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6) 히데요시 사망과 조명연합군의 왜군 공략
- 작성일
- 2022.11.08 14: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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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북선을 만든 과학자 나대용 장군- 56회 히데요시 사망과 조명연합군의 왜군 공략
김세곤(호남역사연구원장,‘임진왜란과 호남사람들’저자)
(이 저작물의 저작권은 저자와 사단법인 체암나대용장군기념사업회에 있습니다. 무단 전제 및 복제를 금합니다.)
# 조명 연합군의 왜군 공략
1598년 8월 형개가 명군을 통솔하기 위해 서울에 들어왔다. 형개는 서울 도착 즉시 명군 재정비에 나섰다. 그는 명군을 사로군(四路軍)으로 편성하여 울산·사천· 순천 등의 왜군을 공략하기로 하였다.
경상좌도 방면의 동로군(울산)은 명나라 마귀, 조선 김응서와 선거이, 전라도의 서로군(순천)에는 명나라 유정, 조선 권율, 경상우도 방면의 중로군(사천)에는 명나라 동일원, 조선 정기룡이었다. 바다의 수로군은 명의 진린과 조선 이순신이었다.
한편 조선은 각 도의 병사와 수사도 사로군(四路軍)에 소속시켰다. 충청ㆍ전라는 서로에, 경기ㆍ황해ㆍ경상우도는 중로에, 평안ㆍ강원ㆍ경상좌도는 동로에 속하게 하고, 호서ㆍ호남의 수군은 수로(水路)에 속하게 하였다.
이때 동원된 군사는 명군 9만 2천 명, 조선군 2만 1천명으로 11만 3천명에 이르렀다. 동로군(東路軍)는 29,514명(명군 2만 4천 명, 조선군 5천 5백 14명)이고, 중로(中路)군은 명군 2만 6800여 명, 조선군 2215명 등 총 2만 9015명, 서로(西路)군은 2만 7828명(명군 2만 1900명, 조선군 5,928명), 수로(水路)군은 2만 6728명(명군 19,400여 명, 조선군 7,328명)으로 모두 합하면 113,085명(명군 9만 2100명, 조선군 2만 985명)이었다. (선조실록 1598년 10월 12일 7번째 기사)
그런데 명군이 남하할 시점에 일본 내부에서는 큰 변고가 있었다. 8월18일에 도요토미 히데요시(1536-1598)가 교토 후시미 성에서 사망한 것이다.
히데요시는 죽으면서 이런 시를 남겼다.
이슬처럼 떨어졌다 이슬처럼 사라지는 게 인생이런가.
나니와(옛 오사카의 지명)의 영화는 꿈에 또 꿈인 것을.
히데요시는 도쿠가와 이에야스 등 5대로에게 5살 난 아들 히데요리를 잘 부탁한다는 말과 함께 “내가 죽거든 지체없이 조선에서 철병하라.”고 유언하였다.
히데요시 사망을 계기로 도쿠가와 이에야스 등 5대로는 조선에 있는 왜군 철수에 착수하였다. 10월 1일에 일본 특사가 부산으로 건너왔다.
특사는 가토 ․ 고니시 ․ 시마즈 등을 만나 철군을 지시했고, 일반 사병에게는 비밀로 붙여졌다. 그런데 조명연합군에게도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사망소식이 알려졌다. 이러자 조명연합군은 대대적인 반격 작전에 들어갔다.
# 조명연합군, 사천과 울산 전투에서 패배하다.
9월 들어서 명군은 총공격을 펼쳤다. 그러나 결과는 참담하였다. 먼저 명군 제독 동일원의 중로군은 사천에 있는 시마즈의 왜군을 공격하였다. 중로군은 초반에는 승전보를 올리며 진격했다. 9월 18일에 조명연합군은 사천 지역에 주둔하고 있는 일본군을 공격하기 위하여 진주로 향하였다. 이때 일본군은 시마즈 요시히로 지휘하에 사천신성(泗川新城)에 본진을 두고 1만여의 병력을 배치하였으며, 진주 남강 연안의 망진채(望晉寨), 영춘채(永春寨), 곤양채(昆陽寨) 등에 1천여 명, 사천성에 2천여 명의 병력을 배치하여 14,000여명의 병력이 주둔하고 있었다.
9월 20일에 명나라 선봉군이 진주 남강을 지키던 일본군을 급습하였다. 왜군은 도주하여 곤양채를 거쳐 사천성에 주둔한 왜군과 합류하였다. 이윽고 명군이 망진채와 영춘채를 점령하자 시마즈는 사천성의 군사에게 사천신성의 병력과 합류하도록 명령했다.
사천신성의 왜군이 철수 준비를 하던 28일 밤 정기룡의 조선군은 이 정보를 알고 야습을 감행하였다. 당황한 왜군은 성문을 열고 포위망을 돌파하려다가 많은 희생자를 내고 사천신성으로 들어갔다. 이후 일본군은 성을 지키며 방어 전술로 일관했다.
명나라 동일원은 작은 승리에 취하여 시마즈 군에 대해 공격을 감행했다. 조명연합군은 10월 1일 사천신성을 전면 공격하였다. 그런데 일본군은 아무 반응이 없었다. 명군이 접근해 성벽을 기어오르자 성안에서 일제히 사격을 퍼부었다. 일본군은 대포까지 쏘았다.
그런데 악재가 터졌다. 명군 진영에서 유격 모국기 휘하 포병부대의 불랑기포가 과열하여, 파열된 포신으로부터 발생된 불꽃이 화약 더미에 옮겨붙어 폭발한 것이다. 이에 놀라 명군은 본격적인 전투를 하기도 전에 우왕좌왕하였다. 이 기회를 놓치지않고 시마즈는 전 병력을 출동시켜 명군을 공격하였다. 명군은 단번에 무너졌고 줄행랑쳤다. 동일원도 합천까지 도망쳤다.
중로군의 피해는 일본 측은 4만 명, 명나라는 3-4천명, ‘선조실록’에는 8천 명 내지 1만 명으로 기록하고 있다. 시마즈는 코를 베어 소금에 절여 담은 나무통 10개를 히데요시에게 보냈다. 하지만 히데요시는 이미 이 세상에 없었다.
한편 제독 마귀가 지휘한 동로군은 경상우병사 김응서와 합류하여 9월 중순에 가토 기요마사가 지키는 울산왜성 공격에 들어갔다. 마귀는 동래 온정에서 왜군 30여명을 베고 조선인 포로 1천 명을 데려오는데 성공했다. 그런데 가토는 1597년 12월에 10일간의 조명연합군 공격에 성안의 우물 물이 부족하자 말의 피를 빨아 먹고 오줌을 마시면서 겨우 울산왜성을 사수한 전력이 있어, 왜성을 더욱 난공불락으로 만들었다. 가토는 해자를 만들어 바닷물을 끌어 들임으로써 도산성 앞의 강을 건너기 어렵게 하였다.
이처럼 동로군의 공격이 난항을 겪을 무렵, 중로군의 명군이 패했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10월 4일에 마귀는 경주로 퇴각하고 말았다.
# 서로군과 조명연합수군의 순천 왜성 공격
9월 11일에 명군 2만 2천 명, 조선군 6천 명으로 이루어진 서로군은 전주에서 출정식을 가졌다. 우의정 이덕형도 수행했다.
9월 중순에 남원에 도착한 서로군 제독 유정은 도원수 권율과 전라병사 이광악 등이 이끄는 조선군과 함께 순천왜성을 공격하는 작전계획을 짰다. 그리고 고금도에 있는 진린과 이순신에게도 이 같은 작전계획을 시달했다.
그런데 고니시가 먼저 유정에게 편지를 보내어 강화(講和)하자고 하였다. 유정은 고니시의 편지를 읽고 희색이 만면하였다.
1598년 9월 7일의 ‘선조실록’을 읽어보자.
“우의정 이덕형이 치계하였다.
유제독(劉提督)이 남원에 도착하자 고니시 유키나가가 편지를 보내 강화(講和)하기를 구하면서 서로 만나려고 하였습니다. 유 제독은 편지를 읽고 희색이 만면하여 ‘나의 계획을 이룰 수 있겠다.’ 하였습니다. 대체로 제독의 뜻을 살펴보니 강화를 핑계하여 서로 만날 적에 계책을 세워 기회를 틈타 사로잡으려는 것입니다. 제독의 계책은 위태로운 방법에서 나온 것이어서 걱정스럽기 그지없습니다. ”
이처럼 이덕형은 유정의 고니시 생포 작전에 우려를 표시했다.
한편 서로군은 좌협 명군 부총병 이방춘, 전라병사 이광악이 8천 명의 군사를 이끌고 전주에서 구례를 지나 광양에 들어왔고, 중협 부총병 조희빈과 충청병사 이시언이 1만여명의 군사를 이끌고 전주에서 곡성을 지나 순천부에 진을 쳤다. 우협 부총병 오광과 전라방어사 원신은 5,600명의 군사와 함께 전주에서 순창을 지나 낙안에 도착했다.
9월 19일에 명나라 제독 유정과 도원수 권율은 1만 명의 군사를 이끌고 순천 부유현(富有縣)에 도착하였다. 이날 이순신은 전라좌수영 여수에서 하개도로 옮겨 정박했다.
이 때의 ‘난중일기’를 읽어보자.
9월 15일
명나라 도독 진린과 함께 한꺼번에 군사를 움직였다. 나로도(고흥군 봉래면)에 이르러 하룻밤을 머물렀다.
9월 16일
나로도에 머물면서 도독과 술을 마셨다.
9월 17일
나로도에 머물며 진린과 함께 술을 마셨다.
9월18일
오후 2시쯤 군사를 움직여서 방답(여수시 돌산읍)에 이르러 머물렀다.
9월 19일
아침에 좌수영(여수) 앞바다로 옮겨 배를 대었더니 눈앞에 보이는 것이 참담하였다. 자정에 달빛 속에서 하개도에 배를 옮겨대었다. 날이 새기 전에 군사를 움직였다.
9월 20일
오전 8시에 광양 땅 유도(광양시 골약명 송도)에 다다랐더니 명나라 육군 제도 유정이 벌써 병력을 이끌고 왔다.
9월 20일은 명 제독 유정은 고니시와 만나기로 한 날이었다. 유정은 병사들을 미리 매복시킨 후 기패관(旗牌官) 왕문헌과 우후(虞候) 백한남을 각각 유정과 권율로 속여서 회담 장소로 보냈다.
고니시 유키나가는 부하들의 만류를 뿌리치고 회담 장소로 향했으나 명나라 군사가 실수로 미리 대포를 쏘아 버렸다. 고니시는 자신을 죽이려는 명의 술책임을 눈치채고 재빨리 자기 진영으로 돌아가 버렸다. 이리하여 고니시 생포 작전은 실패로 끝나고 말았다.
겸연쩍은 유정은 당장 공격을 개시하였다. 조명군은 왜교에 진격해 들어가서 왜성 밖 7-8리 지점에서 싸웠는데 왜군이 퇴각하였다. 조명 수군도 드나들며 대포를 쏘았다. 이러자 왜군은 기세가 꺾여 두려워하는 모습이 가득하였다.
이처럼 9월 20일에 시작된 순천 왜교성 전투는 11월 19일 노량해전에 이르기까지 2개월간 지속되었다.
( 참고문헌 )
o 기타지마 만지,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조선침략, 경인문화사, 2008
o (사)이충무공 유적영구보존회, 정유재란과 왜교성 전투, 지웅, 2014
o 이순신 지음, 노승석 옮김, 교감 완역 난중일기, 민음사, 2010
o 이순신 지음, 송찬섭 엮어 옮김, 난중일기, 서해문집, 2004
o 제장명, 이순신 백의종군, 행복한 나무, 20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