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4) 고금도 통제영
- 작성일
- 2022.11.08 14: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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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북선을 만든 과학자 나대용 장군- 54회 고금도 통제영
김세곤(호남역사연구원장,‘임진왜란과 호남사람들’저자)
(이 저작물의 저작권은 저자와 사단법인 체암나대용장군기념사업회에 있습니다. 무단 전제 및 복제를 금합니다.)
# 이순신, 아들 면의 죽음에 통곡하다.
1597년 9월 16일의 명량대첩은 왜군의 서해진출을 무산시켰다. 이날 밤 이순신은 당사도(무안군 암태도)에 머물렀다. 조선 전함은 한 척도 부서지지 않았지만 왜군과 더 싸우기는 어려웠다.
17일에 이순신은 어외도(신안군 지도읍 지도)에 이르렀다. 이때 300여 척의 피난선이 먼저 와 있었다. 나주 진사 임선, 임환, 임업 등이 방문하여 승첩을 축하하고 식량을 많이 가지고 와서 군사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임환(1561-1608)은 1592년에 의병장 김천일의 종사관으로 활동하였는데, 조선 최고의 풍류객 백호 임제(1549-1587)가 맏형이었다.
어외도에서 하루 더 머무른 조선 함대는 9월 19일에 영광 칠산도 바다를 건너 저녁에 법성포에 이르렀다. 이때 흉악한 왜적이 육지로 들어와 마을의 집과 창고 곳곳에 불을 질렀다. 이순신은 해질 무렵 홍농 앞바다에 당도하여 하룻밤을 묵었다.
20일에 이순신은 다시 서해로 북상하여 위도(전북 부안군 위도면)에 이르렀다. 이곳에도 피난선이 많이 정박하고 있었다.
21일에 이순신은 서해로 올라가 고군산도(전북 군산시 옥도면)에 이르렀다. 이곳에서 이순신은 10월 2일까지 12일간 머물렀다.
9월 27일에 이순신은 송한등 3명에게 명량승첩 장계를 조정에 올려 보냈다.
그러면 명량해전에서 패전한 일본 수군의 동향은 어떠하였을까? 왜군은 전라우수영을 초토화하고 무안, 함평, 영광 앞바다를 다니면서 정찰을 계속하며 그 일대를 쑥대밭으로 만들었다.
9월 22일에 일본 수군은 무안에서 군자첨정 정기수를 사로잡았다. 23일에 도도 다카토라는 형조좌랑 강항을 영광 앞바다 논잠포(영광군 염산면)에서 붙잡았다. 일본에 끌려간 강항은 1600년 5월에 귀국하여 포로생활의 기록 ‘간양록’을 남겼다.
한편 이순신은 10월 3일에 고군산도를 떠나 영광 법성포에 도착하여 5일간 머문 후 10월 9일에 해남 우수영으로 돌아왔다. 그런데 해남 우수영은 왜군들에 의해 초토화되어 있었고 왜군들은 아직도 머무르고 있었다.
10월 9일의 ‘난중일기’를 읽어보자.
“일찍 떠나 우수영에 이르렀더니 성 안팎에 사람 사는 집이라고는 하나도 없고, 사람의 자취도 없어서 보기에 참담하였다. 저녁에 들으니 흉악한 적들이 해남에 진을 쳤다고 한다. 날이 막 어두워질 무렵에 김종려, 정조, 백진남(삼당시인 옥봉 백광훈의 아들) 등이 와서 만났다.”
10일 밤에는 중군장 김응함이 와서 해남에 있는 적들이 도망치는 모습을 많이 보았다고 전하였다. 11일에 이순신은 정탐꾼을 해남으로 보내어 상황을 파악하였다. 해남은 연기가 하늘을 덮었다고 한다. 왜적이 달아나면서 불을 지른 것이었다.
그랬다. 시마즈 요시히로가 이끄는 1만 명의 왜군은 9월 16일 정읍회의 이후 전라도로 남하하여 장성·나주·영암을 거쳐 9월 27일에 해남에 진주했다. 이들은 10월 10일까지 해남에 머물면서 전라우수영을 초토화하고 11일에 해남을 떠난 것이다. 이후 시마즈는 10월 29일에 경상도 사천에 도착하여 그곳에 머물렀다.
한편 이순신은 10월 11일부터 29일까지 18일간 안편도(신안군 장산도)에 머물렀다. 13일에 이순신은 정탐군관 임준영으로부터 왜적의 형세를 들었다. 해남으로 들어와 웅크리고 있던 적들이 10일에 우리 수군이 내려오는 것을 보고 그 다음 날 모두 도망갔다는 것이다. 또 해남 향리 송언봉과 신용 등이 왜적에게 달라붙어 지방 선비들을 많이 죽였다는 것이었다. (10월 16일에 이순신은 송언봉 등의 목을 베었다.)
10월 14일에 이순신은 충남 아산 본가로부터 한 통의 편지를 받았다. 막내 아들 면이 전사했다는 소식이었다. 청천벽력이었다.
이 날의 ‘난중일기’를 읽어보자.
“새벽 2시쯤 꿈에 내가 말을 타고 언덕 위를 가다가 말이 발을 헛디뎌서 냇물 가운데 떨어졌는데 말이 거꾸러지지는 않았다. 그 다음에 아들 면이 엎드려 나를 끌어안고 있는 듯하더니 깨었다. 이것이 무슨 조짐인지 모르겠다. (중략)
저녁에 천안에서 온 어떤 사람이 집에서 보낸 편지를 전하는데, 봉함을 뜯기도 전에 온몸이 먼저 떨리고 정신이 어지러웠다.
거칠게 겉봉을 뜯고 열이 쓴 편지 봉투를 보니 겉면에 ‘통곡(痛哭)’이란 두 글자가 쓰여 있었다. 면이 전사하였음을 알고 간담이 떨어져 목 놓아 통곡하였다. 하늘이 어찌 이다지도 어질지 못하는가? 간담이 타고 찢어지는 것 같다.
내가 죽고 네가 사는 것이 이치에 마땅한데, 네가 죽고 내가 살았으니 어쩌다 이처럼 이치에 어긋났는가? 천지가 깜깜하고 해조차도 빛이 변했구나. 슬프다, 내 아들아! 나를 버리고 어디로 갔느냐! 영리하기가 보통 넘어섰기에 하늘이 이 세상에 머물게 하지 않는 것이냐! 내가 지은 죄 때문에 화가 네 몸에 미친 것이냐! 내 이제 세상에서 누구에게 의지할 것이냐! 너를 따라 죽어서 지하에서 같이 지내고 같이 울고 싶지만 네 형, 네 누이, 네 어머니가 의지할 곳이 없으므로 아직은 참고 목숨을 이을 수밖에 없구나! 마음은 죽고 껍데기만 남은 채 울부짖을 따름이다. 하룻밤 지내기가 한 해를 지내는 것 같구나. 밤 10시쯤 비가 내렸다.”
왜군들은 명량해전에서 패한 보복으로 이순신의 가족들이 있는 충청도 아산으로 쳐들어갔다. 이들은 본가와 마을을 통째로 불지르고 초토화 시켰다. 이순신의 막내아들 면은 왜군들과 맞서 싸우다가 왜군의 칼에 맞아 죽었다. 스무 살이었다. (이순신은 부인 방씨 사이에 회·열·면 3형제와 딸 하나를 두었다. 회와 열은 이순신 휘하에서 일하였고, 셋째 아들 면은 아산 집에 남아 어머니를 모시고 지냈다.)
15일도 하루 종일 바람이 불고 비가 내렸다. 이순신은 누웠다 앉았다 하면서 하루 내내 뒤척거렸다. 부하들이 조문을 하였지만 이순신은 마음 놓고 울 수도 없었다.
16일에야 이순신은 소금 굽는 강막지 집에 가서 홀로 목 놓아 울었다. 19일에 이순신은 또 다시 통곡하였다. 슬픔때문에 가슴이 찢어지는 듯하여 가눌 길이 없었다.
이런 비통함 속에서도 이순신은 일상을 게을리 할 수 없었다. 10월 20일 부터 이순신은 겨울나기 준비를 착실히 하였다. 해남 등지에서 군량을 확보하였고 김종려를 소음도 등 13개소의 염전을 관리하는 감독관으로 임명했다.
# 이순신, 목포 고하도에서 전선 40척을 만들다.
10월 29일에 이순신은 신안 안편도에서 보화도로 진영을 옮겼다. 보화도는 지금의 목포 고하도이다.
10월 29일의 ‘난중일기’를 읽어보자.
맑다. 새벽 두시 첫 나팔을 불어 배를 띄워 목포로 향했다.
목포에 이르렀다가 보화도에 옮겨 배를 정박하였더니 서북풍을 막을 만하고 배를 감추기에 알맞았다. 그래서 육지로 내려 섬 안을 돌아보니 지형이 아주 좋기에 진을 치고 집 지을 계획을 세웠다.
이순신은 보화도에 도착하자마자 곧바로 월동준비를 하였다. 군량 확보와 전선 건조에도 박차를 가하였다.
11월 6일에 새 집 지붕을 이었고 군량창고도 같이 지었다. 7일에는 새 집의 마루를 놓았고, 8일에는 사방 벽에 흙을 발랐고 수루도 만들었다. 11일에는 새 집도 지어졌다.
아울러 이순신은 주변지역으로부터 군량을 조달했다. 해남에 왜군이 남긴 군량 300여석을 접수하고 나주와 영암에서 타작을 방해하는 자들을 잡아 주도자는 처형하고 나머지 4명은 배에 가두기도 하였다.
각 고을 수령이나 유력자들도 양곡을 가져 왔다. 11월 5일에 영암군수 이종성이 와서 밥을 30말 지어 일꾼들을 먹이고, 군량 200섬과 중조(中租) 700섬을 마련했다. 11월 7일에는 전 흥산현감 윤영현과 생원 최집 등이 와서 군량에 쓸 벼 40섬과 쌀 8섬을 바쳤고, 11월 28일에는 무안에 사는 진사 김덕수가 군량에 쓸 벼 15섬을 바쳤다.
그러나 천 여 명이나 되는 군사에게 먹일 식량으로는 턱 없이 부족하였다. 그래서 이순신은 해로통행첩 제도를 시행하였다. 배가 운행 시는 반드시 통행첩을 소지하게 하고, 통행첩이 없으면 간첩으로 처벌하였다. 이순신은 통행첩 발급시 배의 크기에 따라 수수료를 받았는데 대형은 쌀 3석, 중형 2석, 소형 1석으로 정하였다. 이리하여 열흘 동안에 1만 여 섬의 군량을 확보할 수 있었다. 해로통행첩 제도를 이순신에게 건의한 이는 군량모집 참모 이의온이었다. 이의온은 회재 이언적의 손자로 20대 초반의 젊은이였다.
한편 이순신은 전선 건조에 나섰다. 왜군 수군과 대적하는 데 전선 13척으로는 크게 부족하였다. 더구나 고하도에 정착한지 4일 만인 11월 2일에 전라우수사의 배가 바람에 떠내려가다가 바위에 걸려 부서졌다. 이순신은 병선군관 당언량을 잡아다가 곤장 80대를 쳤다.
11월 중순 이후 이순신은 전선 건조에 박차를 가하여 병선 40척을 건조하였다. 그 증거가 1598년 2월 22일의 ‘선조실록’이다.
“ (...) 병선(兵船)에 대해서는 양호(兩湖 충청도와 전라도)의 민력(民力)이 이미 고갈되었으므로 다시 더 만들도록 독촉할 수가 없었다. 통제사가 이미 40척을 만들었는데 이 숫자를 합하여 경리에게 보고하였다.”
한편 고하도에서 명량해전에서 승리한 데 대한 포상이 내려왔다. 거제 현령 안위가 통정대부(정3품 당상관)로 승진하는 등 휘하 부하들이 포상을 받았다.
또한 명나라 장수들은 이순신에게 크고 작은 선물을 보내어 축하의 뜻을 전하였다. 명나라 경리 양호는 이순신의 배에 붉은 비단 깃발을 직접 걸어주고 싶었지만, 그러지 못하고 깃발만 전달하였다.
# 삼도수군통제영, 완도 고금도
목포 고하도에서 108일간 머문 이순신은 1598년 2월 17일에 완도 고금도로 진을 옮겼다. 여기에서 그는 최후의 결전을 준비하였다. 고금도는 이순신의 마지막 삼도수군통제영이었다.
고금도는 한산도보다 두 배나 좋았다.여기에서 자족하여 군량을 확보하였고 그간 손실된 군사력도 완전히 회복하였다.
이순신은 병력 증강과 전선 추가 건조에 박차를 가하였다. 이 때 큰 역할을 한 사람이 흥양현감 최희량(1560-1651)이었다. 그는 백성들을 이끌고 목재를 끌어서 전선을 건조하였으며 구리와 쇠들을 실어다가 대포 등을 만들었다. 최희량이 남긴 ‘임란첩보서목(壬亂捷報書目)’에는 새로 건조한 전선과 집물 목록이 수록되어 있는데 당시 전선에 소요되는 군기류들의 종류를 이해할 수 있다. 여기에는 각종 총통과 활, 화살, 창, 칼, 철환 등의 무기들과 신호용 물품, 군량, 기타 다양한 집물들이 망라되어 있다.
7월경에 조선수군은 함대가 80여 척으로 늘어났고 군사도 8천 명에 이르렀다. 그뿐 아니라 이순신에 의지해 피난 온 백성들이 1,500명이나 되어 섬에는 수백 호의 민가가 생겨났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