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 남원성 함락과 끌려간 도공들
- 작성일
- 2022.11.04 13: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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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북선을 만든 과학자 나대용장군-50회 남원성 함락과 끌려간 도공들
김세곤(호남역사연구원장,‘임진왜란과 호남사람들’저자)
(이 저작물의 저작권은 저자와 사단법인 체암나대용장군기념사업회에 있습니다. 무단 전제 및 복제를 금합니다.)
# 남원성 함락
1597년 8월 16일의 이순신 ‘난중일기’를 읽는다.
“선전관 박천봉이 돌아갔다. 아침에 보성군수에게 지시하여 군관들을 굴암으로 보내어 난을 피해 달아난 관리들을 수색하게 하였다. (...) 오후에 궁장 이지와 태귀생이 찾아왔다. 선의, 대남도 들어오고 김희방, 김붕만도 뒤따라 왔다.”
그런데 8월 16일에 우키다 히데이에가 총지휘하는 5만6천 명의 왜군이 남원성을 함락시켰다. 명나라 총병 양원과 전라병사 이복남이 이끄는 4천 명의 조명 연합군은 3박 4일간 치열하게 싸우다가 전멸당했다.
8월 초에 일본 육군과 수군이 남원으로 진격했다. 총대장은 우키다 히데이에, 선봉장은 고니시 유키나가이고, 장수들은 시마즈 요시히로·하치스가 이에마사 등이었다. 도도 다카도라·와기자카 야스하루·가토 요기아키가 이끄는 일본 수군도 합류했다.
8월 8일에 왜군이 몰려온다는 소식을 접한 명나라 총병 양원은 전주성을 지키는 명나라 유격 진우충과 전라병사 이복남에게 남원성으로 들어오라고 전갈을 보냈다. 이복남의 군사는 1천 명, 진우충은 2천 명이었다.
8월 9일에 왜군은 둔산령을 넘어 여러 마을에 불 지르며 남원 가까이 왔다. 백성들은 피난 가느라고 북새통이었다.
10일에 총병 양원은 남원부사 임현으로 하여금 교룡산성(蛟龍山城) 안에 있는 가옥을 모두 불사르게 하고 남원성 밖의 민가도 전부 불태우게 하였다. 남원에는 두 개의 성이 있었다. 평지에 남원성이 있고 산에는 교룡산성이 있었다. 일찍이 명나라 참장 낙상지는 남원성을 보수하였고, 또 교룡산성도 지킬 만한 곳이라고 여겨 여러 고을의 군사를 동원하여 성을 수리하고 성가퀴를 더 쌓았다.
그런데 총병 양원은 교룡산성을 버리려 하였다. 접반사 정기원과 남원 부사 임현이 양원에게 건의하였다.
“교룡산성은 천하에 험하기로 이름난 요새지이니 만약 버리고 지키지 않는다면 적의 근거지가 될 것입니다. 본부의 민병은 힘을 다하여 본성을 지키고, 다른 고을의 백성은 모두 산성으로 들어가게 해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교룡산성과 본성인 남원성이 자모진(子母陣)이 되어 서로 의지한다면 어찌 좋은 계책이 아니겠습니까.”
그러나 양원은 비웃으면서 조선군의 무능부터 비난하였다.
“근래 누국안(婁國安)의 말을 들으니 조선 수군이 접전할 때에 오직 한 배의 장수만이 싸움에 항거할 계책을 세웠을 뿐 그 밖에는 모두 지레 물에 뛰어들어 죽거나 혹은 해안으로 기어올라 도망하여 흩어지니, 왜적들이 비웃으며 '우리가 조선 군사를 패망시킨 것이 아니라 조선 군사 스스로가 패망한 것이다. 만약 많은 군사를 이끌고 곧바로 남원으로 향한다면 누가 감히 우리를 대적할 것인가'라고 말하였다.”
양원의 이 말은 7월 16일 칠천량 해전의 패전을 조선 수군의 무기력 탓으로 돌리는 치욕적인 발언이었다.
이어서 양원은 “그대 나라의 사람들은 멍청하고 겁이 많으니 만약 적을 보고 붕괴된다면 장차 어떻게 할 것인가"라고 말하면서 교룡산성을 지키자는 조선 지휘관들의 건의를 아예 무시하고 평지에 있는 남원성 고수만 결정하였다.
그런데 양원이 교룡산성을 포기한 것은 하책(下策)중에 하책이었다. 당시에 군량 지원을 챙기러 온 호조참판 이광정이 남원성 안에 머물러 있다가 남문으로 향하여 나오면서, “우리나라 군사가 산성을 맡아 지킨다면 직책은 비록 다르나 나도 또한 죽음으로써 함께 지키려 하였는데 산성이 이미 파하였으니 여기 있어야 무슨 소용이 있으랴” 하였다.
8월 12일에 전라병사 이복남, 조방장 김경로, 교룡산성 별장 신호 등이 장사 50명과 수백 명의 군사를 이끌고 남원성으로 들어왔다. 이들은 나팔과 태평소를 불고 북을 치면서 행군하여 남문으로 들어갔다.
이 때 왜적들은 놀라서 한참 동안 바라보았다. 왜적들이 묻기를 “저 사람은 누구이기에 저렇게 당돌하냐?”하니 사로잡힌 조선 사람들이 “전라병사 이 아무개이다.”라고 하였다.
한편 전주에 있는 진우충은 아예 움직이지 않고 있었다. 정말 어이없는 일은 갓 부임한 전라도 관찰사 황신이 전주 감영에서 부안군 변산으로 피신한 것이다. 황신은 1596년 명나라와 일본의 강화회담 결렬 때에 일본에 파견된 조선 사신이었다. 전라도를 책임지는 최고 수장이 저 혼자 살려고 도망을 갔으니 참으로 한심했다.
그러면 8월13일부터 8월 16일까지의 남원성 전투 상황을 살펴보자. 1)
8월 13일
왜군은 선봉장 고니시의 지휘 아래 남원성을 완전 포위하였다.
조선과 명나라 연합군은 명나라 총병 양원이 지휘하였다. 양원은 이신방과 함께 동문에, 장표는 남문에, 모승선은 서문에, 전라병사 이복남은 북문에서 성을 지키고 있었다. 왜군은 남문은 우키다, 서문은 고니시, 동문은 하치수, 북문은 시마즈가 공격을 맡았다.
오후 2시에 왜적 수만 명이 성 밖 백 보쯤에 와서 계속하여 총을 쏘고 고함쳤다. 성안에서는 진천뢰를 쏘았다. 그러자 왜군이 많이 다치고 퇴각하였다.
8월 14일
왜군은 성 밖에서 사방으로 나뉘어 이전보다 두 배나 많은 인원으로 토목공사를 시작하였다. 또한 성 밖 민가의 담벽을 뚫어서 총구를 만들었다. 그리하여 성안을 굽어보면서 조총을 쏘니 명나라 군사가 많이 죽어 동남쪽 성가퀴가 텅 비었다.
낮 12시 무렵에 왜군은 큰 소리를 지르며 돌진하였는데 포 소리가 천지에 울렸다. 서문 앞에 있던 왜적은 만복사의 사천왕상을 수레에 싣고 와서 성 밖에 돌며 시위하는 심리전을 펼치기도 하였다.
왜군이 이렇게 집요하게 공격하여 오자 양원은 매우 화가 나서 군사 천 명을 거느리고 성문을 열고 나가서 싸웠는데 적이 퇴각하므로 돌다리 밖에까지 쫓아나갔다. 잠시 후 왜군은 문밖에 잠복해 있다가 포위하려 하므로 양원은 나팔을 울려 급히 성으로 돌아왔다.
8월 15일
왜적들은 성 밖에서 잡초와 벼를 베어 묶으며 크게 단을 만들고 있었다. 저녁때 고니시가 보낸 왜군 5명이 양원을 찾아왔다. 양원은 왜군을 접견하였다. 왜군은 양원에게 성을 비우라고 하였다. 양원은 단번에 거절했다.
이날 밤늦게 왜적은 짚단으로 참호를 메우고 풀단을 쌓았다. 그것은 성보다도 더 높았다. 조금 있다가 수많은 왜적들이 풀단을 딛고 성위로 올라왔다. 성안은 아수라장이었다.
8월 16일
왜군은 새벽 2-3시경에 남문과 서문으로 뛰어 들어와 명군과 조선군을 마구 죽였다. 살아남은 이들은 모두 북문으로 달려갔다.
이 때 왜군은 총병 양원에게 성 밖으로 나가라고 재촉하였다. 양원은 성이 결국 함락될 것을 알고 5십 명의 기병을 거느리고 포위를 뚫고 나왔다. 왜군이 쫓았지만 양원은 4, 5마리의 말을 한꺼번에 몰면서 어렵사리 성을 빠져나갔다.
한편 조선군은 전라병사 이복남의 진두지휘로 용감하게 잘 싸웠다. 양원은 남원성을 탈출할 때 이복남에게 사람을 보내 성을 버리고 함께 피할 것을 권유하였다. 이에 이복남은 '나는 이 성과 더불어 운명을 같이 할 것을 맹세하였다. 어찌 죽음을 두려워하랴' 하고 거절하였다. 그는 부하에게 명령하여 나무 섶을 가져오게 하여 쌓아놓고는 언제라도 죽을 각오를 하고 오응정, 김경로와 함께 큰 칼을 뽑아 들고 독전하면서 왜적과 싸웠다.
그러나 더 많은 왜군이 몰려들어 조선군이 힘이 다하자, 전라병사 이복남은 방어사 오응정, 조방장 김경로, 구례현감 이원춘을 조용히 쳐다보며 “이제 우리 갈 길을 갑시다”하였다. 이들은 모두 태연자약하게 섶단으로 걸어가 불속에서 순절하였다. 이 광경을 지켜보고 있던 나머지 용사들도 피눈물을 흘리며 있는 힘을 다하여 왜적과 끝까지 싸우다가 모두 죽었다.
남원성을 함락시킨 왜군은 정말 잔인하였다. 산하를 불태우고 사람을 닥치는 대로 죽이고 코를 베었다. 종군했던 일본 승려 케이넨은 8월 16일자 '임진왜란 종군기'에 “성안 사람 남녀 할 것 없이 모두 죽여서 생포한 자는 없었다. 눈뜨고 볼 수 없는 처참한 상황이다. 알 수 없는 이 세상살이, 모두 죽어서 사라지는구나.”라고 기록했다.
# 끌려간 도공들
남원성이 함락된 후에 만인의총(萬人義塚)이 만들어졌다. 만인의총은 1만 명의 의로운 사람들의 무덤이라는 뜻이다. 그런데 경내에 특이한 탑이 하나 있다. ‘오나리 오나리쇼셔’ 노래 탑이다.
남원에서 끌려갔던 도공들이 일본 규슈 남쪽에 있는 사쓰마(가고시마현)의 나에시로가와에 정착하여 망향의 한을 달래면서 부르던 노래가 “오늘이 오늘이소서”이다.
일본인들은 임진왜란을 일명 '도자기 전쟁'이라고 부른다. 당시에 일본에서 조선 도자기는 권력과 부의 상징이었다. 사쓰마 번주 시마즈 요시히로는 남원에서 심당길, 박평의, 김해 등 80여 명의 조선 도공을 끌고 갔다.
1603년에 나에시로가와로 이주한 심당길은 갖은 고생 끝에 백토(白土)를 발굴해 사쓰마 도자기를 만들어 냈다.
1964년에 제14대 심수관은 일본 역사소설가 시바 료타로의 소설 '어찌 고향을 잊으랴'의 주인공으로 널리 알려졌다. '어찌 고향을 잊으랴'는 조선 도공들의 애환을 가슴 저리게 그린 소설이다. 국영 NHK TV는 이 소설을 토대로 8시간짜리 특집 프로그램을 만들었고 그 바람에 심수관 도자기는 명품으로 대접받게 되었다.
주1)남원성 전투 기록은 '선조실록'과 '선조수정실록', 조경남의 '난중잡록', 이긍익의 '연려실기술', 류성룡의 '징비록' 그리고 신경의 '재조번 방지' 등에 실려 있다.
(참고문헌)
o 케이넨 지음·신용태 역주, 임진왜란 종군기, 경서원, 199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