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5) 명나라 도독 진린, 이순신과 합류하다
- 작성일
- 2022.11.08 14: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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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북선을 만든 과학자 나대용 장군- 55회 명나라 도독 진린, 이순신과 합류하다
김세곤(호남역사연구원장,‘임진왜란과 호남사람들’저자)
(이 저작물의 저작권은 저자와 사단법인 체암나대용장군기념사업회에 있습니다. 무단 전제 및 복제를 금합니다.)
# 고니시의 순천 왜군, 전라도 해안 출몰
1598년 초에 순천 왜교성에 주둔한 고니시의 왜군은 간혹 주변 지역을 분탕질하고 있었다. 이들은 고흥 반도에도 출몰하여 백성들을 괴롭혔다. 이 때 흥양현감 최희량의 활약이 돋보인다.
최희량은 3월 20일에 첨산에서 싸워 왜적 30명을 베었고, 3월 21일에는 35명을 베고 1명을 생포, 3월22일에는 31명 참급, 1명 생포, 3월 23일에 첨산에서 왜적 1명 생포하였다. 4월 14일에는 흥양현 남문 밖에서 3명을 베었다.
7월 9일에도 왜선 2척이 남당포에 상륙하였다. 최희량은 왜적과 싸워 2명을 참하고 이순신에게 보고하였다. 이렇듯 순천왜성에 주둔한 고니시의 왜군들은 고흥 등 전라도 해안에 수시로 침범하였다.
# 명나라 도독 진린, 이순신과 합류하다.
7월 16일에 명나라 수군 도독 진린(陳璘 1543-1607)이 이끄는 수군 5천 명이 고금도에 도착하였다. 그런데 진린은 본국에서부터 성격이 난폭하고 거만하며 뇌물 좋아하기로 소문이 난 자였다.
1543년에 광동성에서 태어난 진린은 1562년에 군대에 들어가 광동성 인근의 도적떼와 소수민족의 반란을 진압하여 점차 이름을 날렸다. 그는 1584년 9월, 좌부총병에서 제독낭산등처지방부총병(提督狼山等處地方副總兵)로 승진하였으나 이후 파직되었다. 진린은 전공을 세운 무장이었지만 병사들에게 강제로 노역을 시키고 돈을 거두어들이는 등 각종 비리와 뇌물 문제로 잡음이 끊이지 않았던 것이다.
그런데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진린은 왜정(倭情)에 밝다는 이유로 그를 조선으로 파견코자 하였다. 그러나 명나라와 일본이 강화회담에 돌입하자, 진린은 중국 해안의 방비를 맡았는데 이때도 그는 뇌물을 주고 받다가 파면되고 말았다.
이런 진린에게 기회가 찾아왔다. 바로 정유재란이었다. 진린은 1597년 9월에 부총병이 되었고, 1598년 5월에 수군 도독(都督)으로서 5천 명의 수군을 거느리고 조선으로 들어왔다.
진린과 그의 부하들은 강화도에 들어오면서부터 조선의 관민을 구타하고 욕하는 개망나니였다. 진린이 서울을 떠나는 6월 26일에 선조는 청파까지 나가서 진린을 전송하였다. 류성룡도 이때 참석했는데, 진린은 찰방 이상규가 조금 늦게 왔다는 이유로 그의 목을 새끼줄로 매어 끌어서 얼굴에 피가 낭자하였다. 류성룡은 이를 보고 통역관을 시켜 말리도록 했으나 진린은 끝내 듣지 않았다.
류성룡은 탄식했다
“허허 이번 싸움에 이순신의 군사가 또 패하겠구나. 진린과 같이 군중(軍中)에 있으면 자연히 장수의 권리를 잃을 것이니, 저렇듯 군사들에게 횡포하고서야 그 군사가 패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유성룡 지음·이민수 옮김, 징비록, p 278 )
류성룡은 군령권이 명나라 수군 도독 진린에게 있으니 이순신이 진린의 비위를 잘 맞출지가 걱정이었다.
류성룡은 이순신에게 별도로 편지를 보냈다. ‘서애선생 별집’ 제3권에 나온다.
“무더운 바다에서 평안하신지요. 도독(진린)도 그곳에 합세하여 진을 치려고 하니 호응하는 계책과 군량을 징발 수송하는 모든 일은 오로지 영감의 선처만을 믿습니다. 바라건대 모름지기 동심협력하여서 큰 공훈을 이루십시오. 바라건대 오직 나라를 위하여 몸을 보살피십시오.”
한편 이순신은 진린이 온다는 소식을 듣고 군사들을 시켜 물고기를 낚고 돼지와 사슴을 잡아 술과 안주를 푸짐하게 장만해 놓고 그를 맞이했다. 진린의 배가 도착하자 이순신은 멀리까지 나가서 진린을 맞았다. 그리고 성대한 환영식을 열었다. 명나라 군사들은 모두 취하고 배불렀으며 서로 환성을 올리며 이순신을 칭찬하였다. 진린도 상당히 흡족한 표정이었다.
그런데 진린이 고금도에 도착한 지 이틀 후인 7월 18일에 비상사태가 발생했다. 이순신은 왜선 100여 척이 녹도에 침범했다는 보고를 받은 것이다. 이순신은 진린과 함께 출전 하였다. 첫 조명수군 연합작전이었다.
연합함대가 금당도(고흥군 금당면)에 이르렀을 때 왜선들은 도망가고 없었으며 적선 2척만 도망가는 것이 보일 따름이었다.
이순신과 진린은 이 날 해상에서 하룻밤을 보냈다. 이튿날인 7월 19일에 이순신은 녹도만호 송여종(1553~1609)에게 배 8척으로 절이도 (고흥군 금산면 거금도)에서 복병하도록 하고 진린도 30척을 남겨두고 철수하였다. (녹도만호 송여종은 1592년에 낙안군수 신호의 막하에서 일하다가 전라좌수사 이순신의 군관이 되었다. 1594년에 무과에 합격한 그는 명량해전에서 이순신의 중군장으로 활약하였다.)
# 절이도 해전 승리와 명 도독 진린의 갑질
5일 후인 7월 24일에 이순신은 진린을 위해 술자리를 베풀고 있었다. 흥이 한창 돋워질 무렵 명나라 군관이 급히 진린에게 보고하였다.
“오늘 새벽에 절이도에 침입한 적선 11척을 송여종이 공격해서 그 중 6척을 나포하고 적군 머리 70급을 취했습니다. 명나라 수군은 바람세가 불순하여 싸워보지도 못했습니다.”
진린은 그 자리에서 술잔을 집어 던지고 술상을 뒤엎는등 크게 화를 내면서 그 군관을 끌어내라고 하였다.
이 때 이순신은 진린의 노여움을 풀어주며 말하였다.
“대인께서는 명나라의 대장으로서 왜적들을 무찌르기 위하여 이곳에 오셨습니다. 그러므로 이곳 진중의 모든 승첩은 바로 대인의 승첩입니다. 우리가 베어 온 적의 머리는 마땅히 대인에게 드려야지요. 대인께서 이곳에 온 지 얼마 안 되어 황제에게 큰 공로를 아뢰게 되었으니, 이 어찌 좋은 일이 아니겠습니까.”
이윽고 이순신은 진린에게 수급 40급을 주고, 명군 장수 계금에게도 5급을 내주었다. 진린이 크게 기뻐하며 “내가 본국에서부터 장군이 조선의 명장이란 말을 들었는데 듣던 그대로군요”라고 말하고 종일 취하도록 마시며 즐겼다.
이어서 진린은 이순신에게 받은 수급을 서울의 명군 총사령부로 보내어 자신의 공로를 과시하였다. 이러자 녹도만호 송여종이 억울함을 호소하였다.
이순신이 웃으며 “왜적들의 머리는 썪은 고깃덩이에 지나지 않는다. 그것을 가지고 저 사람들과 다투자는 말인가. 너의 공적은 장계에 적어 그대로 알릴 것이니 염려하지 말라”고 말했다.
그랬다. 진린은 이순신에게 수급을 26급만 자른 것으로 보고서를 올리라고 강요했다. 이순신은 진린의 요구대로 보고하면서, 진린이 수급 45개를 가로챘다는 장계도 별도로 보냈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다. 명나라 감찰부에서 진린의 공로를 감찰한 것이다. 그래서 별수 없이 비변사는 이순신이 보낸 거짓 장계를 감찰관에게 보냈다.
1598년 10월 4일 자 ‘선조실록’에 나온다.
“비변사가 아뢰었다.
이순신이 절이도의 전투에서 적의 머리 71급(級)을 베었는데 진린 도독이 40급을 빼앗고 유격 계금이 5급을 빼앗았습니다. 그리고 도독이 이순신에게 독촉하여 다만 26급을 벤 것으로 장계를 꾸미게 하였으므로 이순신은 도독의 말대로 26급을 베었다고 거짓 장계를 만들어 보내고, 또 별도로 장계를 만들어 사실대로 치계하였습니다.
왕안찰(王按察)이 남쪽으로 내려와서 그 소문을 듣고 우리나라에 공문을 보내 수급에 관련된 일을 묻고 아울러 그 장계를 보내라고 명하였습니다. 지금 만약 사실대로 적은 장계를 보내면 반드시 도독을 큰 죄에 빠뜨릴 것이니 거짓 장계를 보내는 것이 합당할 듯하므로 감히 품합니다.”
한편 1598년 8월 13일 ‘선조실록’에는 이순신이 사실대로 적은 장계가 실려있다.
“지난번 해상 전투에서 아군이 총포를 일제히 발사하여 적선(賊船)을 쳐부수자 적의 시체가 바다에 가득했는데, 급한 나머지 끌어다 수급을 다 베지 못하고 70여 급만 베었습니다. 중국 군대는 멀리서 적선을 바라보고는 원양(遠洋)으로 피해 들어가 하나도 포획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다가 우리 군사들이 참획한 수급을 보고 진도독이 뱃전에 서서 발을 둥둥 구르면서 그 관하(管下)를 꾸짖어 물리쳤으며 신 등에게 공갈 협박을 가하여 못하는 짓이 없었으므로 마지 못해 40여 급을 나눠 보내줬습니다. 유격 계금도 하인을 보내어 수급을 구하기에 신이 5급을 보냈는데 모두 고맙다고 편지를 보냈습니다.”
그런데 얼마 후 명나라 수군은 다시 본색을 드러냈다. 고금도 민가를 드나들며 약탈을 자행한 것이다. 그러자 이순신은 식량과 의복을 모두 배에 싣고 고금도를 떠나려 했다. 이 소식을 들은 진린이 이유를 묻자, 이순신은 “명나라 군사들의 행패 때문에 우리 군사가 다 흩어졌습니다. 대장인 나만 홀로 여기 있을 수 없어 이 섬을 떠납니다.”라고 말했다.
그제야 진린이 사과하며 이순신을 붙들었고, 명나라 군사의 감찰권을 이순신에게 맡겼다.
한편 조명 연합함대는 절이도 해전 승리를 계기로 고흥반도 서쪽 바다의 제해권을 확보했고, 순천만에 진을 치고 있는 고니시의 왜군을 공격하기 위한 교두보를 마련했다.
( 참고문헌 )
o 김세곤, 정유재란과 호남사람들, 온새미로, 2014
o 이민웅, 이순신 평전, 성안당, 20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