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용리
- 등록일 2020.04.17 10: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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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등록자 관리자
현재의 황용리는 본래 남평군 욱곡면의 지역이었으나 1914년 행정구역개편에 따라 부정리, 와룡리, 장서리, 신황리, 구황리, 동곡리, 태봉리, 두음리 일부를 병합하여 신황과 와룡의 이름을 따서 황용리라 하여 봉황면에 편입되었다. 현재는 황용1구, 2구, 3구로 나누어 1구에는 장서, 구황, 2구에는 신황, 와룡, 3구에는 태봉, 동곡마을이 속해 있다. 현재 황용리의 6개 마을은 길게는 500여년, 짧게는 200여년 정도의 역사를 가진 마을들로써 마을간의 친목과 화합을 강조하며 살고 있다. 비록 마을간의 거리는 떨어져 있지만 빈번한 왕래와 교류를 통해 하나의 마을과도 같은 생활권을 형성하여 살아가고 있으며, 공동체 의식이 매우 강한 마을들이다. 황용리에 자리잡고 있는 태봉산과 봉황산은 예로부터 명당자리가 많고, 산세와 경관이 좋아 명산으로 알려져 있다. 신황과 와룡마을에는 방죽이 있어 옛날에는 이 방죽물을 이용해 논농사를 지어 왔다고 한다. 이 방죽이 막아지기 전에는 마을 앞 어귀까지 배가 들어 왔었다는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는데 얼마 전 신황초등학교 앞에서 발견된 배 조각이 이러한 사실을 뒷받침하고 있다.
장서마을
장서마을은 시청소재지에서 남쪽으로 약 10㎞, 면소재지에서는 서쪽으로 약 2㎞ 떨어진 봉황산 기슭에 위치하고 있다. 마을 어귀에서 약 15분쯤 걸어 들어가야 마을의 형세가 나타나는데, 마을 옆 조그마한 언덕에 우산각이 자리잡고 있으며, 마을 뒤에는 해발 53.4m의 봉황산을 배경으로 마을 앞에는 넓은 들판이 펼쳐져 있는 단아한 마을이다. 이 마을이 개촌된 시기는 서기 1500년경으로 낭주최씨(낭州崔氏) 최안우의 5세손인 최중림이 선영을 수호코자 입향하여 자손이 500년 가까이 이곳에 세거하고 있는데, 3세 최방언이 고려말에 좌우위보승낭장으로 영평감무를 지냈고, 그 아들 안우는 문과에 급제하여 벼슬이 군기시소감 때에 신돈의 혼란으로 낙향했다가 신돈이 숙청된 후 다시 등용되어 재신에까지 이르렀다.
그러나 고려가 망하자 영평 도성산으로 은거하였다. 그 자손이 위동(현 신황마을)에 자리잡고 번창하였는데 4세손 윤문이 1450년경에 이 마을을 개척하였고, 그 둘째아들 중림이 이 마을에 입향하게 된 것이다. 낭주최씨가 입촌하기 전에는 김씨라고만 하는 사람이 살고 있었다고 전할 뿐 본관은 확실치 않다. 장서라는 명칭이 붙게된 것은 처음에는 곡식과 과일들이 풍부하다는 의미로 장곡촌이라 불리워 오다가 그후 장곡촌의 순수한 우리 옛말인 장실내로 개칭되어 장실내로 부르다가 봉황새를 길들인 마을이란 뜻으로 장서라는 이름이 붙게 되었다고 한다. 또한 마을이 형성된 후 문무를 길게 유지하기 위하여 마을이름을 장서로 부르게 되었다는 이야기도 전하고 있다.
장서는 원래 조선시대에는 남평현 욱곡면 장서리였으나 1914년 행정구역 개편시 황용리로 편입되었으며, 현재는 황용 1구에 속해 있다. 마을 뒤에 있는 봉황산은 처음에는 주위에 개천이 있고, 경치 산물이 풍부하여 아름답고 봉황이 춤추는 듯한 형국이라 하여 봉악산으로 불리워 오다가 학이 날개를 펼친 듯한 형세라 하여 봉학산으로 명칭이 바뀌었으며, 그후 지금의 봉황산으로 다시 바뀌었다. 현재의 봉황면은 덕곡, 욱곡, 죽곡의 3개면이 합쳐진 지명으로 이 봉황산을 상징으로하여 봉황면이라 개칭되었다는 이야기도 있다. 예로부터 봉황산의 줄기에는 명당이 많다고 전하고 있으며, 많은 사람들이 봉황산을 명산으로 알고 있다.
봉황산에서는 예로부터 기우제를 지내고 있었는데 옛날에는 고을의 수령이 정치를 잘하지 못할 때에 마을이 가물었다고 하여 지성을 하느님께 알린다는 목적에서 인심을 누그러뜨릴 목적으로 기우제를 지내 왔었으나 현재는 면에서 주관한 기우제가 봉황산에서 한발 때에 지내지고 있긴 하지만 해방 후부터는 이 마을사람들은 거의 참여하지 않고 있다. 마을에는 주민 친목도모를 위해서 1968년 조직된 동계가 있다. 마을의 기본현황은 총인구 71명이며 남자 40명, 여자 31명이다. 총 면적은 0.25㎢로, 전 0.08㎢, 답 0.07㎢, 임야 0.09㎢, 기타 0.01㎢이다. 총 가구 25호 중 농가는 24호, 비농가는 1호가 있다. 마을 사람들의 주요 산업은 쌀, 보리, 콩이며, 주소득원은 쌀농사이며, 특작물로 배, 수박, 무가 있다. 성씨로는 낭주최씨 20호, 안동권씨 3호, 광산김씨 2호가 있다.
구황 마을
구황마을은 멀리 봉황새의 벼슬과도 같다는 봉황산을 앞에 두고 용모양을 한 뒷산을 배경으로 집들이 띄엄띄엄 흩어져 있는 산촌에 속하는 마을이다. 마을의 위치는 시청에서 동남쪽으로 9㎞, 면소재지에서 서쪽으로 3㎞ 쯤 떨어진 곳에 위치하고 있다. 이 마을은 지금부터 약 230년전인 1761년 경에 함평 이씨(咸平李氏) 이긍(李兢)의 11세손인 이계조(李桂祚)가 나주 삼도동 도청에서 거주 하다가 휴양차 환경이 좋은 곳을 찾아 소나무가 울창했던 이 마을에 와서 마을 앞 잔등에 터를 잡고 정착하여 마을을 이루었다고 전해진다. 마을이 형성되기 전에는 평산신씨(平山申氏)라고만 전하는 한 사람이 살다가 이주하여 나갔다고 한다. 구황이라는 지명은 뒷산의 지형 지세가 빛이 누런 용의 형국이라 하여 황룡이라 칭하였으나 새로 생긴 마을들과 구별하여 황용리의 본 마을이란 뜻으로 구황이라 칭하여 현재 통용되고 있다.
풍수 지리적 환경을 보면 마을의 형세가 배 형국과 같다고 하는데 가운데 샘을 파서 배가 주저 앉은 듯 하다고도 하며, 예부터 전해 오는 말로는 배 가운데 구멍을 뚫어 마을이 이루어졌기 때문에 가난하다고 하는 말이 있다. 동시에 누런 구렁이를 상징하는 구황마을은 황토땅이어서 언젠가는 큰 정기를 발휘할 땅으로 황금과도 같은 것이라는 옛 어른들의 말이 전해 내려오고 있다. 이와 부합하게도 이 마을의 특산물인 수박과 무가 황토에서 자란 탓인지 현재 우리나라 농산물 시장에서 각광을 받고 있다. 마을사람들의 모임이나 조직으로는 2월 초 하룻날에 하루 쉬면서 돈을 거둬 계를 치르는 동계가 있는데 이날 총회에서는 노임 등을 결정하였다. 그 뒤로 7월 백중에 치르다가 현재는 경제적인 이유와 농번기라는 이유로 시행치 못하고 있다.
이 마을은 하수구 정리나 피해복구 그리고 논농사 밭농사 등에 있어 마을 사람들만으로는 인력이 부족하여 광주나 나주에서 인부를 데려와 일을 하고 있으며, 품앗이의 경우 특별한 규정이 있는 것은 아니고 가까운 이웃 사람들끼리 조를 짜서 일하고 있다. 구황마을은 예로부터 풍년을 비는 재래 관습이 있어서 40여년 전까지만 해도 매년 보름날 당산제를 지냈다고 한다. 또한 농사철에 모내기 할 때 불렀던 들노래가 있었다고 하나 현재 전하지 않고 있다. 그리고 만드리(풍장)라고 하여 마지막 김을 맨 다음 굿을 하면서 놀았으나 지금은 행하지 않고 있다. 예전에는 농악이 성했으나 현재는 인력부족으로 인하여 부녀회에서 마을 기금을 마련하기 위해 농악을 치며 호별 방문을 하는 정도이다. 마을의 기본현황은 총인구 67명으로 남자 29명, 여자 38명이 있고, 총 면적은 0.49㎢로 전 0.2㎢, 답 0.17㎢, 임야 0.09㎢, 기타 0.02㎢가 있으며. 18가구 모두 농사를 짓고 있다.
태봉·동곡 마을
태봉산 앞쪽 기슭에 자리잡고 있는 태봉과 동곡마을은 가옥이 몇 채 안되는 작은 마을로써 마을과 마을사이의 친목과 화합을 강조하며 살아가고 있다. 마을 사이의 거리가 약 300m 정도로써 한마을과도 같은 생활권을 형성하여 살아가고 있는 마을이다. 원래 두 마을은 욱곡면에 속했는데 1914년 행정구역 개편시에 황용리에 편입되었으며, 현재는 황용 3구에 속해 있다. 태봉마을은 1780년에 형성되었으며, 이로부터 8년 뒤인 1788년에 동곡마을이 형성되었다. 태봉마을은 1780년 장수황씨(長水黃氏) 황일진이 충주부사와 오위장을 지낸 후 태봉산의 정기가 아름답고, 번창할 곳이라 하여, 입향한 뒤 터를 닦고 정착함으로써 마을이 형성되었다. 이로부터 8년 후에 형성된 동곡마을은 1788년 진주강씨(晋州姜氏) 강지회가 동모별관을 지내다가 파직되어 영광 오량리에서 거주하다가 서당을 열 곳을 물색하던 중 마을의 형국과 태봉산의 경관을 보고 이 마을에 들어와 정착한 뒤 후생교육을 시작하면서 마을이 형성되었다.
태봉마을은 태봉산 아래에 있는 마을이라 하여 태봉마을이라 칭하였고, 동곡 마을은 지형지세가 마을 뒷산인 태봉산에서 시작된 골이 동쪽으로 쭉 뻗어 전개되어 동곡이라 칭하게 되었다. 또한 동곡마을은 뒤로는 태봉산을 배경으로 하고 움푹 패인 곳에 위치하고 있는데 마을 앞에는 조류명산과 함박산, 가마골 그리고 동샘이 자리하고 있어 밥을 먹고 사는 형국이라 하여 입지 조건이 이상적인 마을로 알려져 있다. 이 동샘은 함박골이라고 하는 마을 앞 논에 있는 샘으로써 원래는 함박골에 홍씨선산이 있었으나 낭주최씨(朗州崔氏)가 개간하다가 발견하였는데 옛날에는 물이 푹푹 솟아올라 이 샘물을 이용해 논농사를 지었고, 식수로 이용한 바 있다. 동곡과 태봉마을의 뒤에 있는 태봉산에는 예로부터 조선시대 8대 명당이라 불릴 정도로 명당자리가 많았다고 하며, 옛 절터가 두 군데나 남아있다. 태봉산은 왕건의 큰아들의 태를 묻었다 하여 태뫼산이라고도 불리고 있다고 하나 근거자료는 확인할 수 없다.
이 산에는 일제시대에 판 금광맥이 있어 약간의 토금이 나왔었으나 경제적인 가치가 없고 산줄기가 끊겨지면 마을이 흥하지 못한다 하여 일제시대에 다시 이 금광을 막아버린 적도 있다. 또한 태봉산에는 동학난 때에 봉화를 올린 봉화터가 있었다는 옛 이야기가 전하고 있으나 현재는 그 봉화터를 찾아볼 수가 없다. 이 산에서는 지금부터 20년 전까지만 해도 금천, 봉황, 영산의 3개면이 주관하여 기우제를 지냈으나 지금은 행하지 않고 있으며, 각 성씨들의 시제만 올려지고 있다. 최근 동곡마을에서는 잊혀져 가는 농악을 부흥시키고자 하는 노력이 계속되고 있다. 예전에는 생활 형편이 어려워 농악을 전혀 하지 못했었으나 최근들어 마을이 부유해지고, 생활에 여유가 생김에 따라 마을에서 농악기를 새로 구입하는 등 농악부흥운동이 활발히 전개되고 있다.
동곡마을에는 마을 총회인 친목회가 조직되어 있어 연중 2회에 걸쳐 모임을 가지고 있으며, 마을사람들의 친목 도모를 위주로 하고 있다. 태봉마을에는 상부상조와 친목을 위한 동계가 1979년 조직되었다. 마을의 총 인구는 39명으로 남자 19명, 여자 20명이 있으며. 마을의 총 면적은 0.45㎢로, 전 0.10㎢, 답 0.11㎢, 임야 0.21㎢, 기타 0.03㎢가 있다. 한편 마을의 모든 가구가 농사를 짓고 있다. 주요산업은 쌀농사이며, 특작물로 배, 복숭아, 수박 재배를 하고 있으며 성씨로는 장수황씨 7호, 파평윤씨 1호, 하동정씨 1호가 살고 있다. 한편 옆 마을인 동곡마을에는 1951년 조직된 친목회가 있으며, 총 인구 39명 중 남자 21명, 여자 19명으로 총 12가구를 형성하고 있다. 총 면적은 0.43㎢이며, 전 0.22㎢, 답 0.10㎢, 임야 0.11㎢, 기타 0.01㎢가 있다. 마을의 주요산업은 쌀, 보리, 콩 재배이며, 주소득원은 쌀농사이다. 특작물로는 배, 수박, 무이며, 성씨로는 진주강씨 8호, 나주나씨 1호, 낭주최씨 1호, 기타 2호가 거주하고 있다.
신황·와룡마을
신황과 와룡은 마을 앞에 있는 방죽(보)을 경계로 하여 나누어져 있다. 원래 신황과 와룡은 욱곡면에 속했으나 1914년 행정구역개편시 봉황면에 편입되었다. 방죽 안쪽에 있는 마을을 방죽안 또는 신황이라 부르며, 바깥쪽에 있는 마을을 와룡마을이라 부르고 있다. 신황과 와룡은 행정구역상으로는 2개의 마을이나 하나라는 공동체적 의식을 가지고 생활하고 있다. 연도는 확실치 않으나 김해김씨(金海金氏), 현풍곽씨(玄風郭氏), 수원백씨(水原白氏)가 차례로 입촌하면서 마을이 형성되었다. 마을이 형성되기 전에는 낭주최씨(朗州崔氏)가 살고 있었다고 전하나 자세한 내용은 알 수 없다.
신황 마을은 마을 앞에 갈대 숲이 우거져 있는 마을이라고 하여 ‘노동(蘆洞)'이라고 불리어 오다가 마을 앞에 방죽을 막은 후에는 방죽 안 동네라서 ‘방죽안'이라 개칭해 사용하던 중 서대수가 면장으로 있으면서 신황이라 개칭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와룡마을은 지형이 용이 누워있는 형국이라 하여 예부터 와룡촌이라 하였는데 현재는 와룡으로 통용되고 있다. 두 마을은 이농현상으로 인하여 청장년층이 절대 부족하며 기존세대인 50~60대만 남아 있었으나 나주댐 공사로 수몰민들이 이 마을로 이주해 와 현재 마을에는 빈집이 거의 없다. 이 마을의 농토는 일제시대는 90%정도가 일본인들의 소유이었으므로 마을 사람들은 이를 소작하여 농사를 지었다.
정부수립후에 궁삼면(郁谷, 枝竹, 上谷)의 상환료가 감축되어 마을 사람들은 50년 전 빼앗겼던 토지를 비로소 소유하게 되었다. 신황과 와룡의 농악은 옛날에는 봉황면에서 매우 유명하였으나, 미군정시 미군들이 마을 앞에서 마을 사람들이 농악하는 모습을 보고 미개인들이라 하여 농악기를 빼앗아간 일도 있었다. 이러한 일이 있고 난 후로는 농악이 차츰 소멸되기 시작하여 현재는 여자들이 정월대보름이나, 각종 잔치가 있을 때만 행하고 있을 뿐이다. 이 마을의 특색으로는, 일제시대의 생활 및 진흥회를 들 수 있다. 일제시대 인천 출신의 최금석이 소작료 관리차 이 마을에 왔다가 진흥회를 조직하고 공동소유 답으로 밭 200여평을 마련하였으며, 사립학교도 설립하였다. 최금석은 아침 일찍 일어나 징을 두드리고 돌아다니면서 마을 사람들을 깨워 근면 정신을 일깨웠다고 전한다.
진흥회는 마을의 청장년층이 모범을 보인 선진적 조직체로써 농민의 앞에 서서 농사나 풀베기 등에 있어 선구적 역할을 하였으며, 마을의 공동 소유의 토지인 진흥답을 공동 경작한 조직체였다. 신황·황용은 수원백씨들이 일가를 이루고 살고 있는데, 나주의 명물인 나주배 과수원이 많다. 그래서 4월초에는 흰 배꽃이 절경을 이룬다. 특작물로는 수박과 무를 재배한다. 이 마을에 봉황제일교회(목사: 김은수)가 있어서 기독교 신앙 생활을 하는 사람이 많다. 한편 신황국민학교가 페교되면서, 그 자리에 전남경찰청 제 1기동대 부대가 들어 서 있다. 신황마을 자생조직으로는 1934년에 친목을 목적으로 만들어진 상부계와 1985년 조직된 성심계, 1976년 마을 부녀친목을 위한 부녀회가 운영되고 있으며, 참여인원은 15명, 13명, 25명에 이른다.
신황마을의 기본현황은 총인구 169명에 남자 85명, 여자 84명이 있고, 33가구 중 32호가 농가이고, 1호만이 비농가이다. 총 면적은 1.30㎢로, 전 0.15㎢, 답 0.23㎢, 임야 0.90㎢, 기타 0.02㎢로 이루어져 있으며, 마을의 주요산업은 쌀농사이고. 특작물로는 배와 수박을 재배하고 있다. 성씨로는 수원백씨 19호, 현풍곽씨 4호, 김해김씨 2호, 기타 성씨가 8호가 있다. 한편 인접한 와룡마을에는 1961년에 친목을 위해 조직된 대동계와 부녀회가 있으며. 참여인원은 34명, 30명에 이른다. 와룡마을의 기본현황은 총인구 180명에 남자 84명, 여자 96명이며, 34가구 전원이 농가이다. 마을의 총면적은 1.42㎢로, 전 0.15㎢, 답 0.20㎢, 임야 1.00㎢, 기타 0.07㎢가 해당된다. 마을의 주소득원은 벼농사와 과수농사이며. 특작물로는 배, 수박 재배가 있다. 성씨로는 현풍곽씨 6호, 수원백씨 6호, 김해김씨 9호, 기타 성이 9호 있다.
장서마을
장서마을은 시청소재지에서 남쪽으로 약 10㎞, 면소재지에서는 서쪽으로 약 2㎞ 떨어진 봉황산 기슭에 위치하고 있다. 마을 어귀에서 약 15분쯤 걸어 들어가야 마을의 형세가 나타나는데, 마을 옆 조그마한 언덕에 우산각이 자리잡고 있으며, 마을 뒤에는 해발 53.4m의 봉황산을 배경으로 마을 앞에는 넓은 들판이 펼쳐져 있는 단아한 마을이다. 이 마을이 개촌된 시기는 서기 1500년경으로 낭주최씨(낭州崔氏) 최안우의 5세손인 최중림이 선영을 수호코자 입향하여 자손이 500년 가까이 이곳에 세거하고 있는데, 3세 최방언이 고려말에 좌우위보승낭장으로 영평감무를 지냈고, 그 아들 안우는 문과에 급제하여 벼슬이 군기시소감 때에 신돈의 혼란으로 낙향했다가 신돈이 숙청된 후 다시 등용되어 재신에까지 이르렀다.
그러나 고려가 망하자 영평 도성산으로 은거하였다. 그 자손이 위동(현 신황마을)에 자리잡고 번창하였는데 4세손 윤문이 1450년경에 이 마을을 개척하였고, 그 둘째아들 중림이 이 마을에 입향하게 된 것이다. 낭주최씨가 입촌하기 전에는 김씨라고만 하는 사람이 살고 있었다고 전할 뿐 본관은 확실치 않다. 장서라는 명칭이 붙게된 것은 처음에는 곡식과 과일들이 풍부하다는 의미로 장곡촌이라 불리워 오다가 그후 장곡촌의 순수한 우리 옛말인 장실내로 개칭되어 장실내로 부르다가 봉황새를 길들인 마을이란 뜻으로 장서라는 이름이 붙게 되었다고 한다. 또한 마을이 형성된 후 문무를 길게 유지하기 위하여 마을이름을 장서로 부르게 되었다는 이야기도 전하고 있다.
장서는 원래 조선시대에는 남평현 욱곡면 장서리였으나 1914년 행정구역 개편시 황용리로 편입되었으며, 현재는 황용 1구에 속해 있다. 마을 뒤에 있는 봉황산은 처음에는 주위에 개천이 있고, 경치 산물이 풍부하여 아름답고 봉황이 춤추는 듯한 형국이라 하여 봉악산으로 불리워 오다가 학이 날개를 펼친 듯한 형세라 하여 봉학산으로 명칭이 바뀌었으며, 그후 지금의 봉황산으로 다시 바뀌었다. 현재의 봉황면은 덕곡, 욱곡, 죽곡의 3개면이 합쳐진 지명으로 이 봉황산을 상징으로하여 봉황면이라 개칭되었다는 이야기도 있다. 예로부터 봉황산의 줄기에는 명당이 많다고 전하고 있으며, 많은 사람들이 봉황산을 명산으로 알고 있다.
봉황산에서는 예로부터 기우제를 지내고 있었는데 옛날에는 고을의 수령이 정치를 잘하지 못할 때에 마을이 가물었다고 하여 지성을 하느님께 알린다는 목적에서 인심을 누그러뜨릴 목적으로 기우제를 지내 왔었으나 현재는 면에서 주관한 기우제가 봉황산에서 한발 때에 지내지고 있긴 하지만 해방 후부터는 이 마을사람들은 거의 참여하지 않고 있다. 마을에는 주민 친목도모를 위해서 1968년 조직된 동계가 있다. 마을의 기본현황은 총인구 71명이며 남자 40명, 여자 31명이다. 총 면적은 0.25㎢로, 전 0.08㎢, 답 0.07㎢, 임야 0.09㎢, 기타 0.01㎢이다. 총 가구 25호 중 농가는 24호, 비농가는 1호가 있다. 마을 사람들의 주요 산업은 쌀, 보리, 콩이며, 주소득원은 쌀농사이며, 특작물로 배, 수박, 무가 있다. 성씨로는 낭주최씨 20호, 안동권씨 3호, 광산김씨 2호가 있다.
구황 마을
구황마을은 멀리 봉황새의 벼슬과도 같다는 봉황산을 앞에 두고 용모양을 한 뒷산을 배경으로 집들이 띄엄띄엄 흩어져 있는 산촌에 속하는 마을이다. 마을의 위치는 시청에서 동남쪽으로 9㎞, 면소재지에서 서쪽으로 3㎞ 쯤 떨어진 곳에 위치하고 있다. 이 마을은 지금부터 약 230년전인 1761년 경에 함평 이씨(咸平李氏) 이긍(李兢)의 11세손인 이계조(李桂祚)가 나주 삼도동 도청에서 거주 하다가 휴양차 환경이 좋은 곳을 찾아 소나무가 울창했던 이 마을에 와서 마을 앞 잔등에 터를 잡고 정착하여 마을을 이루었다고 전해진다. 마을이 형성되기 전에는 평산신씨(平山申氏)라고만 전하는 한 사람이 살다가 이주하여 나갔다고 한다. 구황이라는 지명은 뒷산의 지형 지세가 빛이 누런 용의 형국이라 하여 황룡이라 칭하였으나 새로 생긴 마을들과 구별하여 황용리의 본 마을이란 뜻으로 구황이라 칭하여 현재 통용되고 있다.
풍수 지리적 환경을 보면 마을의 형세가 배 형국과 같다고 하는데 가운데 샘을 파서 배가 주저 앉은 듯 하다고도 하며, 예부터 전해 오는 말로는 배 가운데 구멍을 뚫어 마을이 이루어졌기 때문에 가난하다고 하는 말이 있다. 동시에 누런 구렁이를 상징하는 구황마을은 황토땅이어서 언젠가는 큰 정기를 발휘할 땅으로 황금과도 같은 것이라는 옛 어른들의 말이 전해 내려오고 있다. 이와 부합하게도 이 마을의 특산물인 수박과 무가 황토에서 자란 탓인지 현재 우리나라 농산물 시장에서 각광을 받고 있다. 마을사람들의 모임이나 조직으로는 2월 초 하룻날에 하루 쉬면서 돈을 거둬 계를 치르는 동계가 있는데 이날 총회에서는 노임 등을 결정하였다. 그 뒤로 7월 백중에 치르다가 현재는 경제적인 이유와 농번기라는 이유로 시행치 못하고 있다.
이 마을은 하수구 정리나 피해복구 그리고 논농사 밭농사 등에 있어 마을 사람들만으로는 인력이 부족하여 광주나 나주에서 인부를 데려와 일을 하고 있으며, 품앗이의 경우 특별한 규정이 있는 것은 아니고 가까운 이웃 사람들끼리 조를 짜서 일하고 있다. 구황마을은 예로부터 풍년을 비는 재래 관습이 있어서 40여년 전까지만 해도 매년 보름날 당산제를 지냈다고 한다. 또한 농사철에 모내기 할 때 불렀던 들노래가 있었다고 하나 현재 전하지 않고 있다. 그리고 만드리(풍장)라고 하여 마지막 김을 맨 다음 굿을 하면서 놀았으나 지금은 행하지 않고 있다. 예전에는 농악이 성했으나 현재는 인력부족으로 인하여 부녀회에서 마을 기금을 마련하기 위해 농악을 치며 호별 방문을 하는 정도이다. 마을의 기본현황은 총인구 67명으로 남자 29명, 여자 38명이 있고, 총 면적은 0.49㎢로 전 0.2㎢, 답 0.17㎢, 임야 0.09㎢, 기타 0.02㎢가 있으며. 18가구 모두 농사를 짓고 있다.
태봉·동곡 마을
태봉산 앞쪽 기슭에 자리잡고 있는 태봉과 동곡마을은 가옥이 몇 채 안되는 작은 마을로써 마을과 마을사이의 친목과 화합을 강조하며 살아가고 있다. 마을 사이의 거리가 약 300m 정도로써 한마을과도 같은 생활권을 형성하여 살아가고 있는 마을이다. 원래 두 마을은 욱곡면에 속했는데 1914년 행정구역 개편시에 황용리에 편입되었으며, 현재는 황용 3구에 속해 있다. 태봉마을은 1780년에 형성되었으며, 이로부터 8년 뒤인 1788년에 동곡마을이 형성되었다. 태봉마을은 1780년 장수황씨(長水黃氏) 황일진이 충주부사와 오위장을 지낸 후 태봉산의 정기가 아름답고, 번창할 곳이라 하여, 입향한 뒤 터를 닦고 정착함으로써 마을이 형성되었다. 이로부터 8년 후에 형성된 동곡마을은 1788년 진주강씨(晋州姜氏) 강지회가 동모별관을 지내다가 파직되어 영광 오량리에서 거주하다가 서당을 열 곳을 물색하던 중 마을의 형국과 태봉산의 경관을 보고 이 마을에 들어와 정착한 뒤 후생교육을 시작하면서 마을이 형성되었다.
태봉마을은 태봉산 아래에 있는 마을이라 하여 태봉마을이라 칭하였고, 동곡 마을은 지형지세가 마을 뒷산인 태봉산에서 시작된 골이 동쪽으로 쭉 뻗어 전개되어 동곡이라 칭하게 되었다. 또한 동곡마을은 뒤로는 태봉산을 배경으로 하고 움푹 패인 곳에 위치하고 있는데 마을 앞에는 조류명산과 함박산, 가마골 그리고 동샘이 자리하고 있어 밥을 먹고 사는 형국이라 하여 입지 조건이 이상적인 마을로 알려져 있다. 이 동샘은 함박골이라고 하는 마을 앞 논에 있는 샘으로써 원래는 함박골에 홍씨선산이 있었으나 낭주최씨(朗州崔氏)가 개간하다가 발견하였는데 옛날에는 물이 푹푹 솟아올라 이 샘물을 이용해 논농사를 지었고, 식수로 이용한 바 있다. 동곡과 태봉마을의 뒤에 있는 태봉산에는 예로부터 조선시대 8대 명당이라 불릴 정도로 명당자리가 많았다고 하며, 옛 절터가 두 군데나 남아있다. 태봉산은 왕건의 큰아들의 태를 묻었다 하여 태뫼산이라고도 불리고 있다고 하나 근거자료는 확인할 수 없다.
이 산에는 일제시대에 판 금광맥이 있어 약간의 토금이 나왔었으나 경제적인 가치가 없고 산줄기가 끊겨지면 마을이 흥하지 못한다 하여 일제시대에 다시 이 금광을 막아버린 적도 있다. 또한 태봉산에는 동학난 때에 봉화를 올린 봉화터가 있었다는 옛 이야기가 전하고 있으나 현재는 그 봉화터를 찾아볼 수가 없다. 이 산에서는 지금부터 20년 전까지만 해도 금천, 봉황, 영산의 3개면이 주관하여 기우제를 지냈으나 지금은 행하지 않고 있으며, 각 성씨들의 시제만 올려지고 있다. 최근 동곡마을에서는 잊혀져 가는 농악을 부흥시키고자 하는 노력이 계속되고 있다. 예전에는 생활 형편이 어려워 농악을 전혀 하지 못했었으나 최근들어 마을이 부유해지고, 생활에 여유가 생김에 따라 마을에서 농악기를 새로 구입하는 등 농악부흥운동이 활발히 전개되고 있다.
동곡마을에는 마을 총회인 친목회가 조직되어 있어 연중 2회에 걸쳐 모임을 가지고 있으며, 마을사람들의 친목 도모를 위주로 하고 있다. 태봉마을에는 상부상조와 친목을 위한 동계가 1979년 조직되었다. 마을의 총 인구는 39명으로 남자 19명, 여자 20명이 있으며. 마을의 총 면적은 0.45㎢로, 전 0.10㎢, 답 0.11㎢, 임야 0.21㎢, 기타 0.03㎢가 있다. 한편 마을의 모든 가구가 농사를 짓고 있다. 주요산업은 쌀농사이며, 특작물로 배, 복숭아, 수박 재배를 하고 있으며 성씨로는 장수황씨 7호, 파평윤씨 1호, 하동정씨 1호가 살고 있다. 한편 옆 마을인 동곡마을에는 1951년 조직된 친목회가 있으며, 총 인구 39명 중 남자 21명, 여자 19명으로 총 12가구를 형성하고 있다. 총 면적은 0.43㎢이며, 전 0.22㎢, 답 0.10㎢, 임야 0.11㎢, 기타 0.01㎢가 있다. 마을의 주요산업은 쌀, 보리, 콩 재배이며, 주소득원은 쌀농사이다. 특작물로는 배, 수박, 무이며, 성씨로는 진주강씨 8호, 나주나씨 1호, 낭주최씨 1호, 기타 2호가 거주하고 있다.
신황·와룡마을
신황과 와룡은 마을 앞에 있는 방죽(보)을 경계로 하여 나누어져 있다. 원래 신황과 와룡은 욱곡면에 속했으나 1914년 행정구역개편시 봉황면에 편입되었다. 방죽 안쪽에 있는 마을을 방죽안 또는 신황이라 부르며, 바깥쪽에 있는 마을을 와룡마을이라 부르고 있다. 신황과 와룡은 행정구역상으로는 2개의 마을이나 하나라는 공동체적 의식을 가지고 생활하고 있다. 연도는 확실치 않으나 김해김씨(金海金氏), 현풍곽씨(玄風郭氏), 수원백씨(水原白氏)가 차례로 입촌하면서 마을이 형성되었다. 마을이 형성되기 전에는 낭주최씨(朗州崔氏)가 살고 있었다고 전하나 자세한 내용은 알 수 없다.
신황 마을은 마을 앞에 갈대 숲이 우거져 있는 마을이라고 하여 ‘노동(蘆洞)'이라고 불리어 오다가 마을 앞에 방죽을 막은 후에는 방죽 안 동네라서 ‘방죽안'이라 개칭해 사용하던 중 서대수가 면장으로 있으면서 신황이라 개칭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와룡마을은 지형이 용이 누워있는 형국이라 하여 예부터 와룡촌이라 하였는데 현재는 와룡으로 통용되고 있다. 두 마을은 이농현상으로 인하여 청장년층이 절대 부족하며 기존세대인 50~60대만 남아 있었으나 나주댐 공사로 수몰민들이 이 마을로 이주해 와 현재 마을에는 빈집이 거의 없다. 이 마을의 농토는 일제시대는 90%정도가 일본인들의 소유이었으므로 마을 사람들은 이를 소작하여 농사를 지었다.
정부수립후에 궁삼면(郁谷, 枝竹, 上谷)의 상환료가 감축되어 마을 사람들은 50년 전 빼앗겼던 토지를 비로소 소유하게 되었다. 신황과 와룡의 농악은 옛날에는 봉황면에서 매우 유명하였으나, 미군정시 미군들이 마을 앞에서 마을 사람들이 농악하는 모습을 보고 미개인들이라 하여 농악기를 빼앗아간 일도 있었다. 이러한 일이 있고 난 후로는 농악이 차츰 소멸되기 시작하여 현재는 여자들이 정월대보름이나, 각종 잔치가 있을 때만 행하고 있을 뿐이다. 이 마을의 특색으로는, 일제시대의 생활 및 진흥회를 들 수 있다. 일제시대 인천 출신의 최금석이 소작료 관리차 이 마을에 왔다가 진흥회를 조직하고 공동소유 답으로 밭 200여평을 마련하였으며, 사립학교도 설립하였다. 최금석은 아침 일찍 일어나 징을 두드리고 돌아다니면서 마을 사람들을 깨워 근면 정신을 일깨웠다고 전한다.
진흥회는 마을의 청장년층이 모범을 보인 선진적 조직체로써 농민의 앞에 서서 농사나 풀베기 등에 있어 선구적 역할을 하였으며, 마을의 공동 소유의 토지인 진흥답을 공동 경작한 조직체였다. 신황·황용은 수원백씨들이 일가를 이루고 살고 있는데, 나주의 명물인 나주배 과수원이 많다. 그래서 4월초에는 흰 배꽃이 절경을 이룬다. 특작물로는 수박과 무를 재배한다. 이 마을에 봉황제일교회(목사: 김은수)가 있어서 기독교 신앙 생활을 하는 사람이 많다. 한편 신황국민학교가 페교되면서, 그 자리에 전남경찰청 제 1기동대 부대가 들어 서 있다. 신황마을 자생조직으로는 1934년에 친목을 목적으로 만들어진 상부계와 1985년 조직된 성심계, 1976년 마을 부녀친목을 위한 부녀회가 운영되고 있으며, 참여인원은 15명, 13명, 25명에 이른다.
신황마을의 기본현황은 총인구 169명에 남자 85명, 여자 84명이 있고, 33가구 중 32호가 농가이고, 1호만이 비농가이다. 총 면적은 1.30㎢로, 전 0.15㎢, 답 0.23㎢, 임야 0.90㎢, 기타 0.02㎢로 이루어져 있으며, 마을의 주요산업은 쌀농사이고. 특작물로는 배와 수박을 재배하고 있다. 성씨로는 수원백씨 19호, 현풍곽씨 4호, 김해김씨 2호, 기타 성씨가 8호가 있다. 한편 인접한 와룡마을에는 1961년에 친목을 위해 조직된 대동계와 부녀회가 있으며. 참여인원은 34명, 30명에 이른다. 와룡마을의 기본현황은 총인구 180명에 남자 84명, 여자 96명이며, 34가구 전원이 농가이다. 마을의 총면적은 1.42㎢로, 전 0.15㎢, 답 0.20㎢, 임야 1.00㎢, 기타 0.07㎢가 해당된다. 마을의 주소득원은 벼농사와 과수농사이며. 특작물로는 배, 수박 재배가 있다. 성씨로는 현풍곽씨 6호, 수원백씨 6호, 김해김씨 9호, 기타 성이 9호 있다.
- 담당부서 봉황면 총무
- 전화 061-339-38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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