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 직산전투와 왜군의 전라도 점령
- 작성일
- 2022.11.04 13: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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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북선을 만든 과학자 나대용 장군- 51회 직산전투와 왜군의 전라도 점령
김세곤(호남역사연구원장,‘임진왜란과 호남사람들’저자)
(이 저작물의 저작권은 저자와 사단법인 체암나대용장군기념사업회에 있습니다. 무단 전제 및 복제를 금합니다.)
8월 16일에 남원성을 함락시킨 왜군은 곧장 전주로 향하였다.
전주를 지키고 있던 명나라 장수 진우충은 남원성이 함락되었다는 급보를 받자마자 줄행랑쳤다.
8월 18일에 고니시 유키나가의 좌군이 전주에 무혈 입성했고, 24일에는 가토 기요마사의 우군도 전주에 들어왔다. 8월 25일에 왜장들은 전주에서 회의를 하였다. 회의 내용을 살펴보자.
“수륙 양면으로 군사를 나누어 전라도를 공격한다. 모리 히데모토 ·가토 기요사마·구로다 나가마사의 우군은 충청도로 북진하여 경기도를 목표로 하며, 좌군 중 우키타·고니시는 군대를 남쪽으로 돌리고, 시마즈등은 전라도의 좌로를 따라 내려가면서 여러 고을에 분산 주둔한다. (기타지마 만지 지음, 김유성·이민웅 옮김,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조선침략, p 203 )
9월 3일에 가토의 우군은 공주를 점령하고 천안으로 진군하였다. 모리 히데모토와 구로다 나가마사의 군대는 이미 전의, 진천에 이르렀다.
이러자 서울의 조정은 다시 소용돌이에 휩싸였다. 선조는 황해도 해주로 도망갈 계획을 세웠고, 연거푸 사신을 보내 평양에 주둔해 있는 명나라 경리(최고 지휘관) 양호에게 명군의 출동을 요청하였다.
그러자 9월 3일에 서울에 온 경리 양호는 압록강으로 후퇴하려는 제독 마귀를 꾸짖고 부총병 해생(解生)·참장 양등산·유격장 우백영·파귀에게 용맹한 군사 8천 명을 거느리고 왜군을 치라고 명령했다.
9월 6일에 명군은 야음(夜陰)을 틈타 은밀하게 천안 방면으로 출동하였다.
9월 7일 동틀 무렵에 명군은 직산 근처 금오평(金烏坪)에 도착하여 왜군을 덮칠 계획을 세웠다.
이때 구로다 부대가 금오평에 이르렀다. 명군은 왜군이 전투준비를 하기도 전에 세 갈래로 나누어 왜군을 공격했다. 연달아 대포를 쏘고 말을 달려 돌진하니 왜군은 혼비백산하였다. 이날 명군과 왜군은 6차례나 맞붙어 싸웠는데 명군의 판정승이었다.
날이 어두워지자 명군과 왜군은 모두 휴식을 취하였다. 이 날 밤 왜장 가토는 여러 장수들에게 내일 아침에는 결사적으로 싸우도록 명령하였다.
명나라 장수 해생은 비밀리 장수들에게 명령하였다.
“오늘 왜적의 형세를 보니 적은 내일 결사적으로 싸울 것이니 죽음을 걸고 용감하게 싸우라. 이 군율을 어기지 말라. 그리고 저 왜적은 교활하니 패하여 물러가게 되면 반드시 산길로 갈 것이다. 험한 곳에서는 명나라의 기병과 왜군의 보병은 형세가 다르니 끝까지 추적하지는 말라.”
다음날 먼동이 틀 때 왜군은 일제히 포를 쏘며 진군하여 오는데, 흰 칼날을 휘두르고 살기(殺氣)가 하늘까지 뻗쳐 명군의 눈을 아찔하게 하였다. 이러함에도 명나라 기병들은 왜군에 맞서서 철퇴를 휘둘러 치니 왜군은 모두 줄줄이 쪼개지듯 하였다.
더구나 유격 파새가 거느린 2천 기병까지 가세하여 싸우니 왜군은 패하여 목천·청주 쪽으로 달아났다. 명군은 왜군을 더 이상 추격하지 않았다.
# 왜군의 점라도 점령
8월 24일의 전주 회의 결과에 따라 일본 좌군의 우키다 히데이에와 고니시 유키나가는 임실, 구례를 거쳐 9월 1일에 순천에 도착하였다.
고니시는 먼저 방문(榜文)을 길거리에 내걸고 왜군 적대 세력 색출작업부터 벌였다. 관리들의 집에 방화를 권장하고, 은신처를 신고한 자는 포상한다고 한 것이다. 한마디로 조선 백성들을 갈라치기 했다.
이어서 고니시는 순천에 왜교성을 쌓기 시작했다. 그는 순천지방 부역자들을 앞잡이로 삼아 인부를 동원하였다. 이리하여 왜교성은 불과 3개월 만에 완성되었다. (사단법인 이충무공유적영구보존회, 정유재란과 왜교성 전투, 지웅, 2014, p 30-31)
한편 시마즈의 좌군은 방화와 약탈, 살인과 코베기를 하면서 9월 16일에 정읍에 닿았다. 이들은 회의를 열어 전라도 각 지역에 분산하여 주둔할 것을 결정했다. (기타지마 만지 지음,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조선침략, p 207-209 )
정읍 회의 후 시마즈는 장성, 나주, 영암, 해남을 내려가면서 전라도를 초토화했다. 시마즈는 9월 27일부터 10월 13일까지 해남에 머물렀다. 이후 시마즈는 나주, 순창, 남원을 지나 10월 25일에 구례에 머물렀다가 10월 29일에 경남 사천에 도착했다.
시마즈 휘하 왜군들은 순창, 담양, 광주, 화순등 50개 군현에 촘촘하게 주둔했다. 왜장 요시라(要時羅)는 만여 명의 군사를 거느리고 곡성에 주둔했다.(조경남의 ‘난중잡록’ 1597년 9월)
왜군은 야만적인 살상과 납치, 약탈과 방화 그리고 코베기를 자행하였다. 코베기는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지시였다. 왜장들은 코를 잘라 소금에 절여 통으로 보냈다. 9월에 나베시마 가츠시게는 금구와 김제에서 취한 코 3,369개를 히데요시에게 보냈는데 접수증명서가 지금도 남아 있다. 영광과 진원(장성군 진원면)에서는 1만 40개의 코가 히데요시에게 보내졌다고 기록되어 있다. 1)
# 명량헤전 전야
9월 16일에 이순신은 13척 대 133척이라는 절대 열세에도 불구하고 명량해전에서 대승을 거두었다. 왜군의 서해진출은 물거품이 되었다.
그러면 8월 15일부터 9월 14일까지의 명량해전 전야를 행적을 살펴보자.
8월 15일에 이순신은 “지금 신에게는 아직도 12척의 배가 있나이다.(今臣戰船 尙有十二)”라는 장계를 선조에게 올리고, 17일에 보성을 떠났다.
18일에 이순신은 장흥 땅 회령포(장흥군 회진면)에서 경상우수사 배설로부터 8척의 전선을 인수받았다.
19일에 이순신은 삼도수군통제사 취임식을 하였다. 그는 여러 장수들에게 선조가 내린 교서와 유서 앞에 엎드려 절하게 하였다. 그런데 경상우수사 배설은 선조의 교서와 유서에 고개 숙여 예를 다하지 않았다. 그래서 이순신은 배설 아래 딸린 이방과 영리를 붙들어다가 곤장을 때렸다.
20일에 이순신은 회령포 포구가 좁아 해남 이진(梨津 해남군 북평면 이진리)아래 창사로 진을 옮겼다. 그런데 이순신은 21일 새벽 2시쯤에 곽란(癨亂 음식이 체하여 갑자기 토하고 설사하는 급성 위장병)을 일으켰다. 그는 몸을 차게 해서 그런가 생각하여 소주를 마셔 치료하려 했다가 오히려 혼수상태에 빠졌다. 토하기를 10여 차례나 하고 밤새도록 괴로워하였다.
22일에도 이순신은 곽란이 심해져 몸을 움직일 수가 없었고 대변도 보지 못했다. 견디다 못하여 23일에는 배에서 내려 포구 밖 민가에서 쉬었다.
24일에야 겨우 정신을 차린 이순신은 정오에 어란포(해남군 송지면 어란 마을) 앞바다에 이르렀다. 가는 곳마다 마을이 텅 비어 있었다.
25일에 이순신은 어란포에 머물렀다. 아침을 먹을 때 포작(배에서 지내는 어부)이 피난민의 소 두 마리를 훔쳐 끌고 가면서 왜적이 왔다고 헛소문을 냈다. 이순신은 헛 소문을 낸 포작인 2명의 목을 베어 사람들이 널리 보도록 하니, 군중의 동요가 가라앉았다.
26일 늦게 탐망군관 임준영이 말을 타고 달려와서 “왜적의 배가 벌써 이진(梨津)에 이르렀습니다.”라고 보고하였다. 일본수군이 벌써 코앞에 왔다.
이날 선조가 임명한 전라우수사 김억추가 부임하여 왔다. 그런데 그는 전투에 필요한 격군과 그리고 무기 등을 가지고 오지 않고 몸만 달랑 왔다. 이순신은 크게 실망하였다.
27일에도 이순신은 어란포에 머물렀다. 경상우수사 배설이 찾아왔는데 두려워서 떠는 빛이 역력하였다. 이순신이 불쑥 말하기를 “수사는 어디로 피해 갔던 것 아니냐?” 하고 캐물었다.
28일 오전 6시에 왜선 8척이 불시에 습격하여 왔다. 조선 수군들은 겁을 먹고 경상우수사는 피해서 물러나려고만 하였다. 이순신은 직접 선봉에 서서 깃발을 휘두르며 추격하라고 명령을 내렸다. 그러자 군사들이 움직였고 적선들이 물러갔다.
이어서 조선수군은 해남 땅끝 마을 부근인 갈두(해남군 송지면 갈두리)까지 왜적을 추격하였는데 더 쫓지는 않았다. 뒤따르던 왜군 배가 50여 척이라는 정보가 있었기 때문이다.
이날 저녁에 이순신은 장도로 진을 옮겼다. 장도는 해남 어란포와 진도 벽파진 사이에 있는 작은 섬이다.
8월 29일 이른 아침에 이순신은 진도 벽파진(진도군 고군면 벽파리)으로 건너가 진을 쳤다. 벽파진은 해남과 진도를 오가는 나루터로서 진도 섬의 입구이고 명량해협의 초입이다. 이순신은 여기에서 9월14일까지 머물렀다.
9월 2일 새벽에 경상우수사 배설이 도망갔다. 이 일로 수군의 동요가 매우 심하였으리라. 이순신은 이렇게 내부의 적과도 싸워야 했다. 결국 배설은 1599년 3월에 고향 선산에서 도원수 권율에 의해 체포되어 참형을 당하였다.
9월 3일부터 6일까지 4일간은 북풍이 강하게 불어 배를 제어하기가 힘들었다. 바람이 잠잠해 진 뒤에는 추위가 엄습하여 사공들이 추위에 떨었다. 이 당시 수군은 군복도 변변하지 못하였고 식량도 부족하였다.
9월 7일에 바람이 그쳤다. 정탐군관 임중형이 와서 “적선 55척 가운데 13척이 이미 어란 앞바다에 도착하였으며 그들의 공격이 예상된다.”고 보고하였다. 이순신은 휘하 장수들에게 군령을 내려 만반의 준비를 하도록 두 번 세 번 엄하게 타일렀다.
이순신의 예상대로 오후 4시경 왜선 13척이 쳐들어왔다.
미리 대비하고 있던 우리 배들은 닻을 거두고 바다로 나가 반격하였다. 그러자 적선은 뱃머리를 돌려 도망쳤다. 이순신은 먼 바다까지 쫓아가다가 바람과 물살이 모두 우리 쪽으로 향하고 또 숨어있는 적의 배도 있을까 걱정되어 더 이상 쫓지 않았다.
벽파진으로 돌아와서 이순신은 여러 장수들을 불러 모아 명령하였다.
“오늘 밤에 반드시 왜적의 야습이 있을 것이다. 모든 장수들은 단단히 준비하라. 조금이라도 군령을 어기는 일이 있으면 군법대로 시행하리라”하고 거듭 타일렀다.
과연 밤 10시경에 왜선이 다시 쳐들어왔다. 이순신은 즉시 앞장서서 지자포(地字砲)를 쏘며 대응하였다. 이 날 밤 조선수군과 일본수군은 4차례 접전하였는데, 자정이 되자 왜군이 물러갔다.
일본 수군의 공격은 벌써 두 번째이다. 전투 강도도 한층 높이고 있다. 이제 일본 수군 대규모 선단은 수륙병진책에 호응하여 조만간 조선수군을 전멸시키고 서해로 올라갈 차비를 하고 있다. 그러기 위해서는 명량해협을 통과하여야 한다. 이순신은 결전의 날이 다가오고 있음을 느꼈다.
다행히도 9월 8일에 왜군은 쳐들어오지 않았다. 이순신은 여러 장수들을 불러 대책을 논의하였다. 어제 일어난 일본 수군의 공격에 심각성을 느낀 것이다. 그런데 뾰족한 대책이 없었다. 장수들은 침묵만 지킬 따름이었다.
9월 9일은 중양절(重陽節)이었다. 이순신은 제주도에서 끌고 온 소 다섯 마리를 잡아서 녹도만호와 안골포 만호에게 주었다. 군사들은 모처럼 고깃국을 먹었다.
오후 늦게 왜선 두 척이 감보도로 들어와 정탐하였다. 감보도는 진도군 고군면 벽파리 벽파항 바로 앞에 있는 섬이다. 왜군이 벽파진 바로 코앞까지 와서 정찰한 것이다. 이에 영등포 만호 조계종이 끝까지 추격하였다. 그러자 왜군 정탐선은 급히 도망갔다.
10일부터 13일까지 4일간은 이순신은 별 징후 없이 지냈다. 그런데 13일 밤에 이순신은 또 이상한 꿈을 꾸었다.
“꿈이 범상하지 않았다. 임진년에 크게 이겼을 때의 꿈과 비슷하였다. 무슨 징조인지 잘 모르겠다.”
9월 14일에 이순신은 중대한 정보를 입수하였다. '난중일기'를 읽어보자.
9월 14일
맑다. 북풍이 크게 불었다. 벽파정 맞은편에 연기가 오르기에 배를 보내서 실어 왔는데 탐망군관 임준영이었다. 그가 정탐한 결과를 보고하기를 ‘전선 2백여 척 가운데 55척이 먼저 어란 앞바다에 들어왔습니다.’하였다.
그리고 또 사로잡혀 갔다가 도망해 돌아온 김중걸이 전하는 말을 전했다. “그는 이 달 초 6일 해남 땅 달마산(해남군 송지면)에서 왜적에 붙잡혀 묶인 채로 왜선에 실렸는데 다행히 임진년에 포로가 된 김해사람을 만났다고 합니다. 그와 함께 왜적 대장에게 빌어서 결박을 풀고 배에서 지냈는데, 한밤중에 왜놈들이 깊이 잠들었을 때 김해사람이 김중걸의 귀에 대고 몰래
이렇게 말했다 합니다.
“왜적들이 모여 의논하기를 ‘조선 수군 10여 척이 우리 배를 추격하여 많이 쏘아 죽이고 배를 태웠으니 극히 통분한 일이다. 각처의 배를 불러 모아 조선 수군을 섬멸해야 한다. 그런 후에 곧장 서울로 올라가자.’라고 하더라는 것입니다. ”
이 말을 다 믿을 수는 없으나 그럴 수 없는 것도 아니어서 곧 우수영으로 전령선을 보내서 피난민들에게 곧 싸움이 벌어질 것이니 빨리 육지로 올라가도록 하였다.
주1) 1597년부터 1598년 8월까지 나대용은 전라도 금구현령을 하였다. 그런데 1597년 8월의 나대용의 행적은 기록이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