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곡리
- 등록일 2020.04.17 10: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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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등록자 관리자
용곡리는 면소재지에서 남으로 약 4㎞정도 떨어진 곳에 위치한다. 봉황에서 세지간 지방도로를 따라 가다가 맷돌바위에서 용제산과 월봉산쪽으로 가는 간선도로로 꺾어 들어가면 운곡리와 마주한 용곡리의 자연마을들이 나타난다. 월곡 신기 서당골 양곡 미사 용정 이곡 등 크고 작은 7개의 자연마을로 이루어진 용곡은 본래 남평군에 속한 죽곡면 지역으로 1914년 행정구역 개편에 의해 용정과 월곡의 이름을 따서 용곡리라 이름하게 되었다.
마을을 둘러싼 큰 산으로는 용제산 월봉산 미륵봉이 있는데 마을의 분포를 보면, 용제산 밑에는 미사 용정 이곡, 월봉산 밑에는 서당골 월곡 신기, 미륵봉 밑에는 양곡이 각각 마을을 형성하는 있다. 이중 용곡1구는 월곡 양곡 지양동 서당골 신기마을이며, 용곡2구는 미사 용정 이곡이 해당된다. 총 84가구에 인구는 316명으로 대부분이 농업을 주업으로 하고 있는 평범한 농촌마을이다. 이들 마을 중 월곡은 달성배씨, 양곡은 진주강씨가 각각 동족마을을 형성하고 있으며 나머지 마을은 고른 성씨 분포를 보이고 있다. 본서의 서술에서는 7개의 자연마을이긴 하지만 그 성격상 동일생활권을 한데묶어 신기와 양곡, 서당골은 지양동, 월곡과 함께 그리고 미사와 용정, 이곡도 한 마을로서 묶어서 기술한다.
월곡마을
월곡 마을은 지금으로부터 450여년 전에 설촌된 마을로 면소재지에서 남쪽으로 약 4㎞ 떨어진 곳에 위치한다. 봉황~세지간 지방도로를 따라 가다가 맷돌바위에서 월봉산쪽으로 약 15분을 걸어가면 마을이 나타난다. 마을 뒤로는 월봉산이 있으며, 마을앞에 평야가 펼쳐져 있고, 그 너머로는 운곡리가 위치하고 있다. 여기서는 동일 생활권이면서 지형적으로 분리되어 있는 서당골과 새터를 함께 소개하고자 한다.
옛날 운곡마을에 속한 12마을 중 한 마을이라고 전해지는 월곡마을이 처음으로 문헌에 나타난 것은 1912년 조선총독부에 의해 편찬된 「지방행정구역명칭일람」이다. 이 기록에 의하면 월곡은 죽곡면의 27개 마을 중 한 마을로 남평군의 관할하에 있었던 것만을 확인할 수 있다. 그러나 이곳에서 동족마을을 형성하고 있는 달성배씨(達城裵氏) 입향연대가 16세기 초반경으로 올라가는 것을 보아 최소한 450여년 전에 이 마을이 형성되었음을 추정해 볼 수 있다. 이 마을의 한가운데에는 쌀밥(이팝)나무가 있는데, 전해오는 말에 의하면, 500년 정도 되었다고 하는 것도 이것을 뒷받침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리고 개인에 관계된 문헌이나 비문들 속에서 이 지역을 운곡리로 표기한 것으로 보아 월곡은 먼 옛날 운곡소와 관계가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이와 같은 이유로 마을의 한 주민은 운곡마을의 대표적 성씨였던 도강김씨와 옛날 많은 혼인관계가 있었음을 전한다.
그후 1914년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월곡마을은 미사, 용정, 양곡 등과 함께 합쳐 용곡리라는 명칭으로 봉황면의 관할권에 들어가게 된다. 즉 이 당시의 개편이 현재의 행정구역과 같은 체제로 바뀌게 된 것이다. 이 마을에 최초로 터를 잡은 성씨는 달성배씨로 월곡마을의 입향조는 문양공 현경(玄慶)의 21세손 배진(裵縉)(1469~1553)이다. 배진의 부친은 휴제(休薺) 배상형(裵尙炯)(~1553)으로 畢齋 김종직의 문인이며, 1474년(성종 5) 문과에 급제하여 정주목사를 역임하였다. 그는 청백리로서 널리 이름을 알려졌으나 연산군이 폭정을 하자 벼슬을 버리고 고향인 화순으로 낙향하였다. 그후 상형의 외아들인 진(縉)이 학문에 힘써 능성훈도(綾城訓導)에 까지 올랐으나 1505년(연산군 11) 부친이 세상을 떠난 후 월곡마을로 옮겨와 정착하였다. 그후 월곡마을은 동족마을을 이루며 현재까지 살아오고 있는데 입향조로부터 20대째에 이르고 있다.
월곡마을은 동일 생활권이면서도 서로 다른 지명을 갖고 있는 월곡.서당골.새터의 3개 자연촌락으로 구성되어 있다. 3개의 마을 중 가운데 위치하고 있는 마을이 월곡이며, 동으로는 서당골이 있고, 서쪽으로는 새터가 있다. 월곡의 양측으로 조그만 야산이 있어 이를 구분하는데, 이 세 마을의 지명유래를 보면 다음과 같다. 먼저 월곡마을은 지형조건이 동쪽으로는 덕룡산, 남쪽으로는 용제산이 두르고, 이 두 산의 사이에 월봉산 (달돋이)이 있는데, 그 아래에 마을을 형성하고 있어 월곡리라 하였다 한다. 현재는 세 마을 중 가장 큰 마을을 형성하고 있다.
다음으로는 옛날 서당이 있어 붙여진 이름으로 ‘서당골'이 있는데, 과거에는 10여호가 살았으며 문중제각인 ‘원모제'가 있다. 한편 달성배씨가 월곡마을에 입향한 이후 새로 터를 잡았다고 하여 부른 지명이 ‘새터'인데 이곳은 월곡마을과 분리되는 경계선이었던 야산을 개간하여 밭으로 이용하고 있다. 월곡마을의 입석신앙으로는 고인돌이 있었는데 농지정리 후에 마을입구에 세워두었다. 원래는 나무 밑에 있었다고 하며 선돌은 세 군데 세워져 있는데 마을에서 바라보았을 때 좌(높이 : 134, 둘레 : 301)와 우(높이 : 95, 둘레 : 107)이고 하나는 사라지고 없다. 그리고 이 월곡마을에서는 연자방아와 들돌, 그리고 이팝나무(수령 : 600, 둘레 30m)가 있다.
이 마을의 인물로는 배범수가 있다. 그는 운곡리, 용곡리 초등학교생들이 봉황남초등학교까지 4㎞를 걸어서 등하교 함으로써 어려움이 많자, 1967년 현재의 창룡국민학교 건립추진위원장으로 선임되어, 그후, 12년간이나 물심양면으로 학교발전에 공이 많아 나주군수, 나주군교육장으로부터 표창을 여러차례 받았다. 마을의 자생조직으로는 1928년에 월곡 주민의 침녹을 도모하기 위해 조직된 위친계와 1979년의 부인계가 있다. 마을의 인구는 남자 86명, 여자 92명으로 총 178명에 이르고, 총 면적은 0.64㎢인데, 이중 전 0.09㎢, 답 0.18㎢, 임야 0.35㎢, 기타 0.02㎢가 해당된다. 마을의 35가구 모두 농사를 짓고 있으며, 주산물은 쌀, 콩이다. 특작물로 무와 고추를 재배하고 있고, 성씨로는 달성배씨 32호, 이천서씨 1호, 강화최씨 2호가 있다.
마을의 민속
위친계
1928년 조직된 것으로 웃어른을 공경한다는 취지에서 만든 것이다. 가구당 1명이 가입하도록 하고 있는 이 계에서는 마을에 초상이 나면 조의금을 전달한다. 그리고 친목을 도모하는 기능을 한다. 이 계는 1년에 한번씩 정기총회를 해서 계의 운영경비에 따른 회비를 결정하고 거출한다.
동계
새마을 지도자로 있던 배인택이 1979년 저소득농가 정부지원비 무이자 2천만원으로 마을의 공동이익을 도모하기 위해 주민들과 협의하여 조직했다이 계에서는 마을의 대소사를 논의하고 결정하는 기능을 가진다. 1986년 마을 안길을 포장할 당시, 정부보조금이 부족하자 이 계에서 충당을 했다. 1986년에 건립된 노인정의 운영도 동계에서 맡고 있다. 또한 마을의 행정적 사업을 보조하고 추진하기 위하여 동계 내에 개발위원회를 조직하여 운영하고 있다.
부인계
1979년 조직된 것으로 마을 안에 거주하는 부인들의 친목을 도모하기 위해 조직하였다. 조직 후 저축의 장려, 생활필수품 공동구입 등으로 마을사람들의 생활향상을 위하여 노력하였다.
양곡마을
양곡마을은 면소재지에서 남쪽으로 약 4㎞ 떨어진 곳에 위치한다. 봉황에서 세지로 가는 지방도로를 따라 가다가 맷돌바위에서 월봉산 쪽으로 10분을 걸어가면 처음으로 나타나는 마을이다. 마을 뒤로는 미륵사가 있는 미륵봉이 있으며, 마을앞의 언덕 밑이 된다고 해서 어덕굴이라 불리는 농경지가 펼쳐져 있으며, 그 너머로는 운곡리와 마주하고 있다. 이 마을에서 월봉산 쪽으로 약 5분을 더 가면 월곡 마을이 위치하고 있는데, 그 사이에 조그마한 야산이 있어 경계가 된다. 그리고 마을의 동남쪽으로는 용곡리 미사마을과 용정마을이 위치하고 있다. 양곡마을은 현재 10여 가구가 살고 있는 조그만 마을로 운구관통 12마을(운곡리 12마을) 중 한 마을이라 전하는 것으로 보아 옛날 이 일대에 위치하고 있었던 운곡소와 많은 관련이 있었을 것으로 보이나, 더 이상의 추정자료는 발견되지 않고 있다.
이 마을의 최초 입향성씨는 진주강씨(晉州姜氏)인데, 진주강씨의 입향조는 확실한 자료에 의해 확인되지는 않으나 별제공파(別提公派)의 파조(派祖) 강형수(姜亨壽)(1476~1503)의 4세손인 매촌 강호(1634~ )이다. 그는 영광에서 시연(1602~1638)의 큰 아들로 태어났는데 이유는 알 수 없으나 철천리로 들어왔다고 전한다. 호가 철야 일대에서 세력을 잡고 있던 이천서씨와 혼인한 것으로 보아 그와 관련이 있는 것으로 보이나 더 이상은 밝혀지지 않는다. 그 후 호의 4세손인 주화가 아들을 둘 두었는데 큰아들 두환(斗煥)(1765~ )은 화순 동복으로 이거하였으며 둘째아들 경환(敬煥)은 그대로 봉황에 머물었다.
그러나 경환은 후손을 잇지 못했고, 두환의 다섯 아들 중 재요, 재위, 재윤, 재열 등 4형제가 다시 용곡리 양곡에 들어와 마을을 형성하였다고 한다. 현재 진주강씨는 양곡에 동족마을을 이루며 살고 있는데 호로부터 11대세가 된다. 지형 여건이 월곡마을과 비슷하며, 특히 이 마을은 햇빛이 잘 들고 따뜻한 명당터로서 사람이 생활하기 편리하고 아담한 마을이어서 양지편이라 부르다가 시기는 알 수 없으나 양곡이라 개칭하였다 한다. 지금까지 확인된 바로는 이 마을의 지명이 옛 지리지나 문헌들 속에서 전혀 보이지 않고 있다. 한편 양곡과 관련된 지형, 지물의 이름으로는 방깨-양곡 북쪽에 있는 골짜기, 어덕굴-양곡 앞쪽에 있는 들. 어덕(언덕) 밑이 됨, 작은 방개- 방개의 작은 골짜기, 큰 방개-방개의 큰 골짜기 등이 있다.
한편 마을의 단합과 공동체적 삶의 모습은 동계에서 엿볼 수 있다. 마을이 작긴 하지만 마을의 제반 대소사를 토의하고 결정하기 위해 1960년대에 조직하였다. 한 가구당 한명이 참여하고 있으며, 정기총회는 매년 음력 2월 1일에 개최하고 있다. 창립이후 보람된 사업으로는 동네안길 포장과 공동샘을 건설한 것을 들 수 있다. 동제 등을 비롯한 마을 사람들의 풍요로운 생활을 빌고 액환을 방지하기 위한 민간신앙은 마을이 작아 지내지 않고 있다.
마을에는 마을운영과 사람들간의 친목 도모를 위한 동계가 1960년 조직되었고, 참여인원은 17명이다. 마을의 총 면적은 0.42㎢으로, 전 0.05㎢, 답 0.09㎢, 임야 0.26㎢, 기타 0.02㎢로 이루어져 있으며, 총 인구는 76명이다. 이중 남자는 38명, 여자 38명이다. 마을의 주요 산업은 쌀, 콩이며, 특박물로 고추를 재배하여 농가 소득을 올리고 있다. 마을에 거주하는 주요 성씨로는, 진주강씨 9호, 김해김씨 2호, 달성배씨 2호, 기타 4호가 있다.
미사·용정·이곡마을
용곡리의 미사·용정·이곡마을은 면소재지에서 남쪽으로 약 4.5㎞ 떨어진 곳에 위치한다. 봉황에서 세지간 지방도로를 따라 가다가 맷돌바위에서 용제산쪽으로 25분 정도 가면 먼저 미사마을이 나타나며, 그 바로 우측 마을이 용정마을이다. 미사와 용정마을은 현재 개간하여 밭으로 이용되고 있는 용제산 줄기에서 뻗어내린 조그만 언덕으로 두 마을은 구분된다. 한편 이곡마을은 옛날에 큰 마을이었다고 전하나 현재는 한 가구만이 거주하고 있다. 이곡마을은 미사마을의 동북쪽에 위치한다. 현재 행정구역상 용곡리 2구로 편제되어 있는 이 세 마을은 겉으로 보기에는 서로 다른 자연마을로 인식되고 있으나 실제로는 마을의 운영이나 제반 행사 등을 같이하는 동일 생활권의 마을이라 할 수 있다.
용곡 2구는 용제산 줄기가 뻗어내린 곳에 아담하게 위치하고 있는데, 마을 안에 소나무 등 여러 나무가 많아 경관이 수려하며 주위에서 보면 마을의 형상이 눈에 잘 띄지 않는다. 마을 앞으로는 농경지가 발달해 있고 용제산이 뻗어내린 줄기에는 개간된 밭들이 많다. 실제로 해질녘에 마을을 보면, 용제산의 기운이 마을을 감싸안은 듯 하다. 구전에 의하면 이들 마을이 형성되기 이전에 옥동이라는 마을이 있었다 한다. 옥동은 현재의 미사·용정·이곡까지 이어지는 큰 마을이었다고 하나 근거가 될 만한 자료는 전혀 찾을 수가 없다.
다만 현재 미사마을과 용정마을은 계속 촌락을 이루어 살고 있으며, 이곡마을은 거의 개간되어 밭으로 이용되고 있다. 이 옥동마을에 대한 전설로는 옛날에 큰 마을이었으나 외부에서 상인이나 행인이 들어오면 마을 주민들이 못된 짓을 많이 하였다. 어느날 도사가 나타나서 운곡리 신반에 있는 돌을 깨도록 지시해서 돌을 깨버리자 차츰 마을이 소멸되었다 한다. 서당골과 미사마을 중간에 당산나무가 있는데 이 중심을 옥동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현재 확인할 수 있는 최초의 입향성씨로는 미사마을은 인동장씨(仁同張氏),
용정마을은 원백씨(水原白氏)가 있다. 미사에 입향된 인동장씨는 중조 출암(黜菴) 장전기(1452~1508)의 11세손인 송포 장한고(1726~1807)이다. 본래 인동장씨는 장전기가 여러 벼슬을 거쳐 영돈녕부사에 이르렀으나 연산군의 폭정에 항소하다 무안군 몽탄면 마산리에 유배당하였다.
그후 몽탄면에 계속 정착하여 세거하였는데 출암으로부터 10세손인 윤재(胤載)(1711~1772)대에 이르러 세아들 중 큰아들인 한고(생몰년 미상)가 이유는 알 수 없으나 이 마을로 이주하여 정착, 마을을 형성하였다 한다. 용정마을에 입향한 수원백씨는 백사의(白思義)(1801~1857)이다. 본래 수원백씨는 장흥에 많이 세거하였는데 사의의 조부인 문황(文璜)(1753~1811)이 선전관을 역임한 후 영암군 신북면 모산리로 이거하였다. 그후 손자인 사의가 이유는 알 수 없으나 이곳 용정마을에 들어와 주세거지를 이루었다. 그러나 현재는 모두 도회지로 떠나고 2가구만이 살고 있는 실정이다. 한편 현재 가장 많이 살고 있는 성씨는 김해김씨로 이들 두 성씨보다 후대에 들어와서 마을을 형성하였다.
이들 마을 주민들의 공동체적 삶의 모습은 자생조직에서 찾아볼 수 있다. 미사마을의 자생조직은 1920년에 조직된 위친계와 1976년 부녀친목을 위해 조직된 부녀회가 있다. 마을의 기본현황은 남자 38명, 여자 48명으로 총 86명이 살고 있으며, 총 면적은 0.58㎢로, 전 0.10㎢, 답 0.12㎢, 임야 0.35㎢, 기타 0.01㎢가 해당된다. 마을의 총 가구수 23호가 농사를 짓고 있는데, 주요 산업은 쌀, 보리 재배이고, 특작물로 마늘, 담배, 고추, 양파를 재배하고 있다. 성씨로는 인동장씨 7호, 김해김씨 5호, 진주강씨 3호, 함평이씨 2호, 강릉유씨 2호, 기타 4호가 있다.
한편, 용정마을의 자생조직으로는 1920년에 조직된 위친계와 1976년 조직된 부녀회가 있으며, 마을의 총인구는 71명이다. 이 중 남자 34명, 여자 37명이 살고 있으며, 총 면적은 0.44㎢로, 전 0.09㎢, 답 0.08㎢, 임야 0.25㎢, 기타 0.02㎢가 해당된다. 마을 사람들의 주소득원은 쌀농사이며, 쌀과 함께 보리, 콩 등을 재배하고 있으며, 담배, 고추, 마늘을 특작물로 재배하고 있다. 마을 사람들의 성씨는 전주이씨 7호, 김해김씨 5호, 수원백씨 2호, 수원황씨 3호, 나주임씨 2호, 기타 1호가 있다.
마을의 생활과 민속으로는 동계와 위친계, 부녀회가 있다. 위친계는 1920년에 조직한 것으로 마을 웃어른을 공경하고 잘 모신다는 취지로 결성되었다. 가구당 한명씩 참가하도록 되어있다. 마을에 초상이 나면 조의금을 전달하고 직접 일을 하면서 상부상조한다. 계의 운영경비는 최초 조직당시 갹출하였던 자산금의 증식으로 조달하고 있다 부녀회는 1976년에 조직한 것으로 마을 부인들의 친목도모가 그 목적이다. 회원들끼리 품앗이를 하기도 하고, 상이 나거나 하면 함께 상부상조한다. 민속으로는 기우제, 씻김굿, 조상단지, 입석이 있었다.
마을을 둘러싼 큰 산으로는 용제산 월봉산 미륵봉이 있는데 마을의 분포를 보면, 용제산 밑에는 미사 용정 이곡, 월봉산 밑에는 서당골 월곡 신기, 미륵봉 밑에는 양곡이 각각 마을을 형성하는 있다. 이중 용곡1구는 월곡 양곡 지양동 서당골 신기마을이며, 용곡2구는 미사 용정 이곡이 해당된다. 총 84가구에 인구는 316명으로 대부분이 농업을 주업으로 하고 있는 평범한 농촌마을이다. 이들 마을 중 월곡은 달성배씨, 양곡은 진주강씨가 각각 동족마을을 형성하고 있으며 나머지 마을은 고른 성씨 분포를 보이고 있다. 본서의 서술에서는 7개의 자연마을이긴 하지만 그 성격상 동일생활권을 한데묶어 신기와 양곡, 서당골은 지양동, 월곡과 함께 그리고 미사와 용정, 이곡도 한 마을로서 묶어서 기술한다.
월곡마을
월곡 마을은 지금으로부터 450여년 전에 설촌된 마을로 면소재지에서 남쪽으로 약 4㎞ 떨어진 곳에 위치한다. 봉황~세지간 지방도로를 따라 가다가 맷돌바위에서 월봉산쪽으로 약 15분을 걸어가면 마을이 나타난다. 마을 뒤로는 월봉산이 있으며, 마을앞에 평야가 펼쳐져 있고, 그 너머로는 운곡리가 위치하고 있다. 여기서는 동일 생활권이면서 지형적으로 분리되어 있는 서당골과 새터를 함께 소개하고자 한다.
옛날 운곡마을에 속한 12마을 중 한 마을이라고 전해지는 월곡마을이 처음으로 문헌에 나타난 것은 1912년 조선총독부에 의해 편찬된 「지방행정구역명칭일람」이다. 이 기록에 의하면 월곡은 죽곡면의 27개 마을 중 한 마을로 남평군의 관할하에 있었던 것만을 확인할 수 있다. 그러나 이곳에서 동족마을을 형성하고 있는 달성배씨(達城裵氏) 입향연대가 16세기 초반경으로 올라가는 것을 보아 최소한 450여년 전에 이 마을이 형성되었음을 추정해 볼 수 있다. 이 마을의 한가운데에는 쌀밥(이팝)나무가 있는데, 전해오는 말에 의하면, 500년 정도 되었다고 하는 것도 이것을 뒷받침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리고 개인에 관계된 문헌이나 비문들 속에서 이 지역을 운곡리로 표기한 것으로 보아 월곡은 먼 옛날 운곡소와 관계가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이와 같은 이유로 마을의 한 주민은 운곡마을의 대표적 성씨였던 도강김씨와 옛날 많은 혼인관계가 있었음을 전한다.
그후 1914년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월곡마을은 미사, 용정, 양곡 등과 함께 합쳐 용곡리라는 명칭으로 봉황면의 관할권에 들어가게 된다. 즉 이 당시의 개편이 현재의 행정구역과 같은 체제로 바뀌게 된 것이다. 이 마을에 최초로 터를 잡은 성씨는 달성배씨로 월곡마을의 입향조는 문양공 현경(玄慶)의 21세손 배진(裵縉)(1469~1553)이다. 배진의 부친은 휴제(休薺) 배상형(裵尙炯)(~1553)으로 畢齋 김종직의 문인이며, 1474년(성종 5) 문과에 급제하여 정주목사를 역임하였다. 그는 청백리로서 널리 이름을 알려졌으나 연산군이 폭정을 하자 벼슬을 버리고 고향인 화순으로 낙향하였다. 그후 상형의 외아들인 진(縉)이 학문에 힘써 능성훈도(綾城訓導)에 까지 올랐으나 1505년(연산군 11) 부친이 세상을 떠난 후 월곡마을로 옮겨와 정착하였다. 그후 월곡마을은 동족마을을 이루며 현재까지 살아오고 있는데 입향조로부터 20대째에 이르고 있다.
월곡마을은 동일 생활권이면서도 서로 다른 지명을 갖고 있는 월곡.서당골.새터의 3개 자연촌락으로 구성되어 있다. 3개의 마을 중 가운데 위치하고 있는 마을이 월곡이며, 동으로는 서당골이 있고, 서쪽으로는 새터가 있다. 월곡의 양측으로 조그만 야산이 있어 이를 구분하는데, 이 세 마을의 지명유래를 보면 다음과 같다. 먼저 월곡마을은 지형조건이 동쪽으로는 덕룡산, 남쪽으로는 용제산이 두르고, 이 두 산의 사이에 월봉산 (달돋이)이 있는데, 그 아래에 마을을 형성하고 있어 월곡리라 하였다 한다. 현재는 세 마을 중 가장 큰 마을을 형성하고 있다.
다음으로는 옛날 서당이 있어 붙여진 이름으로 ‘서당골'이 있는데, 과거에는 10여호가 살았으며 문중제각인 ‘원모제'가 있다. 한편 달성배씨가 월곡마을에 입향한 이후 새로 터를 잡았다고 하여 부른 지명이 ‘새터'인데 이곳은 월곡마을과 분리되는 경계선이었던 야산을 개간하여 밭으로 이용하고 있다. 월곡마을의 입석신앙으로는 고인돌이 있었는데 농지정리 후에 마을입구에 세워두었다. 원래는 나무 밑에 있었다고 하며 선돌은 세 군데 세워져 있는데 마을에서 바라보았을 때 좌(높이 : 134, 둘레 : 301)와 우(높이 : 95, 둘레 : 107)이고 하나는 사라지고 없다. 그리고 이 월곡마을에서는 연자방아와 들돌, 그리고 이팝나무(수령 : 600, 둘레 30m)가 있다.
이 마을의 인물로는 배범수가 있다. 그는 운곡리, 용곡리 초등학교생들이 봉황남초등학교까지 4㎞를 걸어서 등하교 함으로써 어려움이 많자, 1967년 현재의 창룡국민학교 건립추진위원장으로 선임되어, 그후, 12년간이나 물심양면으로 학교발전에 공이 많아 나주군수, 나주군교육장으로부터 표창을 여러차례 받았다. 마을의 자생조직으로는 1928년에 월곡 주민의 침녹을 도모하기 위해 조직된 위친계와 1979년의 부인계가 있다. 마을의 인구는 남자 86명, 여자 92명으로 총 178명에 이르고, 총 면적은 0.64㎢인데, 이중 전 0.09㎢, 답 0.18㎢, 임야 0.35㎢, 기타 0.02㎢가 해당된다. 마을의 35가구 모두 농사를 짓고 있으며, 주산물은 쌀, 콩이다. 특작물로 무와 고추를 재배하고 있고, 성씨로는 달성배씨 32호, 이천서씨 1호, 강화최씨 2호가 있다.
마을의 민속
위친계
1928년 조직된 것으로 웃어른을 공경한다는 취지에서 만든 것이다. 가구당 1명이 가입하도록 하고 있는 이 계에서는 마을에 초상이 나면 조의금을 전달한다. 그리고 친목을 도모하는 기능을 한다. 이 계는 1년에 한번씩 정기총회를 해서 계의 운영경비에 따른 회비를 결정하고 거출한다.
동계
새마을 지도자로 있던 배인택이 1979년 저소득농가 정부지원비 무이자 2천만원으로 마을의 공동이익을 도모하기 위해 주민들과 협의하여 조직했다이 계에서는 마을의 대소사를 논의하고 결정하는 기능을 가진다. 1986년 마을 안길을 포장할 당시, 정부보조금이 부족하자 이 계에서 충당을 했다. 1986년에 건립된 노인정의 운영도 동계에서 맡고 있다. 또한 마을의 행정적 사업을 보조하고 추진하기 위하여 동계 내에 개발위원회를 조직하여 운영하고 있다.
부인계
1979년 조직된 것으로 마을 안에 거주하는 부인들의 친목을 도모하기 위해 조직하였다. 조직 후 저축의 장려, 생활필수품 공동구입 등으로 마을사람들의 생활향상을 위하여 노력하였다.
양곡마을
양곡마을은 면소재지에서 남쪽으로 약 4㎞ 떨어진 곳에 위치한다. 봉황에서 세지로 가는 지방도로를 따라 가다가 맷돌바위에서 월봉산 쪽으로 10분을 걸어가면 처음으로 나타나는 마을이다. 마을 뒤로는 미륵사가 있는 미륵봉이 있으며, 마을앞의 언덕 밑이 된다고 해서 어덕굴이라 불리는 농경지가 펼쳐져 있으며, 그 너머로는 운곡리와 마주하고 있다. 이 마을에서 월봉산 쪽으로 약 5분을 더 가면 월곡 마을이 위치하고 있는데, 그 사이에 조그마한 야산이 있어 경계가 된다. 그리고 마을의 동남쪽으로는 용곡리 미사마을과 용정마을이 위치하고 있다. 양곡마을은 현재 10여 가구가 살고 있는 조그만 마을로 운구관통 12마을(운곡리 12마을) 중 한 마을이라 전하는 것으로 보아 옛날 이 일대에 위치하고 있었던 운곡소와 많은 관련이 있었을 것으로 보이나, 더 이상의 추정자료는 발견되지 않고 있다.
이 마을의 최초 입향성씨는 진주강씨(晉州姜氏)인데, 진주강씨의 입향조는 확실한 자료에 의해 확인되지는 않으나 별제공파(別提公派)의 파조(派祖) 강형수(姜亨壽)(1476~1503)의 4세손인 매촌 강호(1634~ )이다. 그는 영광에서 시연(1602~1638)의 큰 아들로 태어났는데 이유는 알 수 없으나 철천리로 들어왔다고 전한다. 호가 철야 일대에서 세력을 잡고 있던 이천서씨와 혼인한 것으로 보아 그와 관련이 있는 것으로 보이나 더 이상은 밝혀지지 않는다. 그 후 호의 4세손인 주화가 아들을 둘 두었는데 큰아들 두환(斗煥)(1765~ )은 화순 동복으로 이거하였으며 둘째아들 경환(敬煥)은 그대로 봉황에 머물었다.
그러나 경환은 후손을 잇지 못했고, 두환의 다섯 아들 중 재요, 재위, 재윤, 재열 등 4형제가 다시 용곡리 양곡에 들어와 마을을 형성하였다고 한다. 현재 진주강씨는 양곡에 동족마을을 이루며 살고 있는데 호로부터 11대세가 된다. 지형 여건이 월곡마을과 비슷하며, 특히 이 마을은 햇빛이 잘 들고 따뜻한 명당터로서 사람이 생활하기 편리하고 아담한 마을이어서 양지편이라 부르다가 시기는 알 수 없으나 양곡이라 개칭하였다 한다. 지금까지 확인된 바로는 이 마을의 지명이 옛 지리지나 문헌들 속에서 전혀 보이지 않고 있다. 한편 양곡과 관련된 지형, 지물의 이름으로는 방깨-양곡 북쪽에 있는 골짜기, 어덕굴-양곡 앞쪽에 있는 들. 어덕(언덕) 밑이 됨, 작은 방개- 방개의 작은 골짜기, 큰 방개-방개의 큰 골짜기 등이 있다.
한편 마을의 단합과 공동체적 삶의 모습은 동계에서 엿볼 수 있다. 마을이 작긴 하지만 마을의 제반 대소사를 토의하고 결정하기 위해 1960년대에 조직하였다. 한 가구당 한명이 참여하고 있으며, 정기총회는 매년 음력 2월 1일에 개최하고 있다. 창립이후 보람된 사업으로는 동네안길 포장과 공동샘을 건설한 것을 들 수 있다. 동제 등을 비롯한 마을 사람들의 풍요로운 생활을 빌고 액환을 방지하기 위한 민간신앙은 마을이 작아 지내지 않고 있다.
마을에는 마을운영과 사람들간의 친목 도모를 위한 동계가 1960년 조직되었고, 참여인원은 17명이다. 마을의 총 면적은 0.42㎢으로, 전 0.05㎢, 답 0.09㎢, 임야 0.26㎢, 기타 0.02㎢로 이루어져 있으며, 총 인구는 76명이다. 이중 남자는 38명, 여자 38명이다. 마을의 주요 산업은 쌀, 콩이며, 특박물로 고추를 재배하여 농가 소득을 올리고 있다. 마을에 거주하는 주요 성씨로는, 진주강씨 9호, 김해김씨 2호, 달성배씨 2호, 기타 4호가 있다.
미사·용정·이곡마을
용곡리의 미사·용정·이곡마을은 면소재지에서 남쪽으로 약 4.5㎞ 떨어진 곳에 위치한다. 봉황에서 세지간 지방도로를 따라 가다가 맷돌바위에서 용제산쪽으로 25분 정도 가면 먼저 미사마을이 나타나며, 그 바로 우측 마을이 용정마을이다. 미사와 용정마을은 현재 개간하여 밭으로 이용되고 있는 용제산 줄기에서 뻗어내린 조그만 언덕으로 두 마을은 구분된다. 한편 이곡마을은 옛날에 큰 마을이었다고 전하나 현재는 한 가구만이 거주하고 있다. 이곡마을은 미사마을의 동북쪽에 위치한다. 현재 행정구역상 용곡리 2구로 편제되어 있는 이 세 마을은 겉으로 보기에는 서로 다른 자연마을로 인식되고 있으나 실제로는 마을의 운영이나 제반 행사 등을 같이하는 동일 생활권의 마을이라 할 수 있다.
용곡 2구는 용제산 줄기가 뻗어내린 곳에 아담하게 위치하고 있는데, 마을 안에 소나무 등 여러 나무가 많아 경관이 수려하며 주위에서 보면 마을의 형상이 눈에 잘 띄지 않는다. 마을 앞으로는 농경지가 발달해 있고 용제산이 뻗어내린 줄기에는 개간된 밭들이 많다. 실제로 해질녘에 마을을 보면, 용제산의 기운이 마을을 감싸안은 듯 하다. 구전에 의하면 이들 마을이 형성되기 이전에 옥동이라는 마을이 있었다 한다. 옥동은 현재의 미사·용정·이곡까지 이어지는 큰 마을이었다고 하나 근거가 될 만한 자료는 전혀 찾을 수가 없다.
다만 현재 미사마을과 용정마을은 계속 촌락을 이루어 살고 있으며, 이곡마을은 거의 개간되어 밭으로 이용되고 있다. 이 옥동마을에 대한 전설로는 옛날에 큰 마을이었으나 외부에서 상인이나 행인이 들어오면 마을 주민들이 못된 짓을 많이 하였다. 어느날 도사가 나타나서 운곡리 신반에 있는 돌을 깨도록 지시해서 돌을 깨버리자 차츰 마을이 소멸되었다 한다. 서당골과 미사마을 중간에 당산나무가 있는데 이 중심을 옥동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현재 확인할 수 있는 최초의 입향성씨로는 미사마을은 인동장씨(仁同張氏),
용정마을은 원백씨(水原白氏)가 있다. 미사에 입향된 인동장씨는 중조 출암(黜菴) 장전기(1452~1508)의 11세손인 송포 장한고(1726~1807)이다. 본래 인동장씨는 장전기가 여러 벼슬을 거쳐 영돈녕부사에 이르렀으나 연산군의 폭정에 항소하다 무안군 몽탄면 마산리에 유배당하였다.
그후 몽탄면에 계속 정착하여 세거하였는데 출암으로부터 10세손인 윤재(胤載)(1711~1772)대에 이르러 세아들 중 큰아들인 한고(생몰년 미상)가 이유는 알 수 없으나 이 마을로 이주하여 정착, 마을을 형성하였다 한다. 용정마을에 입향한 수원백씨는 백사의(白思義)(1801~1857)이다. 본래 수원백씨는 장흥에 많이 세거하였는데 사의의 조부인 문황(文璜)(1753~1811)이 선전관을 역임한 후 영암군 신북면 모산리로 이거하였다. 그후 손자인 사의가 이유는 알 수 없으나 이곳 용정마을에 들어와 주세거지를 이루었다. 그러나 현재는 모두 도회지로 떠나고 2가구만이 살고 있는 실정이다. 한편 현재 가장 많이 살고 있는 성씨는 김해김씨로 이들 두 성씨보다 후대에 들어와서 마을을 형성하였다.
이들 마을 주민들의 공동체적 삶의 모습은 자생조직에서 찾아볼 수 있다. 미사마을의 자생조직은 1920년에 조직된 위친계와 1976년 부녀친목을 위해 조직된 부녀회가 있다. 마을의 기본현황은 남자 38명, 여자 48명으로 총 86명이 살고 있으며, 총 면적은 0.58㎢로, 전 0.10㎢, 답 0.12㎢, 임야 0.35㎢, 기타 0.01㎢가 해당된다. 마을의 총 가구수 23호가 농사를 짓고 있는데, 주요 산업은 쌀, 보리 재배이고, 특작물로 마늘, 담배, 고추, 양파를 재배하고 있다. 성씨로는 인동장씨 7호, 김해김씨 5호, 진주강씨 3호, 함평이씨 2호, 강릉유씨 2호, 기타 4호가 있다.
한편, 용정마을의 자생조직으로는 1920년에 조직된 위친계와 1976년 조직된 부녀회가 있으며, 마을의 총인구는 71명이다. 이 중 남자 34명, 여자 37명이 살고 있으며, 총 면적은 0.44㎢로, 전 0.09㎢, 답 0.08㎢, 임야 0.25㎢, 기타 0.02㎢가 해당된다. 마을 사람들의 주소득원은 쌀농사이며, 쌀과 함께 보리, 콩 등을 재배하고 있으며, 담배, 고추, 마늘을 특작물로 재배하고 있다. 마을 사람들의 성씨는 전주이씨 7호, 김해김씨 5호, 수원백씨 2호, 수원황씨 3호, 나주임씨 2호, 기타 1호가 있다.
마을의 생활과 민속으로는 동계와 위친계, 부녀회가 있다. 위친계는 1920년에 조직한 것으로 마을 웃어른을 공경하고 잘 모신다는 취지로 결성되었다. 가구당 한명씩 참가하도록 되어있다. 마을에 초상이 나면 조의금을 전달하고 직접 일을 하면서 상부상조한다. 계의 운영경비는 최초 조직당시 갹출하였던 자산금의 증식으로 조달하고 있다 부녀회는 1976년에 조직한 것으로 마을 부인들의 친목도모가 그 목적이다. 회원들끼리 품앗이를 하기도 하고, 상이 나거나 하면 함께 상부상조한다. 민속으로는 기우제, 씻김굿, 조상단지, 입석이 있었다.
- 담당부서 봉황면 총무
- 전화 061-339-38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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