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3) 명량대첩의 역사적 진실
- 작성일
- 2022.11.08 14: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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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북선을 만든 과학자 나대용장군- 53회 명량대첩의 역사적 진실
김세곤(호남역사연구원장,‘임진왜란과 호남사람들’저자)
(이 저작물의 저작권은 저자와 사단법인 체암나대용장군기념사업회에 있습니다. 무단 전제 및 복제를 금합니다.)
명량대첩은 가장 드라마틱한 해전이기 때문에 시간이 흐르면서 사실과 다른 내용들이 덧붙여져서 사실과 허구와 혼동되고 있다. 더구나 TV 드라마나 영화에서 허구적 요소를 다루고 있어 역사 왜곡이 우려된다. 무릇 역사는 사실(fact)에 충실해야 한다.
명량해전과 관련된 역사적 사실과 허구의 혼동은 크게 네 개다.
1. 조선과 일본의 전선 수
명량해전은 13척의 배로 133척의 왜선과 싸웠다는 것이 정설이다. 그런데 1686년(숙종 14)에 이민서는 통제사 충무이공 명량대첩비(統制使忠武李公 鳴梁大捷碑)’비문에 10척의 배로 5백 척의 왜군을 무찔렀다고 적었고, 1956년에 이은상은 ‘진도 벽파진 전첩비’에서 12척의 배로 3백 척의 왜군과 싸웠다고 적었다. 1,760만 명이 본 명량’ 영화는 330척에 맞선 12척의 배로 나온다. 이는 이순신의 승리를 지나치게 부풀리는 것이다.
2. 철쇄설
이는 격량이 심한 명량해협 300여 미터에 철쇄를 설치하여 왜선이 좌초되게 하였다는 이야기이다.
결론부터 말하면 ‘철쇄설’은 사실이 아니다. 그 근거를 살펴보자.
첫째, 명량해전 당시나 직후의 역사적 기록이 전혀 없다는 점이다. 즉 ‘난중일기’나 ‘선조실록’에 관련 기록이 없다. 둘째, 철쇄설은 18세기 후기에 ‘택리지’와 ‘호남절의록’에 나온다. 먼저 이중환(1690-1752)이 1751년에 쓴 ‘택리지’를 읽어보자.
‘택리지’에는 “이순신이 철쇄를 만들어 돌다리에 가로질러 놓고 왜선을 기다렸는데 왜선이 다리 위에 와서 철쇄에 걸렸고 급류에 휩싸여 500여 척이 침몰했다”고 적혀 있다. 왜선이 500여 척 침몰했다니 황당하다.
다음에 1800년에 간행된 ‘호남절의록’에는 전라우수사 김억추가 쇠사슬을 걸어 왜선을 격침시켰다고 되어 있다.
“김억추는 정유재란 때 전라우수사가 되었는데 충무공이 힘을 합쳐 적을 토벌하자는 뜻의 격문을 공에게 보내오니 공은 즉시 진도에 가서 만나 여러 방략들을 마련하는 데 많은 힘이 되었다. 쇠사슬을 명량에 가로질러 설치하여 우리 배가 지날 때는 거두고 적의 배가 지날 때는 걸도록 하였는데 쇠사슬이 너무 무거운 지라 여러 장수들 중 아무도 그 일을 해 낼 수가 없었다. 공이 때에 맞춰 걸고 거두는 것을 아주 쉽게 하였으므로 이순신이 그 용력의 절륜함에 탄복하였다.”
전라우수사 김억추가 헤라클레스처럼 2km나 되는 명량해협을 가로지르는 철쇄를 혼자서 걸고 거두고 하였다 함은 신화 같다.
그런데 이순신은 김억추에 대하여 그리 높이 평가하지 않는 듯하다. 8월 26일과 9월 8일의 ‘난중일기’를 읽으면 알 수 있다.
8월 26일
전라우수사가 왔는데 필요한 격군과 장비를 갖추지 못했으니 그 꼴이 놀랄 만한 일이다.
9월 8일
우수사 김억추는 겨우 일개 만호직이나 맞겠으며 수사의 자리를 받을 만한 인물이 못되는데, 좌의정 김응남이 서로 친분이 드텁다고 하여 마음대로 임명해 보냈다. 이래서야 조정에 사람이 있다고 할 수 있겠는가?
그런데 일본은 명량해전에서 패전한 것이 철쇄 때문이라고 평가하고 있다. 1892년에 세키 코세이는 일본 육군 장교들이 보는 소책자 ‘조선 이순신전’에서 이렇게 적었다.
“일본 수군은 원균을 격파하고 나서 전라도 바다에 진출한 다음 충청과 경기를 치고자 하였다. 9월 16일에 선봉 간 마사카게는 함선 2백여척을 이끌고 명량도로 나아갔다.
이순신은 명량도 입구의 석량에 철쇄를 걸쳐두고 기다렸다. 간 마사카게의 선봉이 철쇄위를 통과 할 때 철쇄를 끌어 당겨 배를 전복시켰다. 뒤를 따르던 배들은 앞배가 침몰하는 것을 보고 노의 방향을 돌리려고 하였다. 하지만 바닷물의 흐름이 빨라 배를 돌리지 못해 명량도 입구에서 일시에 전복된 배의 수효가 헤아릴 수 없었다. 이 틈을 타고 이순신은 함대를 이끌고 화포를 쏘아대는 한편 조류의 흐름을 이용해 공격을 퍼부었다. 일본 수군은 크게 패하였으며, 간 마사카게는 전사혔다. 이순신의 군대는 크게 위용을 떨쳤다.” (사토 데스타로외, 이순신 홀로 조선을 구하다, 2019, p 84-86)
철쇄설을 주장하는 사람들은 이순신이 1592년 4월에 여수 앞바다에 철쇄를 설치한 일을 그 근거로 들지만, 이순신이 며칠 만에 조류가 센 명량에 철쇄를 설치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생각된다.
아울러 당시에 조선 수군은 철쇄를 설치할 상황이 아니었다는 점이다. 이순신 8월 16일 이후 일본의 추격을 피해 여러 번 진을 옮겨, 8월 29일 벽파진에 주둔했는데 이때도 왜군의 공격이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엄청난 양의 철을 주조하여 쇠사슬을 만들어 물살 센 울독목에 설치할 수 있었을까?
3. 거북선 출전설
거북선 출전설은 이순신의 조카 이분이 지은 ‘이충무공 행록’에 근거한 듯 보인다.
“8월 18일 회령포에 이르니 전선이라고는 단지 10척 뿐이었다. 공은 전라우수사 김억추를 불러서 병선을 거두어 모으게 하고, 또 여러 장수들에게 분부하여 거북선 모양으로 꾸며서 군사의 위세를 돋우도록 했다.”
그런데 이순신의 조카 이분은 명량해전 전후로 이순신 휘하에 종군한 사실이 없다.
또한 이은상이 지은 체암 나대용 장군 기적비문 (사단법인 체암 나대용 장군 기념사업회, 거북선을 만든 과학자 체암 나대용 장군, p 324)에는 “정유재란이 일어나자 다시 충무공을 따라가 전선을 거북선으로 개장(改粧)하여 명량해전의 승첩을 거두었다”고 적혀 있어 신빙성을 더해주고 있다.
아울러 1951년에 온양온천역 광장에 세워진 ‘이충무공 사적비’에는 ‘거북선 2척이 명량해전에 참전하였다’고 적혀 있다.
한편 영화 ‘명량’에는 경상우수사 배설이 명량해전 직전에 건조중인 거북선을 불태운 것으로 나온다.
그런데 거북선이 참전하였다면 9월 16일의 ‘난중일기’에 반드시 언급이 있었을 것인데 ‘난중일기’에 거북선 단어는 아예 없다. 더욱이나 거북선을 한 달 만에 만드는 일이 가능했을지도 의문이다. 요컨대 거북선은 건조되지 않았다.
4. 강강술래
강강술래는 해남·진도·완도 등 전남 서남해안지방에서 추석날 밤에 예쁘게 차려입은 부녀자들이 공터에 모여 손에 손을 잡고 둥근 원을 만들어, '강강술래'라는 후렴이 붙은 노래를 부르며 빙글빙글 돌면서 뛰노는 민속놀이이다. 2009년에 유네스코 인류무형문화유산으로 등재되었다.
강강술래는 명량해전 때 이순신 장군이 마을 부녀자들을 모아 남자차림으로 옥매산(玉埋山)1) 허리를 빙빙 돌게 하여 군사가 많은 것처럼 보이게 한 데서 유래 되었다 한다. 하지만 이는 사실이 아니라 설화에 불과할 뿐이다.
한편 명량해전은 다른 해전과는 달리 해남과 진도의 산봉우리에서 전라도 연안 백성들이 전투를 지켜보았다. 이순신의 조카 이분이 지은 ‘이충무공 행록’에는 ‘그날 피난민들이 높은 산봉우리에서 전투를 바라보았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들은 처음에는 300척 이상 되는 왜선에 놀라서 공포감에 사로잡혔다. 조금 있다가 조선 함대가 잘 버티자 힘껏 응원을 하였고, 왜선들이 다수 격침되자 더욱 흥분하여 소리쳤으며 왜군이 물러나자 얼싸안고 환호하였다.
이렇게 기쁨에 넘친 강강술래는 설화가 아니라 사실일 수 있다. 여인들이 서로 손을 잡고 술래를 돌았고, 피난 가면서 치마보다는 남복을 입었으리라.
주1) 옥매산은 해남군 문내면과 황산면의 경계에 있고, 앞 바다가 명량해전의 무대이다. 옥매산에서 내려다보면 울돌목, 벽파진, 어란진 등이 모두 보인다.
( 참고문헌 )
o 김세곤, 정유재란과 호남사람들, 온새미로, 2014
o 사단법인 체암 나대용 장군 기념사업회, 거북선을 만든 과학자 체암 나대용 장군, 세창문화사, 2015
o 사토 데스타로외 지음·김해경 옮김, 이순신 홀로 조선을 구하다, 가가날, 2019
o 신호영, 이순신의 끝나지 않은 전쟁, 돋을새김, 2014
o 이민웅, 이순신 평전, 성안당, 20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