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6) 선조,이순신을 하옥하다 (2)
- 작성일
- 2022.11.03 15: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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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북선을 만든 과학자 나대용장군-46회 선조,이순신을 하옥하다 (2)
김세곤(호남역사연구원장,‘임진왜란과 호남사람들’저자)
(이 저작물의 저작권은 저자와 사단법인 체암나대용장군기념사업회에 있습니다. 무단 전제 및 복제를 금합니다.)
1월 27일 오후에 선조는 별전에서 또다시 어전 회의를 열었다. 참석자들은 영돈녕부사 이산해, 영의정 류성룡, 판중추부사 윤두수, 좌의정 김응남, 지중추부사 정탁, 경림군 김명원, 호조 판서 김수, 병조 판서 이덕형, 병조 참판 유영경, 이조 참판 이정형, 상호군 노직, 좌승지 이덕열, 주서 조즙 등이었다.
오후 회의의 이순신 관련 부분을 살펴보자.
윤두수 : “지난번에 비변사에서 이순신의 죄상을 이미 아뢰었으므로 이순신의 죄상은 상께서도 이미 통촉하시겠지만 이번 일은 온 나라의 인심이 모두 분노해 하고 있으니, 고니시가 지휘하더라도 역시 할 수 없을 것입니다.
위급할 때에 장수를 바꾸는 것이 비록 어려운 일이지만, 이순신을 체직시켜야 할 듯합니다.”
정탁 : “이순신은 참으로 죄가 있습니다만, 위급할 때에 장수를 바꿀 수는 없습니다.”
선조 : "나는 이순신의 사람됨을 자세히 모르지만 성품이 지혜가 적은 듯하다. 임진년 이후에 한번도 거사하지 않았고, 이번 일도 하늘이 준 기회를 취하지 않았으니 법을 범한 사람을 어찌 매번 용서할 것인가. 원균으로 대신해야 하겠다. 왜영을 불태운 일도 김난서와 안위가 몰래 약속하여 했다고 하는데, 이순신은 자기가 계책을 세워 한 것처럼 하니 나는 매우 온당치 않게 여긴다. 그런 사람은 비록 가토의 목을 베어 오더라도 용서할 수가 없다."
이산해 : “임진년에 원균의 공로가 많았다고 합니다.”
선조 : “공이 없었다고 할 수 없다. 앞장서서 나아가는 것을 귀하게 여기는 것은 사졸들이 보고 본받기 때문이다.”
(중략)
류성룡: “거제에 들어가 지켰다면 영등포·김해의 적이 반드시 두려워하였을 것인데 오랫동안 한산도에 머물면서 하는 일이 별로 없었고 이번 바닷길도 역시 출격하지 않았으니 어찌 죄가 없다고 하겠습니까. 다만 교체하는 동안에 사세가 어려울 것 같기 때문에 전일에 그렇게 건의하였던 것입니다. 비변사로서 어찌 이순신 하나를 비호하겠습니까.”
선조: “이순신은 조금도 용서할 수가 없다. 무신이 조정을 가볍게 여기는 습성은 다스리지 않을 수 없다.”
이조참판 이정형: “이순신이 말하기를 ‘거제도에 들어가 지키면 좋은 줄은 알지만, 한산도는 선박을 감출 수 있는데다가 적들이 깊은 실정을 알 수 없고, 거제도는 그 속이 비록 넓기는 하나 선박을 감출 곳이 없을 뿐더러 또 건너편 안골포의 적과 상대하고 있어 들어가 지키기에는 어렵다’고 하였으니, 그 말이 합당한 듯합니다.”
선조 : “들어가 지키는 것이 어렵다고 했는데, 경의 생각은 어떤가?”
이정형: “신 역시 자세히 알 수가 없습니다. 그 사람의 말이 그렇습니다. 원균은 사변이 일어난 처음에 강개(慷慨)하여 공을 세웠지만, 군졸을 돌보지 않아 민심을 잃었습니다.”
선조: “성품이 그처럼 포악한가?”
이정형: “경상도가 파괴된 것은 모두 원균에게서 말미암은 것입니다.”
선조: “우의정(이원익)이 내려갈 때 원균은 적과 싸울 때에나 쓸 만한 사람이라 하였으니, 여기에서 짐작할 수 있다.”
김응남 : “인심을 잃었다는 말은 지금은 덮어두고, 수군에 기용하여야 합니다.”
선조: “이억기는 내가 전에 본 적이 있는데 쓸 만한 사람이다.”
이정형 : “원균만은 못합니다.”
선조: “원균은 자기 소견대로만 하고 고칠 줄을 모른다. 체찰사가 비록 논리적으로 깨우쳐 주어도 고치지 않는다고 한다.”
류성룡 : “대개 나라를 위하는 데는 성심이 있습니다. 청주 상당산성(上黨山城)을 쌓을 때 움막을 만들고 자면서 역사를 감독해 수축하였습니다.”
이산해 : “상당산성을 수축할 때에 위력으로 역사를 감독했기 때문에 원망하는 사람이 많았습니다.”
이정형: “상당산성의 공사를 완공하기는 하였지만 비가 와서 곧 무너지고 말았습니다.”
선조 : “체찰사가 이순신과 원균에게 명령하면, 비록 온당하지 못하더라도 이순신은 그런대로 복종을 하지만 원균은 성을 내며 듣지 않는다고 한다. 이는 그가 공을 빼앗겨서인가? 원균을 좌도 수장에 임명하고, 또 누군가를 시켜서 두 사람을 진압하게 하는 것이 어떻겠는가?”
이정형: “이순신과 원균은 서로 어울릴 수 없는 형세입니다.”
김수 : “원균은 매양 이순신이 공을 빼앗았다고 신에게 말하였습니다.”
이덕열: “이순신이 원균의 공을 빼앗아 권준의 공으로 삼으면서 원균과 상의하지도 않고 먼저 장계한 것입니다.”
김수 : "불태우는 일을 이순신이 처음에 안위와 밀약하였는데, 다른 사람이 먼저 불사르니 이순신이 도리어 자기의 공로로 삼은 것입니다 그러나 그 일은 자세히 알 수가 없습니다.“
이정형 : "변방의 일은 멀리서 헤아릴 수가 없으니, 서서히 처리해야 합니다."
김수 : "이것이 사실이라면 용서할 수는 없습니다."
류성룡 : "그 사람의 죄가 그렇기는 하나 지금부터 책려(策勵)해야 합니다.“
윤두수 : “이순신과 원균을 모두 통제사로 삼아, 서로 힘을 합치도록 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선조 : “비록 두 사람을 나누어 통제사로 삼더라도 반드시 화해시키고 견제할 사람이 있어야 한다. 원균이 앞장서서 싸움에 나가는데 이순신이 물러나 구하지 않는다면 형편이 어려울 것이다.”
김응남 : “그렇게 한다면 이순신을 중죄에 처해야 합니다.”
선조 : “반드시 문관으로 하여금 두 사람을 조절하게 하여 그들이 어렵게 여기는 데가 있게 해야 한다.”
선조: “원균에게 수군을 나누어 통제하게 하는 일을 (병조)판서는 어떻게 생각하는가?”
병조판서 이덕형 : “그 사람이 하고자 하면 신의 생각에도 좋다고 봅니다. 그런데 서로 제지하고 방해하는 폐단이 있을까 싶으니, 중국 제도에 참장(參將)이 싸우는 경우 싸움을 감독하는 사람이 있는 것과 같이 해야 합니다.”
윤두수 : “종사관(從事官)으로 하여금 싸움을 감독하게 하면 됩니다.”
선조 : “반드시 전적으로 조절할 사람을 보내야 한다.”
류성룡 : “한효순(부체찰사)에게 독전(督戰)하게 하면 됩니다.”
선조 : “할 수 있는 일은 빨리 해야 한다. 원균은 오늘 임명할 수 있는가?”
이정형: “원균을 통제사로 하면 일이 이루어지지 않을까 싶으니, 경솔히 하지 말고 자세히 살펴서 해야 합니다.”
이산해 : “요시라와 고니시는 후대(厚待)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 뒤에도 기대하는 바가 있기 때문입니다.”
(선조실록 1597년 1월 27일 3번째 기사)
다음 날인 1월 28일에 선조는 전라병사 원균을 경상우도 수군절도사 겸 경상도 통제사로 삼아 수군을 지휘하게 하였다. 수군 통제권을 양분한 것이다.
"비망기로 유영순에게 전교하였다.
'우리나라가 믿는 바는 오직 수군뿐인데, 통제사 이순신은 나라의 중한 임무를 맡고서 마음대로 기망(欺罔)하여 적을 토벌하지 않아 청정(가토 기요마사)으로 하여금 편안하게 바다를 건너게 하였으니, 잡아다 국문하고 용서하지 말아야 하겠지만 바야흐로 적과 진을 맞대고 있기 때문에 우선 공을 세워 효과를 거두게 해야 한다.
나는 평소 경(원균)의 충용을 알고 있어 경을 경상우도 수군절도사 겸 경상도 통제사로 삼노니, 경은 더욱 책려하여 나라를 위해 힘을 다하라.
우선 이순신과 합심하여 이전의 유감을 깨끗이 씻고 해적을 다 섬멸해 나라를 구해 이름을 역사에 남기고, 훈공이 종정(鍾鼎)에 새겨지게 하라. 경은 공경히 하라.’이를 원균에게 하유하라."
(선조실록 1597년 1월 28일)
2월 4일에 사헌부가 통제사 이순신을 잡아들여 죄를 물어야 한다고 아뢰었다. 이러자 선조는 천천히 결정하겠다고 답하였다.
(선조실록 1597년 2월 4일)
그런데 이틀 후인 2월 6일에 선조는 이순신을 잡아 오도록 우부승지 김홍미에게 은밀히 전교했다.
“이순신을 잡아올 때에 선전관에게 표신(標信)과 밀부(密符)를 주어 보내 잡아오도록 하고, 원균과 교대한 뒤에 잡아 오라고 말해 보내라. 또 이순신이 만약 군사를 거느리고 적과 대치하고 있다면 잡아 오기에 온당하지 못할 것이니, 전투가 끝난 틈을 타서 잡아 올 것도 선전관에게 말하라.”
(선조실록 1597년 2월 6일)
2월 26일에 금부도사는 이순신을 한산도에서 서울로 압송하였다. 이 당시에 이순신은 수군을 거느리고 부산 가덕도 바다에 있었는데 그를 잡아오라는 어명이 내려졌다는 소식을 듣고 곧 한산도로 돌아왔다. 이순신은 원균에게 인수인계하고 함거에 올랐다. 전선 180척, 군량 9,914석, 화약 4천 근, 총통 300자루 등이었다.
이순신이 소달구지에 실려 서울로 올라가자, 백성들이 에워쌌다. 그들은 “사또 어디로 가시오. 이제 우리들은 다 죽었습니다.”라고 울부짖었다.
3월 4일 오후에 서울에 도착한 이순신은 곧바로 의금부에 갇혔다.
사람들이 면회를 왔다. 어떤 사람이 말하기를 “임금의 노여움이 극에 달하였고, 또 조정의 중론도 엄중하여 사태를 알 수 없으니 어찌하면 좋겠는가?”라고 걱정하였다. 이순신은 차분하게 “죽고 사는 것이야 운명이지요, 죽어야 한다면 죽어야지요.”라고 말했다.
한편 여러 사람이 그를 구명하려고 백방으로 노력하였다. 3월 1일에 병조판서에서 공조판서로 보직이 변경된 이덕형은 선조 앞에 나아가 이순신의 목숨만은 구해달라고 애걸하였다. 이순신의 종사관을 한 장흥 출신 정경달은 선조에게 이순신의 석방을 간절히 주청하였다.
아울러 정경달은 영의정 류성룡과 병조판서 이항복을 찾아가 이순신의 구명 운동을 하였다. 류성룡과 이항복은 정경달에게 “그대가 남쪽에서 왔으니 원균과 이순신의 옳고 그름에 대하여 말해 줄 수 있겠는가?”라고 물었다. 정경달은 “누가 옳고 누가 그른지는 말로 해명할 일이 아닙니다. 제가 보니 이순신이 붙잡혀 가자 군사들과 백성들 중에서 울부짖지 않는 이가 없었으며, ‘통제사가 죄를 입었으니 우리는 어떻게 살꼬.’ 하였습니다. 이것을 보면 그 시비를 알 것입니다”라고 답변하였다. 1)
한편 이순신의 가족들도 류성룡에게 구명운동을 벌였다. 그러나 류성룡은 2월 28일과 2월 29일 두 번에 걸쳐 사직서를 선조에게 올린 상태여서 어찌할 수 없었다. 더구나 류성룡은 이순신을 천거한 장본인이었다.
나대용도 그의 동지과 함쎄 옥문밖에서 이순신의 무고함을 호소하였다. 1)
3월 12일에 이순신은 한 차례의 고문을 받았다. 그가 어떤 고문을 얼마나 당하였는지에 대하여는 기록이 없다. 다만, 이덕형의 문집 '한음문고'에는 ‘거의 죽게 되었다’라고 기록되어 있을 뿐이다.
3월 13일에 선조는 이순신의 죄상을 논하면서 이순신을 죽여야 마땅하다고 말한다. 그러면서 대신들에게 의논하라고 전교한다.
우부승지 김홍미에게 전교한 비망기를 읽어보자.
“이순신이 조정을 기망(欺罔)한 것은 임금을 무시한 죄이고, 적을 놓아주고 치지 않은 것은 나라를 저버린 죄이며, 심지어 남의 공을 가로채고 남을 무함하기까지 하여 방자한 것이 거리낌 없는 죄이다. 이렇게 허다한 죄상이 있고서는 법으로 용서할 수 없는 것이니 율(律)을 적용하여 죽여야 마땅하다. 신하로서 임금을 속인 자는 반드시 죽이고 용서하지 않는 것이므로 지금 형벌을 끝까지 시행하여 실정을 캐어내고, 어떻게 처리할 것인지를 대신들에게 의논하게 하라.”(선조실록 1597년 3월 13일)
선조가 말한 이순신의 죄목은 세 가지이다. 즉 (1) 조정을 속여 임금을 업신여긴 죄 즉 부산왜영 화재 사건의 허위보고, (2) 적을 놓아주어 나라를 저버린 죄 즉 수군이 출전하지 않은 죄, (3) 남의 공로를 빼앗고 남을 무함한 죄 즉 원균의 공을 이순신이 가로챘다고 하는 죄이다. 이 날은 이순신이 국문을 당한 다음 날이었다. 이순신은 도저히 살아날 수 없는 형국이었다.
이 때 72세의 원로대신 정탁(1526∼1605)이 이순신 구명에 나섰다. 소위 신구차(伸救箚)라고 불리는 1,298자에 달하는 장문의 구명 상소문을 올린 것이다. 정탁은 ‘지금은 전쟁 중이니 한 사람의 장수라도 필요하다고 하면서, 왜적이 가장 무서워하는 장수는 이순신인데 그를 죽이는 일은 나라에도 손해’라고 완곡하게 아뢰었다. 정탁의 간곡한 청원이 선조에게 먹혀 들어갔을까. 선조는 이순신의 관직을 삭탈하여 도원수 권율 밑에서 백의종군하게 하였다. 1587년에 조산보만호 및 녹둔도 둔전관 시절에 백의종군 한데 이어, 10년만에 두 번째 백의종군하게 된 것이다.
4월 1일에 이순신은 옥에서 풀려났다. 하옥된 지 28일 만이었다.
이 날의 '난중일기'를 살펴보자.
“4월 1일 맑다.
옥문을 나왔다. 남대문 밖에 있는 윤간의 종의 집에 이르러 조카 봉, 분, 아들 울, 사행 원경등과 한 방에 같이 앉아 오래도록 이야기를 나누었다. (중략) 영의정 류성룡, 판부사 정탁, 판서 심희수, 찬성 김명원, 참판 이정형, 대사헌 노직 등이 사람을 보내어 안부를 물었다. 술에 취하여 몸이 땀으로 흠뻑 젖었다.”
주1) 정경달의 문집 ‘반곡집’에 실려있다. (박기봉 편역, 충무공 이순신 전서 제3권, p 349-350)
주2) 1860년에 임병원이 지은 나대용 장군 행장에는 “정유년 정월에 충무공이 소인배들의 중상을 입어 잡혀가 옥에 갇히니 공은 주장이 나라위해 심력을 다하다 모함당하는 것을 보고 비분을 이기지 못하여 여러 장수 열 한 사람과 함께 서울에 올라가 옥문 밖에서 울며 부르짖었더니 이윽고 석방을 보게 되었다.”라고 적혀 있다.
한편 1975년에 이은상이 지은 ‘체암 나대용 장군 기적비문’에는 “정유년 2월 충무공이 모함으로 잡혀 올라가 옥에 갇히자 장군은 동지들과 함께 옥문 밖에서 통곡하였다.”고 적혀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