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림리
- 등록일 2020.04.17 10:26
- 조회수 729
- 등록자 관리자
오림리는 면소재지에서 서남쪽으로 6km 지점에 위치하는데 본 면의 중간지대로 비옥한 땅을 중심으로 하여 8개 마을(오림·내촌·홍동·장성·서당·용강·천동·장치)으로 형성되어 있다. 그 연혁을 살펴보면, 삼한 이전에는 진국에 속하였고, 삼한때는 마한의 불미지국에 속하였다. 백제때는 실어산현으로 발라의 속형이었으며 통일신라의 경덕왕(742~764) 때 철야현으로 개칭하여 금성군에 속하였는데 오림리는 욱곡면의 관할에 있었다. 조선조 태종 15년(1415년) 영평현과 철야현이 합병하여 남평현이 되었고, 조선조 후기에 현을 군으로 개칭함에 따라 남평군이 되었다.
일제 때(1912년) 행정구역 개편으로 덕곡, 죽곡, 욱곡의 3개 면이 합쳐져 봉황면이 되었는데, 오림리는 신라말기부터 마을이 형성되어 여러 성씨가 거주한 것으로 추측되는데 그 후에 창원황씨(昌原黃氏) 황종진(黃種辰) ( 號 春軒, 嘉善大夫 )이 화순 동면에서 이곳으로 이사와 정착하였고, 이어서 광산김씨를 비롯 여러 성씨가 들어와 마을이 점차 발전했다는데 오림마을은 황씨가 자자일촌을 형성하고 있다. ‘오림'이란 마을 이름은 용제산맥이 이 마을의 주령(250m)을 이루는데 그 형상이 날아가는 까마귀가 시체를 쪼으려는 비오탁척(飛烏琢尺) 상징이며, 전후등에 수목이 울창하여 오자와 림자를 따서 오림이라 지칭하였다는 전설이 있다. 조선조 태종때는 영평현에 속한 오림역을 두어 영암·강진 병영서 서울을 내왕하는 중간노정지로 하였고, 당이 있었다고 하는데, 지금은 없어지고 당천이 지금까지 남아 당샘이라 부르고 있다.
오림마을
오림마을은 면소재지에서 서남쪽으로 6㎞지점에 위치하는데 토질은 점토질로서 비옥한 평야지대를 이룬다. 마을의 형국이 비오탁척(飛烏琢尺) 즉 날아가는 까마귀가 시체를 쪼으려는 형국이며 뒷등에 수목이 울창하여 임자를 따서 오림이라 칭하였다 하는데 인근에는 성적산이 있다. 개촌 년대는 통일신라시대(600년대)로 보고 있는데, 1400년전쯤 여러성씨가 거주하였다 하며, 1802년에 화순 동면에서 창원(昌原) 황종진(黃鍾辰)이 땅이 비옥한 이 마을로 이사해 왔으며, 1854년경에 광산 김원국이 장흥에서 옮겨와 마을이 더욱 발전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마을에 가뭄이 들면, 용제산에 올라가 기우제를 지내는데 돼지를 잡아 그 피를 뿌린다. 이것은 명산에 오물을 뿌리면 하늘이 노해서 그 피를 씻기 위해 비가 내린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기우제를 지내도 비가 오지 않으면 마을 사람들은 징과 꽹과리를 치며, 호미와 괭이 등을 가지고 용제산에 올라가 묘를 모두 파헤쳤다고 하는데 명산에 묘를 쓰면 산신령이 노해서 벌을 주기 위해 비를 내리지 않았다고 믿었던데서 행해진 것으로, 그래서 지금도 용제산에는 묘가 없다고 한다.
한편 한일합방과 동시에 없어진 오림역이 이곳에 있었는데 이 역은 고려말에 세워진 것으로 병영, 강진, 해남, 장흥 등지에서 서울을 가려면 이 역을 지나가야 했기에 그 당시에는 상당히 번창하였다고 전한다. 현재는 그 자리에 민가가 지어서 사람이 살고 있다. 그리고 이 역 경내에서 거주하는 사람들에게는 모든 공과금이 부과되지 않았고, 역답도 수십두락이었다고 한다. 민간신앙으로는 집안에 환자가 생기면 액맥이굿을 하고, 명절에는 마당밟기, 풍년이나 경사가 있을때는 농악놀이도 하였다. 마을에는 1961년에 조직된 위친계에 25명, 1970년 조직된 친목계에 30명, 1986년 조직된 노인회에 36명의 마을 사람들이 참여하고 있다. 마을의 총인구는 132명으로, 이 중 남자 63명, 여자 69명이 해당되며, 마을의 총면적은 0.33㎢로, 전 0.10㎢, 답 0.18㎢, 임야 0.25㎢가 해당된다. 마을의 총 가구수는 34호로 이 중 한 가구만이 비농가다. 마을 사람들의 주요 산업은 쌀농사이며, 특작물로 수박과 고추를 재배하고 있다. 마을의 주요 성씨로는 창원황씨 15호, 광산김씨 10호, 김해김씨 4호, 기타 5호가 있다.
내촌마을
오림리 내촌마을은 면소재지에서 남서쪽으로 6㎞ 거리에 위치한다. 오림리 3구의 내촌마을은 평야지대로 토질은 점토질이며, 용제산의 주령인 성적산(250m)을 안산으로 하고 있다. 이 마을은 신라말 서기 900년쯤 마을이 형성되었다고 전해지는데 정확한 연대나 입촌성씨는 알 수 없다. 단지 1200년쯤 박씨가 집성촌을 이루었는데 어떤 사유에서인지 폐촌되고, 그후 1400년쯤 신안주씨가 들어와 집성촌을 이루어 비교적 부유하게 살았다고 하는데 연대는 알 수 없으나 일설에 의하면 전란으로 마을이 폐허가 되었다 한다. 1600년대 말경 창영조씨 조경걸이 나주 옛 장본에서 이곳으로 이사왔고, 1800년쯤 고운 최치원 선생의 23세손 최의환이 이 마을로 이사와 그 둘째아들 최기호를 조경걸의 5세손 조흥진의 장녀와 결혼시켜 6대째 살고 있다. 그후 김해김씨, 선산임씨, 광산김씨, 여흥민씨, 진주강씨 등이 이주해와 현재 30여호가 살고 있다.
한편 내촌마을의 정각 뜰에는 약 600년된 둘레 4m의 팽나무 한그루가 서 있는데, 팽나무 잎이 일시에 잘 피면 풍년이 들고, 또 국가에 변란이 있을 때면 잎이 황갈색으로 변했다고 전해오고 있다. 그런데 이 팽나무가 고령이어서인지 차츰 고사 직전에 이르자 이 마을에 사는 조치섭이 희귀목을 이대로 방치할 수는 없다하여 정성껏 보호하고 관리함으로써 소생케 했다. 1945년 8.15 해방이 되던 해에는 잎이 황갈색으로 변했고, 1950년 한국전쟁 당시에도 역시 잎이 황갈색으로 변한 것을 보고 마을 사람들이 하나같이 입을 모아 과연 신기한 나무임을 입증했다 한다. 이 마을 명인으로는 매년 정월이면 마당밟기와 농악놀이 때 상쇠인 조병태가 있어 민요도 잘 부르는데, 1989년도 전라남도 민요대회에 출전하여 민속발굴회에서 우수상을 수상했다. 그는 상쇠 들노래의 민속보유자이다. 마을에는 1953년 조직된 위친계와 1973년 마을 사람들이 모여 유람을 가기 위해 마련된 유람계가 있으며. 총 30여명 정도가 참여하고 있다. 마을의 기본현황으로 총 인구는 150명으로, 이중 남자 70명, 여자 80명이다. 총 면적은 0.34㎢로, 전 0.11㎢, 답 0.17㎢, 임야 0.06㎢가 해당된다. 마을의 주요 산업은 쌀농사이며, 수박을 특작물로 재배하고 있다. 성씨로는, 창녕조씨 25호, 경주최씨 3호, 여흥문씨 2호, 김해김씨 3호가 있다.
장치마을
면소재지에서 서쪽으로 7㎞ 떨어진 지점에 위치하여 세지면과 이웃하고 있는 평촌이며, 영장선이 경계하고 있다. 매봉산의 주류를 타고 마을이 형성되어 마을 뒤에는 매등이 있고, 앞에는 장닭골이 있는데, 이 형태가 마치 꿩이 잠복하고 있는 형상이라 하여 이름을 장치라 한다. 조선조 말엽 창원황씨, 경주최씨, 신안주씨, 전주이씨가 정착하여 마을을 형성했는데, 황씨가 이주하고 김해김씨가 들어와 다른 성씨와 더불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 옛날 교통이 발달되지 않아 걸어다녔을 때는 마을 경계선에 사금독거리라는 주막집이 있었는데 영산포장을 보기 위해 세지, 영암, 봉황일부의 장사꾼들이 이집에 투숙하고 갔다고 하나 지금은 터만 남아 있을 뿐이다. 이 마을의 유공자로는 새마을 가꾸기 사업을 한 김영원과 과수단지를 조성하고 도예 공장을 설치 운영하고 있는 정옥균이 있으며, 효행자는 김영원으로 부모에게 효도를 했다하여 1989년에 나주군수상을 수상하였다. 마을에는 친목을 위한 동계가 조직되어 있고, 총 인구는 40명이다. 마을의 총면적은 0.10㎢로, 전 0.05㎢, 답 0.03㎢, 임야 0.02㎢가 해당되며, 주요 산업은 쌀농사이며, 특작물은 수박이다. 성씨로는 김해김씨 4호가 살고 있다.
장성마을
면소재지에서 서남쪽으로 약 6㎞ 떨어진 지점에 위치하며, 비옥한 점토질의 평야가 마을앞에 펼쳐져 있다. 해개~ 송정간 도로가 마을 앞을 지나감으로써 교통은 비교적 편리한 편이다. 용제산맥을 타고 내려와 장군봉이 안산을 이루고, 도강김씨 장군묘가 있으며 마을 뒤에는 운곡천의 맑은 물이 흐르고 있다. 옛날 한양을 내왕하는 길목이라 마을 앞에 장승이 서 있었다하여 장성마을이라 했다한다. 조선조 태종때, 김씨가 살다가 떠나고 그후 창원 황찬원이 생활근거지를 찾아 정착하였고, 그 뒤로 여산송씨가 들어와 살게 되었는데 지금은 김해김씨등 여섯 성씨(姓氏)가 살고 있다. 이 마을은 지형적으로 사람이 살기 좋은 곳이라서 일제치하에는 왜인들이 많이 살았는데 해방이 되자 모두 본국으로 돌아갔다. 한국 전쟁후 마을 사람들은 도시를 향해 농촌을 떠나버렸다.
1969년에 전 가구가 전기를 가설하였고, 1975년에는 새마을가꾸기 사업으로 골목길 100m를 폭 4m 로 확장하였으며, 지붕을 개량하고 홍동서 장성간 도로를 확장했다. 한편 이 마을출신인 정순남은 1983년 제23회 국가행정고시에 합격하여 마을의 명성을 드높였다. 장성마을에는 동계가 조직되어 있으며, 총인구는 31명이다. 마을의 총 면적은 0.09㎢로, 전 0.04㎢, 답 0.03㎢, 임야 0.01㎢, 기타 0.01㎢가 해당된다. 마을 사람들의 주소득원은 쌀농사이며, 수박, 담배 등의 특작물을 재배하고 있다. 마을의 성씨로는 김해김씨 3호, 도강김씨 2호, 기타 2호가 살고 있다.
홍동마을
홍동마을은 면소재지에서 서남쪽으로 6㎞ 떨어진 곳에 위치한 비옥한 평야지대이다. 이 마을 남단에 솟아있는 명산인 용제산을 주령으로 좌우로 능선이 뻗어 있어 아담하고 손고리같은 지형을 하고 있다. 마을 중앙에 샘이 있는데 수량이 많아 홈을 뻗쳐 운곡리 들의 농업용수로 사용하였다는데 원래는 마을 이름을 홈걸이라 불렀는데 행정구역 개편으로 홍동으로 바뀌었다. 고려 말엽에 범씨가 살다가 페촌이 되고, 그후 창원 황종화가 이 마을에 정착한 뒤로는 김해김씨, 청주한씨가 이 마을을 형성하였다 하며, 현재는 황씨와 김씨가 주축을 이루고 있다. 마을 입구에는 선돌이 좌우로 1개씩 서 있고, 마을 뒤등에도 바위가 두 개 세워져 있는데 좌우로 서 있는 선돌은 마을의 재앙을 막기 위해 세웠다고 하며 마을 뒷등의 두 개의 바위는 여기에 기도를 하면 소원성취 한다하여 다른 지방에서까지 많은 사람들이 찾아와 기도를 드렸으나 한국전쟁 후부터 차츰 줄어들더니 오늘에 와서는 완전히 발길을 끊겼다 한다.
한편 이 마을에는 여덟명의 장사가 있었는데 하도 횡포가 심하므로 이 소문을 들은 한 도사가 혼을 내주려고 도승으로 변하여 마을로 내려와서 시주를 구했다. 그런데 이 장사들은 시주는커녕 도승을 구박하였고, 도승은 혼잣말처럼 “마을 뒤쪽에 있는 바위를 떨어뜨리면 장사들은 더 부자가 될 것이라”하였고, 이 말을 엿들은 장사들은 서로 힘자랑을 하면서 그 바위들을 모조리 떨어뜨려버렸다. 그후 장사들은 시름시름 앓다가 모두 죽고 폐촌의 위기에 놓이자, 범씨라는 사람이 그 바위를 다시 제자리에 갖다논 후 마을에 다시 평화가 찾아왔다는 전설이 전해지고 있다. 마을의 총 인구는 31명이며, 총 가구수는 7호다. 총 면적은 0.16㎢이며, 이 중 전 0.08㎢, 답 0.04㎢, 임야 0.03㎢, 기타 0.01㎢이다. 마을 사람들의 주소득원은 쌀농사이며, 수박과 담배를 특작물로 심고 있다. 성씨로는 김해김씨 3호, 창원황씨 2호, 기타 2호가 있다.
마을의 생활과 민속
동계
총회라고도 하며, 처음에는 음력 1월 15일에 개최되어 오다가, 그후 2월 1일로, 지금은 양력 12월 30일에 개최하고 있다.
문중계(안동권씨)
이십여년 전부터 음력 2월 10일에 시행되고 있는데, 문중 예산, 문중 사업, 재정관리 등을 토의한다.
위친계
현재의 욱곡 3구인 비조와 예동마을이 같이 참여하여 조직된 계로서 50대 연령층으로 구성되어 있다.
흥애위친계
위친계 자녀와 그 외 30~40대로 구성된 계로 매년 2회 (봄, 가을) 모임을 갖는다.
농악
20여년전만 해도 왕성하였으나 지금은 많이 쇠퇴해가고 있다.
용강마을
용강마을은 면소재지에서 남으로 영장선을 따라 12㎞, 면소재지에서 서쪽으로 5㎞떨어진 지점에 위치하며, 동남에 덕룡산, 동북에 봉황산이 있고, 남으로 만봉, 서에는 북쪽 멀리 금성산과 영산강이 흐르고 있다. 또한 동남쪽으로 리천이라는 시냇물이 흐르고, 북으로 큰 들이 펼쳐 있으며, 마을 뒤편에 농수산이 이 마을의 역사를 간직하고 있으며, 마을의 노송은 용비늘을 형성하고 있다. 옛날에는 작은 소가 있었는데 몇 백년이 지나면서 흙에 묻혀 동천이라는 평지가 되었다 한다. 그래서 논도 일구고 밭도 만들었는데 물이 모자라 저수지를 만들려고 파보니 아름드리 나무가 묻혀 있었다고 한다. 그래서 용강은 옛날 동각 자리에 세워졌다는 전설이 있다. 마을 뒤에 쟁기내가 용소와 같다하여 龍沼村으로 부르다가 1910년에 한일합병후 용강으로 개칭하여 현재에 이른다. 조선조 숙종 병진년(1676)에 한씨와 조씨가 터를 잡았다고 하는데, 청주한씨 한필옥이 조봉대부 공릉참봉으로 재직시에 간신들을 척결하는 상소문을 올린 것이 왕의 노여움을 사 화순으로 유배되었다가 귀양에서 풀려 1700년대 중반에 이곳으로 이거하여 정착하였다 하며, 그 뒤를 이어 창녕조씨, 선산임씨, 반남박씨, 김해김씨 등 여러 성씨가 모여 살게 되었다고 한다.
한편 입향조는 남평현감 한백행으로 청주한씨의 묘소는 반송정 및 연소등에 위치한다. 이 마을 앞에는 청주한씨 효열각이 있는데, 그 효열각으로 가는 길 왼편에 선돌이 하나 있다. 이 선돌은 용강촌의 수세의 액을 막기 위해 세워놓은 것인데 왜인들이 고려장에서 보물을 찾는다고 파헤치다가 뒤집어놓은 것을 마을 사람들이 다시 옮겨 와 세웠다. 용강마을에서도 당산제를 해방 전후까지 지냈는데 시대의 변천에 따라 미신이라고 폐쇄해 버리고 당산나무 부근에 동각도 공기의 흐름을 나쁘게 한다고 마을 앞으로 옮겼다. 마을의 자생조직으로는 마을 사람들간의 화합을 목적으로 한 동중계가 1958년에 조직되었으며, 참여인원은 35명에 이른다. 마을의 기본현황은총인구 244명으로, 남자 130명, 여자 114명이며, 총 면적은 1.19㎢이다. 이 중 전 0.31㎢, 답 0.41㎢, 임야 0.45㎢, 기타 0.02㎢가 해당된다. 마을의 총 가구수는 49호로 모두 농사를 짓고 있으며, 주소득원은 쌀농사이다. 특작물로는 수박, 채소, 배 과수농사를 짓는 사람들이 있으며, 성씨는 청주한씨 41호와 기타 8호가 살고 있다.
천동마을
천동마을은 면소재지에서 서쪽으로 7㎞지점에 위치하며, 영장선을 경계로 세지면과 이웃하고 있다. 이 천동마을은 일명 잿등이라고도 하는데 마을 앞의 우물이 맑고 폭포수같이 솟구쳐 흐르고 있어 마을 이름을 천동이라 하였다 한다. 그런데 마을 앞산에 이씨들의 선산인 반월명당이 있는데 이 이름을 따서 반월마을로 이름을 바꾸자는 의견도 있다. 신라 말엽에 안동권씨가 입촌하였는데 그 이름은 알 수가 없고, 그 뒤로 김해김씨가 들어와 마을을 이루었는데 그 김씨의 동서인 박우후 도원수가 마을의 방향을 살펴보고, 앞 등이 허하여 피해가 있을 것이라고 하여 축성하여 주어 오늘에 이르기까지 아무 탈없이 이어오고 있다고 한다.
이 마을은 이장과 반장이 있으며, 계는 마을단위로 조직되어 있었는데 1988년에 상폭계를 두 부락이 합쳐서 했기 때문에 동계도 같이 지낸다. 마을의 자생조직으로는 친목 도모를 위해 병자년에 상신계가 조직되었다. 총 인구는 60명으로 이중 남자 32명, 여자 28명이 있고, 총 면적은 0.29㎢로, 전 0.08㎢, 답 0.10㎢, 임야 0.10㎢, 기타 0.01㎢가 해당된다. 주소득원은 쌀농사이며, 수박도 재배하고 있다. 성씨는 한씨 3호, 조씨 3호, 임씨 3호, 서씨 4호가 살고 있다.
서당마을
서당마을은 면소재지에서 서남쪽으로 6㎞ 떨어진 지점에 위치한다. 성적산아래 노학귀소라는 풍천임씨의 율봉사가 있고, 안산인 날개등이 병풍처럼 둘러쳐져 경치가 아름답고, 고요한 곳이라 선비들이 수도한 곳이라 하여 서당골이라 일컬었다 한다. 조선조 태종때 풍천임씨가 동창에 터를 잡으려고 했는데, 웃어른들이 마을 이름에 ‘蒼'자가 들어가면 번화지이므로 혼잡하고 약하다고 하여 금천면 야산과 유전마을에 정착하였고, 이곳에서 제각을 보호하기 위해 임씨 2가구가 들어와 살았다는데 그후 나주임씨, 나주정씨 등이 정착하여 마을을 형성하였다.
이 마을에는 원래 9가구가 살았는데 40여년 전에 길이 험하고 교통이 불편하여 모두 타처로 이주하고 폐촌이 되다시피한 현재는 김해김씨, 전주이씨 두 가구만이 남아있다. 마을 앞에 경치좋게 펼쳐진 날개등에는 학의 알이라 하여 일명 알바위라는 15개의 바위가 있는데, 이 바위들은 거의 일정한 간격으로 한곳에 집중되어 있는 지석묘이다. 이 지석묘의 장축은 남북방향인 것 같고, 이것은 서당마을의 기자(箕子) 신앙과 학알과도 관련이 있어 여자들이 와서 아들을 낳게 해 달라고 빌기도 한다. 풍산임씨의 제각은 거의 300년의 역사를 가지고 있었는데, 제각을 보수공사를 하다가 전복되어 다시 증설하였다. 이 제각 앞에 큰 나무가 있는데 몇 년전 태풍으로 부러졌을때 그 나무가 제각쪽으로 넘어지지 않고 동쪽으로 넘어졌다하여 명당이라고도 한다. 한편 제각으로 가는 길 옆에는 커다란 샘 하나가 있는데, 이 샘은 왜정때 가뭄에 식수가 없어졌을때도 물이 마르지 않아 식수뿐만 아니라 농업용수로도 이용했다. 전에는 향나무가 샘위에 있어 풍치도 좋고 깨끗하였는데 폐촌이 되면서 샘을 돌보지 않아 현재는 농업용수로만 쓰여지고 있다 한다.
일제 때(1912년) 행정구역 개편으로 덕곡, 죽곡, 욱곡의 3개 면이 합쳐져 봉황면이 되었는데, 오림리는 신라말기부터 마을이 형성되어 여러 성씨가 거주한 것으로 추측되는데 그 후에 창원황씨(昌原黃氏) 황종진(黃種辰) ( 號 春軒, 嘉善大夫 )이 화순 동면에서 이곳으로 이사와 정착하였고, 이어서 광산김씨를 비롯 여러 성씨가 들어와 마을이 점차 발전했다는데 오림마을은 황씨가 자자일촌을 형성하고 있다. ‘오림'이란 마을 이름은 용제산맥이 이 마을의 주령(250m)을 이루는데 그 형상이 날아가는 까마귀가 시체를 쪼으려는 비오탁척(飛烏琢尺) 상징이며, 전후등에 수목이 울창하여 오자와 림자를 따서 오림이라 지칭하였다는 전설이 있다. 조선조 태종때는 영평현에 속한 오림역을 두어 영암·강진 병영서 서울을 내왕하는 중간노정지로 하였고, 당이 있었다고 하는데, 지금은 없어지고 당천이 지금까지 남아 당샘이라 부르고 있다.
오림마을
오림마을은 면소재지에서 서남쪽으로 6㎞지점에 위치하는데 토질은 점토질로서 비옥한 평야지대를 이룬다. 마을의 형국이 비오탁척(飛烏琢尺) 즉 날아가는 까마귀가 시체를 쪼으려는 형국이며 뒷등에 수목이 울창하여 임자를 따서 오림이라 칭하였다 하는데 인근에는 성적산이 있다. 개촌 년대는 통일신라시대(600년대)로 보고 있는데, 1400년전쯤 여러성씨가 거주하였다 하며, 1802년에 화순 동면에서 창원(昌原) 황종진(黃鍾辰)이 땅이 비옥한 이 마을로 이사해 왔으며, 1854년경에 광산 김원국이 장흥에서 옮겨와 마을이 더욱 발전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마을에 가뭄이 들면, 용제산에 올라가 기우제를 지내는데 돼지를 잡아 그 피를 뿌린다. 이것은 명산에 오물을 뿌리면 하늘이 노해서 그 피를 씻기 위해 비가 내린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기우제를 지내도 비가 오지 않으면 마을 사람들은 징과 꽹과리를 치며, 호미와 괭이 등을 가지고 용제산에 올라가 묘를 모두 파헤쳤다고 하는데 명산에 묘를 쓰면 산신령이 노해서 벌을 주기 위해 비를 내리지 않았다고 믿었던데서 행해진 것으로, 그래서 지금도 용제산에는 묘가 없다고 한다.
한편 한일합방과 동시에 없어진 오림역이 이곳에 있었는데 이 역은 고려말에 세워진 것으로 병영, 강진, 해남, 장흥 등지에서 서울을 가려면 이 역을 지나가야 했기에 그 당시에는 상당히 번창하였다고 전한다. 현재는 그 자리에 민가가 지어서 사람이 살고 있다. 그리고 이 역 경내에서 거주하는 사람들에게는 모든 공과금이 부과되지 않았고, 역답도 수십두락이었다고 한다. 민간신앙으로는 집안에 환자가 생기면 액맥이굿을 하고, 명절에는 마당밟기, 풍년이나 경사가 있을때는 농악놀이도 하였다. 마을에는 1961년에 조직된 위친계에 25명, 1970년 조직된 친목계에 30명, 1986년 조직된 노인회에 36명의 마을 사람들이 참여하고 있다. 마을의 총인구는 132명으로, 이 중 남자 63명, 여자 69명이 해당되며, 마을의 총면적은 0.33㎢로, 전 0.10㎢, 답 0.18㎢, 임야 0.25㎢가 해당된다. 마을의 총 가구수는 34호로 이 중 한 가구만이 비농가다. 마을 사람들의 주요 산업은 쌀농사이며, 특작물로 수박과 고추를 재배하고 있다. 마을의 주요 성씨로는 창원황씨 15호, 광산김씨 10호, 김해김씨 4호, 기타 5호가 있다.
내촌마을
오림리 내촌마을은 면소재지에서 남서쪽으로 6㎞ 거리에 위치한다. 오림리 3구의 내촌마을은 평야지대로 토질은 점토질이며, 용제산의 주령인 성적산(250m)을 안산으로 하고 있다. 이 마을은 신라말 서기 900년쯤 마을이 형성되었다고 전해지는데 정확한 연대나 입촌성씨는 알 수 없다. 단지 1200년쯤 박씨가 집성촌을 이루었는데 어떤 사유에서인지 폐촌되고, 그후 1400년쯤 신안주씨가 들어와 집성촌을 이루어 비교적 부유하게 살았다고 하는데 연대는 알 수 없으나 일설에 의하면 전란으로 마을이 폐허가 되었다 한다. 1600년대 말경 창영조씨 조경걸이 나주 옛 장본에서 이곳으로 이사왔고, 1800년쯤 고운 최치원 선생의 23세손 최의환이 이 마을로 이사와 그 둘째아들 최기호를 조경걸의 5세손 조흥진의 장녀와 결혼시켜 6대째 살고 있다. 그후 김해김씨, 선산임씨, 광산김씨, 여흥민씨, 진주강씨 등이 이주해와 현재 30여호가 살고 있다.
한편 내촌마을의 정각 뜰에는 약 600년된 둘레 4m의 팽나무 한그루가 서 있는데, 팽나무 잎이 일시에 잘 피면 풍년이 들고, 또 국가에 변란이 있을 때면 잎이 황갈색으로 변했다고 전해오고 있다. 그런데 이 팽나무가 고령이어서인지 차츰 고사 직전에 이르자 이 마을에 사는 조치섭이 희귀목을 이대로 방치할 수는 없다하여 정성껏 보호하고 관리함으로써 소생케 했다. 1945년 8.15 해방이 되던 해에는 잎이 황갈색으로 변했고, 1950년 한국전쟁 당시에도 역시 잎이 황갈색으로 변한 것을 보고 마을 사람들이 하나같이 입을 모아 과연 신기한 나무임을 입증했다 한다. 이 마을 명인으로는 매년 정월이면 마당밟기와 농악놀이 때 상쇠인 조병태가 있어 민요도 잘 부르는데, 1989년도 전라남도 민요대회에 출전하여 민속발굴회에서 우수상을 수상했다. 그는 상쇠 들노래의 민속보유자이다. 마을에는 1953년 조직된 위친계와 1973년 마을 사람들이 모여 유람을 가기 위해 마련된 유람계가 있으며. 총 30여명 정도가 참여하고 있다. 마을의 기본현황으로 총 인구는 150명으로, 이중 남자 70명, 여자 80명이다. 총 면적은 0.34㎢로, 전 0.11㎢, 답 0.17㎢, 임야 0.06㎢가 해당된다. 마을의 주요 산업은 쌀농사이며, 수박을 특작물로 재배하고 있다. 성씨로는, 창녕조씨 25호, 경주최씨 3호, 여흥문씨 2호, 김해김씨 3호가 있다.
장치마을
면소재지에서 서쪽으로 7㎞ 떨어진 지점에 위치하여 세지면과 이웃하고 있는 평촌이며, 영장선이 경계하고 있다. 매봉산의 주류를 타고 마을이 형성되어 마을 뒤에는 매등이 있고, 앞에는 장닭골이 있는데, 이 형태가 마치 꿩이 잠복하고 있는 형상이라 하여 이름을 장치라 한다. 조선조 말엽 창원황씨, 경주최씨, 신안주씨, 전주이씨가 정착하여 마을을 형성했는데, 황씨가 이주하고 김해김씨가 들어와 다른 성씨와 더불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 옛날 교통이 발달되지 않아 걸어다녔을 때는 마을 경계선에 사금독거리라는 주막집이 있었는데 영산포장을 보기 위해 세지, 영암, 봉황일부의 장사꾼들이 이집에 투숙하고 갔다고 하나 지금은 터만 남아 있을 뿐이다. 이 마을의 유공자로는 새마을 가꾸기 사업을 한 김영원과 과수단지를 조성하고 도예 공장을 설치 운영하고 있는 정옥균이 있으며, 효행자는 김영원으로 부모에게 효도를 했다하여 1989년에 나주군수상을 수상하였다. 마을에는 친목을 위한 동계가 조직되어 있고, 총 인구는 40명이다. 마을의 총면적은 0.10㎢로, 전 0.05㎢, 답 0.03㎢, 임야 0.02㎢가 해당되며, 주요 산업은 쌀농사이며, 특작물은 수박이다. 성씨로는 김해김씨 4호가 살고 있다.
장성마을
면소재지에서 서남쪽으로 약 6㎞ 떨어진 지점에 위치하며, 비옥한 점토질의 평야가 마을앞에 펼쳐져 있다. 해개~ 송정간 도로가 마을 앞을 지나감으로써 교통은 비교적 편리한 편이다. 용제산맥을 타고 내려와 장군봉이 안산을 이루고, 도강김씨 장군묘가 있으며 마을 뒤에는 운곡천의 맑은 물이 흐르고 있다. 옛날 한양을 내왕하는 길목이라 마을 앞에 장승이 서 있었다하여 장성마을이라 했다한다. 조선조 태종때, 김씨가 살다가 떠나고 그후 창원 황찬원이 생활근거지를 찾아 정착하였고, 그 뒤로 여산송씨가 들어와 살게 되었는데 지금은 김해김씨등 여섯 성씨(姓氏)가 살고 있다. 이 마을은 지형적으로 사람이 살기 좋은 곳이라서 일제치하에는 왜인들이 많이 살았는데 해방이 되자 모두 본국으로 돌아갔다. 한국 전쟁후 마을 사람들은 도시를 향해 농촌을 떠나버렸다.
1969년에 전 가구가 전기를 가설하였고, 1975년에는 새마을가꾸기 사업으로 골목길 100m를 폭 4m 로 확장하였으며, 지붕을 개량하고 홍동서 장성간 도로를 확장했다. 한편 이 마을출신인 정순남은 1983년 제23회 국가행정고시에 합격하여 마을의 명성을 드높였다. 장성마을에는 동계가 조직되어 있으며, 총인구는 31명이다. 마을의 총 면적은 0.09㎢로, 전 0.04㎢, 답 0.03㎢, 임야 0.01㎢, 기타 0.01㎢가 해당된다. 마을 사람들의 주소득원은 쌀농사이며, 수박, 담배 등의 특작물을 재배하고 있다. 마을의 성씨로는 김해김씨 3호, 도강김씨 2호, 기타 2호가 살고 있다.
홍동마을
홍동마을은 면소재지에서 서남쪽으로 6㎞ 떨어진 곳에 위치한 비옥한 평야지대이다. 이 마을 남단에 솟아있는 명산인 용제산을 주령으로 좌우로 능선이 뻗어 있어 아담하고 손고리같은 지형을 하고 있다. 마을 중앙에 샘이 있는데 수량이 많아 홈을 뻗쳐 운곡리 들의 농업용수로 사용하였다는데 원래는 마을 이름을 홈걸이라 불렀는데 행정구역 개편으로 홍동으로 바뀌었다. 고려 말엽에 범씨가 살다가 페촌이 되고, 그후 창원 황종화가 이 마을에 정착한 뒤로는 김해김씨, 청주한씨가 이 마을을 형성하였다 하며, 현재는 황씨와 김씨가 주축을 이루고 있다. 마을 입구에는 선돌이 좌우로 1개씩 서 있고, 마을 뒤등에도 바위가 두 개 세워져 있는데 좌우로 서 있는 선돌은 마을의 재앙을 막기 위해 세웠다고 하며 마을 뒷등의 두 개의 바위는 여기에 기도를 하면 소원성취 한다하여 다른 지방에서까지 많은 사람들이 찾아와 기도를 드렸으나 한국전쟁 후부터 차츰 줄어들더니 오늘에 와서는 완전히 발길을 끊겼다 한다.
한편 이 마을에는 여덟명의 장사가 있었는데 하도 횡포가 심하므로 이 소문을 들은 한 도사가 혼을 내주려고 도승으로 변하여 마을로 내려와서 시주를 구했다. 그런데 이 장사들은 시주는커녕 도승을 구박하였고, 도승은 혼잣말처럼 “마을 뒤쪽에 있는 바위를 떨어뜨리면 장사들은 더 부자가 될 것이라”하였고, 이 말을 엿들은 장사들은 서로 힘자랑을 하면서 그 바위들을 모조리 떨어뜨려버렸다. 그후 장사들은 시름시름 앓다가 모두 죽고 폐촌의 위기에 놓이자, 범씨라는 사람이 그 바위를 다시 제자리에 갖다논 후 마을에 다시 평화가 찾아왔다는 전설이 전해지고 있다. 마을의 총 인구는 31명이며, 총 가구수는 7호다. 총 면적은 0.16㎢이며, 이 중 전 0.08㎢, 답 0.04㎢, 임야 0.03㎢, 기타 0.01㎢이다. 마을 사람들의 주소득원은 쌀농사이며, 수박과 담배를 특작물로 심고 있다. 성씨로는 김해김씨 3호, 창원황씨 2호, 기타 2호가 있다.
마을의 생활과 민속
동계
총회라고도 하며, 처음에는 음력 1월 15일에 개최되어 오다가, 그후 2월 1일로, 지금은 양력 12월 30일에 개최하고 있다.
문중계(안동권씨)
이십여년 전부터 음력 2월 10일에 시행되고 있는데, 문중 예산, 문중 사업, 재정관리 등을 토의한다.
위친계
현재의 욱곡 3구인 비조와 예동마을이 같이 참여하여 조직된 계로서 50대 연령층으로 구성되어 있다.
흥애위친계
위친계 자녀와 그 외 30~40대로 구성된 계로 매년 2회 (봄, 가을) 모임을 갖는다.
농악
20여년전만 해도 왕성하였으나 지금은 많이 쇠퇴해가고 있다.
용강마을
용강마을은 면소재지에서 남으로 영장선을 따라 12㎞, 면소재지에서 서쪽으로 5㎞떨어진 지점에 위치하며, 동남에 덕룡산, 동북에 봉황산이 있고, 남으로 만봉, 서에는 북쪽 멀리 금성산과 영산강이 흐르고 있다. 또한 동남쪽으로 리천이라는 시냇물이 흐르고, 북으로 큰 들이 펼쳐 있으며, 마을 뒤편에 농수산이 이 마을의 역사를 간직하고 있으며, 마을의 노송은 용비늘을 형성하고 있다. 옛날에는 작은 소가 있었는데 몇 백년이 지나면서 흙에 묻혀 동천이라는 평지가 되었다 한다. 그래서 논도 일구고 밭도 만들었는데 물이 모자라 저수지를 만들려고 파보니 아름드리 나무가 묻혀 있었다고 한다. 그래서 용강은 옛날 동각 자리에 세워졌다는 전설이 있다. 마을 뒤에 쟁기내가 용소와 같다하여 龍沼村으로 부르다가 1910년에 한일합병후 용강으로 개칭하여 현재에 이른다. 조선조 숙종 병진년(1676)에 한씨와 조씨가 터를 잡았다고 하는데, 청주한씨 한필옥이 조봉대부 공릉참봉으로 재직시에 간신들을 척결하는 상소문을 올린 것이 왕의 노여움을 사 화순으로 유배되었다가 귀양에서 풀려 1700년대 중반에 이곳으로 이거하여 정착하였다 하며, 그 뒤를 이어 창녕조씨, 선산임씨, 반남박씨, 김해김씨 등 여러 성씨가 모여 살게 되었다고 한다.
한편 입향조는 남평현감 한백행으로 청주한씨의 묘소는 반송정 및 연소등에 위치한다. 이 마을 앞에는 청주한씨 효열각이 있는데, 그 효열각으로 가는 길 왼편에 선돌이 하나 있다. 이 선돌은 용강촌의 수세의 액을 막기 위해 세워놓은 것인데 왜인들이 고려장에서 보물을 찾는다고 파헤치다가 뒤집어놓은 것을 마을 사람들이 다시 옮겨 와 세웠다. 용강마을에서도 당산제를 해방 전후까지 지냈는데 시대의 변천에 따라 미신이라고 폐쇄해 버리고 당산나무 부근에 동각도 공기의 흐름을 나쁘게 한다고 마을 앞으로 옮겼다. 마을의 자생조직으로는 마을 사람들간의 화합을 목적으로 한 동중계가 1958년에 조직되었으며, 참여인원은 35명에 이른다. 마을의 기본현황은총인구 244명으로, 남자 130명, 여자 114명이며, 총 면적은 1.19㎢이다. 이 중 전 0.31㎢, 답 0.41㎢, 임야 0.45㎢, 기타 0.02㎢가 해당된다. 마을의 총 가구수는 49호로 모두 농사를 짓고 있으며, 주소득원은 쌀농사이다. 특작물로는 수박, 채소, 배 과수농사를 짓는 사람들이 있으며, 성씨는 청주한씨 41호와 기타 8호가 살고 있다.
천동마을
천동마을은 면소재지에서 서쪽으로 7㎞지점에 위치하며, 영장선을 경계로 세지면과 이웃하고 있다. 이 천동마을은 일명 잿등이라고도 하는데 마을 앞의 우물이 맑고 폭포수같이 솟구쳐 흐르고 있어 마을 이름을 천동이라 하였다 한다. 그런데 마을 앞산에 이씨들의 선산인 반월명당이 있는데 이 이름을 따서 반월마을로 이름을 바꾸자는 의견도 있다. 신라 말엽에 안동권씨가 입촌하였는데 그 이름은 알 수가 없고, 그 뒤로 김해김씨가 들어와 마을을 이루었는데 그 김씨의 동서인 박우후 도원수가 마을의 방향을 살펴보고, 앞 등이 허하여 피해가 있을 것이라고 하여 축성하여 주어 오늘에 이르기까지 아무 탈없이 이어오고 있다고 한다.
이 마을은 이장과 반장이 있으며, 계는 마을단위로 조직되어 있었는데 1988년에 상폭계를 두 부락이 합쳐서 했기 때문에 동계도 같이 지낸다. 마을의 자생조직으로는 친목 도모를 위해 병자년에 상신계가 조직되었다. 총 인구는 60명으로 이중 남자 32명, 여자 28명이 있고, 총 면적은 0.29㎢로, 전 0.08㎢, 답 0.10㎢, 임야 0.10㎢, 기타 0.01㎢가 해당된다. 주소득원은 쌀농사이며, 수박도 재배하고 있다. 성씨는 한씨 3호, 조씨 3호, 임씨 3호, 서씨 4호가 살고 있다.
서당마을
서당마을은 면소재지에서 서남쪽으로 6㎞ 떨어진 지점에 위치한다. 성적산아래 노학귀소라는 풍천임씨의 율봉사가 있고, 안산인 날개등이 병풍처럼 둘러쳐져 경치가 아름답고, 고요한 곳이라 선비들이 수도한 곳이라 하여 서당골이라 일컬었다 한다. 조선조 태종때 풍천임씨가 동창에 터를 잡으려고 했는데, 웃어른들이 마을 이름에 ‘蒼'자가 들어가면 번화지이므로 혼잡하고 약하다고 하여 금천면 야산과 유전마을에 정착하였고, 이곳에서 제각을 보호하기 위해 임씨 2가구가 들어와 살았다는데 그후 나주임씨, 나주정씨 등이 정착하여 마을을 형성하였다.
이 마을에는 원래 9가구가 살았는데 40여년 전에 길이 험하고 교통이 불편하여 모두 타처로 이주하고 폐촌이 되다시피한 현재는 김해김씨, 전주이씨 두 가구만이 남아있다. 마을 앞에 경치좋게 펼쳐진 날개등에는 학의 알이라 하여 일명 알바위라는 15개의 바위가 있는데, 이 바위들은 거의 일정한 간격으로 한곳에 집중되어 있는 지석묘이다. 이 지석묘의 장축은 남북방향인 것 같고, 이것은 서당마을의 기자(箕子) 신앙과 학알과도 관련이 있어 여자들이 와서 아들을 낳게 해 달라고 빌기도 한다. 풍산임씨의 제각은 거의 300년의 역사를 가지고 있었는데, 제각을 보수공사를 하다가 전복되어 다시 증설하였다. 이 제각 앞에 큰 나무가 있는데 몇 년전 태풍으로 부러졌을때 그 나무가 제각쪽으로 넘어지지 않고 동쪽으로 넘어졌다하여 명당이라고도 한다. 한편 제각으로 가는 길 옆에는 커다란 샘 하나가 있는데, 이 샘은 왜정때 가뭄에 식수가 없어졌을때도 물이 마르지 않아 식수뿐만 아니라 농업용수로도 이용했다. 전에는 향나무가 샘위에 있어 풍치도 좋고 깨끗하였는데 폐촌이 되면서 샘을 돌보지 않아 현재는 농업용수로만 쓰여지고 있다 한다.
- 담당부서 봉황면 총무
- 전화 061-339-3809
제출완료
제출이 완료되었습니다.
의견을 남겨주셔서 감사합니다.
보내주신 소중한 의견은 페이지 개선에 도움이 됩니다.
보내주신 소중한 의견은 페이지 개선에 도움이 됩니다.
만족도조사 결과보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