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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 城을 넘을지라도 절대로 조선 사람의 魂과 氣魄은 넘지 못할 것이다>라는 윤흥신 장수의 포효가 귓가에 맴도는 것 같다. 死即生, 生即死를 외친 이순신 장군의 그 심정과 무엇이 다르랴. 죽음을 눈 앞에 둔 상태에서도 아내와 자식에 대한 사랑, 은혜를 입은 인물에 대한 의리, 그리고 임금을 향한 충심이 절절하다. 역사를 알아 가는 것이 이런 인물 한 분 한 분의 숭고한 가치를 발견해 가는 것이다. 중과부적의 형세임에도 굽히지 않고 상대의 허를 노리고 승전을 이룬 대목을 통쾌하게 감상하였다. <선생님 감사합니다. 잘 읽었습니다.>
遠征 고군분투하여 임진왜란 첫 승리를 거둔 다대진첨절제사 윤흥신을 보니 여러 가지로 느끼는 바가 많다. 중종의 제1계비 장경왕후의 조카이고 천하를 쥐락펴락했던 대윤 윤임의 아들이다. 하지만 을사사화 때 역적으로 몰려 멸문지화의 위기에서 겨우 목숨만 부지하였으나 임진왜란 다대진첨절제사로써 동생 윤흥제와 민관군을 독려하여 힘껏 싸우다 순절함으로써 집안의 명예를 일으켜 세웠으니 백절불굴의 정신이 놀랍다 아니 할 수 없다. 나는 가끔 세계지도를 볼 때 엉뚱한 상상을 하곤 한다. 호주(오스레일리아)가 우리 땅이었으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이런 생각. 중국의 정화는 영락제의 명을 받아 1405년부터 1430년까지 (조선 태종과 세종 집권기) 일곱 차례에 걸쳐 18만 5,000km에 달하는 대원정을 하였다. 동아프리카는 물론 아메리카를 콜롬부스 보다 먼저 도달했다는 설과 함대 일부가 오스트레일리아에 도달했다는 설도 있다. 1768년 제임스 쿡은 엔데버 호를 인솔하여 뉴질랜드를 거쳐 호주 동해안을 탐험하여 영국 영토로 선언하고 1771년 귀국하였다. 1788년 1월 31일 죄수 736명과 하급관리들을 태운 배 13척이 영국으로부터 호주에 도착하였다. 프랑스 혁명 1년 전이고 중국은 청 건륭제 때이다. 우리 나라로는 조선 정조 12년 이고 1789년에는 당대의 인재 다산 정약용이 식년문과 갑과에 급제하였다. 그리하여 1789년에는 한강에 배다리(舟橋)를 준공시키고 1793년에는 성화주략을 지침서로 수원성을 설계하였고, 축성 시에는 거중기, 녹로 등 신기재를 특수하게 고안 사용하고 동서양 축성술을 집약하여 완성하였다. 개혁 군주 정조의 정치력과 와 천재적 인물 정약용의 기술력이 합쳐져 호주를 개척하였으면 하는 능히 상상해봄직한. 위인들의 생애는 우리를 깨우치느니 우리도 숭고한 삶을 살 수 있다 떠날 때에 남겨두고 가는 시간의 모래 위에 찍힌 발자국들 그 발자국들은 아마도 또다시 인생의 장엄한 바다를 항해하다가 외로이 좌초된 형제들에게 길이 되어 용기를 심어 줄 것이다 -A Psalm of Life (인생찬가) Henry wadsworth Longfellow(1807~1882)
부산진성이 무너지고 첨사 정발의 순절했다는 소식을 들은 다대포첨사 윤흥신은 수륙 선제공격을 감행하기로 결심한다. 위험하지만 지리에 밝다는 장점을 살려 매복과 화공을 병행한 작전으로 이룬 첫 승전이었다. 부산진 성에서 희생된 장졸들의 복수를 한 것 같아 통쾌하였다. 32년 관노라는 파란만장하고 기구한 삶을 살았던 다대진첨사 윤흥신의 충성으로 세운 결기가 장하다.
8번째이야기 첫승전, 윤흥신첨사,다대진을 지키기 위해 육전에서는 매복전술로 해전은 선제화공으로 왜군공격조의 허리를 오합지졸로 만들어 버리고 왜선들을 한꺼번에 불살라버리겠다는 수륙작전, 나이든 권관부터 장졸들까지 부산진성의 패배를 죽음으로 앙갚음하겠다는 의지로 전투가 시작도고, 결국 굴강의 바다가 왜군의 피로 붉게 물들었다 부산진성 전투에서 죽은 장졸들의 복수를 해내고 일일이 군관들과 포옹하는 윤흥신의 늠름한 어깨가 넓고 듬직하게 보인다 8편 잘읽었습니다
을사사화로 집안이 풍비박산되고 32년동안이나 관노살이를 했던 파란만장한 윤흥신의 삶이 기구합니다. 다행히 늦게라도 복권되어 다대포 첨사로 목숨을 걸고 일전을 하는 모습에서 그의 굳은 결기가 느껴집니다. 왜군이 해전에만 강할거라고 생각하는 경상좌수사 박홍과 첨사들, 적에 대한 정보가 전혀 없이 짐작으로만 작전을 세우고 전쟁을 하다니 나라가 위태로운 지경인데, 너무 안이한 당시 장수들의 태도가 안타깝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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