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5) 선조,이순신을 하옥하다 (1)
- 작성일
- 2022.11.03 1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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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북선을 만든 과학자 나대용장군-45회 선조,이순신을 하옥하다 (1)
김세곤(호남역사연구원장,‘임진왜란과 호남사람들’저자)
(이 저작물의 저작권은 저자와 사단법인 체암나대용장군기념사업회에 있습니다. 무단 전제 및 복제를 금합니다.)
1596년 9월에 명나라와 일본 간의 강화협상이 완전히 파탄나자,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조선 재침략 명령을 내렸다. 군대를 1번 대에서 8번대로 편성하고 12만 1천 명을 동원하였다. 여기에는 부산 일대에 잔류하고 있던 2만여 명 왜군도 합류시켰다.
부대는 1군이 가토 기요사마 1만 명, 2군이 고니시 유키나가 14,700명 3군 구로다 나가마사 1만 명, 4군 나배시마 나오시케 12,000명, 5군 시마즈 요시히로 1만 명, 6군 조소가베 모도지가 13,300명, 7군 와키자카 야스하루 11,000명, 8군 모리 데루토모, 우키다 히데이에 4만 명 등 도합 12만 1천 명이었다.
히데요시는 재침략을 준비하면서 1592년부터 1596년까지 5년간의 전쟁을 면밀히 분석하였다. 그 결과 조선 침략이 계획대로 이루어지지 못한 것은 첫째 이순신 장군이 이끄는 조선 수군이 제해권을 장악한 점, 둘째 전라도를 점령하지 못하여 양곡을 제대로 마련하지 못한 점이 주된 요인이라고 분석하였다.
그리하여 히데요시는 치밀하게 재침략 지시를 내린다. 이 지시에는 맨 먼저 이순신을 제거한 후에 조선 수군을 궤멸시킬 것, 전라도부터 공격하고 충청도와 경기도는 정세에 따라 진격할 것, 군인과 양민 및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누구든지 참살할 것, 명나라 군대가 나오면 즉시 보고할 것 등이 포함되어 있었다.
“매년 군대를 출동시켜 조선 사람들을 전부 죽여 조선을 빈 땅으로 만든 다음 서도(일본의 서쪽)의 사람들을 옮겨 조선에 살게 하고, 동도의 사람들을 옮겨 서도에 살게 하면 10년 후에는 반드시 성공이 있을 것”이다.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포고문)
1597년(정유년) 1월 중순에 일본이 다시 조선을 침략했다. 정유재란(丁酉再亂)이었다. 가장 먼저 왜군은 이순신을 제거할 반간계를 쓴다. 왜장 고니시는 요시라를 경상우병사 김응서의 진중에 보내어 밀서를 전달한다. 요시라는 고니시의 사위인 대마도주 소 요시토시(宗義智)의 부하인데, 요시라와 김응서는 1595년 봄부터 밀접한 접촉이 있는 이중간첩이었다.
“이번에 강화가 이루어지지 못한 것은 가토 기요마사 탓이다. 고니시는 가토를 미워하여 죽이려 하고 있다. 가토는 며칠 뒤에 조선에 상륙할 것이니 제발 수전에 능한 조선수군이 가토를 해상에서 없애면 좋겠다. 이러면 조선의 원수도 갚고 고니시의 마음도 좋으리라.”
1월 11일에 요시라로부터 고니시의 밀서를 받은 경상우병사 김응서는 급히 조정에 장계를 올렸다. 1월 19일에 김응서의 장계를 본 선조는 이순신에게 출정 명령을 내렸다. 그러나 이순신은 ‘바닷길이 험난하고 왜적이 필시 복병을 설치하고 기다릴 것이다. 전함을 많이 출동하면 적이 알게 될 것이고, 적게 출동하면 도리어 습격을 받을 것이다’ 하고는 출전하지 않았다.(선조수정실록 1597년 2월 1일) 그런데 가토는 이미 1월 13일에 다대포에 도착한 상태였다.
반간계에 실패하자 요시라가 다시 김응서 진영에 나타났다.
“가토가 이미 다대포에 도착하였답니다. 어째서 조선 수군이 그냥 놔두었는지 모르겠습니다.”
요시라는 천재일우의 기회를 놓쳤으니 원망스럽다는 말투였다.
그런데 이 말을 철썩같이 믿은 김응서는 다시 조정에 아뢰었다. 김응서는 너무 경솔했다.
1월 23일에 김응서의 보고를 접한 선조는 “이순신이 출전하지 않아 우리나라가 이제 끝났다.”는 극언까지 했다.
1월 27일에 선조는 대신들과 함께 오전과 오후 두 번에 걸쳐 왜군의 조선 침략에 대해 논의했다.
먼저 오전 회의부터 살펴보자. 참석자는 영의정 류성룡, 판중추부사 윤두수, 지중추부사 정탁, 좌의정 김응남, 영중추부사 이산해, 호조판서 김수, 병조판서 이덕형 등이었다.
선조 : "적선이 비록 2백 척이라 하나 매우 많다."
류성룡 : "16진(陣)이 거의 다 나온 것입니다. 고니시 유키나가의 군사는 두치(豆恥 전남 광양 나룻터)의 길로 가서 정탐하여 전라도를 엿보려는 것 같습니다." (중략)
윤두수 : “이순신은 조정의 명령을 듣지 않고 전쟁에 나가는 것을 싫어해서 한산도에 물러나 지키고 있어 큰 계책을 시행하지 못하였던 것이니. 신하들로서 누구인들 통분해 하지 않겠습니까.”
정탁 : "이순신은 참으로 죄가 있습니다."
선조 : "이순신은 어떠한 사람인지 모르겠다. (...) 이순신이 부산 왜영(倭營)을 불태웠다고 조정에 속여 보고하였는데, 영의정이 이 자리에 있지만 이런 일은 반드시 없어야 할 일이다. 지금 비록 그의 손으로 가토의 목을 베어 오더라도 결코 그 죄는 용서해 줄 수 없다."
선조는 이순신에게 엄청 화가 나 있다. 여기에서 부산왜영 화재 사건의 진상을 살펴보자. 1596년 12월 27일에 이순신은 김난서·안위·신명학의 포상을 청하는 장계를 조정에 올렸다. 1596년 12월 12일에 부산왜영에서 불이 일어나 가옥 1천여 호와 화약이 쌓인 창고 2개, 군기(軍器)와 군량 2만 6천여 섬이 든 곳집이 타고 왜선 20여 척이 잇따라 탔으며 왜인 24명이 불에 타 죽었는데, 이는 이순신의 부하인 안위·김난서·신명학의 공이라는 보고였다. 이순신의 보고에 조정은 크게 기뻐하였다.
그런데 다음 날 체찰사 이원익의 선전관인 이조좌랑 김신국이 같은 내용의 장계를 올렸다. 김신국은 “통제사 이순신이 부산왜영을 불태운 일을 이미 장계하였다는데 이는 사실과 다르다. 이 일은 도체찰사 이원익이 군관 정희현에게 작전을 명하였고, 군관 정희현이 심복인 허수석과 모의하여 부산왜영을 불태웠다. 이순신의 군관이 물건을 운반하는 일로 부산에 도착했었는데 이 날이 마침 왜영이 불타는 날이었고, 그가 돌아가 이순신에게 보고하여 자기의 공으로 삼은 것이다. 이순신은 이번 사정을 모르고 보고한 것”이라고 보고했다. 김신국의 장계를 읽은 선조는 이순신이 남의 공을 가로챈 사실을 알고 분노하였다.
이윽고 류성룡이 아뢰었다.
류성룡 : "이순신은 신과 한동네 사람이어서 신이 어려서부터 아는데, 직무를 잘 수행할 자라 여겼습니다. 그는 평소부터 대장이 되기를 희망했습니다."
선조: “그가 글을 잘 아는가?”
류성룡 : “그는 성품이 강직하여 남에게 굽힐 줄을 모릅니다. 그래서 신이 그를 수사(水使)로 천거하여 임진년에 공을 세워 정헌대부까지 이르렀는데 너무 지나치게 되었습니다. 무릇 장수는 뜻이 차고 기가 펴지면 반드시 교만하고 게을러집니다."
선조 : “이순신은 용서할 수가 없다. 일개 무장(武將)인 주제에 어찌 조정을 경멸하는 마음을 갖는가. 우의정(이원익을 말함)이 내려가면서 말하기를 ‘평일에는 원균을 장수로 삼아서는 안 되나 전시에는 써야 한다.’고 하였다.”
좌의정 김응남 : “수군 중에는 원균만한 사람이 없으니, 이제 버려서는 안 됩니다.”
류성룡 : “원균은 나라를 위하는 마음이 깊습니다. 청주산성을 쌓을 때, 원균은 흙집을 짓고 몸소 성 쌓는 것을 감독하였다 합니다.”
선조: “원균을 수군의 선봉을 삼고자 한다.”
김응남 : “지당하십니다. 임진년(1592년)에 수전(水戰)을 할때 원균과 이순신이 천천히 장계를 올리기로 약속하였다 합니다. 그런데 이순신이 밤에 몰래 혼자서 장계를 올려 자기의 공으로 삼았기 때문에 원균이 원망을 품었습니다.”
윤두수 : “이순신을 전라·충청 통제사로 삼고, 원균을 경상 통제사로 삼으면 어떻겠습니까?”
윤두수와 김응남 : “이순신은 조용한 사람인 것 같지만 속임수가 많고 앞으로 나서지 않는 사람입니다.”
선조: “(병조판서 이덕형에게 이르기를), 원균의 일을 급히 처리하도록 하라.”
이덕형: “원균을 처음 수군으로 보내려고 하였으나 의논이 일치되지 않아 이에 이르렀습니다. 근래 변방 장수의 일을 보건대, 이운룡 같은 경우는 한두 명의 도적을 보고도 나아가서 싸우지 않고 단지 문서로 보고만 하고 있습니다. 이런 사람이 평시 같았으면 어찌 처벌을 받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원균을 경상좌도로 보내는 것이 무방합니다."
선조: “좌도에는 보낼 수 없다.”
김수 : “서성이 술자리를 마련하여 두 사람이 화해하도록 했는데, 원균이 이순신에게 말하기를 ‘너에게는 다섯 아들이 있다.(다섯 아들이란 권준, 배흥립, 김득광 등을 말한다)'하였으니, 그가 얼마나 원망을 품고 불평하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이덕형: “군사 일이란 반드시 기강이 선 연후라야 앞뒤를 알 수 있는 것인데, 전라도의 일은 문란하기 짝이 없습니다. 신이 군사의 수를 알아보려고 팔도로 하여금 병조에 올리게 하였더니, 황해도 등은 이미 올려 보냈는데 전라도는 감감 무소식입니다. 매우 허술합니다.”1)
(선조실록 1597년 1월 27일 1번째 기사)
주1) 당시에 원균은 전라병사였다. 이덕형은 원균을 불신하고 있다.
