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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나운 봄비>편을 흥미 있게 읽었다. 새로 부임한 무인 출신 나주목사의 공무추진을 대하며 느낌이 있다. 예나 지금이나 사람마다 갖는 그 사람의 살아온 생애 이력과 관심사는 크게 다르지 않다는 것이다. 변방에서 나라를 지켜온 그였기에 가장 우선되는 관심은 국방인 듯하다. 김천일 부자의 대화에서 당시의 정세 상황이 엿보인다. 세상에 보여지는 사람들 간의 관계는 보여지는 그대로 이지만 그것을 바라보는 눈과 판단은 각자 다르기에 이야기는 다양하게 전개될 것이고 시공의 흐름에 따라 변화무쌍한 스토리가 독자의 호기심을 강하게 자극할 것 같다. 역사의 한 인물의 일대기를 통해 많은 저변에 깔린 사실을 알게 되고 느끼게 되어 읽을수록 행복감이 든다. 목사고을 나주를 대표하는 인물, 전라도를 대표할 만한 의병장에 대하여 배워가는 기쁨이 쏠쏠하다. 많은 목사고을 백성들이 나주곰탕처럼 깊이 있는 이 기쁨의 맛을 느꼈으면 좋겠다. 다음 편이 기대된다.
사나운 봄비 김상건형제의 봄비가 오는 흥룡마을 집에서 명심보감을 읽으며 서로가 마음에 담아둔 구절을 읽고 묵향하는 모습이 떠오른다 나무는 고요하고자 하지만 바람이 그치지 않고 자식은 효도하고자 하지만 부모는 기다려 주지 않는다 하늘은 복록없는 사람을 내지않고 땅은 이름없는 풀을 기르지 않는다 김상곤 효를 이야기하고 김상건은 나라에서 무엇을 할것인가를 명심보감을 통하여 고민을 한다 해안서는 왜구들이 침략을 일삼고 한양서는 정치인들이 당파싸움으로 내우외환이 지속되는 무너져가는 나라, 사나운 봄비에 영산강 강물이 흙탕물로 돌변해 범람하는 모습이 예나 지금이나 다르지는 않습니다
제4회에서는 "인심이란 아침에 다르고 저녁에 다르니 세상 일에 너무 개의치 말거라. 다만 자기가 하는 일이 진실하다면 하늘이 알고 땅도 알아주는 법이다. 나는 너희들이 두꺼비처럼 묵묵히 살고 두꺼비 태도같이 의연했으면 좋겠다" 김천일의 자식들에 대한 훈계를 다시 한 번 되새긴다. 사돈이자 옛친구인 정철의 몰락 앞에서 성혼에게 편지를 쓰는 김천일. 붕당의 병폐를 걱정하고 그 폐해를 막아야한다는 간절한 심중을 이해할 수 있었다. 곤경에 처한 정철을 위하면서도 어려워하는 그가 매사 신중하고 언행이 무거웠던 사람임을 다시 생각케 한다. 서두에 새로 나주목사에 부임한 이경록의 얘기에서는 녹둔도에서 함께 여진족을 섬멸하던 이순신, 김억추, 선거이 같은 낯익은 인물들이 들춰져 반갑고 새로웠다. 이경록이 무장답게 나주에 부임하자마자 군적과 무기고를 점검하고 무너진 성을 보수하는 한편 군졸을 훈련시키는 등 이전 목사들과 사뭇 다른 행태를 보이는 것은 당연하다. 다만, 농번기에 양민 농사꾼들을 사역에 동원하는 일은 좀더 신중했어야 한다는 생각이다. 5회를 기다린다.
4회 '사나운 봄비'는 그 내용이 마치 오늘날 우리나라 상황과 많이 닮은 것 같다.여러가지 좋지 못한 징조들이 계속되어도 위정자들이 이를 깨닫지 못하고 당파싸움만 계속하다가는 유유히 흐르던 영산강이 돌변하여 범람하게 되고 그 피해는 고스란히 양민들에게 돌아간다.남해안에 왜구들의 약탈이 점점 심해지는데 조정에서는 동인과 서인간에 싸움이 극에 달한다.정철에의해 참담한 피해를 당한 동인들이 참 치사한 방법으로 반격을 시작한다.동인의 영수 이산해와 유성룡이 세자 책봉 문제로 덫을 놓아 정철을 걸려들게 만들었다.선조는 신성군을 가장 총애하면서 은근히 조정에서 신성군을 천거해주기를 바라고 있는데정철은 그 내막을 모른채 광해군을 천거하여 선조의 눈밖에 나고 탄핵을 받는다. 같은 서인이며 친구이자 사돈간인 김천일은 정철이 실각으로 끝나지 않으리라 걱정한다. 정철이라면 이가 갈리던 동인들이 가만 있을리 만무하기 때문이다. 신성군은 이제 10살이고 장남인 임해군은 도저히 군주가 될 자격이 없는 형편없는 사람.그러니 상식적으로 광해군이 세자가 되어야 하 는것이 마땅하다는데 반대할 이유가 없는 상황. 코로나19가 전국적으로 기승을 부리고 있고 역대급 태풍이 한반도에 상륙하였건만의사들은 이러한 긴급사태를 이용하여 파업을 계속하면서 정부로부터 항복을 받아내려 하고 있고정부에서 방역에 실패하여놓고 그 책임을 미통당과 전광훈에게 전가하려 하고 있다고 떠드는 사람들.그때나 지금이나 다를게 하나도 없다. 붕당의 폐해를 누누히 강조해오던 김천일은 정철에게 직접 하기 곤란한 말을 성혼에게 편지로 대신한다.'소나기는 피하고 보라'는 성현들의 지혜를 본받아 누가 뭐라고 꼬드겨도 은인자중하시라.그러다 보면 분명 좋은 날이 올 것이다. 이 말을 꼭 대신해서 전해달라는 것이 편지 내용.이 편지 하나만 보더라도 김천일의 신중함과 선견지명을 엿볼 수 있을 것 같다.
우리는 선조와 전라도에 대해 잘 못 가지고 있는 생각이 많은 듯해 여기 지면을 이용해 서울교대 함규진교수의 “선조, 나는 이렇게 본다” 책을 요약해 올립니다. 길게 씁니다. 양해 바랍니다. 혹시 오류가 있더라도 양해해주시고 책과 논문을 읽은 것을 요약한 것이고 제 의견이 아님을 밝혀드립니다. 이런 지면을 이용한 것에 대해 정찬주 작가님께서 양해를 부탁드립니다. 1. 선조 선조는 세종이나 정조와 같은 천재적인 인간도 아니다. 태종과 같은 결단력과 추진력, 비범함도 없다. 영조와 같은 불굴의 의지를 갖지도 못했다. 그렇다고 일탈과 투쟁으로 나라를 비탄으로 몰고 간 연산군이나 구중궁궐 속으로 숨어버린 광해군도 아니다. 선조는 최선을 다했으나 최선만이 다가 아니라고 믿는 사람이다. 바로 백성이 닥친 현실이 바로 실용이고 이 실용정신이 우대를 받아야 한다고 믿었던 군주이다. 그는 성실했다. 그리고 박하게 인재를 내치지 않았고 천하의 인재를 불렀다. 다시는 그처럼 많은 인재의 별 무덤이 조선시대 내내 나오지 않았다. 원래는 그는 인재를 찾고 그들을 대우했고 절대 내치지 않았다. 이순신도 마찬가지다. 이순신이 나올 수 있던 토양에 선조가 있었다. 다른 국왕이라면 이순신과 같은 인재가 버틸 수 있었을까. 선조는 아무리 신하라 해도 자신의 과오를 시인할 줄 아는 사람이다. 이순신에게 삼도수군통제사를 재임명하면서 내린 교지에 “과인이 무슨 말을 하리요. 무슨 말을 하리요.”라고 자책하며 본인의 잘 못 결정한 것을 사과한다. 조선 어느 왕이 신하에게 자신을 자책하며 상대를 인정하며 신하의 이해를 구한 왕은 없다. 오직 선조만이 가능했다. 선조는 바로 우리의 모습이다. 오늘날 우리는 본인이 잘 못 한 경우에 자신의 과오를 인정하고 바로 사과의 말을 하는경우가 있다. 그러면 상대는 자신의 판단에 따라 상대를 용서도 하고 벌을 주기도 한다. 상대에게 의사를 묻고 그 처분을 달게 받는 것이다. 바로 이런 것이다. 선조는 권위와는 다른 사람이다. 자주 병세에 눕고 깨어나기를 반복한 명종은 재위22년(1567) 죽음을 맞이하였다. 그는 죽을 때 까지도 그 희망의 끈을 놓지 않았다. 하지만 그 걸로 끝이었다. 이에 이준경이 중전에게 대계를 청하자 중전이 “을축년에 정한 바대로 한다며 하성군으로 밀어 붓쳤다.” 이 것이 후에 선조를 정통성 결여로 두고두고 괴롭힌다. 선조는 16세의 나이로 즉위한다. 처음에는 인순왕후가 수렴청정을 한다. 하지만 이듬해가 되자 인순왕후는 선조가 정사 처리가 능숙해졌다고 판단해 더 이상 수렴청정을 하지 않았다. 선조는 즉위한 뒤 “널리 인재를 구한다.”는 국정방침이 조선 하늘에 별처럼 인재가 쏘다지고 전쟁을 이긴 원동력이 된 것이다. 선비에서부터 무신까지 심지어 의병장들이 벌떼처럼 들고 일어난 것은 바로 인재를 보는 철학이 있는 선조의 덕이라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 이순신도 마찬가지다. 선조22년(1589)1월21일 선조는 불차탁용하겠다면서 신료들에게 유능한 장수를 천거하라고 한다. 그는 조부 중종 재위 시 (1555년) 전라도 영암, 흥양(고흥)을 쑥대밭으로 만들고 해안50리까지 백성들이 살 수 없을 만큼 약탈을 했었다. 그리고 1587년2월 흥양과 가리포 해안에 침공하여 녹도 총관 이대원을 죽이는 등 변란을 일으킨다. 이 사건을 임란의 징조로 보았다. 선조는 1989년 비변사에게 명한다. 조정의 신료들은 평소 눈여겨 봐왔던 장수를 추천한다. 이순신은 선조의 기대에 부흥하여 임란 1년2개월 전 여수의 전라좌수사로 부임하여 전선을 수리하고 제작하고 거북선을 개발하여 건조하여 전쟁에 대비하였다. 이산해 현직 영의정과 정언신 전 우의정 두 분이 이순신을 천거한다. 이산해는 당시 대세인 북인의 거두였고 정언신은 니탕개의 난이 일어났을 때 현지에서 토벌을 총 지휘한 순찰사였다. 당시에 그는 이순신이 백의종군을 하였을 때 이순신과 만난 적이 있어서 이순신의 인물됨을 잘 알고 있었다. 선조는 융통성이 있는 사람이다. 그는 성리학 공부를 하는 중에 틈틈이 궁궐 밖에서 읽었던 역사책도 계속 탐독하고 있었다. 그래서 세상 운수라는 것이 좋기도 하고 나쁘기도 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고 융통성 없이 원칙만 고집한다는 것이 반드시 좋은 것만 아니라는 것도 알고 있었다. 선조의 마지막 인사 방침은 널리 인재를 구하는 교서에 있는 것처럼 한 치의 장점만 있더라도 반드시 기용한다는 것이다. 성리학과 선비 정치의 원칙에서는 아무리 재능이 뛰어나더라도 인품이 부족하면 쓰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 재능은 아까운 것이다. 그래서 뛰어난 재능을 가진 사람이라면 조금 무리해서라도 나라를 위해 아낌없이 쓰도록 하자는 것이 선조의 생각이자 일관된 행동 철학이었다. 선조는 한 번 잘못한 사람, 다소 흠이 있는 사람이라도 재기할 기회를 주려고 애썼다. 불교에 빠져 한 때 승려가 된 이이나 이순신이 두 번의 백의종군 할 기회를 준 것이나 정여립의 난에 유성룡이 연루되어 벼슬에서 스스로 물러나려 했으나 선조는 끝내 그를 잡고 놓아 주지 않았다. 선조31(1598) 이순신이 보성에서 수군을 폐하고 육군에 합류하라는 선조의 교지를 읽고 불가함의 장계를 올렸을 때 선조는 그에게 다시 기회를 준다. 이는 조선의 다른 어떤 왕도 신료도 상상할 수 없는 사건이다. 물론 국가 존망이 걸린 전시 상황이였기에 가능한 점도 있긴 하다. 왕명을 거부하고 다시 장계를 올리는 것은 조선 어느 시기와 어떤 이도 감히 할 수 없었고 하지 않았지만 이순신은 선조에게 자신의 처지와 방어의 가능함을 피력한 것이다. 이순신은 정읍현감으로 갔다가 무려 6계단이나 높은 전라좌수사 정3품으로 승진된다. 조선은 전라도세가 조선 팔도 중 거센 시대였다. 태조 이성계의 4대조인 목조의 관향이 전주여서인지 몰라도 전라도 출신을 200여 년간 중용한다. 1400-1600년 동안 호남 출신 당상관의 숫자가 무려 30%에 이른다. 그래서 이순신의 전라좌수사는 당시 조선 5수사 중 최고의 자리였다. 비록 5관5포로 관할 지역은 작았지만 중요도에 있어서는 최고였다. 이 역시 이치에 맞지 않으니 철회하라는 상소가 빗발쳤다. 하지만 선조는 사람을 알아 봤다. 이순신도 허준과 마찬가지로 오래토록 자신의 재능이 빛을 보이지 못하는 동안에도 꾸준히 병서를 읽고 생각하고 탐독한 ‘깊은 내적 내공’이 축척되어 있었다. 그래서 세상이 자신을 필요로 해주는 시기에 국가를 구한 것이다. 전형적인 대기만성형이었다. 선조는 그 내공을 꿰뚫어 보았고 사람을 알아보고 기회를 준 것이다. 만일 선조가 오늘날의 대기업 총수가 되었다면 그는 천하의 인재를 다 모이게 하여 세상에서 가장 크고 강력하고 탄탄한 회사를 만들었을 것이다. 선조는 조선의 인재를 다 모아 그들이 그 재능을 꽃 피우게 한 탁월한 왕이었다. 선조는 절대 감정을 내세우지 않았다. 당대는 선악과 도덕률이 머리에 가득차서 부정직함, 몸가짐이 단정치 않음. 말이 예의에 벗어남, 못된 성품을 가짐, 예법에 어긋나는 관례 등으로 처벌을 주장하는 시대였다. 선조는 이에 대해 단호했다. 의혹과 예절의 어긋남, 잘못의 구체성 결여, 확인되지 않은 설 등은 과감히 배척하였다. 선조의 시대는 인물 넘쳐나는 시대였다. 조선왕조 어느 시대보다 많은 인재가 출현했다 사라졌다. 그 시절보다 많은 인물이 나고 지는 시대는 없었다. 세종이나 정조가 꽃 피운 인재의 시대보다 훨씬 더 풍성하게 인물의 풍년이 든다. 이는 선조가 근본적으로 인재를 널리 구하고 아끼고 대접하고 그들의 의견을 경청했고 국사에 반영했기 때문이다. 그 시대를 대표하는 인물은 다음과 같다. 서애 유성룡, 남명 조식, 미암 유희춘, 율곡 이이, 고봉 기대승, 퇴계 이황과 오리 이원익, 한음 이덕형, 백사 이항복, 우계 성혼, 여헌 장현광, 소재 노수신, 약봉 서성, 유천 한준겸, (토정비결)의 토정 이지함, (홍길동전)의 교산 허균 등이 있다. 또한 송강 정철의 (사미인곡),(속미인곡),(성산별곡)과 같은 불후의 문학 작품을 남겼다. 그는 담양출신으로 1587년 기축옥사를 주도한 과오로 인해 평생 동인의 주적이 되었다. 그의 문하생인 석주 권필도 명문장가였다. 또한 그림의 신사임당, 명필의 한석봉, 한문 4대가, 선조대의 8문장가 등이 있었다. 여성으로서는 신사임당을 비롯 허난설헌과 이옥봉이 조선의 대표적인 여성 문학인이고 미암 유희춘의 부인 덕봉 송씨 또한 유명하였다. 불교계는 서산대사 휴정, 사명대사 유정이 의병장으로 유명하다. 의병장으로는 광주의 김덕룡과 의령의 곽재우와 장흥의 고경명 ,나주의 김천일 등이 유명하다. 2. 전라도와 조선 조선시대는 전라도의 시대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선조까지 전라도 출신의 당상관이 조선팔도 중에서 무려 30%까지 차지하였다. 선조 역시 “과인은 서인이다.”라고 공인하기까지 했다. 물론 지금의 동서의 개념은 아니었지만 서인 중에 호남을 위시한 기호지방(경기, 충청, 전라)의 인재가 많았었다. 임란 중 전주 본을 빼고 조선왕조실록이 모두 불타고 없었다. 한양과 충청의 충주, 경상도의 성주 그리고 전주에 보관하였다. 전주 본만 빼고 모두 소실되었다. 전주의 사관들은 자신의 조상의 기록이라고 생각하고 목숨을 걸고 깊은 산 속으로 밤에 옮김으로서 조선전기의 왕들의 기록을 지금까지 볼 수 있게 하였다. 조선왕조 내내 왕조는 전주에 단 한 명의 죄인도 유배보내지 않았다. 이는 전주가 조선왕조의 성스러운 고향이었다는 것을 상징하고 왕에게는 자신의 뿌리의 시작이 전주임을 모두 인식하고 있었다는 반증이다. 또한 조선시대 전주출신 이씨성의 문과 급제자가 약 850명으로 2위인 안동 권씨360명보다 약 500여명 앞선 압도적1위를 차지한다. 이는 태조 이성계의 후손이기 때문이다. 이는 총 급제자의 약7%나 된다. 조선은 전라도의 왕조이다. 500년 조선왕조는 전라도의 인재가 쏘다진 시대였다. 전라인은 조선왕조에 깊은 유대가 있으며 애정이 있어야 할 것으로 본다. 전라도 의병의 특성은 전라도를 떠나 전국으로 흩어져 의병활동을 한 것이다. 이는 타 지역의 의병이 자기 향토를 방어한 것과 다르다. 이는 전란이 호남을 피해갔기 때문이다. 김천일은 서애 유성룡이 쓴 징비록에도 잘 나와 있다. 징비록에 유일하게 나온 의병장인 김천일은 원래 문인이었기에 문반인 유성룡도 잘 알아서인 것 같다. 임란과 재란 중 전국의 의병 수 중 절반 이상이 호남출신의 의병이다. 타 지역에서 알고 있는 것과는 달리 전라도 출신의 의병이 압도적으로 많았다. 이는 후대에 호남을 “호국도”라고 불리는 계기가 되었다. “호국도”라고 불러도 조금도 지나침이 없는 압도적인 숫자이다. 각 목과 군에서 의병의 숫자가 2000명대에 이르는 곳이 담양과 나주가 있고 보성과 순천 등은 천여 명에 가깝다. 이런 숫자는 타 지역에서는 보기 힘든 숫자이다. 전라도 대신 다른 도명을 쓴다면 “호국도”라고 불러도 좋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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