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7) 순천 왜교성 전투 (1)
- 작성일
- 2022.11.08 14: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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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북선을 만든 과학자 나대용 장군- 57회 순천 왜교성 전투 (1)
김세곤(호남역사연구원장,‘임진왜란과 호남사람들’저자)
(이 저작물의 저작권은 저자와 사단법인 체암나대용장군기념사업회에 있습니다. 무단 전제 및 복제를 금합니다.)
9월 20일부터 조명연합군과 왜군의 순천왜교성 전투가 시작되었다.
명나라 제독 유정이 지휘하는 서로군(육군)은 이방춘, 조희빈, 오광, 우백영, 남방위 등 21,900명, 조선군은 전라병마사 이광악, 전라도 방어사 원신등 5,928명이고, 수군은 진린의 명군이 19,400명, 이순신의 조선군이 7,328명이었다. 왜군은 고니시 유키나가, 마쓰라 시게노부, 아리마 하리노부, 고토 가문, 오무라 가문등 14,000명이었다.
조명연합군은 육지와 바다에서 동시에 순천왜성을 공격했다. 이순신의 ‘난중일기’를 읽어보자.
“9월 20일 맑다.
오전 8시에 광양 땅 유도(광양시 골약명 송도)에 다다랐더니 명나라 육군 제도 유정이 벌써 병력을 이끌고 왔다. 수륙으로 협공하니 적의 기세가 크게 꺾여 두려워하는 기색이 보였다. 수군이 드나들며 대포를 쏘았다.”
이어서 진경문(陳景文)의 ‘예교진병일록(曳橋進兵日錄)’을 읽어보자.
“이 날 조명연합수군은 장도(獐島 노루섬)를 습격하여 적의 군량 300여석과 우마를 탈취하고 포로 300여 명을 구출하였다. 또 군사를 나누어 적 소굴을 소탕하고서 장도 앞바다에 전함을 줄세워 백기를 내걸었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조명연합 수군이 광양만 해상전략의 요충지인 장도를 장악하였다는 사실이다. 장도는 남해로 통하는 관문이자 왜교성에서 가장 가까운 일본 수군 기지였다. 따라서 조명연합수군이 장도를 점령한 것은 고니시 왜군의 해상진출을 초전에 봉쇄했다는 데 큰 의미가 있다.
이 날 유정은 순천 왜교성에서 1.5km 정도 떨어진 검단산성에 진을 쳤다.
9월 21일에도 유정은 왜교성을 공격하였다. 그런데 공격의 강도는 미약했다. 조명연합 수군은 아침에 진군하여 하루종일 싸웠으나, 물이 매우 얕아서 가까이 다가가 싸울 수가 없었다. 이런 와중에 남해의 적이 배를 타고 들어와서 정탐하려 하자 이순신의 수군 허사인등이 추격했더니 적들은 육지에 내려 산으로 도망갔다. 그래서 그 배와 여러 가지 물건을 빼앗아 와서 진린에게 바쳤다.
22일에도 조명연합수군은 공격을 하였다. 그런데 명나라 유격 계금이 왼편 어깨에 탄환을 맞았는데 중상은 아니었다. 명나라 군사 11명이 탄환에 맞아 죽었다. 지세포 만호와 옥포만호도 총상을 입었다. 그런데 유정의 육군은 싸우는 것도 아니고 안 싸우는 것도 아닌 어영부영이었다.
9월 23일 이후 명 제독 유정은 전투를 중지하였다. 공성전을 펼칠 사다리를 준비한다는 핑계였다.
우의정 이덕형의 치계를 살펴보자.
"수군이 예교(曳橋)에 접근하자 왜적이 나와서 싸워 명나라 유격 계금은 오른쪽 팔에 탄환을 맞았으나 중상에 이르지는 않았고 탄환을 맞아 죽은 중국 군사는 숫자를 알 수 없을 정도입니다. 유제독(劉提督)은 공성용 사다리와 수레를 제작 중이지만 아직 완성하지 못했습니다."(선조실록 1598년 10월 1일)
9월 말이 되자 이순신이 진린에게 항의하였다.
“기약 없이 마냥 기다려야 합니까? 거취를 분명히 해주시지요.”
이러자 10월 1일에 진린은 검단산성으로 유정을 찾아갔다. 유정이 먼저 말을 꺼냈다.
“마침 잘 왔소. 그렇지 않아도 사람을 보내려는 참이었는데. 내일 오전 6시를 기해 총공격을 할 것이요. 진도독도 어김없이 그 시각에 공격하여 주시지요.”
10월 2일부터 조명연합군의 공격은 시작되었다. 그런데 수군은 해상에서 적극 공세를 펼쳤으나 육군은 여전히 소극적이었다.
10월 2일
조명연합수군은 오전 6시쯤 군사들을 진격시켰다. 이순신의 수군이 먼저 올라갔다. 조명수군은 정오까지 서로 싸워 적을 많이 죽였다. 이 전투에서 사도첨사 황세득과 이청일 등이 총에 맞아 전사하고 제포만호 주의수, 사량만호 김성옥, 해남현감 유형, 진도군수 선의경, 강진현감 송상보가 총상을 입었으나 죽지는 않았다.
2일 전투 상황에 대한 이순신의 치계를 살펴보자.
"2일 수군이 합세하여 왜적을 공격하였는데 (왜군은) 육군이 바라만 보고 진격하지 않음을 알고서 수군을 치기에 전력(專力)하였습니다. 우리 군대가 혈전(血戰)하니 왜적의 시체가 언덕 밑에 낭자하게 흩어져 있었으며 혹은 서로 적치되어 있었습니다. 우리 군사 중에 탄환을 맞아 죽은 자는 29명이고 중국 군사는 5명입니다."(선조실록 1598년 10월 13일 3번째 기사)
그런데 이날 전투에서 육군을 지휘한 명나라 유정은 공격 명령을 내리지 않고 바라만 보았다. 조선 의병장 임환은 “유정은 싸울 뜻이 없고 반드시 강화하려 하여 퇴각하려고 한다.”고 말했다.
10월 3일
명나라 수군 제독 진린은 유정의 밀서를 받고 초저녁에 나가 자정이 될 때까지 싸웠다. 명나라 함대 300척이 공격했는데 조수 시간을 놓친 진린 휘하의 사선(沙船) 19척과 호선(唬船) 20여 척이 갯벌 위에 갇혔다가 왜군의 공격을 받아 큰 피해를 입었다. 도독이 펄펄 뛰는 모습을 말로 하기가 어려웠다. 안골포 만호 우수도 탄환에 맞았다. (이순신의 ‘난중일기’)
3일의 전투에 대한 도원수 권율의 치계이다.
“3일 밤에 수군이 조수(潮水)를 타고 진격하여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왜적을 살상하였습니다. 중국 군사는 치열하게 싸우느라 조수가 빠지는 것을 깨닫지 못하여 당선(唐船) 23척이 얕은 항만에 걸리자 왜적들이 불을 질렀는데 죽거나 잡혀간 중국 군사가 매우 많았습니다. 그중에서 살아 돌아온 자는 1백 40여 명이었습니다. 우리나라의 배 7척도 또한 얕은 곳에 걸렸는데, 다음날 수군이 일찍 조수를 타고 와 구원하였으므로 돌아와 정박하였습니다.”(선조실록 1598년 10월 10일 5번째 기사)
이 날도 명나라 제독 유정은 팔짱만 끼고 있었다. 왜인들이 놀라고 당황하여 모두 동쪽으로 갔으니 만약 서쪽에서 공격하여 들어갔다면 성을 함락시킬 수 있었다. 유정이 행한 일은 참으로 넋을 빼앗긴 사람과 같았다.
10월 2일과 3일의 전투에 대하여는 우의정 이덕형도 치계하였다.
"제독 유정이 2일 왜적의 성을 공격할 때 모든 군사가 성 아래로 60보(步)쯤 전진했는데 왜적의 총탄이 비오듯 하자, 제독은 끝내 깃발을 내려놓고 독전(督戰)하지 않았습니다. 부총병 오광의 군사는 대장의 호령이 있기를 고대하다가 순거(楯車)에 들어가 잠자는 때도 꽤 있었습니다.
그때 조수(潮水)는 차츰 빠지고 수군도 물러갔습니다. 왜노(倭奴)는 육군이 일제히 진격하지 않는 것을 보고 밧줄을 타고 성을 내려와 오광의 군대를 공격하여 20여 명을 죽이자 오광의 군대는 놀라서 1백 보쯤 후퇴하고 각 진영의 사기도 모두 떨어졌으니, 그날 한 짓은 아이들 장난과 같았습니다. 이미 독전하지도 않고 또 철수도 하지 않아 각 군대로 하여금 반나절을 서서 보내게 하고 다만 왜적의 탄환만 받게 했으니, 제독이 한 짓을 도무지 알 수가 없습니다.
3일 수군이 조수를 타고 혈전(血戰)하여 대총(大銃)으로 고니시의 막사를 맞추자 왜인들이 놀라고 당황하여 모두 동쪽으로 갔으니 만약 서쪽에서 공격하여 들어갔다면 성을 함락시킬 수 있었습니다. 김수(金晬)가 문을 열어 젖히고 싸우자고 청하였지만 제독은 노기(怒氣)를 띠고 끝내 군대를 출동시키지 않았습니다.
성 위에서 어떤 여자가 부르짖기를 ‘지금 왜적이 모두 도망갔으니 중국 군대는 속히 쳐들어오라.’고 하였습니다. 기회가 이와 같은데도 팔짱만 끼고 지나쳤으니, 유정 제독이 행한 일은 참으로 넋을 빼앗긴 사람과 같아서 장수와 군졸들이 모두 업신여기고 있습니다. 마침 사천(泗川)에서 패했다는 소식을 듣고는 마음이 혼란하여 후퇴를 결정하였으니 더욱 통곡을 통곡을 금할 수 없습니다."(선조실록 1598년 10월 12일 5번째 기사)
10월 4일에 수군 도독 진린은 연합함대를 이끌고 공격을 계속했으나 육상에서 유정이 호응하지 않아 별다른 효과를 거두지 못하고 물러나고 말았다. 이에 분격한 진린은 유정을 찾아가 엄중 항의하였다.
10월 5일에 이순신은 서풍이 강하게 불어서 출항할 수가 없었다.
10월 6일에 유정은 철수할 조짐을 보였다. 이 날의 ‘난중일기’이다.
“10월 6일
맑았으나 서북풍이 세게 불었다. 도원수가 군관을 보내어 편지를 전하기를, ‘유제독이 달아나려고 합니다.’하였다. 분하고, 분하다! 나랏일이 앞으로 어떻게 될 것인가!”
도원수 권율의 예상대로 명나라 도독 유정은 7일에 잠깐 퇴각하여 전력을 정비한 후에 다시 공격하겠다고 하고 왜교성의 포위를 풀었다. 유정은 각종 무기와 군량 수천 석을 방치한 채 부유창으로 퇴각하였다. 이후 유정은 10월 9일에 완전히 철수하고 말았다.
이순신은 유정의 육군이 이미 철수하였으므로 진린과 함께 9일에 유도를 출발하여 10일에 전라좌수영, 12일에 나로도에 도착하였다. 조명연합군의 왜교성 공격은 실패로 끝났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