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2) 나대용이 참전한 명량대첩
- 작성일
- 2022.11.08 14: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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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북선을 만든 과학자 나대용장군- 52회 나대용이 참전한 명량대첩
김세곤(호남역사연구원장,‘임진왜란과 호남사람들’저자)
(이 저작물의 저작권은 저자와 사단법인 체암나대용장군기념사업회에 있습니다. 무단 전제 및 복제를 금합니다.)
1597년 9월 15일에 이순신은 진영을 진도 벽파진에서 해남 전라우수영 앞바다로 옮겼다. 이순신은 즉시 휘하 장수들을 소집하여 작전회의를 열었다.
먼저 그는 일장 연설을 하였다.
“병법에 이르기를 ‘반드시 죽고자 하면 살고, 살려고 하면 죽는다. (必死卽生 必生卽死)’하였고, 또 ‘한 사람이 길목을 지키면 족히 천 명이 와도 두렵지 않다’라고 했는데 이 두 마디 말은 지금 우리를 두고 한 말이다.
그대들은 이번 전투에서 살고자 하는 생각을 품지 마시오. 장수들이 목숨을 걸고 싸워야 군졸들도 뒤를 따를 것이요. 만약 조금이라도 군령을 어기면 군법으로 엄히 다스릴 것이요”
칠천량 전몰이후 부하 장수들이 왜적을 두려워하고 있음을 잘 알고 있는
이순신은 정신 승리부터 강조했다.
이날 밤 이순신은 또 꿈을 꾸었다.
“신인(神人)이 나타나서 ‘여차여차하면 크게 이길 것이요 여차여차하면 패배할 것이라’고 하였다.”
얼마나 노심초사하였으면 꿈에도 전투 작전 구상이 나타났을까?
그러면 명량해전을 살펴보자. 이는 9월 16일의 ‘난중일기’에 그대로 실려있다.
“ 9월 16일 맑다
이른 아침에 탐망군이 와서 보고하기를 ‘수효를 셀 수 없이 많은 적선이 명량으로부터 곧바로 우리가 진 치고 있는 곳을 향해 달려옵니다.’ 하였다.
곧 모든 배에 명령하여 닻을 올리고 바다로 나갔더니 적선 130여 척이 우리 배를 에워쌌다. 여러 장수들은 스스로 적은 군사로 많은 적과 싸우는 형세임을 알고 모두 회피할 꾀만 내고 있었다. 전라우수사 김억추가 탄 배는 이미 2마장(800m) 밖에 있었다.
나는 노를 빨리 저어 앞으로 나아가며 지자(地字), 현자(玄字) 총통 등을 마구 쏘았다. 탄환이 폭풍우같이 날아갔다. 군관들도 배 위에 총총히 들어서서 화살을 빗발처럼 쏘아댔다. 그러자 적의 무리가 감히 대들지 못하고 쳐들어왔다 물러갔다 하였다.
그러나 왜군에게 여러 겹으로 둘러싸여 형세가 어찌 될지 헤아릴 수 없으니, 배 안에 있는 사람들은 서로 쳐다보며 얼굴빛이 하얗게 질려 있었다.
나는 조용히 타이르기를 ‘적선이 비록 많다 해도 우리 배를 바로 침범하지 못할 것이니 조금도 동요하지 말고 힘을 다해서 적을 쏘아라’하였다.
여러 장수의 배를 돌아보니 이미 1마장 (400m 정도) 정도 물러났고, 우수사 김억추가 탄 배는 멀리 떨어져 가물가물하였다.
배를 돌려 바로 중군 김응함의 배로 가서 먼저 목을 베어다가 내걸고 싶지만, 내 배가 머리를 돌리면 여러 배가 점점 더 멀리 물러나고 적들이 더 덤벼들 것 같아서 나가지도 돌아서지도 못할 형편이 되었다.
호각을 불어 중군에게 기를 세워 군령을 내리도록 하고 또 초요기(招搖旗 대장이 장수를 부르는 깃발)를 세웠더니 중군장인 미조항 첨사 김응함의 배가 차츰 내 배 가까이 왔으며, 거제현령 안위의 배가 그보다 먼저 왔다.
나는 배 위에 서서 직접 안위를 불러 “안위야, 군법에 죽고 싶으냐? 군법에 죽고 싶으냐? 도망간다고 어디 가서 살 것이냐?”하였다. 그러자 안위도 황급히 적선 속으로 뛰어들었다.
또 김응함을 불러 “너는 중군으로서 멀리 피하고 대장을 구원하지 않으니 죄를 어찌 면할 것이냐? 처형하고 싶지만 전세가 급하므로 우선 공을 세우게 하겠다.”하였다.
그리하여 두 배가 적진을 향해 앞서 나가는데, 적장이 탄 배가 그 휘하의 배 두 척에 지시하자 일시에 안위의 배에 개미 떼처럼 달라붙어 올라가려 하였다. 안위의 격군 7∼8명이 물에 뛰어들어 헤엄을 치니 거의 구하지 못할 것 같았다. 안위와 그 배에 탄 사람들이 죽을힘을 다해서 몽둥이(철못을 박고 쇠줄고리를 단 몽둥이)를 들거나 긴 창을 잡거나 또는 돌멩이를 가지고 마구 후려쳤다. 배 위의 사람들이 거의 기진맥진한 상태가 되자 나는 뱃머리를 돌려 바로 쫓아 들어가서 빗발치듯 마구 쏘아댔다.
적선 세 척이 거의 뒤집혔을 때 녹도만호 송여종과 평산포 대장 정응두의 배가 뒤쫓아 와서 서로 힘을 합쳐서 적을 쏘아 죽여 왜적 한 놈도 살아남지 못하였다.
왜인 준사는 이전에 안골포의 적진에서 투항해온 자인데, 내 배 위에 있다가 바다에 빠져 있는 적을 굽어보더니, ‘그림 무늬 비단옷을 입은 자가 바로 안골진에 있던 적장 마다시입니다’라고 말했다.
내가 물 긷는 군사 김돌손을 시켜 갈구리로 낚아 올렸더니, 준사가 펄쩍 뛰면서 ‘정말 마다시입니다’라고 말하였다. 곧바로 명령을 내려 토막토막 잘랐더니 적의 기세가 크게 꺾였다.
우리 배들이 적을 물리칠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일제히 북을 울려 함성을 지르면서 쫓아 들어갔다. 지자, 현자 총통을 쏘니 그 소리가 산천을 뒤흔들었고, 화살을 빗발처럼 쏘았다. 적선 31척을 깨뜨리자 적선은 도망가고 다시는 우리 수군에 가까이 오지 못하였다.
싸움하던 바다에 그대로 정박할까 싶었다. 그러나 물결도 몹시 험하고 바람도 거꾸로 불어서 우리 편의 형세가 외롭고도 위태로운듯 하여 당사도(무안군 암태면)로 옮겨가서 밤을 지냈다. 참으로 천행(天幸)이었다”
이순신도 ‘난중일기’ 말미에 명량대첩을 ‘하늘이 도왔다’고 소감을 밝혔다.
그러면 명량대첩을 자세히 살펴보자. 먼저 해전장소인 명량(鳴梁)이다. 명량은 해남과 진도 사이를 흐르는 좁은 수로이다. 길이는 1.5km, 최저 수심은 1.9m, 입구 쪽의 폭은 약 650m이며 가장 좁은 폭은 295m이다. 그나마 양쪽에 큰 암초가 있어서 실질적인 폭은 120m에 불과하다. 이곳의 조류 속도는 최대 11.5 노트로 매우 빨라 20리 밖에서도 소리가 들린다고 해서 ‘울돌목’이라는 별칭이 붙었다. 이처럼 명량 해협은 물살이 빠르고 수심이 얕아 배가 다니기 어려운 협수로(狹水路)였다.
다음은 조선과 일본 수군의 전력(戰力)이다. 조선의 전함은 13척이었다. 이순신이 8월 15일에 보성 열선루에서 선조에게 올린 장계에는 ‘신에게는 아직도 12척의 배가 있나이다’라고 했는데 그 뒤에 전라우수사 김억추가 부임하면서 판옥선을 타고 왔다.
일본 수군은 도도 다카토라가 총대장을 맡고 와키자카 야스하루(한산 대첩의 패장), 가토 요시야키, 구루지마 미치후사 등 수군 장수들이 이끈 전함이 300척이 넘었다. 이들은 해남 어란포에서 출발하여 5시간 걸려 명량 입구에 도착했지만, 명량 협수로의 특성으로 대형군선(아다케부네)은 명량해협 밖에서 대기하고, 소형 군선(세키부네) 133척이 명량을 통과하여 이순신 함대와 싸웠다. 그럼에도 조선수군은 일본 수군에 비하여 13대 133의 10배 차이였다.
다음은 실제 전투이다. 전투는 오전 11시경에 시작되었는데 처음엔 이순신의 지휘선만 홀로 분전하였다. 여러 장수들은 겁에 질려 싸울 생각을 안 했다. 그러다가 안위와 김응함의 배가 합류했고, 안위의 배가 백병전으로 고전한 뒤에는 송여종과 정응두의 배도 합세했다. 그러자 적장 마다시 즉 당항포 해전에서 죽은 구루지마 후시모토의 동생 구루지마 미치후사의 시신이 떠 올랐고, 이순신은 그를 토막내어 걸었다. 이후 31척을 분멸하자 왜군은 물러갔다. 이때가 오후 2시경이었다.
명량대첩은 세계 해전사에서 가장 드라마틱한 해전이다. ‘한산도 해전이 화려한 뮤지컬이라면, 명량해전은 비장감이 흐르는 오페라’라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조선 수군의 승리 요인은 무엇인가? 그 요인은 (1) 전선 수는 적으나 강한 함대 (2) 철저한 첩보 파악, 지형지물과 조류의 흐름 활용, 이순신의 솔선수범과 탁월한 리더십 (3) 전라도 연안 백성들의 지원과 참전으로 요약된다.
첫 번째 승리요인은 전함 수는 적으나 강한 함대이다. 13척이라는 절대 열세에도 불구하고 조선함대는 막강한 화포를 갖춘 판옥선이 있었다. 또한 배 한 척에 장교·부사관 등 군관들이 여러 명 탑승하여 전투능력이 최강이었다.
둘째는 철저한 첩보 파악, 지형지물과 조류의 흐름 활용, 이순신의 솔선수범과 탁월한 리더십이다. 이순신은 임준영의 첩보를 활용했고, 조류의 흐름을 알고 싸움을 하였다. 해전이 시작되자 이순신만 홀로 분전하였다. 휘하 장수들은 겁을 먹고 나서지 않았고 전라우수사 김억추의 배 또한 멀리 떨어져 있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자 이순신의 분전에 힘입어 조선 함대는 일제히 분발하여 왜군을 총공격하였다.
셋째는 전라도 연안 백성들의 지원과 참전이다. 이순신을 따라 피난 온 고흥·보성·장흥·영암의 백성들과 해남·진도의 주민들은 수군에게 의복과 식량을 지원하였고 자원입대하였다. 지역의 어부들과 목수들은 선박 수리도 하였다. 명량해전 당일에는 피난선 100여척을 전선으로 가장하고 대기하였고, 이순신이 위험하자 함께 싸우기도 하였다. 아울러 육상에서 유격활동을 하여 해안 지대를 방어하였다.
여기에서 궁금한 것은 나대용의 참전 여부이다. 선조실록을 살펴본바, 1597년 10월13일의 금구현령은 한수성이었다. 따라서 나대용은 명량해전 때 금구현령으로 재임하지 아니하여 명량해전에 참전할 가능성이 높다.
1597년 10월 13일자 선조실록을 읽어보자.
“전라도 관찰사 황신이 장계하기를, ‘도내에 관아를 버리고 도망한 수령들이 많지만 선후와 원근의 차등이 없지는 않습니다. ... 관아를 버리고 도망한 수령에 대하여 황신이 아뢴 것은 다음과 같다. 금구 현감 한수성은 타도로 피란했다가 이제 비로소 관아로 돌아왔고, ... 옥과 현감 홍요좌는 타도에 가서 피란하다가 지금 비로소 내려왔으며 ...”
한편 나대용 장군 약사와 체암 나대용 장군 기적비문(사단법인 체암 나대용 장군 기념사업회, 거북선을 만든 과학자 체암 나대용 장군, 2015, p 305, 324)에는 나대용이 명량해전에 참전하였다고 밝히고 있다.
“명량대첩시 전선을 거북선으로 개장(改粧)하여 용전분투, 사상 유례없는 대승을 거두는데 결정적 역할을 함 (나대용 장군 약사)”
“정유재란이 일어나자 다시 충무공을 따라가 전선을 거북선으로 개장
하여 명량해전의 승첩을 거두었으며 마지막 무술년 노량해전에서는 충무공과 종제 나치용이 순국하므로 장군은 통곡하기를 마지 못했다.”(기적비문)
또한 현충사 ‘충무공 이순신 기념관’의 전시관에는 ‘이순신과 함께 싸운 사람들’안내판이 있는데, 여기에도 나대용이 명량해전에 참가하였다고 적혀 있다.
“ 나대용(羅大用, 1556~1612) 거북선 건조 책임관
1591년에 나대용은 전라좌수사 이순신 휘하에 들어가 병선 연구에 힘썼는데 특히 거북선을 건조하는 데 많은 기여를 하였다. 1592년 옥포해전에서 유군장을 맡아 적의 대선 두척을 격파하고, 사천해전과 한산해전에서 각각 분전하여 부상을 당하였다. 1597년 명량해전과 1598년 노량해전에도 참가하여 큰 공을 세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