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기리
- 등록일 2020.04.16 18: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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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등록자 관리자
내기 1리 (내정마을)
지석강을 등에 업고 시설원예로 고소득 올리는 농업마을
동쪽으로는 비행장으로 건설된 도로가 광주쪽으로 끝없이 펼쳐진다. 서쪽으로는 내상마을과 그 너머에 금천면이 있다. 남쪽으로는 국도 1호선의 옛 도로와 신도로가 자리하며 북쪽으로는 지석강이 흐른다. 마을은 대부분 미맥농사에 종사하지만 국도 1호선 주변 마을들의 특징인 시설하우스를 이용한 특작물의 재배가 주된 소득원이다.
두산면사무소의 터가 있었던 곳
마을의 지명이 최초로 보이는 기록은 1912년의 이다. 이 기록에 의하면 남평군에 속한 두산면(頭山面) 17개 마을 가운데 한마을인 내정리(內汀里)로 표기되어 있다. 이후 1914년 지방행정구역개편으로 산포면에 속한 등정리의 자연마을로 소속되고 현재에 이르게 된다. 당시 마을의 위에서부터 아래로 냇물이 흐르고 있었다고 한다. 냇물은 고무래 정(丁)자모양으로 돌아갔는데 냇물을 중심으로 마을이 형성되어 있어 물가 정(汀)자를 붙여 내정(內汀)이라고 불리게 됐다고 한다. 한편 이 곳은 내정마을 외에도 여러 자연마을이 있었다. '외목재', '아랫거리', '빈터'로 불리는 곳들이 그 곳이다. '외목재(外木材)'는 면내에서 가장 높은 곳에 자리하고 있으며 소가 왼쪽으로 누운 형상이라 한다. 마을 이름은 마을 뒷산의 소나무가 많은 재 밑에 이룬 마을이 있어 그렇게 붙여졌다고 한다.'빈터'는 일제강점기까지 비어 있던 곳이었으나 새로 집들을 짓고 살자 마을이 형성되었다. '아랫거리'는 마을의 아래쪽에 위치한 곳이다. 마을에는 기억할만한 여러 지명들이 전해오고 있었다. 1914년 행정구역 개편이 되기 전 두산면사무소 터가 있었던 '머리매', 한국전쟁 때까지 산포지서가 있었던 지서터도 있었다. 또한 평야지역인 특성때문인지 들판에 관한 지명과 지석강에 관한 지명도 전해오고 있었다. 자갈밭이었다는 '갱본들', 모래땅이어서 그냥 물이 빠져나가기에 붙여졌다는 '간대들', 그리고 '과구리들'과 '무순굴'이 있었고 '망매산'은 포구에 배를 매는 곳이었다고 한다. 여기에 마을의 형국을 알려주는 지명으로 지석강 내에 자리한 '매산봉'이 있었는데 용이 여의주를 물고 있는 지세라고 한다. 성씨의 구성은 김해김씨가 가장 많은 분포를 보이고 내정마을을 형성했다는 전주이씨, 외목재 마을을 형성했다는 이천서씨, 그리고 밀양박씨, 달성배씨, 청주한씨 등이 비슷한 분포를 보이며, 그 외에 여러 성씨들이 모여 살고있다.
조선후기에 형성된 마을로 추정
여러 자연마을이 모여 있음에서 알 수 있듯이 각 마을들은 각기 형성 시기가 달랐다. 그러나 마을의 형성에 관한 기록은 전하지 않는다. 마을에 전하는 이야기와 1989년 간행된 에 의하면 먼저 내정마을은 전주이씨에 의해 마을이 형성됐다고 한다. 함평에서 살던 전주이씨 정근(汀根)이 가세가 기울자 식솔들을 데리고 이곳에 오게 되었고 마을이 형성되었다고 한다. '외목재'는 이천서씨에 의해 마을이 형성되었다는데 경기도 이천에 살던 서강인(徐江仁)이 경주최씨 딸을 맞아 이곳에 정착한 것이 계기가 되었다고 한다. 이와 관련해 1912년의 에 이미 내정마을이 기록되고 있어 내정마을은 늦어도 조선후기에는 마을로서 기틀을 잡은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외목재'는 기록에 나타나지 않는다. '빈터'는 일제강점기까지 주민들이 거주하지 않았다는 것으로 미루어 최근에 마을이 형성된 것을 알 수 있다. 이런 점들은 두산면사무소가 자리하고 있었고 한국전쟁 전까지 산포지서가 있었떤 두산면의 중심지였음을 생각해 볼 때 의 기록보다는 훨씬 이전에 마을이 형성됐음을 추정해 볼 수 있다. 하지만 평야 지역인데다 풍부한 농업용수는 이 곳에 일찍부터 주민들이 거주할 수 있는 최적의 조건임은 부인할 수 없다. 또한 주민들은 360년전에 마을이 형성됐다고 증언하고 있다. 마을이 형성된 후 마을은 차츰 번창했고 1800년대에는 면의 중심지로서 역할을 했던 것을 확인할 수 있다
내기2리(내상마을)
산포면의 최서단 마을
동쪽으로는 두 곳의 진입로와 내정마을이 자리한다. 서쪽으로는 금천면과 경계하고 남쪽으로는 국도1호선을 넘어 매성리 쌍산마을이 있다. 북쪽으로는 신기마을과 그 너머로 지석강이 흘러간다.
조선중기에는 여러 마을이 있었던 듯
마을의 지명이 최초로 보이는 기록은 1789년의 이다. 이 기록에는 남평현에 속한 두산면 11개 마을 가운데 한 마을인 내상(內上)이 나온다. 이로 미루어 이미 조선 중기에는 마을로서 그 형태를 갖추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1912년의 에는 두산면 17개 마을에 속한 내상리가 나오고 1914년 행정구역개편으로 산포면 내기리에 속해 현재에 이른다. 내상이라는 마을 이름은 내기리에서도 가장 높은 곳에 자리하고 있어서 붙여졌다는데 그 전에는 두산리(頭山里)라 불렀다고 전해온다. 두산리라는 이름은 마을의 뒷산인 재봉의 머리. 즉, '머리메'라 해서 곧 한문으로 두산(頭山)으로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이와 관련해 1789년의 에 두산리와 관련된 것으로 보이는 '외두산(外頭山)'이 있어 주목된다.
여기에 내상의 아랫마을이었을 것으로 보이는 '내하촌(內下村)'과 지금도 내상마을의 북쪽 마을을 일컫는 '신기(新基)'등도 기록에 있어 조선중기에는 여러 마을이 이 곳에 자리하고 있었던 것을 알 수 있다. 하지만 1912년의 기록에는 '외두산'이 나타나지 않고 '내하촌'은 1914년 행정구역 개편 후에는 보이지 않는다. 이 같은 이유는 '외두산'은 조선 후기에, '내하촌'은 일제강점기 마을로서 기능을 상실한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한편 이들 마을 이름과 함께 '지금실', '여시골', '온머리골' 등의 지명도 있다. 현재는 내상과 신기마을로 내기2리를 구성하고 있다. 신기(新基)라는 지명은 새로운 터에 자리잡은 마을이라 그렇게 붙여졌다고 한다. 마을간의 의식과 생활문화의 접촉, 그리고 동질성 등은 내상마을을 중심으로 이루어지고 있다. 성씨의 구성은 청주한씨와 김해김씨가 가장 많은 분포를 보이고 있고, 전주이씨, 밀양박씨 등 여러 성씨가 살고 있다.
조선중기에는 두산면(頭山面)의 중심 마을로 자리
앞서 밝혔듯이 내상마을은 조선중기 여러 마을이 모여있떤 큰 마을이었을 뿐 아니라 두산면의 중심지였다. 하지만 이들에 대한 자세한 기록은 전하지 않는다. 다만 1989년 간행된 에 내상말은 청주한씨(淸州韓氏) 성인(成仁)이 화순에서 마을의 위치가 좋은 이 곳에 정착했다고 표기되어 있다. 신기마을은 남원윤씨 상한(尙漢)이 남원에서 이 곳으로 옮겨와 정착했다고 했다. 하지만 이들 의 기록에 대한 확인 방법은 없었다.
근대의 시범마을 선정
근대화 과정에서의 새마을 운동은 이 마을에도 큰 변화를 가져왔다. 먼저 1970년도 전라남도 지정 새마을운동사업 시범마을로 선정된 것이다. 이외에도 마을 안길 벙비와 지붕 개량등이 행해져 마을의 현대화를 촉진시켰다. 현대화로 생활은 편리해졌지만 그에 따른 부작용도 따랐다. 마을에 전승되던 민속놀이가 사라진 것이다. 먼저 '재봉'에서 행하던 기우제가 사라졌다. 그리고 이웃 마을과 선의의 경쟁을 벌이던 줄다리기 또한 없어졌다. 그러나 매년 정월대보름에 행하는 당산제는 아직까지 행해지고 있어 주민들의 단합의 장이 되고 있다.
청주한씨 영모재(永慕齋) 남아 있어
마을에는 청주한씨의 재실인 영모재(永慕齋)가 있다. 정면 4칸, 측면 3칸의 팔작지붕의 골기와 건물인 이 재실은 청주(淸州) 한영수(韓榮洙) 등 4위(位)의 재실이다. 1914년 건립했고 1974년에 개수를 거쳤다. 재실 안에는 3기의 비(碑)가 있다
지석강을 등에 업고 시설원예로 고소득 올리는 농업마을
동쪽으로는 비행장으로 건설된 도로가 광주쪽으로 끝없이 펼쳐진다. 서쪽으로는 내상마을과 그 너머에 금천면이 있다. 남쪽으로는 국도 1호선의 옛 도로와 신도로가 자리하며 북쪽으로는 지석강이 흐른다. 마을은 대부분 미맥농사에 종사하지만 국도 1호선 주변 마을들의 특징인 시설하우스를 이용한 특작물의 재배가 주된 소득원이다.
두산면사무소의 터가 있었던 곳
마을의 지명이 최초로 보이는 기록은 1912년의 이다. 이 기록에 의하면 남평군에 속한 두산면(頭山面) 17개 마을 가운데 한마을인 내정리(內汀里)로 표기되어 있다. 이후 1914년 지방행정구역개편으로 산포면에 속한 등정리의 자연마을로 소속되고 현재에 이르게 된다. 당시 마을의 위에서부터 아래로 냇물이 흐르고 있었다고 한다. 냇물은 고무래 정(丁)자모양으로 돌아갔는데 냇물을 중심으로 마을이 형성되어 있어 물가 정(汀)자를 붙여 내정(內汀)이라고 불리게 됐다고 한다. 한편 이 곳은 내정마을 외에도 여러 자연마을이 있었다. '외목재', '아랫거리', '빈터'로 불리는 곳들이 그 곳이다. '외목재(外木材)'는 면내에서 가장 높은 곳에 자리하고 있으며 소가 왼쪽으로 누운 형상이라 한다. 마을 이름은 마을 뒷산의 소나무가 많은 재 밑에 이룬 마을이 있어 그렇게 붙여졌다고 한다.'빈터'는 일제강점기까지 비어 있던 곳이었으나 새로 집들을 짓고 살자 마을이 형성되었다. '아랫거리'는 마을의 아래쪽에 위치한 곳이다. 마을에는 기억할만한 여러 지명들이 전해오고 있었다. 1914년 행정구역 개편이 되기 전 두산면사무소 터가 있었던 '머리매', 한국전쟁 때까지 산포지서가 있었던 지서터도 있었다. 또한 평야지역인 특성때문인지 들판에 관한 지명과 지석강에 관한 지명도 전해오고 있었다. 자갈밭이었다는 '갱본들', 모래땅이어서 그냥 물이 빠져나가기에 붙여졌다는 '간대들', 그리고 '과구리들'과 '무순굴'이 있었고 '망매산'은 포구에 배를 매는 곳이었다고 한다. 여기에 마을의 형국을 알려주는 지명으로 지석강 내에 자리한 '매산봉'이 있었는데 용이 여의주를 물고 있는 지세라고 한다. 성씨의 구성은 김해김씨가 가장 많은 분포를 보이고 내정마을을 형성했다는 전주이씨, 외목재 마을을 형성했다는 이천서씨, 그리고 밀양박씨, 달성배씨, 청주한씨 등이 비슷한 분포를 보이며, 그 외에 여러 성씨들이 모여 살고있다.
조선후기에 형성된 마을로 추정
여러 자연마을이 모여 있음에서 알 수 있듯이 각 마을들은 각기 형성 시기가 달랐다. 그러나 마을의 형성에 관한 기록은 전하지 않는다. 마을에 전하는 이야기와 1989년 간행된 에 의하면 먼저 내정마을은 전주이씨에 의해 마을이 형성됐다고 한다. 함평에서 살던 전주이씨 정근(汀根)이 가세가 기울자 식솔들을 데리고 이곳에 오게 되었고 마을이 형성되었다고 한다. '외목재'는 이천서씨에 의해 마을이 형성되었다는데 경기도 이천에 살던 서강인(徐江仁)이 경주최씨 딸을 맞아 이곳에 정착한 것이 계기가 되었다고 한다. 이와 관련해 1912년의 에 이미 내정마을이 기록되고 있어 내정마을은 늦어도 조선후기에는 마을로서 기틀을 잡은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외목재'는 기록에 나타나지 않는다. '빈터'는 일제강점기까지 주민들이 거주하지 않았다는 것으로 미루어 최근에 마을이 형성된 것을 알 수 있다. 이런 점들은 두산면사무소가 자리하고 있었고 한국전쟁 전까지 산포지서가 있었떤 두산면의 중심지였음을 생각해 볼 때 의 기록보다는 훨씬 이전에 마을이 형성됐음을 추정해 볼 수 있다. 하지만 평야 지역인데다 풍부한 농업용수는 이 곳에 일찍부터 주민들이 거주할 수 있는 최적의 조건임은 부인할 수 없다. 또한 주민들은 360년전에 마을이 형성됐다고 증언하고 있다. 마을이 형성된 후 마을은 차츰 번창했고 1800년대에는 면의 중심지로서 역할을 했던 것을 확인할 수 있다
내기2리(내상마을)
산포면의 최서단 마을
동쪽으로는 두 곳의 진입로와 내정마을이 자리한다. 서쪽으로는 금천면과 경계하고 남쪽으로는 국도1호선을 넘어 매성리 쌍산마을이 있다. 북쪽으로는 신기마을과 그 너머로 지석강이 흘러간다.
조선중기에는 여러 마을이 있었던 듯
마을의 지명이 최초로 보이는 기록은 1789년의 이다. 이 기록에는 남평현에 속한 두산면 11개 마을 가운데 한 마을인 내상(內上)이 나온다. 이로 미루어 이미 조선 중기에는 마을로서 그 형태를 갖추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1912년의 에는 두산면 17개 마을에 속한 내상리가 나오고 1914년 행정구역개편으로 산포면 내기리에 속해 현재에 이른다. 내상이라는 마을 이름은 내기리에서도 가장 높은 곳에 자리하고 있어서 붙여졌다는데 그 전에는 두산리(頭山里)라 불렀다고 전해온다. 두산리라는 이름은 마을의 뒷산인 재봉의 머리. 즉, '머리메'라 해서 곧 한문으로 두산(頭山)으로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이와 관련해 1789년의 에 두산리와 관련된 것으로 보이는 '외두산(外頭山)'이 있어 주목된다.
여기에 내상의 아랫마을이었을 것으로 보이는 '내하촌(內下村)'과 지금도 내상마을의 북쪽 마을을 일컫는 '신기(新基)'등도 기록에 있어 조선중기에는 여러 마을이 이 곳에 자리하고 있었던 것을 알 수 있다. 하지만 1912년의 기록에는 '외두산'이 나타나지 않고 '내하촌'은 1914년 행정구역 개편 후에는 보이지 않는다. 이 같은 이유는 '외두산'은 조선 후기에, '내하촌'은 일제강점기 마을로서 기능을 상실한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한편 이들 마을 이름과 함께 '지금실', '여시골', '온머리골' 등의 지명도 있다. 현재는 내상과 신기마을로 내기2리를 구성하고 있다. 신기(新基)라는 지명은 새로운 터에 자리잡은 마을이라 그렇게 붙여졌다고 한다. 마을간의 의식과 생활문화의 접촉, 그리고 동질성 등은 내상마을을 중심으로 이루어지고 있다. 성씨의 구성은 청주한씨와 김해김씨가 가장 많은 분포를 보이고 있고, 전주이씨, 밀양박씨 등 여러 성씨가 살고 있다.
조선중기에는 두산면(頭山面)의 중심 마을로 자리
앞서 밝혔듯이 내상마을은 조선중기 여러 마을이 모여있떤 큰 마을이었을 뿐 아니라 두산면의 중심지였다. 하지만 이들에 대한 자세한 기록은 전하지 않는다. 다만 1989년 간행된 에 내상말은 청주한씨(淸州韓氏) 성인(成仁)이 화순에서 마을의 위치가 좋은 이 곳에 정착했다고 표기되어 있다. 신기마을은 남원윤씨 상한(尙漢)이 남원에서 이 곳으로 옮겨와 정착했다고 했다. 하지만 이들 의 기록에 대한 확인 방법은 없었다.
근대의 시범마을 선정
근대화 과정에서의 새마을 운동은 이 마을에도 큰 변화를 가져왔다. 먼저 1970년도 전라남도 지정 새마을운동사업 시범마을로 선정된 것이다. 이외에도 마을 안길 벙비와 지붕 개량등이 행해져 마을의 현대화를 촉진시켰다. 현대화로 생활은 편리해졌지만 그에 따른 부작용도 따랐다. 마을에 전승되던 민속놀이가 사라진 것이다. 먼저 '재봉'에서 행하던 기우제가 사라졌다. 그리고 이웃 마을과 선의의 경쟁을 벌이던 줄다리기 또한 없어졌다. 그러나 매년 정월대보름에 행하는 당산제는 아직까지 행해지고 있어 주민들의 단합의 장이 되고 있다.
청주한씨 영모재(永慕齋) 남아 있어
마을에는 청주한씨의 재실인 영모재(永慕齋)가 있다. 정면 4칸, 측면 3칸의 팔작지붕의 골기와 건물인 이 재실은 청주(淸州) 한영수(韓榮洙) 등 4위(位)의 재실이다. 1914년 건립했고 1974년에 개수를 거쳤다. 재실 안에는 3기의 비(碑)가 있다
- 담당부서 산포면 총무
- 전화 061-339-35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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