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7) 이순신, 백의종군 길을 걷다
- 작성일
- 2022.11.03 15:02
- 등록자
- 문화예술과
- 조회수
- 222
거북선을 만든 과학자 나대용 장군- 47회 이순신, 백의종군 길을 걷다
김세곤(호남역사연구원장,‘임진왜란과 호남사람들’저자)
(이 저작물의 저작권은 저자와 사단법인 체암나대용장군기념사업회에 있습니다. 무단 전제 및 복제를 금합니다.)
4월 1일에 의금부 감옥을 나온 이순신은 4월 3일에 서울을 떠났다. 그는 6월 4일에 도원수 권율이 있는 경상도 초계(경남 합천군)에 도착할 때까지 62일간 백의종군 길을 걸었다.
백의종군 길에 특기할 것은 모친 변씨(1515~1597)가 4월 13일에 별세한 일이다. 4월 5일에 이순신은 아산 선영에 도착하여 성묘하였고, 저녁에는 외가로 내려가 사당에 곡하였다. 이후 이순신은 며칠간 아산에 머물면서 친척들과 함께 지냈다. 그런데 4월 11일에 이순신은 뒤숭숭한 꿈을 꾸었다.
4월 11일
새벽에 꿈자리가 몹시 산란하여 마음이 극히 불안했다. 병드신 어머님을 생각하니 나도 몰래 눈물이 흘러내렸다. 그래서 종을 보내어 소식을 알아보게 하였다. 금부도사는 온양으로 돌아갔다.
4월 12일
이순신은 어머니가 무사하다는 소식을 들었다.
종 태문이 안흥량(충남 태안군 근흥면)에서 들어와 편지를 전하였다. 어머니의 기운은 아주 쇠약하시나 초9일 전후로 하여 무사히 안흥에 도착하였다 한다. 길을 떠나 법성포에 이르러 자고 있을 때 닻이 풀어지는 바람에 떠내려가서 배에 머무른 지 엿새 만에 서로 떨어져 있다가 만났는데 무사하다고 한다. 둘째 아들 울을 먼저 바닷가에 보냈다.
4월 13일에 이순신은 어머님의 임종 소식을 들었다. 가슴이 찢어지는 듯하였다.
4월 13일 맑음
일찍 아침을 먹고 어머니를 마중하려고 바닷가로 가는 길에 홍찰방 집에 들렀다. (...) 조금 있자니 배에서 달려온 종 순화가 어머님이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전하였다. 방을 뛰쳐나가 슬퍼 뛰며 뒹굴었더니 하늘에 솟아있는 해조차 온통 캄캄하였다. 곧장 해암(아산시 인주면 해암리)으로 달려가니 배가 벌써 와 있었다. 길에서 바라보니 슬픔으로 가슴이 찢어지는 듯하여 모두 다 적을 수가 없다. (난중일기)
이순신의 모친 변씨는 1593년 8월부터 1597년 4월 초까지 4년여 동안 전라좌수영 본영인 여수 고음천(여수시 웅천동 송현마을)의 별장(別將) 정대수(鄭大水) 집에 기거하고 있었다.
그런데 변씨 부인은 아들 이순신이 잡혀갔다는 소식을 듣고 4월 초에 부랴부랴 배를 타고 서울로 올라갔다. 그런데 고향 아산까지 올라오는 도중에 서해 해상에서 풍랑을 만났다. 결국 모친은 고통 끝에 배 위에서 숨을 거두었다. 향년 82세였다.
4월 14일에 홍찰방, 이별좌가 들어와서 곡하고 관을 짰다. 관의 목재는 본영(여수)에서 준비해 왔는데 배로 오는 동안에 전혀 흠이 없었다.
15일 늦게 입관을 하였다. 이순신과 친한 오종수가 입관 일을 맡았고 천안군수가 상여를 준비하여 주었다.
4월 16일에는 궂은비가 내렸다. 배를 끌어 중방포(충남 아산시 염치읍 중방리)로 옮겨 대고 영구를 상여에 올려 싣고 집으로 돌아왔다. 마을을 바라보니, 이순신은 너무 슬퍼서 가슴이 찢어지는 듯하였다. 집에 이르러 빈소를 차리고 나니 비가 쏟아졌다. 기력이 빠진데다가 남쪽으로 떠 날 길이 또한 급해서 이순신은 소리내어 울부짖었다. 빨리 죽고 싶은 심정이었다.
17일에 금부도사가 거느린 서리 이수영이 공주에서 와서 길을 재촉했다.
18일엔 하루종일 비가 내렸다. 이순신은 몸이 몹시 불편하여 고개도 내밀지 못하고 빈소 앞에서 곡만 하다가 종 금수의 집으로 물러나왔다.
4월 19일에 이순신은 모친상도 제대로 치르지 못한 상태에서 다시 백의종군 길을 떠났다.
4월 19일
일찍 길을 떠나며 어머니의 영전에 인사를 올리며 울부짖었다.
천지간에 나와 같은 이 또 어디 있으랴. 차라리 일찍 죽은 것만 못하다.
4월 25일에 이순신은 남원 운봉에 머물렀는데 거기서 도원수 권율이 순천으로 떠났다는 소문을 들었다. 26일에 이순신은 구례현 손인필의 집에서 머물렀다. 이 날 이순신은 구례현감 이원춘의 융숭한 대접을 받았다.
4월 27일 아침에 이순신은 순천으로 떠났다. 송치(순천시 서면)를 지나 송원에 이르렀고 저녁에 정원명의 집에 도착한다. 도원수 권율은 이순신이 온 것을 알고 군관 권승경을 보내 조문을 하고 안부를 물었다. 저녁에 순천부사 우치적이 찾아왔다. 우치적은 1592년 4월 임진왜란이 일어났을 때 영등포 만호를 한 수군 맹장이다.
늦은 밤에 정사준이 찾아왔다. 정사준은 순천 사람으로 왜군의 조총보다 성능이 우수한 정철총통을 만든 이순신의 심복이었다. 정사준은 이순신에게 원균이 망령된 짓을 많이 하고 있다고 말했다.
4월 28일 아침에 도원수 권율은 다시 군관 권승경을 보내어 문안하면서 두 가지 배려를 베풀었다. 하나는 ‘상중에 피곤할 것이니 몸이 회복되는 대로 나오라’는 것이었고, 둘째는 이순신이 그를 보좌할 친분이 있는 군관을 거느리도록 한 것이다.
4월 30일 아침에 이순신은 전라병사 이복남을 만났다. 이복남은 원균의 일에 대하여 많은 이야기를 하였다. 5월 1일에 이순신은 신사과와 함께 이야기를 나누었다. 전라도 순찰사와 전라병사는 도원수 권율이 머물고 있는 정사준의 집에서 함께 모여 술을 마시면서 지냈다.
5월 2일에 도원수 권율은 보성으로 가고 전라병사 이복남은 본영으로 갔으며 전라도 순찰사 박홍로는 담양으로 가는 길에 이순신을 만났다. 순천부사 우치적도 이순신을 찾아왔다.
한편 여수에서 진흥국이 와서 눈물을 흘리면서 원균의 일을 이야기 하였다. 원균이 수군통제사가 된 지 불과 3개월인데 여수 본영과 한산도 진영 사이에 심각한 갈등이 일어나고 있었다.
5월 4일은 별세하신 모친 생신이었다. 이순신은 비통함을 견디지 못하였다.
“어머님 생신이다. 슬프고 애통함을 참을 길이 없었다. 닭이 울 무렵에 일어나 앉아 눈물만 흘렸다. 오후에 비가 몹시 퍼부었다. 정사준이 와서 하루 내내 돌아가지 않았다. 이수원도 왔다.”
5월 5일에도 이순신은 순천에 머물렀다.
“새벽꿈이 매우 어지러웠다. 아침에 순천부사가 보러 왔다. 늦게 충청우후 원유남이 한산도에서 왔는데 원균이 못된 짓을 많이 한다고 했다. 또 진중의 장졸들이 다 그를 따르지 않으므로 앞일을 예측하기 어렵다고 했다. 오늘은 단오인데, 어머니 영전을 떠나 천 리 밖 먼 곳에 종군하고 있어서 예를 못 드리고 곡도 마음대로 못하니 무슨 죄로 이런 일을 당하는가? 나와 같은 운명은 고금을 통해 찾아보기 힘든 일이니 가슴이 찢어지는 듯 아프다. 다만 때를 못 만난 것을 한탄할 따름이다.”
5월 6일에는 정원명이 한산도에서 와서 원균의 못된 짓에 대하여 이야기 하였다. 이 날 이순신은 전라우수사 이억기의 조문 편지를 받았다.
8일에는 원균이 편지를 보내어 조문하였는데 이는 도원수의 명령에 따른 것이었다. 이경신이 한산도에서 와서 원균이 저지른 일에 대하여 많이 말하였다. 이순신은 일기에 ‘원균이 온갖 계략을 써서 나를 모함하려고 하는 데 이 역시 운수이다’라고 적었다.
5월 12일에 이순신은 부체찰사 한효순을 만났다. 부체찰사는 도체찰사 이원익이 원균의 일에 대하여 많이 탄식하더라는 말을 전하였다.
5월 14일에 이순신은 순천을 떠났다. 정사준과 정사립, 양정언도 동행하였다. 저물녘에 구례에 도착하여 다시 손인필의 집에서 머물렀는데 구례현감 이원춘이 찾아왔다.
15일에는 구례 현감과 하루 종일 이야기를 나누다가 관아의 모정에서 잤다
5월 19일에 이순신은 도체찰사 이원익이 구례로 온다는 소식을 들었다. 이순신은 성안에 있기가 미안하여 동문 밖 장세호의 집으로 거처를 옮겼다. 저녁에 도체찰사가 고을에 들어왔다.
5월 20일에 이원익은 사람을 보내어 조문을 하고 저녁에 이순신을 만났다. 이원익은 흰옷을 입고 이순신을 맞았다. 부담을 주지 않으려는 배려였다. 이순신과 이원익은 밤이 깊도록 이야기를 하였다. 이야기 중에 이원익은 ‘음흉한 원균이 무고가 극심한데 하늘이 굽어살피지 못하니 장차 나랏일을 어찌 하겠는가?’ 라고 말하였다.
23일에도 이순신은 도체찰사를 만났다. 이원익은 시국이 이미 잘못 돌아가고 있음을 분하게 여기면서 단지 죽을 날만을 기다린다고 하였다.
24일에는 도체찰사가 군관 이지각을 보내어 안부를 묻고, 경상우도 연해안 지도를 그리고 싶으나 그릴 방도가 없으니 그려서 보내주면 고맙겠다고 하였다. 이순신은 거절할 수가 없어서 지도를 그려서 보내주었다.
이순신은 5월 25일에 초계로 떠나려 하였으나 비가 너무 많이 와서 구례에 머물렀다.
5월 26일에 이순신 일행은 큰 비가 쏟아지는데도 불구하고 길을 떠났다. 석주관(구례군 토지면)에 이르니 비가 퍼붓듯이 왔다. 간신히 악양(경남 하동군 악양면 평사리)의 이정란의 집에 이르렀으나 사는 사람이 문을 닫아걸고 기숙을 거절하였다. 이 집에는 팔도의병장 김덕령(1567-1596)의 아우 김덕린(난중일기’에는 김덕보가 김덕린으로 적혀 있다)이 살고 있었다. 이순신은 아들 열을 시켜 간청하여 겨우 들어가서 잤다. 1)
한편 5월 27일에 이순신은 두치에서 지내고 5월 28일에 하동에 이르러 하동현감을 만났다. 하동현감도 원균이 하는 짓 가운데 미친 짓이 많다고 하였다. 6월 1일에 이순신은 단성에서 자고 2일에는 삼가현에 이르렀다. 이곳 현감은 이미 산성으로 가고 없어 주인 없는 공관에서 잤다. 3일에는 비로 계속 내려 걱정하고 있었는데 도원수 권율의 군관 유홍이 흥양으로부터 왔다. 그에게 물어보니 길을 다닐 수 없을 정도라고 하기에 하루 더 묵었다.
6월 4일에 이순신은 괴목정에서 아침 식사를 하고 권율의 원수진이 있는 경남 하천군 초계 모여곡에 도착했다. 모여곡은 지금의 경남 합천군 율곡면 낙민리이다. 이곳에서 이순신은 7월 18일(7월16일 칠천량 해전으로 수군 전몰 이틀 후)까지 머물렀다.
그런데 이순신은 TV 드라마나 소설에 나오듯이 노역을 하면서 백의종군(白衣從軍)한 것이 아니었다. 백의종군이란 글자 그대로 ‘흰옷을 입고 종군하는 것’으로 특별한 직책 없이 공을 세우게 하는 조선 특유의 처벌인데, 이순신은 도원수 권율의 원수진(경남 합천군 소재)에 소속되어 자문관 역할을 하였다.
주1) 김덕보(1571-1627)는 1596년 8월에 형 김덕령이 억울하게 옥사하자 세상이 싫어 지리산 백운동에 은거했다. 1602년에 그는 광주로 돌아와서 무등산 원효 계곡 아래에 조그만 집을 짓고 살았다. 이 집이 풍암정(楓巖亭)이다.
(참고문헌)
o 이순신 지음 · 송찬섭 엮어 옮김, 난중일기, 서해문집, 2004
o 이순신 지음 · 노중석 옮김, 교감 완역 난중일기, 민음사, 20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