따라 오리라는 것을 예견이라도 하였을까?그래서 외숙이 오면 잘 좀 해달라는 무언의 부탁이라도 하였던 것일까?외딴 그 집에서 하룻밤을 자고 아침밥까지 얻어 먹고 힘을 얻었다니 우연이라고만 치부할 수는 없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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