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진리
- 등록일 2020.04.16 15: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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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등록자 관리자
총 면적은 165여만㎡으로 일제 1914년 행정구역 개편 때, 시랑면(侍郞面), 동강리(東江里), 누저리(樓底里), 사직리(士直里), 백하리(栢下里), 풍호리(楓湖里), 신정리(新丁里)를 합해 신정과 풍호의 첫 자를 따서 신풍리라 칭하다. 1996년 3월 15일자로 회진리(會津里)로 변경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 회진리는, 1구 동촌(東村)·사직(社稷), 2구 백하(柏下)·정촌(丁村)마을로 고성되어 있다.
회진리 1구 동촌(東村)마을
마을형성은 백제시대때는 두힐현이라 하였으며, 통일신라시대는 회진현이라 하는 곳으로서 역사가 깊은 곳임. 지명유래는 회진성의 동남쪽에 해당한다 해서 생긴 이름이다. 본래 '동말'이라 하다가 한자화 해 동촌이라 했다. 마을은 다시 풍호, 누저, 탑골로 나뉘는데, 풍호는 영산강 가까이에 있어 생긴 이름이고, 누저는 회진성 바로 남쪽 밑이라는 뜻이거나 종가집과 부조묘가 있어서 붙인 성 싶다. 탑골은 전에 관음사 탑이 있었던 곳임을 알 수 있고 바로 북동쪽 고개 넘어에 간음자골 마을이 있었는데 관음사(觀音寺)란 절이 있었다고 전한다. 마을내 주요 유물 및 시설물로는 영모정(지방기념물 제112호), 기오정, 귀래정임붕유허비, 백호임제선생기념비, 백호임제선생기념관 등이 있다. ☞ 사직(社稷)마을, 마을형성은 백제시대때는 두힐현이라 하였고, 고려초에는 회진현이라 하여 당시 양씨, 평택임씨, 신씨, 조씨 등이 거주하였으며 조선초에 나주임씨 중시조 감무공(임탁)이 개성에서 지금 본 마을로 들어와 현제 23대를 이어오고 있다. 지명유래는 회진현의 사직단이 있었던 곳이라 해서 불려지게 되었다. 295번지 대밭에 고인돌로 추정되는 바위에서 제사를 지냈다는 얘기가 전하는 바 사직단터로 여겨진다. 사직단은 나라의 토신(土神)과 곡신(穀神)에 대해 임금을 대신해 고을수령이 제사를 지낸 곳으로 고을마다 중심지 근처에 있었다. 마을내 주요 유물 및 시설물로는 나주임씨 대종가, 회진성(지방기념물 제87호), 나주임씨참판공부조사당, 영회정, 매곡재, 사직제, 마을회관 등이 있다.
회진리 2구 백하(柏下)마을
마을형성은 백제시대 때는 두힐현이라 하였고, 통일신라 및 고려초에는 회진현이라 하였으며, 조선초에 나주임씨가 들어와 살았음. 지명유래는 잠애산 아래에 있다는 뜻으로 지었다. 잠애산(蠶崖山)을 한자로 풀어 누에머리와 같다고 풀고 있으나 사실 회진성에서 연원을 찾을 수 있다. 즉 성(城)은 우리 토박이 말에서 '잣'이 된다. 따라서 잣뫼를 잠뫼로 부르다가 산을 붙일 때 잠애산이 된 것이다. 그런데 잣을 한자로 다시 옮길 때 잣나무 백(柏)자로 옮기면서 백하마을로 된 성 싶다. 마을내 주요 유물 및 시설물로는 입석(높이 140cm, 폭 120cm 크기의 액막이 용), 당산나무(450년된 나주시 보호수), 임윤택소장 고문서(금강십일인계안, 죽오랑무서 등 다수), 회진국미학교(폐교), 백하정, 마을회관 등이 있다. ☞ 정촌(丁村)마을, 마을형성은 옆마을 백하에서 살던 사람들이 결혼하여 분가하면서 차차 마을이 형성되었음. 지명유래는 샘이 있는 마을 즉 샘골로 한자로 표기하면서 샘정(井)자를 써서 정촌이라 하였는데 후에 한자를 바꾸어 정촌(丁村)으로 하였다. 꼬두샘과 새샘이 매우 역사가 깊으며 수량이 풍부했다. 마을에서는 본래 새터(新丁)라 불렀는데 마을이 점차 커지면서 정촌이라 하였다고 전한다.
회진리 1구 동촌(東村)마을
마을형성은 백제시대때는 두힐현이라 하였으며, 통일신라시대는 회진현이라 하는 곳으로서 역사가 깊은 곳임. 지명유래는 회진성의 동남쪽에 해당한다 해서 생긴 이름이다. 본래 '동말'이라 하다가 한자화 해 동촌이라 했다. 마을은 다시 풍호, 누저, 탑골로 나뉘는데, 풍호는 영산강 가까이에 있어 생긴 이름이고, 누저는 회진성 바로 남쪽 밑이라는 뜻이거나 종가집과 부조묘가 있어서 붙인 성 싶다. 탑골은 전에 관음사 탑이 있었던 곳임을 알 수 있고 바로 북동쪽 고개 넘어에 간음자골 마을이 있었는데 관음사(觀音寺)란 절이 있었다고 전한다. 마을내 주요 유물 및 시설물로는 영모정(지방기념물 제112호), 기오정, 귀래정임붕유허비, 백호임제선생기념비, 백호임제선생기념관 등이 있다. ☞ 사직(社稷)마을, 마을형성은 백제시대때는 두힐현이라 하였고, 고려초에는 회진현이라 하여 당시 양씨, 평택임씨, 신씨, 조씨 등이 거주하였으며 조선초에 나주임씨 중시조 감무공(임탁)이 개성에서 지금 본 마을로 들어와 현제 23대를 이어오고 있다. 지명유래는 회진현의 사직단이 있었던 곳이라 해서 불려지게 되었다. 295번지 대밭에 고인돌로 추정되는 바위에서 제사를 지냈다는 얘기가 전하는 바 사직단터로 여겨진다. 사직단은 나라의 토신(土神)과 곡신(穀神)에 대해 임금을 대신해 고을수령이 제사를 지낸 곳으로 고을마다 중심지 근처에 있었다. 마을내 주요 유물 및 시설물로는 나주임씨 대종가, 회진성(지방기념물 제87호), 나주임씨참판공부조사당, 영회정, 매곡재, 사직제, 마을회관 등이 있다.
회진리 2구 백하(柏下)마을
마을형성은 백제시대 때는 두힐현이라 하였고, 통일신라 및 고려초에는 회진현이라 하였으며, 조선초에 나주임씨가 들어와 살았음. 지명유래는 잠애산 아래에 있다는 뜻으로 지었다. 잠애산(蠶崖山)을 한자로 풀어 누에머리와 같다고 풀고 있으나 사실 회진성에서 연원을 찾을 수 있다. 즉 성(城)은 우리 토박이 말에서 '잣'이 된다. 따라서 잣뫼를 잠뫼로 부르다가 산을 붙일 때 잠애산이 된 것이다. 그런데 잣을 한자로 다시 옮길 때 잣나무 백(柏)자로 옮기면서 백하마을로 된 성 싶다. 마을내 주요 유물 및 시설물로는 입석(높이 140cm, 폭 120cm 크기의 액막이 용), 당산나무(450년된 나주시 보호수), 임윤택소장 고문서(금강십일인계안, 죽오랑무서 등 다수), 회진국미학교(폐교), 백하정, 마을회관 등이 있다. ☞ 정촌(丁村)마을, 마을형성은 옆마을 백하에서 살던 사람들이 결혼하여 분가하면서 차차 마을이 형성되었음. 지명유래는 샘이 있는 마을 즉 샘골로 한자로 표기하면서 샘정(井)자를 써서 정촌이라 하였는데 후에 한자를 바꾸어 정촌(丁村)으로 하였다. 꼬두샘과 새샘이 매우 역사가 깊으며 수량이 풍부했다. 마을에서는 본래 새터(新丁)라 불렀는데 마을이 점차 커지면서 정촌이라 하였다고 전한다.
- 담당부서 다시면 총무
- 전화 061-339-37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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