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곡리
- 등록일 2020.04.17 10:26
- 조회수 794
- 등록자 관리자
운곡리는 면소재지에서 남서쪽으로 약 2.5㎞지점에 위치하는데, 동쪽으로 용곡리의 미사마을과 용정마을이 인접한다. 운곡리은 본래 남평군 죽곡면에 속했던 지역으로서 1914년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민치리, 신반리, 귀동, 와우리 일부와 욱곡리의 마암(馬飮), 흥동 일부를 병합하여 운곡리라 하여 나주군 봉황면에 편입되었다. 운곡리는 옛날 운곡 열두마을이라 하여 구동 ,큰동네(운곡), 건네데미(송정) 민자굴(민치) 신반 마음 양곡 월곡 용정 미사 새테(새터)이곡마을을 일컬어 왔다. 운곡1구는 큰동네인 운곡마을을 중심으로 왼쪽으로 귀동마을, 오른쪽으로 송정마을이 있고, 운곡2구는 용제산 서쪽으로 신반마을과 마음마을이 평야지대에 위치한다. 운곡 1구에는 주산이 용제산의 유래와 함께 아기장군 전설과, 장군대좌라는 명당이 있어 이에 얽혀 내려오는 전설을 간직하고 있으며, 한말 도강 김도숙 의병장이 살았던 곳이기도 하다. 이곳은 각각의 이름을 가진 용제산 봉우리로 둘러싸여 있고, 마을 곳곳에는 독특한 지명들이 붙여져 있어 무척 정겨운 마을이다.
한편 운곡리는 고려시대부터 운곡소가 있었던 지역으로 역사적인 유서가 간직되어 있는 곳으로도 주목된다. 구획상 운곡 구동 송정마을로 불리고 있을 뿐 실제 마을 행정이나 동회 동계 등은 같이 하고 있다. 마을 사람들도 또한 전혀 다른 마을이라는 개념이 없이 완전 한 마을 생활권이므로 마을별 기록을 할 때, 운곡1구의 세 마을은 같이 서술하기로 하였다. 다만 마을에 남아있는 지명이나 유형물이 있는 곳은 행정구역상 위치한 마을이름을 써 주기로 한다. 운곡 2구는 평야지대에 위치하는 신반마을과 마음마을이다. 자그마한 마을로서 만봉저수지가 축조되기 이전에는 이 두마을이 함께 봇제를 지내기도 하였다. 그러나, 봉황~세지간 도로를 사이에 두고 500m 정도의 거리가 있어서인지 아니면 예전에 운곡리가 죽곡리에 속했던 때문인지 그다지 두 마을간의 연계성은 찾아보기 어렵다. 운곡리는 총 3.45㎢의 면적에 100여호 400여명이 거주하며, 주업인 벼농사와 함께 수박 무 등의 그다지 많지 않은 특작물 재배로 살아가고 있다.
운곡, 귀동·송정마을
운곡 1구에 속해 있는 운곡, 귀동, 송정마을은 면소재지에서 서남쪽으로 약 2㎞지점에 있으며, 운곡리 정류장에서 버스를 내리면 남쪽으로 약 1.5㎞ 더 들어가 용제산 기슭에 자리잡고 있다. 마을 동쪽으로는 미사마을과 용정마을이 이웃하며, 서쪽으로는 도강김씨(道康金氏) 문산(門山)인 장군대좌라는 명당이 자리한다. 마을 앞으로는 평야가 펼쳐져 있고, 운곡천이 흐른다. 마을의 뒤로는 남동쪽으로부터 시작한 병풍처럼 생긴 병풍바위가 그림처럼 펼쳐져 있다. 병풍바위의 주산인 해발 400m의 용제산, 학이 날아가는 듯한 비학봉, 밤에는 학처럼 보인다는 야학봉, 중이 입는 가사모양을 닮았다 하여 붙여진 가사봉, 중이 춤추는 모습의 승무봉이 그 기이한 자태로 마을을 둘러싸고 있다. 원래 운곡소가 있던 이곳에는 고려시대 혹은 그 이전부터 많은 사람들이 살았을 것으로 추정되나, 현재로서 확인되는 것은 고려말 이 마을에 정착한 도강김씨(道康金氏)의 입향을 들 수 있다.
도강김씨 김광려(金光礪)가 해남에서 병마절도사로 재직하다가 그만두고 아버지 김희와 더불어 철야에서 살려고 하였는데, 어느 지관이 이르기를 철야터도 좋기는 하나 도강김씨가 살기에는 부적당하니 운곡으로 가서 자리잡으라 하여 오게 되었다 한다. 도강김씨의 입향 후로 1700년대에 김해김씨 김익정(金益精)이 광양현감을 지내다가 화순군 도암면 청소에서 살던 중 이곳으로 와 지금은 7세손인 김옥규(金玉圭) 등이 마을을 지키며 살고 있다. 이와 거의 비슷한 시기에 경주김씨(慶州金氏) 김상서(金尙瑞)가 문래면 용암에서 살다가 운곡리로 들어와 지금은 7세손인 김일우(金日羽) 등이 살고 있다.
운곡리는 1789년 호구총수에 죽곡면에 속한 마을로 나타나고 있으며, 1912년 지방 행정구역명칭일람에도 또한 귀동마을과 함께 그대로 죽곡면에 속하다가 1914년 행정구역개편과 함께 지금의 봉황면 관할 운곡리로 나타난다. 먼저 지명유래를 살펴보면, 운곡이란 마을 이름은 구름마을이라는 뜻으로, 마을 뒤에 산이 있어 용은 반드시 구름이 있어야 상서롭다하여 운곡이라 칭하게 되었다고 한다. 다음 귀동마을은 이 마을 윤신평 노파의 집 마당에 3m 정도의 거북처럼 생긴 바위가 있는데 여기서 따와 마을 이름을 귀동이라 했다한다. 송정마을은 1970년대 새마을사업으로 이름 지어진 마을로서, 본래 운곡리의 마을 입구에 있었는데, 예전에 이곳에 아름드리 소나무가 울창하였다 하여 송정(松亭)이라 부르게 되었다.
지금은 대여섯 그루만이 남아있으며 그 옆에는 선독 1기가 있다. 이 선독은 마을로 들어오는 액막이의 역할을 한다고 마을 사람들은 믿고 있으나, 이것에 대한 어떤 특별한 의례행위는 없다. 예로부터 운곡1구는 전체적인 마을의 형태가 배형국이라 하여 마을에 샘을 파지 않았다고 한다. 샘을 파게 되면 배구멍을 통하여 물이 들어와 마을이 망한다는 속설이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옛날에는 마을 앞 삼거리에 장대를 세워 배의 삿대부분을 표시하였으나 이곳 짐대거리에서 행해졌음직한 의례는 전해지지 않고 있다.
이 마을의 명물인 병풍바위는 길게 이어진 바위가 병풍을 두른 듯하여 이름 붙여진 것으로 예로부터 이 바위에는 3일 먹을 보화가 있다는 말이 전해온다. 또한 이곳에는 말발굽 자국이 있는 말발굽 바위, 장수가 통해 다녔다는 장수굴, 말구유처럼 생긴 구시바위, 짚신삼는 신틀바위, 독수리처럼 생긴 수리바위와 베틀바위가 있다. 바위에 글씨를 새긴 매향비가 있다는데 현재는 발견되지 않고 있다. 운곡1구에는 100여년전에 조직된 동계가 있는데 마을의 모든 일을 관장하고 있다. 자생조직은 다음과 같다. 1896년에 창립된 운곡위친계와 마을의 친목과 부녀사업을 위해, 1976년 부녀회가 조직되었고, 참여인원은 55명씩이다.
마을의 총인구는 132명으로 남자가 60명, 여자가 72명이다. 총면적은 0,61㎢이며, 이 중 전 0,11㎢, 답 0.19㎢, 임야 0.29㎢, 기타0.02㎢가 해당된다. 총 32가구가 농사를 짓고 있으며, 주요산업은 쌀과 보리재배로 주소득원은 쌀농사이다. 마을사람들은 담배와 고추를 특작물로 재배하고 있다. 마을의 주요 성씨는 도강김씨 10호, 경주김씨 7호, 김해김씨 3호, 기타 12호이다. 운곡 1구에는 100여년전에 조직된 동계가 있다. 마을의 모든 일을 관장하는 이 계는 매년 2월 1일에 열렸으나 편의상 양력 1월 1일로 옮겨 행하고 있다. 송정마을에는 친목을 위한 동계가 조직되어 있으며, 마을의 기본현황은 남자 35명, 여자 28명, 총 63명이 살고 있고, 총 면적은 0,41㎢이다. 이 중 전 0.07㎢, 답 0.12㎢, 임야 0.20㎢, 기타 0.02㎢가 해당된다. 마을의 19가구 모두가 농사를 짓고 있으며, 마을의 주산물은 쌀, 보리, 콩 재배이며, 특작물로 담배와 고추를 재배하고 있다. 마을의 성씨로는 김해김씨 7호, 해남윤씨 2호, 경주김씨 4호, 기타 6호가 거주하고 있다. 귀동마을은 1896년 위친계가 조직되어 있으며, 총 인구는 남자 9명, 여자 10명으로, 19명이며, 총면적은 0.85㎢로, 전 0.03㎢, 답 0,05㎢, 임야 0.75㎢, 기타 0.02㎢가 해당된다. 마을사람들은 쌀, 보리, 콩을 주로 재배하며, 특작물로는 고추와 참깨를 심고 있다. 마을의 성씨는 도강김씨 6호, 진주정씨 1호, 경주김씨1호, 문씨1호가 있다.
마음마을
마음 마을은 면소재지에서 남서쪽으로 2㎞쯤 떨어진 국도변에서 서쪽으로 500m 정도를 걸어 들어가면 마을의 입구가 보이기 시작한다. 마을 앞으로는 평야가 펼쳐져 있고, 남동쪽으로 신반마을과 운곡마을의 장군대좌 명당이 바라다보인다. 마을 중앙에는 남평향교에서 1945년도에 세워준 광산김씨(光山金氏) 쌍효문(雙孝門 )운천 (雲泉) 김정수(金亭洙)(1889~1963) 효행비가 있다. 또한 마을 뒤편등에는 1975년경에 건립된 광산김씨 제각인 운남제(雲南霽)가 있다. 이곳에는 후손 김성찬이 살고 있으며, 팔작지붕에 정면 4칸, 측면 1칸의 구조로 되어있다. 마음이라는 이름은 마을 형국이 갈마음수형(渴馬飮水形)이라 하여 목마른 말이 물을 마신다는 데서 유래되었다고 한다. 매년 음력 동짓날에 개최되는 동계는 약 100여년 전에 조직되어 마을사람들의 친목 도모에 큰 몫을 하고 있는데, 마을의 제반사에 관해 논의하고 품삯과 노임 등을 정한다. 한편 공동재산이 없는 관계로 얼마간의 거출을 정하여 정월에 행해지는 농악놀이에서 나온 기금과 함께 마을자금으로 운용하고 있다.
마을 지형이 말이 물을 마시는 형국임에도 불구하고 전답이 모두 건답이었던 이 곳은 천수에만 의존하여 넉넉지 못하였으나 만봉저수지가 축조된 이후로는 수리사정이 좋아졌다. 한편 마음마을은 사람들로부터 ‘새터마을'이라고도 불리우는데, 이것은 마을이 세워진 지 약 100년 정도밖에 되지 않아서 새로운 터라 하여 그렇게 부른다. 마음마을에는 장군봉, 멧돌바위가 있다. 장군봉은 윗마을에서 장군이 안 고랑에서 태어났다고 전해지고 있는데 이 장군이 태어난 것은 여기에 묘 자리를 썼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리고 멧돌바위는 본래는 산 위에 있었고 약 40년 전에 산언덕에 있었는데 비가 와서 허물어져 떨어져 지금은 묻혀버렸다. 마음마을의 자생조직으로는 약 100여년 전에 창립된 동계와 1976년 마을 부녀자들을 위해 조직된 부녀회, 1980년에 조직된 청년회가 있다. 마을의 기본 현황을 살펴보면 총 인구는 170명으로 남자 77명, 여자 93명이 해당 된다. 총 면적은 1.19㎢이며, 전 1.08㎢, 답 0.32㎢, 임야 0.68㎢, 기타 0.01㎢가 해당된다. 마을 사람들의 주요 산업은 쌀과 콩 재배이며, 주소득원은 쌀농사이다. 특작물로는 고추, 담배, 수박등을 심고 있고, 마을의 주요 성씨로는, 광산김씨 20호, 창원황씨 3호, 경주김씨 4호, 기타 7호로 이루어져 있다.
신반마을
운곡리 신반마을은 면소재지에서 남서쪽으로 2㎞쯤 떨어진 곳에 위치한다. 마을 남쪽으로는 용제산과 운곡마을이 보이고, 봉황~세지 간 도로를 사이에 두고, 서북쪽으로는 마음마을과 1983년도에 세워진 창용교회, 보건진료소가 있다. 북동쪽으로는 운곡, 용곡리 주민들에 의해 세워진 창룡초등학교가 자리하고 있고, 마을 중앙으로는 신반천이 흐른다. 봉황면 구석마을에서 청주한씨가 가장 먼저 이 마을로 이주해 왔다고 하지만 확실하지는 않다. 그 후 1900년대 초 한양조씨 조치순이 영암 금정에서 살다가 이곳에 와 정착하였고, 그후 운곡리 송정마을에서 살던 김해김씨 김병희가 이 마을에 와서 살게 되면서 마을이 형성되었다. 신반마을의 민속으로는 기우제를 들 수 있다.
마을에는 1940년경에 조직된 동계가 있으며, 현재 28명 정도가 참여하고 있다. 마을의 총 인구는 125명으로, 남자 62명, 여자 63명이고, 총 면적은 0.39㎢로 전 0.05㎢, 답 0.08㎢, 임야 0.16㎢, 기타 0.10㎢이다. 마을의 28가구 모두 농사를 짓고 있는데, 주요 산업으로는 쌀과 콩이며, 고추, 참깨 등을 특작물로 재배하고 있다. 마을의 주요 성씨로는 한양조씨 3호, 김해김씨 4호, 함풍이씨 3호, 기타 18호가 거주하고 있다.
한편 운곡리는 고려시대부터 운곡소가 있었던 지역으로 역사적인 유서가 간직되어 있는 곳으로도 주목된다. 구획상 운곡 구동 송정마을로 불리고 있을 뿐 실제 마을 행정이나 동회 동계 등은 같이 하고 있다. 마을 사람들도 또한 전혀 다른 마을이라는 개념이 없이 완전 한 마을 생활권이므로 마을별 기록을 할 때, 운곡1구의 세 마을은 같이 서술하기로 하였다. 다만 마을에 남아있는 지명이나 유형물이 있는 곳은 행정구역상 위치한 마을이름을 써 주기로 한다. 운곡 2구는 평야지대에 위치하는 신반마을과 마음마을이다. 자그마한 마을로서 만봉저수지가 축조되기 이전에는 이 두마을이 함께 봇제를 지내기도 하였다. 그러나, 봉황~세지간 도로를 사이에 두고 500m 정도의 거리가 있어서인지 아니면 예전에 운곡리가 죽곡리에 속했던 때문인지 그다지 두 마을간의 연계성은 찾아보기 어렵다. 운곡리는 총 3.45㎢의 면적에 100여호 400여명이 거주하며, 주업인 벼농사와 함께 수박 무 등의 그다지 많지 않은 특작물 재배로 살아가고 있다.
운곡, 귀동·송정마을
운곡 1구에 속해 있는 운곡, 귀동, 송정마을은 면소재지에서 서남쪽으로 약 2㎞지점에 있으며, 운곡리 정류장에서 버스를 내리면 남쪽으로 약 1.5㎞ 더 들어가 용제산 기슭에 자리잡고 있다. 마을 동쪽으로는 미사마을과 용정마을이 이웃하며, 서쪽으로는 도강김씨(道康金氏) 문산(門山)인 장군대좌라는 명당이 자리한다. 마을 앞으로는 평야가 펼쳐져 있고, 운곡천이 흐른다. 마을의 뒤로는 남동쪽으로부터 시작한 병풍처럼 생긴 병풍바위가 그림처럼 펼쳐져 있다. 병풍바위의 주산인 해발 400m의 용제산, 학이 날아가는 듯한 비학봉, 밤에는 학처럼 보인다는 야학봉, 중이 입는 가사모양을 닮았다 하여 붙여진 가사봉, 중이 춤추는 모습의 승무봉이 그 기이한 자태로 마을을 둘러싸고 있다. 원래 운곡소가 있던 이곳에는 고려시대 혹은 그 이전부터 많은 사람들이 살았을 것으로 추정되나, 현재로서 확인되는 것은 고려말 이 마을에 정착한 도강김씨(道康金氏)의 입향을 들 수 있다.
도강김씨 김광려(金光礪)가 해남에서 병마절도사로 재직하다가 그만두고 아버지 김희와 더불어 철야에서 살려고 하였는데, 어느 지관이 이르기를 철야터도 좋기는 하나 도강김씨가 살기에는 부적당하니 운곡으로 가서 자리잡으라 하여 오게 되었다 한다. 도강김씨의 입향 후로 1700년대에 김해김씨 김익정(金益精)이 광양현감을 지내다가 화순군 도암면 청소에서 살던 중 이곳으로 와 지금은 7세손인 김옥규(金玉圭) 등이 마을을 지키며 살고 있다. 이와 거의 비슷한 시기에 경주김씨(慶州金氏) 김상서(金尙瑞)가 문래면 용암에서 살다가 운곡리로 들어와 지금은 7세손인 김일우(金日羽) 등이 살고 있다.
운곡리는 1789년 호구총수에 죽곡면에 속한 마을로 나타나고 있으며, 1912년 지방 행정구역명칭일람에도 또한 귀동마을과 함께 그대로 죽곡면에 속하다가 1914년 행정구역개편과 함께 지금의 봉황면 관할 운곡리로 나타난다. 먼저 지명유래를 살펴보면, 운곡이란 마을 이름은 구름마을이라는 뜻으로, 마을 뒤에 산이 있어 용은 반드시 구름이 있어야 상서롭다하여 운곡이라 칭하게 되었다고 한다. 다음 귀동마을은 이 마을 윤신평 노파의 집 마당에 3m 정도의 거북처럼 생긴 바위가 있는데 여기서 따와 마을 이름을 귀동이라 했다한다. 송정마을은 1970년대 새마을사업으로 이름 지어진 마을로서, 본래 운곡리의 마을 입구에 있었는데, 예전에 이곳에 아름드리 소나무가 울창하였다 하여 송정(松亭)이라 부르게 되었다.
지금은 대여섯 그루만이 남아있으며 그 옆에는 선독 1기가 있다. 이 선독은 마을로 들어오는 액막이의 역할을 한다고 마을 사람들은 믿고 있으나, 이것에 대한 어떤 특별한 의례행위는 없다. 예로부터 운곡1구는 전체적인 마을의 형태가 배형국이라 하여 마을에 샘을 파지 않았다고 한다. 샘을 파게 되면 배구멍을 통하여 물이 들어와 마을이 망한다는 속설이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옛날에는 마을 앞 삼거리에 장대를 세워 배의 삿대부분을 표시하였으나 이곳 짐대거리에서 행해졌음직한 의례는 전해지지 않고 있다.
이 마을의 명물인 병풍바위는 길게 이어진 바위가 병풍을 두른 듯하여 이름 붙여진 것으로 예로부터 이 바위에는 3일 먹을 보화가 있다는 말이 전해온다. 또한 이곳에는 말발굽 자국이 있는 말발굽 바위, 장수가 통해 다녔다는 장수굴, 말구유처럼 생긴 구시바위, 짚신삼는 신틀바위, 독수리처럼 생긴 수리바위와 베틀바위가 있다. 바위에 글씨를 새긴 매향비가 있다는데 현재는 발견되지 않고 있다. 운곡1구에는 100여년전에 조직된 동계가 있는데 마을의 모든 일을 관장하고 있다. 자생조직은 다음과 같다. 1896년에 창립된 운곡위친계와 마을의 친목과 부녀사업을 위해, 1976년 부녀회가 조직되었고, 참여인원은 55명씩이다.
마을의 총인구는 132명으로 남자가 60명, 여자가 72명이다. 총면적은 0,61㎢이며, 이 중 전 0,11㎢, 답 0.19㎢, 임야 0.29㎢, 기타0.02㎢가 해당된다. 총 32가구가 농사를 짓고 있으며, 주요산업은 쌀과 보리재배로 주소득원은 쌀농사이다. 마을사람들은 담배와 고추를 특작물로 재배하고 있다. 마을의 주요 성씨는 도강김씨 10호, 경주김씨 7호, 김해김씨 3호, 기타 12호이다. 운곡 1구에는 100여년전에 조직된 동계가 있다. 마을의 모든 일을 관장하는 이 계는 매년 2월 1일에 열렸으나 편의상 양력 1월 1일로 옮겨 행하고 있다. 송정마을에는 친목을 위한 동계가 조직되어 있으며, 마을의 기본현황은 남자 35명, 여자 28명, 총 63명이 살고 있고, 총 면적은 0,41㎢이다. 이 중 전 0.07㎢, 답 0.12㎢, 임야 0.20㎢, 기타 0.02㎢가 해당된다. 마을의 19가구 모두가 농사를 짓고 있으며, 마을의 주산물은 쌀, 보리, 콩 재배이며, 특작물로 담배와 고추를 재배하고 있다. 마을의 성씨로는 김해김씨 7호, 해남윤씨 2호, 경주김씨 4호, 기타 6호가 거주하고 있다. 귀동마을은 1896년 위친계가 조직되어 있으며, 총 인구는 남자 9명, 여자 10명으로, 19명이며, 총면적은 0.85㎢로, 전 0.03㎢, 답 0,05㎢, 임야 0.75㎢, 기타 0.02㎢가 해당된다. 마을사람들은 쌀, 보리, 콩을 주로 재배하며, 특작물로는 고추와 참깨를 심고 있다. 마을의 성씨는 도강김씨 6호, 진주정씨 1호, 경주김씨1호, 문씨1호가 있다.
마음마을
마음 마을은 면소재지에서 남서쪽으로 2㎞쯤 떨어진 국도변에서 서쪽으로 500m 정도를 걸어 들어가면 마을의 입구가 보이기 시작한다. 마을 앞으로는 평야가 펼쳐져 있고, 남동쪽으로 신반마을과 운곡마을의 장군대좌 명당이 바라다보인다. 마을 중앙에는 남평향교에서 1945년도에 세워준 광산김씨(光山金氏) 쌍효문(雙孝門 )운천 (雲泉) 김정수(金亭洙)(1889~1963) 효행비가 있다. 또한 마을 뒤편등에는 1975년경에 건립된 광산김씨 제각인 운남제(雲南霽)가 있다. 이곳에는 후손 김성찬이 살고 있으며, 팔작지붕에 정면 4칸, 측면 1칸의 구조로 되어있다. 마음이라는 이름은 마을 형국이 갈마음수형(渴馬飮水形)이라 하여 목마른 말이 물을 마신다는 데서 유래되었다고 한다. 매년 음력 동짓날에 개최되는 동계는 약 100여년 전에 조직되어 마을사람들의 친목 도모에 큰 몫을 하고 있는데, 마을의 제반사에 관해 논의하고 품삯과 노임 등을 정한다. 한편 공동재산이 없는 관계로 얼마간의 거출을 정하여 정월에 행해지는 농악놀이에서 나온 기금과 함께 마을자금으로 운용하고 있다.
마을 지형이 말이 물을 마시는 형국임에도 불구하고 전답이 모두 건답이었던 이 곳은 천수에만 의존하여 넉넉지 못하였으나 만봉저수지가 축조된 이후로는 수리사정이 좋아졌다. 한편 마음마을은 사람들로부터 ‘새터마을'이라고도 불리우는데, 이것은 마을이 세워진 지 약 100년 정도밖에 되지 않아서 새로운 터라 하여 그렇게 부른다. 마음마을에는 장군봉, 멧돌바위가 있다. 장군봉은 윗마을에서 장군이 안 고랑에서 태어났다고 전해지고 있는데 이 장군이 태어난 것은 여기에 묘 자리를 썼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리고 멧돌바위는 본래는 산 위에 있었고 약 40년 전에 산언덕에 있었는데 비가 와서 허물어져 떨어져 지금은 묻혀버렸다. 마음마을의 자생조직으로는 약 100여년 전에 창립된 동계와 1976년 마을 부녀자들을 위해 조직된 부녀회, 1980년에 조직된 청년회가 있다. 마을의 기본 현황을 살펴보면 총 인구는 170명으로 남자 77명, 여자 93명이 해당 된다. 총 면적은 1.19㎢이며, 전 1.08㎢, 답 0.32㎢, 임야 0.68㎢, 기타 0.01㎢가 해당된다. 마을 사람들의 주요 산업은 쌀과 콩 재배이며, 주소득원은 쌀농사이다. 특작물로는 고추, 담배, 수박등을 심고 있고, 마을의 주요 성씨로는, 광산김씨 20호, 창원황씨 3호, 경주김씨 4호, 기타 7호로 이루어져 있다.
신반마을
운곡리 신반마을은 면소재지에서 남서쪽으로 2㎞쯤 떨어진 곳에 위치한다. 마을 남쪽으로는 용제산과 운곡마을이 보이고, 봉황~세지 간 도로를 사이에 두고, 서북쪽으로는 마음마을과 1983년도에 세워진 창용교회, 보건진료소가 있다. 북동쪽으로는 운곡, 용곡리 주민들에 의해 세워진 창룡초등학교가 자리하고 있고, 마을 중앙으로는 신반천이 흐른다. 봉황면 구석마을에서 청주한씨가 가장 먼저 이 마을로 이주해 왔다고 하지만 확실하지는 않다. 그 후 1900년대 초 한양조씨 조치순이 영암 금정에서 살다가 이곳에 와 정착하였고, 그후 운곡리 송정마을에서 살던 김해김씨 김병희가 이 마을에 와서 살게 되면서 마을이 형성되었다. 신반마을의 민속으로는 기우제를 들 수 있다.
마을에는 1940년경에 조직된 동계가 있으며, 현재 28명 정도가 참여하고 있다. 마을의 총 인구는 125명으로, 남자 62명, 여자 63명이고, 총 면적은 0.39㎢로 전 0.05㎢, 답 0.08㎢, 임야 0.16㎢, 기타 0.10㎢이다. 마을의 28가구 모두 농사를 짓고 있는데, 주요 산업으로는 쌀과 콩이며, 고추, 참깨 등을 특작물로 재배하고 있다. 마을의 주요 성씨로는 한양조씨 3호, 김해김씨 4호, 함풍이씨 3호, 기타 18호가 거주하고 있다.
- 담당부서 봉황면 총무
- 전화 061-339-38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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